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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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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82
추천수 :
1,290
글자수 :
406,586

작성
19.05.17 11:02
조회
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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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글자
21쪽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DUMMY

양정에게 보고가 올라갔을 즈음에는 야인들 사이에서만큼은 언제부턴가 모르게 새로 나타난 대장간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쇠라는 것은 군사적으로든, 혹은 민간 수요로든 퍽 긴요한 물자였고 야인들은 이 귀한 금속을 그 동안 자체적으로 충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중요한 금속을 얻기 위해서는 조선이나 명 정부가 국경지대에 열어 주는 관영 시장에서 품질이 조악한 잡쇠를 그나마도 적은 양으로 겨우 구해 올 수 있었다. 잠상들조차 이 철에 대해서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조선이나 명나라 사람들은 특히 위험한 철 거래를 하느니 보다 안전하면서도 이문이 남는 암거래들이 많았고, 야인들의 경우에는 철 만드는 일에 대해서 접근하는 것이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사정이 바뀐 것이다.


야인 땅 깊숙한 곳에 은밀히 자리한 쇠둑부리가마에서는 야인들이 그토록 목말라하던 잡쇠덩어리가 연일 고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 생철은 손돌이 부리는 대상들에 의해 조금씩 풀려나갔고, 마을 단위에 흩어져 있는 야인 대장장이들이 이를 가지고 각종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고, 손돌은 이 금속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는 거의 유일한 잠상으로서 톡톡한 벌이를 할 수 있었다. 이제 웬만한 족장들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였다.

분명 잠재력이 큰 사업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함부로 확대할 수 없다는 것이 홍위 일행의 딜레마였다. 소문이 함부로 나게 되면 명나라나 조선의 주의를 끌기 쉬웠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벌대가 조직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 때문에 홍위나 손돌이나 모두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전호인은 새 화둑이 세워지는 것을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야인족 일꾼들 여럿이 달라붙어 큰 구덩이를 파고 받침돌을 괴어 둔 후, 그 위에 사면으로 판석을 세워 두었다. 이후에는 사방으로 근방 습지대에서 날라 온 점토를 안팎으로 두툼하게 발랐다. 그는 연신 일꾼들이 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했다.


“일은 잘 되어 가나?”


“오셨습니까, 나으리.”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호인은 후딱 몸을 돌려 부복했다. 야인 풍습대로 털가죽 옷을 입고 장신구를 찬 홍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 유빈도 같이 있었다.


“나으리께서 하명하신 대로 어김없이 일이 되어 가고 있나이다. 강엿쇠둑은 이미 거의 만들어졌고,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은 판장쇠둑이올시다.”


호인이 감독하고 있는 화둑은 큰대장간용 화둑으로, 근처에 있는 쇠둑부리가마에서 생철덩이를 고아 내면 강엿쇠둑에서 일차로 풀무질을 하고 가열해서 강엿쇠덩이를 고아내고, 다시 판장쇠둑에서 판장쇠로 만들어내게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는 쇠둑부리가마만을 두어 생철덩이까지만을 만들어내면 이를 손돌이 부리는 대상 (大商)들이 야인들의 대장간에 내다 파는 식이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자 큰대장간 설비까지 마련하는 것이다.


“훌륭하네. 기일에는 차질이 없겠지?”


“그렇사옵니다.”


호인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홍위가 처음 쇠부리 일을 배워 온 직후에는 대장간 일은 전적으로 홍위 외에는 감독할 이가 없었다. 그러나 공방 규모가 점차로 커지게 되면서 홍위는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해졌다. 그러다 보니 대장간 일이 호인에게 떨어진 것인데,

그 역시 대장간 일은 전연 처음이었지만, 막상 써 보니 의외로 일을 금방 익혔다. 붙임성 있는 성격인 호인은 대장간에 들어온 첫날부터 서투르게나마 야인 대장장이들에게 서슴없이 다가가 일하는 것을 구경하고 모르는 것은 스스럼없이 묻기도 했으며, 또한 자신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열정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되어갔고, 모두가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한 가지 제안할 일이 있사온데······.”


“말해 보게.”


호인은 마른 침을 삼켰다. 얼마 전부터 곰곰이 생각해왔던 것이지만 막상 말을 꺼내자니 쭈뼛거리게 되었다.


“공방 근처에는 제법 큰 시냇물이 흐르고 있고, 물살도 큽니다. 소인은 소싯적에 수차를 본 일이 있사온데, 이를 보다 보니 문득 떠올랐습니다. 앞으로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할 때, 지금까지는 손풀무질을 했지만 혹 수차를 써보면 어떨까요?”


호인의 제안에 홍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제안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호인이 말한 수차는 선대왕 세종대왕 시절 주로 수리 시설 용도로 보급하러 시도한 것이다.


“그것이 가하겠는가? 그대도 잘 알겠지만 선대왕 시절에도 수차는 그리 효용이 없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홍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한 번 해볼 만한 시도로군. 앞으로는 대장간이 날로 흥성해질테니. 호인 자네가 이제 대장간을 맡아보는 것이 아닌가. 해보게나.”


“알겠습니다.”


호인은 허리를 숙였다. 홍위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대장간 일을 넘겨 맡아보게 된 이후로 호인은 이 일에 푹 빠져들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장인 일은 손대보지도 않은 일인데 마치 적성을 새로 찾은 것처럼 열중해 있었는데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내 미처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네가 스스로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 시도해보는 것은 실로 바람직한 일이야. 앞으로도 그리해 주게.”


“감사하옵니다.”


홍위의 칭찬에 호인은 크게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홍위에게서 칭찬을 받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없었다. 홍위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


“큰대장간을 새로 둔다면 이제 못되어도 십여 명의 인원이 더 필요합니다.”


통상 생철덩이를 고아내는 쇠둑부리 가마는 열여섯 명, 생철덩이를 다시 강엿쇠덩어리로, 그리고 판장쇠로 만들어내는 큰대장간은 각각 여섯 명씩 열두 명, 판장쇠를 가지고 연장을 만들어내는 대장간은 이십여 명의 인원이 필요했다. 이 인원은 모두 야인 부락에서 영입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생소해했으나 이내 흙으로 쌓아올린 가마에서 귀한 쇳물이 고아져 나오자 모두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것만 해도 야인들의 생활을 크게 바꿀 수 있겠지만, 그조차도 다만 시작에 불과했다.


“내 잠시 언덕에 올라가 보겠네. 일하고 있게나.”


“예, 나으리.”


호인은 홍위가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있었다. 대장간 주변은 바위가 뒤덮인 구릉지가 관목 숲과 뒤섞여 산재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높은 언덕에 오르면 이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였고, 홍위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했다. 홍위와 유빈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고,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이내 두 사람은 정상에 올라섰다.


“보기 좋구먼!”


“실로 그렇습니다.”


이곳에서는 이미 지어진 가마와 새로 지어지는 화둑이 모두 보였다. 그는 머릿속에서 앞으로 이곳에 들어설 모습을 그려보자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홍위는 홀린 듯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인기척을 느낀 유빈이 몸을 돌렸다.


“여기 있었구만.”


“자네 왔는가.”


올라오는 사람을 알아본 유빈은 경계를 풀었고 홍위는 그를 맞이했다. 언덕을 올라온 퉁주동이 싱긋 웃었다.


“내 아우와 함께 어떤 분 하나를 모시고 바람을 쐬러 나온 차에 자네를 보았네. 멀리서도 보이더군. 자네 말일세, 요새 이곳에 올라오는 재미에 빠진 것 같군.”


“그 말대로야.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게. 얼마나 대단하겠나.”


퉁주동은 홍위 옆으로 다가서서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홍위가 아래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보게.”


퉁주동이 보기에 아래 펼쳐져 있는 터는 사실 별로 쓰임새가 없는 곳이었다. 바위투성이 구릉 사이사이로 갈대 슾지가 있고, 흙탕물 섞인 시냇물이 우거진 숲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구릉 지대에 작물을 기를 만한 밭을 일구려면 퍽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처럼 보였고 그나마도 들인 수고에 못 미치는 결과를 얻을 것이 뻔해 보였다. 퉁주동의 감상을 들은 홍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기에 여긴 주목을 못 받은 거지. 하지만 나름의 장점도 있다네. 저 바위투성이 구릉에서 쇳돌을 발견했다네. 이곳에 널린 숲에는 참나무들이 많은데, 덕분에 가마에 넣을 참숯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 갈대 숲 역시 좋은 땔감으로 쓸 수 있을 거야. 훌륭한 조건이지. 워낙에 다른 이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땅인 만큼 비밀을 유지하기도 수월하지.”


“그런 장점이 있었구먼······ 자네의 계획은 뭔가?”


홍위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그려내고 있었던 장면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생철을 고아내는 쇠둑부리 가마를 중심으로 큰대장간, 다시 완제품을 생산할 대장간 시설까지 합하면 어엿한 마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을에 장인들이 살게 될 것이고, 곧 좋은 쇠를 만들어낼 것이다. 무릇 쇠란 곧 문명의 씨앗과도 같지 않던가. 일찍이 문명을 일구었다는 신농 (神農)씨도 몸소 쇠를 다루어 연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제 철제 농기구가 널리 보급되면 살기 위해 노략질에 의존해야 하는 야인들도 땅을 일구며 곡식을 거두는 기쁨을 알게 되리라. 물산이 풍족해지면 곧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넓은 땅에 문명이 흥성해지는 것이다. 홍위의 말을 들은 퉁주동이 짧게 평했다.


“자넨 지나치게 넓고 크게 보는 경향이 있군······. 우리네 족속들은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하는 데 익숙해져 있지. 그런 사람들이 농기구를 쉽게 잡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농사를 짓는 이들도 적지 않잖나. 농자 천하지대본이라······ 언젠가는 이 땅이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농부들의 흥겨운 노랫소리로 넘쳐날 걸세.”


퉁주동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쉽게 바뀌어지지 않아. 자네는 너무 조선 사람의 눈으로 우리네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네. 우리들 중에서도 자네 동족들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네 방식에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네.”


“언젠가는 바뀌어나가지 않을까? 저 기자 (箕子)께서 교화하기 전에는, 우리 조상들도 자네들과 별 다를 바 없었다네.”


그 말에 퉁주동은 씩 웃었다.


“젊은이들은 매사를 쉽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지.”


“자넨 젊지 않고?”


퉁주동은 홍위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그러나 의형제를 맺으면서 그들은 나이 따위는 중요치 않게 서로를 친구처럼 여겼다. 퉁주동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나도 젊지. 자네의 포부가 그대로 이룩된다면······ 나로서는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해. 그렇게 되면 자넨 우리 족속에 대해서는 삼황 오제에 버금가는 이로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겠지. 하지만, 모두가 자네 뜻에 공감해 줄까?”


홍위는 침묵을 지켰다.


“필경 오랜 세월이 걸릴 거야. 자신의 생활 풍습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흐름이더라도 말일세.”


“나는 조선 땅을 등지고 이곳으로 왔네. 지금으로서는 내 모든 것을 이 땅과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걸고 있어. 내 평생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는 일일세.”


친구의 진심어린 말에 퉁주동은 달리 더 붙일 말이 없었다. 지평선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퉁주동이 입을 열었다.


“여하튼 행운을 빌겠네······ 가만, 저기 자네 사람이 오는 것 같아 보이네만.”


“내게는 잘 안 보이는데······ 말 타고 오는 이가 하나 보이는군.”


퉁주동은 눈이 밝았다. 홍위도 야인 땅에 온 이후로 너른 초원에서 점차 눈썰미가 밝아지고 있었으나 나면서부터 이 대초원에서 살아온 이들만은 못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가 점차 가까워지자 홍위도 그이가 장손돌임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아래로 내려섰다. 마을 쪽으로 다가온 손돌이 홍위를 알아보고 말에서 내렸다.


“자네 왔구먼.”


홍위는 반갑게 손돌을 맞았다. 퉁주동도 마찬가지였다. 손돌은 이런저런 긴요한 물자를 잘 구해오는 데다 거래가 확실한 편이라 부락민 사이에서는 꽤 신망이 높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쩐 일인가······? 자네, 어딘지 불안해 보여.”


손돌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 홍위가 놀라 물었다.


“옳게 보시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홍위가 이상하다는 듯이 턱을 긁적거렸다.


“희한한 일이군. 장사꾼은 언제나 속내를 숨기고, 태산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자네의 지론이자, 내게 가르쳐준 으뜸 원칙이 아니던가.”


홍위의 말에 손돌은 입을 헤 벌리고 감탄했다.


“나으리께서는 소인의 보잘것없는 가르침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실로 그 말씀대롭니다. 확실히 장사꾼이란 칼날 위에서도 태연한 얼굴로 춤을 추어야 하는 일이올시다. 특히나 소인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는.”


“그렇다면, 자네가 지금 품고 있는 걱정거리는 범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불행히도, 그렇습니다.”


홍위는 손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늘 그렇듯이 침착하고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옛 성현들의 말씀에 대한 배움은 없을지 몰라도 그에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장사꾼으로서의 지혜만큼은 분명히 있었다. 이곳이 성균관이나 경연 장소라면 모를까, 홍위는 손돌의 걱정을 그냥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말해 보게.”


“나으리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야인들이 쇠를 다루는 비방을 익혔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애초에 막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여하튼 이 때문에 명이나 조선에서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 문제는 예견되었던 일 아닌가.”


명이나 조선 모두 야인의 힘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철기 다루는 기술이 흘러들어가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려 했다. 그런데 홍위 일행 덕분에 사정이 바뀐 셈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장차의 후환거리를 미리 제거하고 싶어할 게 뻔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홍위도 어느 정도 생각해 둔 바가 있었지만, 야인 사정에 능통한 손돌에게 의견을 먼저 구하고 싶었다.


“자네 소견에는 어찌 해야 하겠다고 보나?”


홍위의 질문에 손돌은 딱 잘라 말했다.


“뒷배가 필요합니다. 지금 부씨 부락 정도로는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퉁주동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손돌은 신경쓰지 않았다.


“일반적인 재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했겠지만 쇠붙이라면 이야기는 다르오이다. 쇠붙이라면 한다하는 야인 부족들 모두가 탐내는 물건이지요. 그리고 대명은 물론 조선에서도 반출에 신경쓰는 물자오이다.”


“그렇다면······.”


홍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그도 미리 예견한 대로였다.


“작금 건주위에서 세력을 떨치는 자는 이만주이나이다. 그는 한때 대명에 거역하였던 자이오나, 건주위 도독 자리를 제수받았음입니다.”


수년 전 달단 즉 오이라트 부를 정벌하기 위해 명 황제가 친정군을 이끌고 나섰다 오히려 패해 포로로 붙잡힌 토목의 변 이후 명나라 조정은 북방 땅에 대한 통제권을 크게 잃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부상한 것이 바로 이만주였는데, 명 조정은 그를 힘으로 누르기보다는 작위를 주어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이만주는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을 결집시켜 가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자와 통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나이다. 그 역시 쇠붙이에는 관심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명에게서 작위를 받았다 하나, 그도 심복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홍위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만주의 힘을 빌려 위기를 넘긴다······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지만 걸리는 것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퉁주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만주의 야심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에게 충분한 철기를 내준다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군대를 조직하고 세력을 넓히려 하겠지.”


퉁주동이 마땅찮아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건주위 도독이라고는 하나 모두가 이만주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진 야인들이었으니 건주위라고 해서 통일된 체제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퉁주동이 속한 부씨 부락은 건주위에 속해 있으며, 이만주에게 드러내놓고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 부족장은 이만주를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이만주는 분명히 우리 부락을 껄끄럽게 여기는 것도 사실이지.”


“어떤 문제가 있었나?”


홍위의 말에 퉁주동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있기야 있었지. 이만주가 월영이를 첩으로 요구한 적이 있었거든. 물론 족장님은 거절했었네. 자네는 아마 그것까지는 모르고 있었나보이.”


퉁주동은 홍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모르고 있었네.”


홍위는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 확실히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홍위는 달빛 아래 그를 보듬어 안았었던, 조선인의 피를 반나마 물려받은 야인족 처녀를 떠올렸다. 그 때 그녀는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었다고는 말했으나······ 그 내막까지는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홍위는 그제서야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긍지 높고 자존심 강한 월영에겐 이만주의 후처가 되는 것이 마땅치 않았겠지.


퉁주동이 수긍하며 말을 이었다.


“그랬을 거야. 사실 어느 쪽도 공공연히 밝힐 일은 아니었겠지. 이만주 입장에서는 일이 성사되면 명망 있는 부족을 포섭할 수 있기에 가볍게 한 번 찔러 본 것에 불과했겠지만 거절당한 것이 그렇게 기분좋을 리도 없겠지. 우리 부족으로서도 이만주와 공공연히 적대하는 것은 좋을 게 없기에 모두 쉬쉬한 거야.”


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손돌이 끼어들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명이나 조선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만주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그 말에 모두들 침묵을 지켰다. 참으로 껄끄러운 문제였다. 잠시 후 홍위가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는 손돌의 제안을 생각해 볼 만하네. 이만주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보네. 적어도 한 번 만나볼 필요는 있겠지. 이번 일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장차 사업을 벌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와는 마주쳐야만 해.”


그 말에는 퉁주동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내심 마뜩치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 친근히 지냈던 월영에 대한 문제가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말이지, 아까 전에 내가 누군가와 같이 왔다고 했었지 않은가. 바로······.”


“여기들 계셨군요.”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퉁주동의 말을 잘랐다. 홍위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말 두 필이 있었는데, 회색 말을 타고 있는 덩치 큰 사내는 퉁주동의 아우 주강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약간 긴장한 듯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한눈에 보아도 밤색 말을 타고 옆에 같이 있는 사람 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은비녀를 꽂은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젊고 당찬 여인, 밝은 태양 아래 건강한 갈색을 띤 피부에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흔들림없이 말을 몰고 있는 여인. 바로 부월영이었다. 순간 홍위는 그녀의 기품 있는 모습에 아찔함마저 느끼었다. 지난 달빛 아래 본 그녀가 새벽의 정령과 같이 보였다면 태양 아래 말 위에 오른 그녀는 여왕과도 같은 풍모가 있었다. 살면서 이미 볼 것 다 본 손돌마저도 그녀 앞에서 무심코 숨을 크게 들이쉴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퉁주동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런,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그 말에 월영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예요, 오라버니. 가신 지 한참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왔는걸요.”


월영은 반쯤 얼이 빠진 채 그녀를 멀거니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홍위를 발견했다. 그녀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반가운 미소도 섞여 있었지만 미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와 같이 바람을 쐬러 나온 참이었는데······ 우연히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월영의 말에 퉁주동은 슬그머니 웃었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홍위가 퉁주동을 흘끗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아닐세.”


월영의 시선을 느낀 퉁주동이 그렇게 얼버무렸다.


“구경을 하고 싶은데 안내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월영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약 이 각 정도 시간이 지나 홍위는 월영과 함께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었다. 태양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작가의말

원래 이 화에 약간 덧붙여서 마무리할까 했는데 이 마지막 부분이 선뜻 손이 가지 않네요. 오그라드는 기분이라. -_-


다음편에 대강 처리하고 서둘러 위기 부분으로 넘겨야겠네요. ㄱ-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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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19 [탈퇴계정]
    작성일
    19.05.17 12:42
    No. 1

    부월영이 엮인 문제니 이만주 밑으로 들어갈 것 같지는 않고...홍위가 어떻게 세력을 모을지 기대가 됩니다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18 18:01
    No. 2

    ㅎㅎㅎ 기대에 부응해야 할텐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The도리깨
    작성일
    19.05.17 12:56
    No. 3

    요동도사: 야인주제에 재밌게 노네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18 19:01
    No. 4
  • 작성자
    Lv.48 벼이삭
    작성일
    19.06.02 21:25
    No. 5

    몇달만에 가마만드는법까지 다 배워오다니 약간 치트쓴 느낌은 있네요 ㅎㅎ. 그치만 소설이고 위화감 없으니까 잘 넘어가지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6.02 22:20
    No. 6

    예. 그건 뭐 홍위의 영특함을 보여주는 서술이라 치고 넘어가는 거지요. 원래는 대장장이를 포섭해서 데려간다, 그렇게도 할까 했는데 쓸데없이 등장인물을 추가시켜 극의 흐름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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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최형욱 (2) +1 19.08.14 607 19 14쪽
49 최형욱 +5 19.08.13 658 16 16쪽
48 손 하나에 두 가지 모두를 쥐랴 (2) +2 19.08.08 737 19 15쪽
47 손 하나에 두 가지 모두를 쥐랴 +5 19.08.07 723 19 16쪽
46 한가령 (2) +9 19.08.06 692 16 14쪽
45 한가령 +5 19.08.06 686 17 13쪽
44 이고납합 (2) +5 19.08.05 667 17 14쪽
43 이고납합 +9 19.08.02 701 16 15쪽
42 다가오는 위난 (4) +6 19.07.31 751 16 13쪽
41 다가오는 위난 (3) +4 19.07.30 713 18 17쪽
40 다가오는 위난 (2) +3 19.07.28 728 19 17쪽
39 다가오는 위난 +9 19.07.27 791 27 10쪽
38 전령 (2) +4 19.06.13 932 30 10쪽
37 전령 +2 19.06.11 871 26 15쪽
36 몰려오는 먹구름 (5) +3 19.06.05 915 26 17쪽
35 몰려오는 먹구름 (4) +12 19.06.03 867 23 16쪽
34 몰려오는 먹구름 (3) +6 19.06.02 870 29 15쪽
33 몰려오는 먹구름 (2) +4 19.06.01 878 26 22쪽
32 몰려오는 먹구름 (1) +14 19.05.28 984 29 19쪽
31 음모가들 (2) +6 19.05.27 838 24 23쪽
30 음모가들 (1) +7 19.05.26 1,018 28 13쪽
29 변화구 (2) +5 19.05.23 911 32 13쪽
28 변화구 (1) +8 19.05.22 947 31 11쪽
27 건주위 도독 이만주 (2) +14 19.05.21 946 27 12쪽
26 건주위 도독 이만주 (1) +2 19.05.20 961 32 20쪽
25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3) +9 19.05.19 1,085 29 12쪽
»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2) +6 19.05.17 941 27 21쪽
23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1) +11 19.05.16 1,009 30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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