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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데나] 님의 서재입니다.

심양왕 단종

웹소설 > 일반연재 > 대체역사, 무협

[파사데나]
작품등록일 :
2019.05.04 07:44
최근연재일 :
2019.08.20 20:33
연재수 :
51 회
조회수 :
53,070
추천수 :
1,290
글자수 :
406,586

작성
19.05.28 18:00
조회
983
추천
29
글자
19쪽

몰려오는 먹구름 (1)

DUMMY

최형욱이 뒤를 쫓을 단서를 찾는 데 여념이 없고, 이만주가 태도를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홍위 일행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결론부터 말하면 이 때 홍위는 다른 데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홍위 일행의 후원자라고 할 수 있었던 부씨 족장의 문제였다. 며칠 전 사냥에서 낙마한 후로 족장은 자리 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야인 족장이면 늘 그렇듯이 그도 종종 부락민 모두가 참여하는 사냥을 열었었다. 사냥이란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는 데도 의미가 있었지만 부락민들을 단합하는 한편 나름의 군사 훈련을 하는 의미도 있었다. 제아무리 농사를 지어 먹을 양식을 댈 수 있는다 해도 스스로를 지킬 힘은 필요했다. 족장 개인적으로 보면 자신의 무력과 권위를 드높일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때마침 겨우내 웅크리고만 있었던 족장은 오랜만에 사냥에 나섰던 참이었고, 그 때문에 마치 젊은 시절이 다시 오기라도 한 양 들떠 있었다. 야생마 한 무리가 질주하고 있는 것을 본 족장은 두말 하지 않고 달려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토끼 한 마리에 놀란 족장의 말이 날뛰자 그대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하필이면 족장이 들떠 있던 탓에 호위병도 제쳐두고 혼자 따로 떨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사냥에 들떠 있던 부락민이 족장의 부재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홍위는 때마침 큰대장간 완공을 감독하러 나가 있다가 부랴부랴 돌아왔었다. 퉁주동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를 맞았다.


“족장님은 괜찮으신가.”


홍위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서둘러 물었다. 퉁주동이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말하기 어렵네. 젊은 무사들도 말에서 잘못 떨어지면 목숨을 장담키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하물며 족장님께서는 나이가 많이 드신 분 아니던가. 그래도 원체 근골이 있으신 분이지만······.”


홍위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용태가 심하신가.”


“말에서 넘어지면서 우선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그 외에도 여기저기 다치셨어. 음식을 통 잡숫지를 못하신다네.”


홍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부상이라면 조선 땅에서도 일류급 의원을 불러와도 장담을 하기 어려운 부상이 아닌가.


“의원은 불렀나.”


“의원이라······. 일단 인근 부락 중에서 이런 데 경험 많은 분을 청하긴 했는데 그분 말로는 본인이 마음을 굳게 먹고 주위가 간절히 바라면 하늘의 정령이 도우실 게라는 거야.”


말이 의원이지, 야인 땅에서는 점 치는 무당이 사실상 의원 역할을 같이 하는 것이다. 고약을 쓰거나 탕약을 달이기도 하지만 조선이나 명에 비하면 정말로 기초적인 수준이고,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조선으로 치면 굿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간절히 바라면 또 우주 천지신명이 나서서 도와준다는 것이니.


“월영은 안에 있는가.”


“아버님 머리맡에 꼭 붙어 있어 떠나지 않고 있지.”


“내 족장님을 뵈어도 되겠는가.”


그 말에 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우리 부락에서 신뢰받는 빈객이 아닌가.”


주동의 그 말은 꼭 결의형제를 맺은 사이라서가 아니었다. 홍위가 이곳에 온 지도 어언 2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처음 이방인에 불과했던 홍위는 부씨 부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그가 오고 나면서 건주위 남쪽에서 조금 규모가 있던 부씨 부락은 이제 인근 부족들 사이에서 으뜸가는 존재로 부상했다. 홍위가 이끄는 조선인 상단과 손을 잡았던 것이기도 했다. 그 전까지 족장의 경륜과 덕망으로 인해 인근 족장들도 조언을 구하며 공경하는 정도의 지위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중계 무역으로 취득한 부와 무엇보다 홍위가 공급하는 쇠붙이로 인해 부씨 부락은 실질적인 힘 역시 가지게 되었다.


뿐만이 아니다. 이제 열여덟 살이 된 홍위는 말 그대로 헌헌장부 (軒軒丈夫)가 되어 있었으니 건주위 남쪽 일대를 통틀어 그와 대적할 만한 사내가 없었다. 한다하는 야인 청년들 중 그와 겨루어 부하 되기를 자청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손돌은 그런 이들을 모아 사사로이 무력을 갖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송유빈이 그 지휘를 맡아보고 있었다. 아직은 그 수가 수십여 인에 불과하였으나, 상단을 따라 호위 임무에 종사하면서 뭇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다 홍위가 그 건주위 도독동지 이만주와 담판을 짓고, 부씨 부락의 안전을 확보한 일로 인해 그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자네는 나뿐 아니라 우리 부락 모두의 은인이기도 해.”


퉁주동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홍위가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족장님을 뵈었으면 하네.”


주동과 홍위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른 건초를 쌓아올려 그 위에 털가죽을 덮은 침상 위에 족장이 누워 있었다. 옆에는 무당으로 보이는 나이든 노인이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머리맡에는 월영이 양 팔을 포갠 채 머리를 묻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졸고 있는 듯했던 무당이 입을 열었다.


“오늘 점괘에 북쪽에서 귀인이 오신다고 되어 있더니······.”


퉁주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쪼글쪼글한 얼굴에 왜소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당이 끙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켜 허리를 깊숙이 굽혀 절했다. 퉁주동은 족장이 세상을 떠날 경우 차기 족장이 될 사람이었고, 홍위는 비록 이방인이기는 하나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퉁주동이 무당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홍위는 족장 옆으로 갔다. 고개를 파묻고 있던 월영이 그를 돌아보았다.


“홍위 오라버님······.”


지난번 서로의 목숨을 구해 준 이후 월영은 홍위를 오라버님이라고 부르며 친근하게 따르게 되었다. 아직까지 홍위는 이장경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으나, 퉁주동이 그의 진명을 알고 있었으며 족장이나 월영 등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몇이 홍위의 본명을 알았다. 물론, 그가 몇 년 전 쫓겨난 조선의 왕이라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이후 바로 달려왔다. 얼마나 힘들겠느냐.”


한때 발랄했던 월영은 불과 며칠 만에 얼굴이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눈가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규방 안에서 온종일 지내며 다소곳이 앉아 있는 조선 여염집 처녀와 달리 월영은 사내들과 더불어 말을 달리고 호방하게 웃고 떠들며 활솜씨를 겨루는 초원의 여장부라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상태가 위독해지면서는 어쩔 수 없는 한 사내의 딸이었다.


“안 그래도 아버님께서도 오라버님을 찾으셨습니다.”


“족장님께서······?”


월영의 말에 홍위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내심 짚이는 곳이 있었다. 부씨 족장은 대명 황제나 조선 국왕, 심지어 건주위 이만주에 비하자면 한없이 힘이 약한 부락 하나를 다스리는 이였지만 그래도 분명 한 집단의 수장이었다. 이제 스스로의 상태가 위중함을 알았다면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이 자신이 떠난 후 부락의 운명일 터. 퉁주동이 부락을 이어받을 사람이겠지만, 족장 입장에서는 이방인이면서도 부락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홍위 역시 마음에 걸리는 존재일 것이다. 홍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왔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오라버님.”


월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와 주셔서 우리 일가로서는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로도서요······.”


월영은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홍위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두 눈을 감고 있던 족장이 슬며시 눈을 떴다.


“자네 왔는가. 마침 잘 왔네그려. 안 그래도 자네를 보고 싶었는데.”


그 말에 홍위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족장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밤새워 말을 달렸습니다.”


홍위가 소식을 전해들은 것이 어제 저녁의 일이었다. 대장간 마을을 찾은 퉁주강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빈을 비롯한 몇 사람만을 거느리고 밤 새워 말을 달려 도착했다.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월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 홍위와 단둘이 있고 싶다. 잠시 자리를 피해 줄 수 있겠느냐.”


월영은 잠시 족장을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이내 그리하겠습니다, 하고는 밖으로 물러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족장이 한숨을 쉬었다. 여느 사내와도 뒤지지 않는 괄괄한 여장부였지만 그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럽고 또 아낄 수밖에 없는 딸이었다. 월영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족장이 홍위 쪽을 돌아보았다.


“내 근력이 예전같이 못한 줄은 진작에 알았지만, 그래도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추태까지 보일 줄은 미처 몰랐네. 이거야 원, 망신스러운 일이 아닌가.”


족장은 씩 웃으려고 했지만 홍위의 눈에는 한없이 가냘파 보였다. 홍위의 표정을 읽었는지 족장은 한숨을 쉬려다가 이내 밭은기침을 몇 번 했다. 홍위가 그의 상체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래, 옛날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 나도 늙은 지 오래야. 내 살 날도 얼마 안남았던 게지.”


“무슨 그런 말씀을······ 쾌차하셔야지요.”


“그런 소리 말게. 나라고 해서 내 몸이 어떤지 모르는 게 아니야. 다 늙어빠진 몸이 한 번 다치면 온갖 병이 찾아온다네. 상처 입은 짐승을 노리는 늑대 떼들처럼 말이지.”


족장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홍위는 침묵을 지켰다.


“한 가지 다행한 일이라면, 나에게는 비록 아들놈은 없지만 내 뒤를 이어 줄 믿음직한 녀석은 있더라는 거지. 그래, 자네와 결의 형제를 맺은 퉁주동이야.”


이렇게 낙마해서 자리보전하게 되기 전부터 이미 부씨 족장은 내심 누군가 더 나은 사람에게 자리를 물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고, 그 나은 사람이라면 단연 퉁주동이었다. 주동은 족장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일신의 용력도 뛰어난데다 사람들을 이끄는 통솔력도 갖추고 있었으니 족장으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족장으로서는 후사가 든든하니 그 이상 걱정할 것은 없겠지만, 굳이 말하자면 걱정거리가 하나 있다네······. 족장이 아니라 애비로서이지. 그래, 월영이 말이야.”


족장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에게 굳이 하나 더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외동딸의 거취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족장님께서는 일찍이 주동이를 눈여겨 보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었지, 물론.”


족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비라고 한들 남녀지사를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나. 하물며 월영이 그애는 웬만한 남자 못지않은 아이거늘. 주동과 월영이 그 두애가 맺어진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문제는 그애들이 서로 마음이 없는게야. 서로를 친한 동기로 보기는 하지만 평생 해로할 사람으로는 생각지 아니하는게지.”


그전부터 족장은 퉁주동을 사윗감으로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의 말대로 문제가 있었으니, 주동이나 월영 모두 서로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지 연인으로 나아갈 뜻은 없더라는 것이 문제였다. 홍위는 침묵을 지켰다.


“일찍이 월영이는 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네. 그래, 이만주가 월영이를 내달라고 요구했을 때 일이지. 자기는 자기가 마음에 정한 사람 아니면 아니되겠다고. 그래서 그 다음날 내가 이만주의 요구를 물리쳤던 게야.”


족장의 말 끝은 연달아 터져나오는 기침소리 때문에 잠시 끊겼다. 홍위가 그를 부축했다.


“고맙네. 여하간 월영은 내 하나뿐인 딸이야. 괄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훌륭하게 키워낸 내 딸이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 욕심은, 비록 주동이와는 아니더라도 내 죽기 전에 그애의 앞날을 기약해주고 가고 싶다는 거야.”


족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홍위를 쳐다보았다. 족장의 시선을 받은 홍위는 눈을 내리깔았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지요······.”


족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오랫동안 사람들을 눈여겨보았고, 애비로서 딸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야.”


“자네가 일찍이 조선 땅에 두고 온 이가 있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네. 하지만, 내 딸아이를 거두어 준다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게야.”


“족장님.”


“그렇게 해 주게. 자네가 월영이를 거두어 주고, 주동이를 도와서 부락을 이끌어 준다면, 나 이상으로 잘 해나갈 수 있을걸세.”


족장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홍위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잠시 후 홍위는 바깥으로 나섰다. 월영이 문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위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조선에서야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지만, 이곳에 온 이후 조선의 풍속을 버린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도 않았다. 무념무상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한참만에 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치 꿈 속이라도 걷고 있는 듯한 아련한 목소리였다.


“예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이랬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어요.”


홍위는 월영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님까지 데려가시는군요.”


순간 월영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홍위 앞에서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떨군 그녀였지만, 두 어깨가 들썩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애잔했다. 홍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가 머리를 홍위에게 기대며 중얼거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족장의 자리는 주동 오라버님이 물려받게 되겠지만 저 역시 족장님의 하나뿐인 딸이랍니다. 그러니 나약한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울어도 돼. 울지 말라고는 않겠어. 울음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속에 담아놓았던 것을 터 주는 약이기도 하잖아.”


“고마워요, 오라버님.”


월영이 물기 어린 눈으로 살짝 웃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나도 그랬어.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땐 너무나도 어렸지만,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도 지금 월영이와 똑같았어. 정신이 어뜩해지더군. 참 별 생각이 다 들었어. 봐라, 이런 날 어쩌면 이렇게도 하늘이 맑고 푸른지. 하늘이 무너지진 않더라도, 천둥 번개라도 쳐야 하지 않나? 아니면 땅이 꺼지기라도 해야 하지 않나? 너무나도 멀쩡한 거야. 삼라만상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온한 거야. 낯설 정도로.”


월영은 홍위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동안 쏟아낸 홍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미 겪어본 일이니 월영이의 마음을 잘 안다, 그렇게 말할 마음은 없었어. 하지만만······.”


여기서 더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이 참으로 힘들다는 것만은 알아. 그리고 월영이가 그것을 털어놓기 참으로 힘들 거라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월영이가 힘들어 할 때 옆에 있어주는 일 정도뿐이로구나.”


겨우 쥐어짜낸 말이 그런 정도뿐이었다. 뭐라고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월영의 훌쩍이는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녀는 오른손을 어깨에 둘러진 홍위의 손 쪽으로 가져다 댔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정말 의지가 될 거예요.”


“음.”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잠시 후 월영이 일어섰다.


“아버님께 다시 가보아야겠어요······.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같이 있을 수 있을 때까지는.”


홍위는 월영의 어깨에 얹혀져 있던 손길을 거두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던 나약한 처녀의 모습은 어느덧 그녀에게서 지워지고 없었다. 족장의 딸다운 기품과 엄격함이 그녀로부터 흘러나왔고, 홍위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몸 잘 챙기고······.”


월영은 돌아서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홍위 쪽을 돌아보았다.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는 햇살 속에 강인한 여장부이기도 한 그녀의 얼굴에는 한순간 처연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짧은 순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듯한가 싶더니, 이내 월영은 천천히 돌아섰다.


“살펴 가시기를······.”


결국 월영은 그 이상의 말을 하지 않은 채 멀어져갔다. 홀로 남은 홍위는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 자신은 지금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 남겨둔 아내로 인한 망설임인가, 그것도 있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내버리고 도망치듯 쫓겨 온 이가 다시 새 사람을 맞아들일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격지심, 그것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야인 처녀를 맞아들이고 야인 땅에서 묻혀 살면서 야인족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 일말의 망설임이 있었다. 홍위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와서 왜 물러서느냐. 너는 영월 땅을 떠나 만포진까지 이르러, 야인 땅으로 들어설 각오를 다질 때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지 않았더냐. 야인족의 일원에 섞여 들어가 일생을 야인족으로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가.


그랬다. 분명히 사실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 같은 평화로운 삶 자체가 과분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한 나라를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벗고, 생명의 위협이나 배신당할 위험에서도 자유로워진 채, 마치 푸른 하늘을 벗삼아 훨훨 날아가는 기러기 때처럼 이 넓고 넓은 대초원 속에서 여유롭게 살아가는 삶. 너무나도 굉장해서 이렇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아찔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아니다······.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이제 와서 그에게 이 평화롭고 안락한 삶 대신 취해야 할 다른 의무라도 있다더라는 말인가. 이제 와서 도대체 무엇을? 홍위는 시름깊게 중얼거렸다.


“영월 길에서 만난 그이들라면 그 때 북행길을 일깨워 주었듯이 지금 내 가야 할 길을 알려 줄꼬······.”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없다. 홍위는 맥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저런 생각 때문에 머리가 한없이 무거웠다.

유동근.png


작가의말

p.s. 글을 쓰며 구상한 캐릭터들의 이미지 두 번째.


수양대군 - <명성황후>에서 흥선 대원군 (유동근 분)

수양대군은 악마적인 카리스마와 한정없는 권력욕에 불타는 ‘전형적인’ 캐릭터로 설정했다. 음험하고 흉포하되, 동시에 찌질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모비 딕에 휘감겨 죽은 선장 에이허브같이 강렬함을 남겨야 하고, 마리오 푸조의 <대부>에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는 돈 콜리오네와도 같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정잡배의 그것과도 같은 상스러움을 갖춘 사내이며, 그러면서도 이따금 걸맞지 않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다가 바로 다음 순간 한없이 잔혹해질 수 있는 사내이다.


그렇게 본다면 유동근 옹과는 좀 맞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래된 드라마일지언정, 유동근 옹이 보여 준 사자후와 카리스마는 세월을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전반적으론 다른 캐릭터여야 하지만, 소설 전반부를 통틀어 홍위와 대척점에 있으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발산해야 하는 수양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 참고하고 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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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4

  • 작성자
    Lv.41 o이안o
    작성일
    19.05.28 20:49
    No. 1

    아직 호찬이 등장하려면 빨라도 몇화정도 더 기다려야 할듯 싶은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06:17
    No. 2

    언급이라도 해야 복선이 회수되지요. 송씨도 그렇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7 파이파텔
    작성일
    19.05.28 22:27
    No. 3

    가출(?)해서 야인 여자와 결혼하는 왕자는 또 모세와 시포라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06:18
    No. 4

    그것도 있긴 있군요 ㅎ. 진문공 공자 신생을 떠올리기는 했는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7 The도리깨
    작성일
    19.05.29 02:43
    No. 5

    잘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06:18
    No. 6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작작작
    작성일
    19.05.29 09:51
    No. 7

    개추. 작가노트도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서 좋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11:04
    No. 8

    그런가요? 도움이 되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인데... ㅎ 저 요소들을 본문에 녹여내지 못했다는 뜻도 되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o이안o
    작성일
    19.05.29 16:29
    No. 9

    지금 다시 보니까 간절히 바라면 온우주가 도와준다 드립이...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17:17
    No. 10
  • 작성자
    Lv.41 o이안o
    작성일
    19.05.29 16:35
    No. 11

    그리고 작가의 말의 해설보다 본문의 내용만으로 이해하게 하는 소설을 쓰시고자 하는 바는 알지만 지금까지 나온 수양의 비중으로는 권력욕이 있으면서,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이라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는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나온 수양의 모습을 종합하자면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 왕위를 찬탈하고 도주한 전왕을 제거한다는 어찌보면 누구나 나아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작가님께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권력욕이 강하고, 카리스마 강한 인물이라는 부분은 일부분이나마 표현된 듯합니다만 나머지 모습은 시간의 흐름이 더 지난 뒤에 잘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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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5.29 17:17
    No. 12

    하하, 생각해보면 그렇군요. 이 소설의 볼륨이 그리 크지 않다보니.

    하지만 수양을 등장시키는 각 씬마다 최대한 힘을 주어 묘사하려고는 노력은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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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9 [탈퇴계정]
    작성일
    19.05.31 22:35
    No. 13

    시험치고 돌아왔읍니다...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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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글
    작성자
    Lv.7 [파사데나]
    작성일
    19.06.01 08:46
    No. 14

    고생하셨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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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변화구 (2) +5 19.05.23 911 3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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