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때는 정해년 (丁亥年), 즉 1467년 입동 (立冬)이 다가온 초겨울이었다. 북방에서 불어오는 삭풍이 도성 한양 (漢陽)을 에워싸고 있는 성곽을 거칠게 휩쓸고 있었으며,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양 남쪽으로 흐르는 한강 역시 얼어붙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경번갑 (鏡幡甲) 갑옷을 걸치고 두터운 가죽을 두른 젊고 키 큰 장수가 붉은빛이 감도는 흑마를 타고 한양 성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수려한데 젊어보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깊은 눈동자에는 우수가 감돌고 있었다. 비교적 호리호리했지만 단단하게 잡힌 근육 위로 그가 걸친 옷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색이었다. 흡사 북방에서 내려온 저승차사 (儲承差使)를 연상케 하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흠칫 물러설 것이다.
멀리서 기수 하나가 말을 몰아 달려오는 동안 그는 묵묵히 한양성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털북숭이 거한이 우렁차게 외쳤다.
“서문으르 뚫었슴메다. 안으르 들어갈 준비가 되었지비요.”
“그러한가.”
짧게 대답한 장수는 곧바로 말을 몰아 도열해 있는 자신들의 부하들 앞으로 달려갔다. 가죽옷을 걸치고 말을 탄 그들의 복색은 저 북변 (北邊) 야인족 (野人族)들의 그것을 따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깃발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는데, 붉은 천에 또렷하게 네 글자 글귀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제천행도 (濟天行道), 즉 ‘하늘을 대신해 법도를 행한다’ 라는 뜻이었다. 장수가 병사들의 앞에 서자, 앞장섰던 털북숭이 거인이 함길도 (咸吉道) 사투리를 섞어 가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고조 – 우리드르 임금 이홍위 (李弘暐) 님께서리 행차했습네! 거저 성 안에르 있는 무도한 역적넘의 간나새끼들과 간사한 간나드르 깡그리 없이 허구 의를 실현할 때가 왔음메! 알갓지비?”
병사들 사이에서 우렁찬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 말을 맺은 이시애 (李施愛)는 젊은 장수를 돌아보았다. 한때 이 나라의 정당한 국왕이자, 숙부에게 왕위를 찬탈당했던 이홍위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한 번의 싸움에 승부가 날 것이다! 천명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수천 명을 헤아림직한 야인족 기병들이 일제히 우렁찬 함성을 질렀다. 홍위는 도성을 돌아보며 나직히 읊조렸다.
“너 그리운 도시 한성아, 내가 다시 돌아왔도다!”
짧은 교전 끝에 야인족 기병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안으로 달려갔다. 공포에 질린 백성들의 비명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었으나, 장수들이 병사들 앞에서 말을 달리며 군기를 엄정히 다스렸다. 홍위가 심복 무장들 중 가장 앞장서서 외쳤다.
“광화문 (光化門)으로 돌격한다!”
한때 관리들이 정무를 보던 육조 (六曹) 거리는 개미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아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그것을 본 이시애가 혀를 찼다.
“아무리 민심으르 역적놈의 자석들에가서 멀어졌다고 하지마눈 다들 겁먹구 토셨다는 거이 마음에 차지 않습고 엥 – 우낍지비. 일국의 도성이라는 거이 이륵케 느슨하니 위태롭기 짝이 없슴메.”
홍위 옆에 있던 사십대의 남성이 웃었다. 그는 털가죽 옷을 둘렀을지언정 무장들 중에서 유일하게 갓 쓰고 도포를 입었기에 두드러져 보였다.
“원래가 그렇소. 늘 쓸 만한 충신은 적고, 권력을 탐하는 하찮은 무리들만이 도성에 들끓는 법이오. 이제 변란이 일어났으니 모두들 자신의 굴 속에 몸을 숨기고 일이 어찌 돌아가나 눈알만 굴리고 있을 뿐이지요.”
그 말에 이시애가 크게 웃었다. 갓 쓴 이가 말채찍을 들어 외쳤다.
“저기, 광화문입니다! 필경 숙위군 (宿衛軍) 병사들이 지키고 있을 것입니다.”
과연 광화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홍위는 그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안, 저 멀리 북악산 (北岳山)에 자신이 찾는 대상이 있으리라. 숨막히는 정적이 내리깔리는 가운데 기수 하나가 앞으로 달려나가 외쳤다.
“안에 들어 있는 자는 듣거라!”
“거기, 누구더냐!”
대답하는 목소리는 적지 않게 떨리었다. 그 말에 기수가 입을 꾹 다문 홍위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배에 힘을 주어 목청을 돋우었다.
“건주야인과 해서야인의 위대한 대족장이시며, 대명 건주위 도독동지, 북원의 공포, 조선의 적법한 군주이시니라. 어서 문을 열거라.”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억지로 용기를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르겠소이다!”
기수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다시 외쳤다.
“에라이- 이 못난 자식들 같으니! 국정을 농단한 무도한 대역죄인 도당을 없이 하고 적법한 자리를 되찾으러 오신 분이시니라. 어서 문을 열지 못할까?”
“우린 그가 누군지 모르겠다! 썩 물러가라!”
이제는 제법 용기를 되찾은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때, 홍위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부릅뜨더니 주위에서 말릴 틈도 없이 몸소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안에 있는 자들은 들어라!”
높고도 기품있는, 위엄찬 목소리였다.
“내가, 너희들 앞에 선 이 내가, 바로 태조대왕 (太祖大王) 전하의 고손이며, 태종대왕 (太宗大王) 전하의 증손이며, 세종대왕 (世宗大王) 전하의 손자이자, 문종대왕 (文宗大王) 전하의 아들이다.”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린 가운데 홍위의 목소리만이 쩌렁쩌렁 울렸다.
“너희들과 이 나라, 이 백성들의 적법한 군주이니라!”
한참 동안 대답이 없다가 문 안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리었다.
“소, 소인들은······.”
“내가, 너희들의 군왕이다.”
빛나는 광휘가 젊은 왕의 주위에 맴도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잠시 기다렸다. 얼마가 지났을까, 이내 삐이걱 하는 소리를 내면서 광화문 대문이 서서히 열리었다. 사시나무 떨 듯 하는 숙위군 군졸들을 무시한 채 홍위는 궁궐 안으로 들어섰다.
경복궁 (景福宮) 안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홍위는 자신의 심복 무장들이 이 혼란을 능숙하게 다스려나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흔들리지 않는 걸음걸이로 한때 자신의 것이자, 이제 되찾아야 할 궁궐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는 자신이 찾아가야 할 자가 어디 있는지 잘 알았다. 근정전 (勤政殿) 앞에서 그는 발을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리게.”
“괜찮으시겠습니까?”
갓 쓴 남자의 말에 홍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우리 가문의 일이자, 나와 내 숙부간에 풀어야만 할 일일세.”
“흉계가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걱정어린 목소리였지만 홍위는 가볍게 일축했다.
“걱정 말게! 이 몸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 어디 나의 힘만이었겠는가? 하늘의 뜻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어 있었을 걸세. 하늘이 나와 함께하노니, 그 어떤 흉계도 두려울 것이 무에가 있단 말인가!”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갓 쓴 이가 빙긋이 웃었다.
“안으로 드십시오.”
홍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전각 안으로 향해 들어갔다. 텅 빈 전각 안으로 붉은 석양빛이 드리워졌다. 홍위는 그 중심부를 가만히 응시했다. 팔도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지존의 자리, 그 옥좌 위에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왔느냐.”
“오랜만이오, 숙부.”
옥좌에 앉아 있던 수양 (首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늙고 병마에 시달리는 그였지만 여전히 무시무시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웬만한 드세고 굳센 사내라도 기가 눌릴 정도의 힘이 발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홍위 역시 이곳에 이르기까지 숱한 인고와 단련의 세월을 보내 온 남자였다.
그는 눈을 들어 어둠 속에 침잠해 있는 자신의 숙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실로 감개무량했다. 수 년 전부터 그들 사이에 얽히고 설켜 있던 운명의 장난을 이제 정리할 때가 된 것이다. 숙부를 노려보는 와중에도, 홍위의 머릿속 깊은 한 구석에서는 옛날 일들이 차근차근 떠올려지고 있었다.
- 작가의말
<Caution! >
본작에 묘사된 사건들, 인물들 그리고 조직들은 사실과 현저한 유사점이 다수 존재하지만 결국 사실에 기반하여 재창조한 가공의 것입니다. 어떤 실제 인물, 단체, 병기, 전투와의 완전한 유사성은 그것이 현존한 것(혹은 현존 인물)이든 망자이든 우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