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뜻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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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울적했다. 차라리 정신없이 쫓길 때면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조금 여유가 생기니 오히려 그 여유가 고통의 시간이었다. 고작 왜국의 도적에 이리 쫓기다니... 그때 율곡의 말을 들어 십만대군을 양성했으면... 왜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좀 더 달랬으면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때 내관 한 명이 선조의 심경을 알아채고 냉큼 한마디 했다.
“전하. 울적함을 달래는데는 여인만한 것이 없사옵니다.”
허허... 여인이라... 내 지금 이런 상황에 여인이라니...“
“미색이 아주 뛰어난 여인을 보았사옵니다.”
“험! 그래. 그렇게라도 달래는 것도 좋겠지.”
선조는 못 이기는 척 여인을 데려오도록 했다.
* * *
탐락방은 난리가 났다. 선조가 비선을 데려 오라하여서였다. 이제 비선이 승은을 입을 것이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의외로 김주평이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큰일일세. 승은? 승은 좋지. 허나 승은이라고 다 같은 승은인가? 지금 비선에게 내리는 승은은 나랏님이 그저 적적함 한 번 댈래고자 내리는 승은일세. 그 적적함 풀고 나면 버려질 게야. 물론 궁에 들어가 살겠지. 아! 지금은 궁이 없구먼. 어쨌든 궁에 들어가 봐야 그냥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거란 말일세. 평생 시집도 못 가고, 애도 못 낳고. 전하께서는 비선을 거들떠도 안 볼 것이며, 전하의 여인들이 갖은 패악질을 당하게야. 비선이 정말 불쌍하게 되었네.”
그럼 김주평의 말이 아니라도 배주길 아니 패주길은 절대 선조에게 비선을 내어 줄 생각이 없었다. 문제라면 왕이 부르는 것이니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인데...
“아니 있다!”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했다. 이에 패주길은 더 생각하고 말고 할 것 없이 곧바로 비선을 데리러온 사람들에 말했다.
“아니 아무리 전하시라도 이건 아니지요.”
“무엇이라? 뭐가 아니란 거냐?”
“어찌 남의 내자를 데려가려 하신단 말입니까?”“내, 내자?”
“예. 이미 성혼을 했고, 혼례를 치루기 전에 난리통을 만나 이리 된 것입니다.”
패주길의 말에 비선을 데리러 온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패주길의 말대로라면 지금 선조는 선왕들을 능력한 자를 잡아 온 사람의 아내를 끌고 가 욕정을 채우려 했다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 폭군으로 이름 높은 연산군도 안 했을 짓이...
‘아니지 하고도 남았지.’
결국 선조를 연산군과 동급으로 만드는 짓. 결국 그 자는 물러났다. 패주길은 겨우 한숨을 쉬었다. 이로서 비선은 시집도 가고 잘 살게 되리라... 라고 생각했는데...
* * *
“내가 왜...”
지금 패주길은 관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관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패주길 앞에는 여러 먹을 거리가 쌓은 상이 있었고 그 너머에 활옷을 입은 비선이 연지곤지를 직고 서 있었다. 그랬다. 패주길과 비선의 혼례가 진행되고 있었다.
“허허. 그런 일이... 내 나라와 왕실의 은인에게 죄를 범할 뻔 하지 않았는가? 허허.. 아! 그렇구나. 패주길 그 자가 혼례를 채 치루지 못 하였다고 하였겠다? 그럼 과인이 직접 혼례를 치루게 해야지.”
이런 상황이 있던 것이었다.
‘하여튼 간에... 그 양반 아니 그 왕놈. 도움이 안 되네.’
입 밖으로 내면 당장 목 잘려 죽을 소리를 속으로 해대는 패주길이었다.
“허허. 배사장 아니 패사장 얼굴 굳은 것 좀 보게.”
“그러게나 말입니다. 장가들면 싱글벙글 좋아야 하는 것 아님니까요?”
“허허.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은근히 긴장이 되. 거 뭐냐. 패사장 잘 하는 말로 스트레스? 그거 쌓인다니까.”
“그렇구만요. 그나저나 헤헤 비선 예쁜 것 좀 보소.”
“허허! 말 함부로 하지 말게. 이제 비선이는 자네와 같은 끕. 끕... 끕 맞지? 패사장 쓰는 말이. 아무튼 그 끕이 달라. 패사장은 나랏님께 반첩을 받은 양반이고 비선도 당연히 양반이 된 게지. 거기에 패사장이 비선이 말 오죽 잘 듣나? 우족하면 비선이를 탐락방 숨은 실세라고 하겠냔 말일세. 부부가 아닐 때도 그랬는데 베갯머리 송사가 가능한 부부일 때는 오죽하겠나? 이젠 비선이 실세일세.”
“헤에... 탐락방은 비선실세인겁니까요?”
“그렇다 말다. 흠흠. 그나저나 쯧쯧 그래도 패사장 얼굴 좀 피지...”
의외로 시끌벅적한 혼례식이었다.
* * *
“이제 오라버니랑 저랑 정말 부부네요.”
술상을 앞에 두고 비선이 말했다.
“하아... 그러네...”
패주길이 보기에도 비선이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아주 예뻤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데려다 놔도 미모로 얼짱은 충분히 하고, 걸그룹 센터도 우습게 거머쥘 것이었다. 다만...
‘애고... 쟤를 언제 키워서...’
비선은 동안이었다. 나이도래에 비해 작고 어려 보였다. 반면 패주길의 취향은 쯕빵 글래머 성숙한 외모의 여자였다. 취향과는 완전 반대인 여자와 혼인 한 것이니...
‘비선이랑 자면 범죄 저지르는 기분일 텐데... 흠. 일단은 그냥 재우자. 그런데 그럴려면...’
일단 술부터 먹이자고 생각하는 패주길이었다. 어린애에게 술을 먹인 다는 것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자신도 술 마신 나이는 뭐...
“그런데 오라버니와 전 인연인가 봐요.”
“뭐가?”
막 술주전자에 손을 가져가던 패주길이 대충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잃어버린 옥패를 오라버니가 가지고 있잖아요.”
“어... 그랬지.”
“혹여 오라버니가 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이 아닐까요?”
“선물이라...”
생각해보니... 어르신이 준 옥패였다.
‘설마... 어르신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을 알고...’
그렇다면 선물이 맞다.
“허허! 저 놈 보게! 저런 놈은 주리를 틀고 곤장을 쳐야 해!”
교도소에서는 뉴스와 종교방송만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 어린 여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크게 노해 소리치던 어르신의 모습...
‘아무래도 선물은 아닌 걸로...’
만약 어르신이 눈앞에 있다면 자신을 죽였을지도... 라는 생각이 들자 절로 몸이 떨리는 패주길이었다.
“오라버니?”
비선이 패주길을 불렀다.
“아니 죽이지는... 아, 아냐. 흠흠. 응?”
그러고 보니... 비선이 어르신의 딸이라면 어르신의 이름을 알지 않겠는가? 교도소에서 쓰던 이름은 가짜 이름이었고...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비선에게 어르신의 본명을 물어보지 않았다. 스스로의 무심함을 탓하며 비선에게 물었다.
“비선아. 그러고 보니 어르신. 아! 장인어른. 장인어른의 함자가 어찌 되시냐?”
그러자 비선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 오라버니가 어찌 우리 아버님 함자를 알고 계세요?”
“응? 무슨 소리야? 나 몰라서 물었잖아.”
“아뇨. 방금 말씀 하셨잖아요.”
“내가?”
“예. 제 아버님 함자는 어씨 성에 류자 신자 라고 해요. 방금 오라버니도...”
“어씨 성에... 류... 신... 비선이 너 어씨였니?”
“몰랐어요?”
“응.”
역시나 무심함으로만 치면 조선에서 갑 중 갑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어씨 성에 류자 신자라면 음... 어류신... 어류신... 으르신... 풉!”
순간 패주길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르신은 그냥 별명이 아니라 본명이었던 것이었다. 그저 사람들이 어류신을 어르신으로 잘 못 알아들었을 뿐...
“푸하하하하!”
패주길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 패주길은 비선은 눈만 껌뻑거리며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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