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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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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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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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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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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바다-윤정과 정인, '따귀'의 계약

DUMMY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주름을 펴지 않았다.


그러니 정인으로서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인> ‘앞으로 일하기 뻣뻣하겠는걸.’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신 뒤 윤정은 정인을 방으로 불렀다.



<윤정> “정인 씨, 결혼했어요?”


<정인> “그건 이미 아시듯이······.”



정인은 머뭇거렸다. 오기 전부터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아는 줄로 생각했다.



<윤정> “안 했어요?”


<정인> “네. 아직 안 했습니다.”


<윤정> “그럼 내가 정인 씨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내내 ‘정인 씨’라고 이름을 부르기는 너무 거추장스럽잖아요?


그렇다고 ‘정인아’ 하기는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정인>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전 뭐든 괜찮습니다.”


<윤정> “결혼 안 하신 정인 씨한텐 미안하지만 ‘아줌마’로 부를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줌마’ 만한 호칭이 없어요.”



<정인> “그렇게 하세요. 전 상관없습니다.”



정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말은 상관없다고 했어도 결국 그녀가 ‘아줌마’ 호칭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지금 윤정의 앞에 불려온 까닭이


조금 전 점심상에서 찌푸린 그녀의 얼굴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잡은 일자리를 ‘아줌마’ 때문에 버릴 수는 없었다.



<윤정> “그리고······. 나이는 내가 두 살이 많죠? 말도 편하게 할게요. 괜찮죠?”


<정인> “그럼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저도 그게 좋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두 살 나이 많은 주인’의 갑질이 쉽사리 납득되는 것은 아니었다.



<윤정> “아줌마, 이미 들어서 알고는 있겠지만,


내가 아줌마를 들인 이유는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야.


근데 밥이야 밥솥이 해주고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는데


굳이 비싼 돈 주고 아줌마를 들인 이유가 뭘까?


그게 뭐든 뭔가 이유는 있겠지.”



정인은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얼굴이 굳었다.



<정인> “그게······ 뭡니까?”


<윤정> “아줌마는 아직 경험이 없어 모르겠지만, 난 임신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


우울증도 좀 있는 것 같고.”



<정인>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윤정> “내 스트레스만 풀어주면 돼.”


<정인>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그걸······.”


<윤정> “내가 원할 때 아줌마 따귀를 좀 치고 싶은데. 어때? 괜찮겠지?”


<정인>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윤정> “말 그대로. 아줌마의 뺨을 후려치겠다는 거야.


그렇다고 무기를 쓰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정인> “그게, ······ 절 뽑으신 이윱니까?”


<윤정> “맞아.”



윤정은 살짝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윤정>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


한 대에 5만 원씩 쳐 줄 테니까.


그러니까 열 대를 맞으면 50만 원을 벌어가는 거고 백 대를 맞으면 500만 원을 벌어가는 거야.”



<정인> “저더러 매품을 팔라는(註1) 말씀이십니까?”


<윤정> “어때. 요즘은 일부러도 맞아서 돈 버는데.”



윤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는 정인이 매를 맞으면서도 여전히 도도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정인> “아뇨, 그렇게는 못 합니다.


아무리 매 맞는 아르바이트가 많고 제가 사모님 돈을 바라고 들어왔다고 해도


저는 ‘집’의 일을 하러 왔지 ‘우리’(돼지우리)의 일을 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흉흉하더라도 그렇게 망가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정인은 자신이 돼지가 아니며, 윤정 또한 돼지가 되려 하지 말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이것은 매 맞고 살아남을 수 있느냐 이전의 문제였다.


하지만 5만 원이란 제법 큰 돈이어서 한 대 맞고 5만 원을 벌어갈 수 있다는 유혹은


사흘 끊은 담배의 ‘속삭임’처럼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윤정> “그래? 하지만 이를 어쩌지?


‘따귀’는 내가 아줌마를 들인 가장 큰 이유인데.


그게 성사되지 않는다면 나 역시 아줌마에게 밥솥의 일, 청소기의 일, 세탁기의 일을 맡길 이유는 없어.


아, 이젠 ‘아줌마’가 아니라 ‘정인 씨’라고 불러야 할까요?”



정인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꺼낸 말은,



<정인> “절 계속 ‘아줌마’로 불러 주세요.”



였다. 뭉개진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그녀는 한 대에 5만 원을 생각하며 계속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 9 -




이튿날 아침, 윤정은 태휘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응시했다.


비록 아닐 수도 있다고는 하나 태휘 앞에서 임신한 척을 했더니 괜히 기쁘고 설레기도 했었다.


아기를 안는 상상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정인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척을 하려니


그녀는 평소 같지 않게 우울해지고 예민해지고 있었다.



<윤정> ‘예민해야지. 실수하면 안 되니까.


나도 멀쩡한 사람 볼따구니 치는 게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아.’



그녀는 괜히 헛구역질을 하는 연습도 해 보았다.


음식 잘못 먹었을 때의 구토와는 다를 테지만,


지금껏 입덧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까지 ‘더부룩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모습이야 보는 이들에게


여자가 임신 중이고 지금 입덧을 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과장한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윤정> ‘이러다가 진짜 속 뒤집어지겠네!’



그러다 그녀는 정인 역시 임신경험이 없을 줄을 깨닫고는 ‘입덧으로 인한 고민’을 내려놓았다.


다만 계속 우울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려 애썼다.



이윽고 시곗바늘이 오전 10시를 가리킬 즈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윤정은 정인임을 직감하고 배를 움켜쥐며 인터폰 쪽으로 나갔다.



<윤정> ‘너무 민감했나?’



그녀는 아직 정인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므로 보는 사람이 없는 줄을 깨닫고는 핏, 웃고 말았다.


그리고 정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정인> “안녕하세요, 사모님.”



정인은 앞에 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대뜸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윤정> “어서 와, 아줌마.”



윤정은 괜히 인상을 쓰며 언짢은 투로 ‘인사’를 했다.


굳이 붙이지 않아도 좋으련만 또 굳이 ‘아줌마’라는 호칭을 붙여


정인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



<정인> “어디, 편찮은 데라도 있으세요? 몸이 안 좋아 보여요.”



윤정의 모습을 보고 정인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윤정> “신경 쓸 것 없어. 괜히 우울하고 짜증이 나서 그런 것 뿐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듣는 사람은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


‘스트레스의 계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정인은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윤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일단은 그녀의 방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뒤, 이 방 저 방 돌아보았다.



명분이야 ‘가사도우미’로 채용된 것이니 집이 지저분하고 더러우면 청소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방에 내팽개쳐진 듯한 옷가지 하며 괜히 쏟아놓은 듯한 물 등 일부러 일을 얹어 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이는 통에,


괜히 서러움에 북받쳐서 저도 모르게 양 볼을 감싸 쥐기까지 했다.



<정인> ‘60평이라더니 방도 어지간히 많네. 나, ······ L 식품 사장님 딸인데.’



전날 왔을 땐 거실이 좀 넓은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방, 저 방은 물론 두 개나 되는 화장실 문을 열어 보면서


마치 ‘청소’라는 이름의 미로 한복판에 선 듯한 착각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그녀는 청소를 마치고 잠시 허리를 폈다.



<정인> ‘북한에서는 천삽 뜨기 운동(註2)을 한다더니, 에구 허리야.’



L 식품이 쓰러지기 전에는 그녀 역시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나름 호의호식하며 살았었다.


그러니 갑작스레 ‘일’을 해서 허리가 아팠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을 해서 받는 돈보다 따귀 한 대 맞아서 버는 돈이 더 많다니(註3)


그게 더 요절복통(腰折腹痛; 허리요, 꺾을절, 배복, 아플통)인 것이었다.


그보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 노력했던 모습에 비해,


이젠 차라리 ‘무한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라서 좋아하는 자신이 싫었고,


한 대 맞아서 ‘일당’ 채우고 싶어하는 그녀 자신이 비참했다.



아픈 허리를 웬만큼 추스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정인은 주방으로 나와 작은 주전자에 물을 넣고 끓였다.


윤정에게 차를 내갈 참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오늘 기분이 어떤지도 살펴보고,


무엇보다 처음 일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고 싶었다.






찬장에는 커피와 녹차, 홍차 말고도 여러 꽃차들이 많이 있었다.


처음엔 무난하게 커피를 내갈 생각이었지만, 꽃차를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는 구절초차를 선택했다.



찻잔에 찻숟가락으로 구절초차를 조금 떠냈다.


그러고는 그녀 몫의 찻잔에는 목련차를 떠냈다.



<정인> ‘좋아하니까 두고 마시는 거겠지. 안 좋아한대도 어쩔 수 없어.


근데 이 구절초차는 빨간 구절초 꽃잎으로 만들었나, 색깔이 아주 빨갛네. 에잇, 알 게 뭐야.’



처음엔 뜻밖에 꽃차가 많아 다소 당황하기는 했어도, 독특한 취향이려니 하고 넘겼다.



그리고 국화꽃 비슷한 꽃이 그려진 앤틱 사각 쟁반에 차를 담아


윤정이 쉬는 방 문 앞에서 노크를 했다.



<정인> “사모님, 차 좀 내왔습니다.”


<윤정> “으, 응. 들어와.”





=== 주석


註1. 매품팔이는 조선 후기에 성행한, 매를 대신 맞아 주는 이른바 매 맞는 대타이다. 죄지은 양반들이 곤장을 맞기는 싫어서 대신 매 맞을 사람을 구해 곤장을 맞고 오도록 하였다. 곤장은 20대만 맞아도 엉덩이에 피가 흥건히 고일 정도의 가혹한 형벌이었다. 매품팔이의 대가로 곤장 100대에 7냥 정도를 받았는데, 이는 날품팔이가 받는 일당의 35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註2. 이른바 ‘천리마 운동’을 가리킨다. 70, 80년대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은 천삽을 뜨고 허리 한번 펴는 중노동에 시달린다고 배웠다. 정인은 소설 속 시간인 1999년 현재 만 29세이다.


註3. 서기 2000년 공무원 9급 1호봉은 380,200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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