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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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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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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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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태휘의 사망

DUMMY

그리고 잠시 뒤 이달 29일 일요일 5시 시내 모처에서 만나자고 문자가 왔다.



태휘는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모든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슬그머니 다시 X 매트 경영일선에 복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는 이에 대한 확답을 받을, 필요하다면 협상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러니 일단 만나야 했다.



<태휘> “네놈 명줄도 그때까지다.”



하지만 신문을 가진 자를 당해낼 재간이 여간해서는 없는 줄을,


굳이 이번 사태를 통하지 않더라도 그는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함부로 펜대 놀리지 못하게끔 달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펜을 무디게 하려면 그 끝에 사과 상자 안에 든 것보다 달콤한 돈뭉치를 꽂아둬야 하리라는 것 정도가 그가 아는 것이었다.






한편 그로부터 3주가 지나고 29일이 되었다.


이날 태휘는 정한 시각이 되어 지후와 만나기 위해 옷을 갖춰 입고 필요할지도 모를 서류를 갖추는 등 여러 준비를 했다.



하루하루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람에게 무슨 이유로 3주나 지난 뒤에야 약속을 잡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이 주주나 채권자는 물론 시장바닥의 일반인들까지 화가 상당히 진정돼 있었다.


그러니 그 역시도 ‘딴생각’을 품어볼 법도 하겠지마는,


그는 그런 마음이 고개를 들 때면 일부러라도 펜 끝으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욕망’을 억누르곤 했다.


한번 펜대의 힘을 맛본 이상, 살기 위해서는 ‘허벅지’를 내어줄밖에 도리가 없다고 여기는 편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그는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차를 몰고 갔겠지만, 그는 호흡 하나하나, 심장박동 하나하나 진정하기가 힘들어서 지하철을 탔고,


지금은 신대방역에서 내려 길을 걷고 있었다.



일요일 치고 거리는 한산했다.


간혹 보이는 가판대에는 신문이 없었다.


일요일이니 당연하다 생각은 하면서도, 무가지(註1)(無價紙)도 이런 ‘패악질’을 하지 않는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바로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도 허벅지를 찌르던 생각은 잊어버리고 Q 신문의 주 6일 ‘500원짜리’ 패악질에 대고 끝 모를 욕설을 내뱉고야 마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짓으로 지후가 돈을 벌어간다 생각을 하면,


또 결국은 그 짓 잘 하라고 Q 신문에 여태 돈을 대 주었다 생각하고 나면,


속에 마른 참나무 장작불이 10개는 들어가 타는 것 같이 매캐하고 쓰라렸다.



<태휘> ‘그런 플래카드를 걸지도 않았지만, 설령 그런 걸 찍었다고 해도 3년이나 지난 마당에 말이야!’



그러니 장작은 지후가 팼어도, 안타깝게도 참나무 밑동은 그가 자른 셈이 되는 것이었다.



길을 걷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OO 산부인과라고 적힌 병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7일 전 정인과의 통화가 마음에 걸렸다.






<정인> “오빠, 아기는 잘 크고 있어?”


<태휘> “아기······라니? 누굴 말하는 거야?”



당연히 ‘아기’는 윤정의 아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인이 윤정의 밑에서 일을 했던 당시,


윤정의 뱃속에 아기가 실제 있었고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전년도(1999년) 10월이면 태어났겠지만,


그 아기는 일단 ‘유산’되었다.


물론 그것이 쇼임을 그는 알고 있었지만,


이 일(쇼라는 것)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어서 그의 부모는 물론 정인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비록 정인에게 그 아기가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고 말을 해 두었더라도.



지금 윤정의 뱃속에는 그의 아기가 있었다.


임신 중인 것이었다.


그러니 “아기가 잘 크고 있느냐”는 정인의 물음은 대답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질문이었다.


정인이 ‘유산된 아기’에 대해 알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평범한 질문에 대답하는 모양새가 저리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



<정인> “아기 말이야 아기. 윤정씨 아기.”


<태휘> “내가 말을 안 했나? 아기는 유산됐어. 작년 7월에.”



그는 정인이 ‘유산’을 모른다는 데 베팅을 했다.



<태휘> “그 일로 윤정이도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지.


그 얘긴 안 했으면 좋겠다. 그 모습 지켜보는 나도 괴로웠거든.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정인> “그 뒤로 윤정씨는 아기 가지려는 노력은 안 했어?”


<태휘> “정인아, 그건 나도 몰라. 그리고 윤정이 일인데 너도 관심 둘 일은 아닌 것 같다. 더는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인> “그래. 그렇구나.”






뜬금없이 전화해서 아기에 대해 묻고 끝낸 그 대화가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걸렸다.


말만 놓고 보면 별것도 아닌 대화였지만,


1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들의 맥락을 놓고 보면 꽤 께름칙한 대화인 셈이었다.



그는 체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머리만 아파올 뿐이었다.



<태휘> ‘이러면 어쩔 거고 저러면 어쩔 거야. 가던 길 가자.’



이윽고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수학 입시학원 간판을 단 평범한 장소였다.



<태휘>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 했지?’



그는 의아함을 뒤로 한 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내부는 보무도 당당히 ‘학원’이라고 써 붙인 외부와는 달리 학원의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 비밀스럽고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곳에는 만나기로 한 지후는 물론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아직 오지 않았나 생각하며 여기저기 돌아보았다.


빈 공간이라 그런지 발걸음 소리의 울림이 자못 컸다.



그때 한쪽 문이 ‘끼익’ 하고 열리더니 그 문으로 웬 여자가 하나 나왔다.



<태휘> “정인아!”



정인이 있을 곳이 아닌데 왜 그녀가 그곳에서 나오는지 태휘는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게다가 그와 지후의 약속장소에 나타난 그녀가 지후와는 또 무슨 관계인지도 알 길이 없어 머리가 적잖이 복잡해졌다.


혹시 정인이 지후의 배후인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녀가 지후의 ‘대리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생각일 뿐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X 매트의 부도나 X 매트에 대한 그의 경영권 상실 등을 연결고리로 하는 매듭은 없었다.



기껏 둘 사이의 인연이라봐야 대학 선후배 사이라는 것 뿐이었다.


하나 걸리는 게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인연으로 그가 도움을 받았으면 받았지,


지금 지후에게 당하는 것처럼 낭패를 당하는 일은 없었다.



<정인> “오빠.”


<태휘> “네가 여길 어떻게?”


<정인> “기자회견은 잘 봤어.”


<태휘> “그럼, 허지후의 일은 네가 꾸민 거니?”



태휘는 에누리 없이 훅 치고 들어갔다.


그만큼 그의 심경이 여유 없이 다급하고 날카롭다는 뜻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선 그녀가 허지후와 일을 도모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에, 그의 이 짧은 순간의 예상대로 일이 진행된 것이라면


그녀에 대한 극강의 배신감을 억누르기는 물론, 그간의 정을 생각한 넉넉한 마음마저


다만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었다.


이런 마당에 이러쿵저러쿵 정인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정인> “그런 말이 있어. 사람이 그 어떤 타이틀도 없이 순수한 인간이 됐을 때 그는 아무런 권리도 누릴 수 없다.”


<태휘> “무슨 말이야?”


<정인> “오빠.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몰라.”


<태휘> “뭐?”


<정인> “오빠가 X 매트 사장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고 순수한 인간이 되기를. 그래서 나와 동등해지기를.”


<태휘> “······.”


<정인> “나와 같아지면 오빠랑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태휘> “그저께까지만 해도 너랑······.”


<정인> “아니, 그동안 기다렸다니까.”


<태휘> “이러지 마, 정인아.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까 허지후랑 한통속인 모양인데, 허지후 어딨어? 응? 허지후 어딨냐구!”


<정인> “소리 지르지 마. 화내지도 말고. 화내면 내가 무서워서 말을 못 하잖아.”


<태휘> “그래, 미안하다. 이렇게 되어 정말 착잡하지만


이것이 네가 바란 것이라면, 난 이제 너와 완전히 동등한 사람이 됐으니까, 네 바람대로,


이제 내 바람, 허지후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않을래?”



<정인> “그럼 이제 우리 완전히 동등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야?”


<태휘> “그럼.”



정인은 태휘의 눈을 보며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태휘> ‘귀찮아 죽겠네. 이 와중에 키스가 다 뭐야.’



태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입술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예의 달콤함 따위는 없었다.


정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았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태휘> - 억.



그의 눈에는 문에서 걸어 나오는 지후가 있었다.


지후는 입으로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태휘는 순간 옅은 아몬드 냄새를 맡았는데,


설마 지후가 씹고 있는 것이 아몬드이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그는 호흡이 가빠진 동시에 숨쉬기가 상당히 곤란해졌다.


그리고 동공은 산대(註2)(散大)됐고 점막은 선명해졌다.



그와 동시에 태휘는 그 자세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정인의 손에는 주사기가 들려 있었고, 맹독을 주사한 듯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다.


전형적인 청산염 중독의 증세였다.





=== 주석


註1. 2002년 5월 31일, 무료신문(무가지) ‘메트로’가 창간되어 성공을 거두고 이후로 무료신문 창간 붐이 일었다. 소설에서는 2000년 7월에도 무료신문이 존재했던 것으로 설정하였다.


註2. ‘산대’(散大)란 죽을 때가 임박하여 눈동자가 열리는 것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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