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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47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6.0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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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정인의 나신 사진을 찍던 날 있었던 일

DUMMY

쓰린 가슴이 진정될 즈음 그녀는 간신히 말했다.



<태휘> “그래, 정인아. 미안하다.”


<정인> “오빠. 오빠는 내가 결혼하자 하면 어떡할 거야?”



이 말을 하고 정인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태휘의 ‘허’를 찌르기 위한 질문이니 괜찮다며 애써 합리화를 했다.



<태휘> “뭐?”



과연 태휘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인> “오빠, 나랑 결혼해 줘.”


<태휘> “너한테 곧 프로포즈하겠다는 남자가 있다며. 그 사람은 어떡하구?”


<정인> “그런 사람 없어. 그냥 오빠 마음 떠보기 위해 만들어 낸 사람일 뿐이야.”


<태휘> “그래. 결혼하자.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좀 시간을 두고 회사가 살아나면, 그때 하자.”



태휘는 방금 전 구속되기 싫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에 비해


진짜 속마음은 따로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처음부터 이러려고 했다는 것처럼.



반면에 정인은 이 말을 듣고 또 혼란스러워졌다.


혼자 살고 싶다거나 결혼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줄로 생각한 데 반해


전혀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정인> “우리 둘이 같이 살리면 안 될까? 모든 걸 갖춰놓고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태휘> “지금도 같이 살리고 있는데 뭘.


그저 예식을 갖추자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렸다가 여유가 생기면 하자는 거야.”



정인은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었다.



무엇을 묻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대신 반드시 그녀와 결혼을 하겠다는 확답을 두 번 세 번 받아 두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태휘와 헤어진 뒤 정인은 아빠가 입원해 계신 병원으로 갔다.


간병은 병원에서 해주고 있어서 부담은 덜했지만,


병원의 보살핌보다 딸의 보살핌을 더 원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인> “아빠.”


<동섭> “그래, 태휘는 뭐라든?”



병원에서 나갈 때 정인은 태휘와 저녁 식사를 한다고 말해 뒀었다.



<정인> “뭐라기는. 그냥 저녁만 먹고 온 거야.”


<동섭> “알면서 딴소리만 할래? 결혼 얘기 없었느냔 말이야.


전에도 말했지만, 아빠는 너 결혼할 때까지만 그리고 그때까지는 꼭 살고 싶어.”



<정인> “그런 소리 왜 자꾸 하는 거야. 결혼은 10년 뒤에 해주겠대. 그러니까 10년 더 살아.”


<동섭> “정말 그렇게 말했어?”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섭> “그 자식, 결혼할 마음이 없는 거 아냐?


나이가 다 찬 사람을 어떻게 10년을 기다리래?


그것도 여자한테?(註1) 아니지? 바른대로 말해 봐.


아빠 놀라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면 충분히 놀라 줄 테니까.”



<정인> “아빠 말대로 지금은 결혼 생각이 없나 봐. 회사 일 때문이라는데, 난 모르겠어.”


<동섭> “지금이 봄인데, 봄도 한창인데 전기장판 만들어 파는 놈이 뭐가 그리 바쁜 게 있다고?


게다가 장인 될 사람이 한번 보자는데 얼굴 한번 들이민 적이 없잖아.


내 직접 만나봐야겠다.


내일 퇴근하면 병원으로 오라고 해라.”



<정인> “아빠, 그러지 마. 그 사람 바빠. 정말 바빠서 그래.”


<동섭> “넌 자존심도 없냐?


인생에 결혼보다 급하고 중한 일이 또 있어?


그런데 계속 딴 일로 바쁘다고 하면, 그걸 그냥 넘겨? 안 되겠다.


그놈이 정 바쁘다면, 내가 가 봐야겠다.”



<정인> “아빠, 제발 그러지 마. 결혼은 나한테도 중요해.


근데 그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나도 자존심 있고······.”



<동섭> “거짓말이란 말은 안 했는데?


그놈이 너랑 결혼 못 하겠다고 했구나. 그런 거냐?”



정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꾸무럭거리기만 했다.



<정인> “미안해 아빠.”


<동섭> “괜찮다. 네가 미안할 게 뭐냐. 다 아빠가 못난 탓이지.”



정인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더는 낙담한 아빠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어 봐야 그녀 자신이나 아빠나 돌아오는 것은 실망밖에 없을 것 같았다.


창가에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정인> “귀걸이 받았을 때 괜한 소리를 했나 봐.”



그녀는 자책을 했다.


그래도 답답한 속은 시원해질 줄 몰랐다.


별빛 한 줄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14 -




- 1999년 5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도림의 집에 ‘출근한’ 정인은 낯빛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두웠다.


지난 윤정의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물론 그땐 물어봐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부친의 증세가 위중해진 탓임을 도림은,


아니 윤정은 추궁하다시피 물은 끝에 알아냈었다.


도림은 이번에도 그때와 같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짐작이 맞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물었다.



<도림> “정인 씨, 왜 그리 얼굴이 어두워? 오늘따라 더하네?”


<정인> “집안일이에요. 심려를 끼쳐 드렸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정인의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도림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도림> “혹시 가족 중에 무슨 일이 있어?”



도림은 방심하고 있을 정인을 훅 찌르고 들어갔다.


역시나 정인은 깜짝 놀라면서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도림을 응시했다.


그 낯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그때 그 흙빛이었다.



<정인> “아뇨, 아무 일 없어요. 보세요. 아무 일 없지요?”



정인은 그때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미 그 사정을 도림이 알고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면의 수심까지 웃음으로 감출 수는 없었다.


역시나, 그녀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림> “말하기 정말 싫은가 보네. 그래도 내 눈엔 다 보이는 것 같은데······.”


<정인> “실은, ······ 아빠가 많이 편찮으세요. 그래서 얼굴에 걱정이 좀 묻어났나 보네요.”


<도림> “아니, 왜? 얼마나? 어떻게?”



도림은 몹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정인> “아빠는 제가 여기 오기 전부터 병원에 계셨는데, 요즘 병세가 더 악화된 것 같아서······.”


<도림> “이를 어쩌지? 아버님 일로 정인 씨 심려가 크겠다.


아유, 내 정신 좀 봐.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네.


몰랐으면 모르겠지만 이제 정인 씨도 우리 식구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안 이상 가만 있을 수는 없지.


내가 뭘 좀 도와줄 게 없을까?”



<정인> “말씀만으로도 고맙네요. 하지만 이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도림> “이럴 게 아니지. 그러면 조금이라도 아버님 곁에 있어야, 아니 있고 싶을 것 같은데.”


<정인> “그래도, ······ 어떻게, ······.”


<도림> “아냐, 아버님한테 가 봐.


이런 말, 정인 씨 더 힘들게 할 줄은 아는데, 달리 할 말이 없네.


아버님께서 조금이라도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다는 말밖에······.


당분간 아버님 곁에 있어.


필요할 때 전화나 해주고.”



도림은 그때처럼 옷장 깊은 곳에서 100만 원을 꺼내 정인에게 건네주었다.



<정인>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정인이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보며 도림은 흐뭇해했다.



윤정의 때와 달리 따귀를 치지도 않았고 나신의 몸을 만들지도 않았고 그 모습을 찍지도 않았다.


하여 그녀는, 운명은 정인의 부친을 곧 데리고 가겠지만


정인은 여전히 그녀의 옆에 남으리라 생각했다.



장차 장례도 같이 치러주고 부친상에 대해 위로도 해 주고


앞으로 가족처럼 잘 대해 주고 싶었다.


물론 사람의 생사는 바꿀 수 없다 했으니 태휘는 반드시 사망하고 말겠지만,


이럴 경우에 그는 적어도 정인의 손에는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게 있었다.



<도림> ‘쳇, 별게 다 희망이네.’



그래도 도림은 이번만큼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만 궁금한 것은 태휘의 죽음이 어떻게 풀려갈 것인가였다.






- 1999년 5월(김윤정의 생)




윤정이 정인의 나신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그 날, 그녀는 그 필름을 태홍에게 건넸다.


그리고 태홍은 그 필름에서 나신으로 따귀를 맞는 장면,


쓰러지는 장면, 눈물을 흘리는 장면 등 중요한 장면 몇몇을 골라 사진으로 뽑아


서류봉투에 넣어 동섭이 치료받던 병원으로 갔다.



그는 복도에서 서성이며 병실에서 정인이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기왕 기다린 김에 식사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두 사람이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지나가는 길에 마주쳐 힐끔 쳐다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정인에게서 얼굴을 가릴 필요까지는 없었다.



<태홍> ‘시간은 넉넉히 확보할 수 있겠지.’



그가 시계를 보려던 그때, 마침 정인이 병실을 나섰다.


그러자 태홍도 병실 문을 빠끔 열고 들어가 ‘그의 일’을 시작했다.



<태홍> “채동섭씨?”


<동섭> “누구요?”



동섭이 태홍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 들어간 말투였다.



<태홍> “따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동섭> “내 딸을 잘 안다구? 지금 정인이는 점심 먹으러 갔어요.”


<태홍> “오늘은 정인이가 아니라 아버님께 긴히 드릴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동섭> “나한테? 나한테 뭘 준다는 게요?”


<태홍> “그 전에, 아버님께서 이 병원에 머무신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동섭> “그런 건 왜 묻는 거요? 꽤 됐소만.”


<태홍> “따님께서 지금 어떤 처지에 계신지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태홍은 준비해간 사진을 동섭에게 건넸다.


동섭은 봉투 안에서 사진을 꺼내더니, 보고는 이내 집어넣어 버렸다.





=== 주석


註1. 1999년에는 지금(2022년)처럼 만혼이 성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 29세, 한국 나이 30세의 여자는 이른바 ‘노처녀’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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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1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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