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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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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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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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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동섭의 죽음, 그리고 사파이어 반지

DUMMY

태홍은 준비해간 사진을 동섭에게 건넸다.


동섭은 봉투 안에서 사진을 꺼내더니, 보고는 이내 집어넣어 버렸다.



<동섭> “조금 전까지 정인이는 내 옆에 있었는데, 그간 어디 괴한들에게 납치라도 당했었다는 게요?”


<태홍> “그게 아닙니다. 따님께서 일하시면서 받으시는 처우가 그렇다는 겁니다.”


<동섭> “정인이가? 아니 왜?”


<태홍> “얼마 전 따님께서 집을 팔고 옥탑방으로 이사 간 것은 아실 테구요.”


<동섭> “그 일로 내, 정인이를 나무라긴 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헌데 그거와 이 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태홍> “따님께서 왜 집을 파셨겠습니까? 옥탑방이 좋아서? 옥탑에서 살고 싶어서?”


<동섭> “그럼······?”



물론 동섭이 그 이유를 몰라서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 일(옥탑으로 간 이유로 짐작한 일)로 인하여 딸이 받는 처우가 너무나 기가 막혔기 때문에,


부디 그게 아니라는(그의 짐작이 틀렸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 심정도 몰라주고 태홍은 야속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섭> “궁금한 게 있어요. 정인이는 어차피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테니. 그 녀석,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게요?”


<태홍> “전 거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동섭> “정인아······.”



동섭은 정인이 취직을 해서 일을 한다고 했으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차마 그런(사진에서 본 바와 같은) 대접을 받으며 일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일을 시키면서 어느 고용주가 그런 처우를 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 역시 L 식품을 경영하면서 직원들에게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을 보니 그 생각이 너무나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마치 자신이 정인에게 몹쓸 짓을 하기라도 한 것 같아 딸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사달이 L 식품이 부도가 남으로써 빚어진 사태라고 자책하기에 이르렀다.



<동섭> ‘정인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보다, 눈치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니 태휘가 L 식품 부도 전과 후에 태도가 왜 바뀌었는지도 너끈히 짐작할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그가 태휘였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랬을 거라고,


태휘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넉넉한’ 마음이 되었다.



<동섭> “그나저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 사진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동섭의 말투는 처음 경계하던 때에 비하면 상당히 누그러졌다.



<태홍> “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따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진은 저도 어렵게 구했습니다.


경로는 알려 드릴 수가 없구요.”



<동섭>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내 정인이한테 한번 물어보고 고마움의 표시라도 하고 싶은데······.”



물론 말은 이렇게 했어도 고마움의 표시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딸에게 평생에 수치가 될 일을 세상 밖으로 꺼낸 사람을 딸이 어떻게 느낄지


그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지금은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일이 해결된 뒤에는 앞에 선 이가 엄청난 골칫덩이로 남으리라는 것,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은 앞에 선 이의 신원을 알아내어 일의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리 말하는 것일 뿐이었다.



<태홍> “그러실 것 없습니다.


단, 따님께서 왜 그런 대접을 받고도 그 일을 하셨는지,


할 수밖에 없었는지만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태홍은 병실을 빠져나갔다.


태홍의 마지막 말은 참으로 고약했다.


누구의 탓인지 알아달라,


그 말은 정인이 그런 모욕 속에서도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아버지인 당신 때문이니


빨리 결단을 내리라는 말과도 같았다.



하지만 건강은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져서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줄을 동섭은 잘 알고 있었다.


분명한 건 내리막길에 들어선 썰매의 질주는 ‘결단’이 필요치 않다는 것 뿐이었다.






정인이 그 사진을 발견한 것은 동섭 사망 후였다.


아빠가 사망한 뒤 그의 침대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빠가 그 사진을 침대 매트리스 밑에 감추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사흘 밤낮을 울었었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그리고 윤정이,


무엇보다 정인 자신이 그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하여, 그녀는 이때부터 윤정 일가에 대한 ‘칼’을 갈기 시작했다.






- 1999년 5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그때(정인에게 100만 원을 쥐여주고 병원으로 보낸 때)로부터 열흘 남짓 지난 뒤


도림은 정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그때처럼 정인의 목소리에는 피곤기가 많이 묻어났고


울음을 참는 듯 조용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물론 도림은, 이 역시 예상하던 바였다.



<정인> - 네, 사모님. 아빠 돌아가셨습니다.


<도림> “아니, 어쩌다가. 이거 정인 씨 안쓰러워서 어떡하지?”


<정인> - 절 위해 안쓰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도림> “장례는? 장례는 언제야? 꼭 가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데.”


<정인> - 위로. 사모님께서 절 위로해 주신다 하실 줄 알았더라면 장례를 좀 늦출 걸 그랬습니다.



도림은 놀랐다. 적어도 윤정의 때와 같은 짓 - 나신의 사진으로 충격을 주는 일 - 은 하지 않았으니,


이번만큼은 그녀도 정인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 줄로 생각했고,


그러려고 이것저것 준비하던 터였기 때문이었다.



<도림> “무슨 말이야?”


<정인> - 아무 말도 아닙니다. 연락 못 드리고 장례 치른 것은 죄송합니다. 내일 찾아뵙겠습니다.



그러고 전화가 끊겼다.



도림은 운명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 물론 운명이 있다고 믿는 쪽으로 많이 기울긴 했지만 -


천반산 목소리에게 농락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아무리 다른 길로 가려고 이리 틀고 저리 틀어도


주요 고비에서는 꼭 좋지 않은 일 - 즉 윤정의 때와 똑같은 일과 만나게 되는 까닭이었다.



<도림>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 업인지 뭔지, 해결을 못 하잖아. 아.’



그녀는 허공에 대고 장탄식을 내뱉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어떻게 생을 이끌어 가야 할지 막막했다.



문득 중학교 때 읽었던 양상논리(註1)가 떠올랐다.



갑돌이가 다치면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는 논리는 양상논리 하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갑돌이가 다치면 살거나 죽을 것인데,


그가 살면 어차피 살 것이므로 병원에 데려갈 필요가 없고


그가 죽으면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병원에 데려갈 필요가 없으니,


갑돌이가 다치면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는 논리는 양상논리 하에서는


갑돌이가 다쳐도 병원에 데려갈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둔갑하고 만다.



모든 것이 숙명으로 환원되는 가운데, 양상논리의 세계에서 인간의 선택이란


결론으로 치달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자그마한 힘도 되지 않았다.



<도림> “지금 내가 꼭 그 형편이야.


이런 마당에, 내가 전생에 ‘저질렀던’ 갑질,


업을 회귀해서 돌이킨들 무슨 의미가 있으며 돌이키지 않은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튿날 정인은 윤정 때처럼 검은 상복 차림으로 도림의 앞에 나타났다.


역시 목에는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에메랄드 귀걸이는 없었다.



윤정의 때와 같은 모습이 낯설지 않았지만,


도림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뀌지 않는 ‘운명’ 때문에 고민하는 자신에 비해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정인이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도림> “아직 상중인가 봐?”



도림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정인의 상복이 두려웠다.



<정인> “마음속에서 아빠를 떠나보내기가 힘드네요.”



정인이 대답했다.



<도림> “오늘은 정인 씨 방에서 쉬어. 그래도 돼.”



도림은 어차피 오늘 그만둘 줄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직 정인이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일단은 윤정 때처럼 쉬라고 말했다.



<정인> “아뇨, 사모님. 저 오늘부로 이 일 그만하려고 합니다. 실은 그 말씀을 드리려고 왔습니다.”


<도림> “나한테 서운한 거라도 있어? 왜 그래?


그러잖아도 정인 씨,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도, 장례 치를 때도 말도 안 하고 서운한데


이러면 정말 섭섭해.”



<정인> “돈 주고 부리시는 사람이 돈 안 받고 일 안 하겠다는데


사모님께서 서운하실 일이 있으실까요?


오늘따라 사모님의 사파이어 반지가 눈부시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도림은 윤정 때 없었던 사파이어 발언에 주목했다.



<도림> “정인 씨 이러는 게 내 사파이어 반지랑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거야?”


<정인>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냥 빛나는 반지를 하셨으니 좋으시겠다는 것 뿐입니다.


그나저나 사모님께서는 저를 왜 뽑으셨습니까?


단순히 임신하셨기 때문에요?


이제 보니 루비를 가진 제게 사파이어를 자랑하고 싶으셔서 절 뽑으신 것 같은데,


꼭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도림> “내 반지가 정인 씨 일하는 데 무슨 영향이라도 있었어?”


<정인> “그건 사모님께서 더 잘 아실 일입니다.


루비가 사파이어한테 졌네요. 주제를 알아야겠죠.


처음부터 그런 뜻 아니었습니까?


덕분에 지금 입은 이 상복을 입게 됐습니다.


처음 일할 땐 이 옷을 입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인은 그녀가 입은 상복의 열린 재킷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정인> “사모님께서는 그런 제게 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우쳐 주셨습니다.”


<도림> “그 옷은 산 거야?”



도림은 정인의 상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인> “그런 걸 왜 물으시죠?”


<도림> “며칠 입지도 못할 것 같은데 꽤나 비싸 보여서.”


<정인> “아뇨, 이 옷은 오래 입을 겁니다. 아주 오래.”





=== 주석


註1. 논리학에서, 양상 논리(樣相論理; modal logic)는 논리 체계의 일종으로, 명제의 필연성·가능성·불가능성과 같은 양상(modality)을 서술할 수 있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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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1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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