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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49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5.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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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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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우리, 결혼 좀 미루면 안 될까?

DUMMY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이 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달 어느 날 태휘는 그녀를 회사 근처로 불렀다.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도림은, 전생으로 봐도 요 근래에 없던 일인지라 처음엔 수상히 여겼지만,


이내 저녁 같이 먹는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나 일어나겠나 싶어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태휘> “꼭 눈이 즐거워야 여행인 것은 아니야. 입이 즐거워도 여행은 여행이지. 내 몸이 즐거우니까.”



도림을 만난 태휘의 말이었다.


여행을 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식여행’(食旅行)이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그는 음식이란 먼저 입이 아닌 눈으로 먹는 것이기 때문에 품격 있고 정갈한 곳으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들으면 시내 음식점도 식당이 아닌 여행지로서 평점을 매길 수 있다는 뜻이 되니,


2018년에서 온 도림은 이 말 한마디로 제법 설레는 것이었다.


다만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는 것, 설령 어떻게 사진을 찍더라도


그것을 올릴 SNS가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와는 별개로, 작년 연말에 약속한 루비도 안 해준 마당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싶어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윤정의 생에 비추어 루비가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굳이 해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또 굳이 해 주겠다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음식점 안에서 주문한 음식이 상에 하나, 둘 나왔을 때 도림은 탄성을 질렀다.


아직 메인이 아닌데도 나오는 음식은 색깔은 다종다양했지만


그것을 담은 그릇이 하나같이 흰 바탕의 접시나 플라스틱 받침이어서,


그의 말대로 꽤나 정갈해 보였다.



찬이 나올 때마다 도림은 서빙하는 아가씨의 손에서 상 위로,


상 위에서 서빙하는 아가씨의 손으로 저도 모르게 눈이 움직였다.



<도림> “여긴, 음, 관광지로 말하자면 선유도 해수욕장쯤은 될 것 같아.


신선들이 노닐다 갔다는 그 선유도 말이야.


이 음식들을 신선이 아니고서야 감히 인간들이 어떻게 범접이나 할 수 있겠어?


형광등이 아니라 등만 주홍빛으로 바꾸면


해 지는 선유도의 저녁노을 풍경을 여기서 만끽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그러자니 도림은 구이로 나온 고등어도 집에서와 달리


손에 들고 쉽게 뜯어먹지를 못하고 젓가락으로 끙끙대며 휘적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젓가락질을 못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오늘만큼은 뭔가는 기품이 있어야 할 것 같았고 조금은 품위를 지켜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있어서였다.



메인은 전주비빔밥이었다.


찹쌀고추장에 콩나물, 참기름을 넣고 초벌 볶음을 한 비빔밥은 냄새부터 고소했고 보기에도 맛깔스러웠다.


여행으로 치자면 다리 아프지 않은 선유도 여행으로 호강을 한 셈이었다.



도림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태휘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가 싶은,


다소 의아한 마음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 두 사람은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빔밥집에서 음식을 먹던 때와는 달리 태휘는 마치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 제법 무게를 잡았다.


도림은 단박에 눈치를 챘다.



<도림> ‘그러면 그렇지. 괜히 이런 근사한 데를 데리고 올 리가 없지.’



그녀는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좋은 것 얻어먹고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지을 수 없어 이내 풀었지만.



그는 먼저 찻잎을 담은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 도림의 잔에, 그리고 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태휘> “윤정아.”


<도림> “응?”



도림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는 꽤 신경이 쓰였다.



<태휘> “우리 결혼 말이야.”



태휘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17세 소녀 도림, 해가 지나서 신체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도림,


이제 다음 달 결혼을 앞둔 도림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이 감기었다.


두려웠다.


결혼 자체도 그러했지만, 일이 어떻게 풀려갈지 또한 못지않게 걱정이 됐다.



<도림> “말해.”



목소리마저 염소 울음소리마냥 자지러지는 까닭에,


그녀는 말해놓고 마치 못 할 말을 하기라도 한 양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뚜렷한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자못 컸다.



<태휘> “조금 미루면 안 될까?”



이 말을 듣고 도림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그가 결혼을 미루자고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은


그녀의 ‘운명’이 결혼을 미루는 길목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며,


다음으로는 윤정이 말하기 전부터 태휘가 결혼을 미룰 생각을


전생에서도 하고 있었는지는 미처 생각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전생이 원래 그랬던 것인지, 혹은 회귀한 생에서 ‘굴곡’이 생겨 바뀐 것인지


머릿속은 온통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만 했다.


만화나 만평에 등장하는, 풍선말로 엉킨 실타래가 그려진 사람, 도림은 딱 그런 사람이었다.



<도림> “왜? 이제 결혼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지금 결혼을 미루자고 하면 우리 준비한 것은 어떻게 하고?


청첩장 돌린 것도 많을 텐데?”



<태휘> “실은 안 돌렸어. 그리고 부모님한테도 5월 결혼은 얘기도 안 했어.”


<도림> “뭐라고? 하지만 난 벌써 내 친구들한테,


그리고 엄마, 아빠한테 결혼 얘기 하고 청첩장도 돌리고 했는걸?”



물론 전생에서 5월 결혼은 없었기 때문에 말만 그렇게 할 뿐,


회귀한 삶에서 그녀는 청첩장 따위 돌리지 않았다.



<태휘> “그분들은 내가 설득할게.”


<도림> “왜 그러는데?”



도림은, 그럴 일이 있기야 하겠는가마는,


천반산 목소리에게 ‘들킨’ 마음(운명을 시험한 것)을 혹시 태휘가 알까 싶어 언성을 높였다.



<도림> ‘천반산 그이가 그랬지. 사람의 생사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근데 이제 보니 결혼 같은 것도 안 바뀌는 모양이지?


그런 건가? 그러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정해진 길이 있다는 뜻이잖아.


그리고 그 길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잖아?


내 잃어버린 5년도 정해진 운명이었던 건가?


그래놓고 전생을 다시 살라는 건 또 뭐야?


모든 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전생의 업이고 뭐고


그걸 핑계로 내 인생에 고통을 줘서는 안 되지.’



그렇게 운명의 존재를 기정사실로 만들어놓고 그녀는,


한편으로는 고통을 당하는 것 역시 정해진 운명이라면


마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머릿속이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태휘> “지금은 일이 바빠. 회사도 살려야 하고, 결혼에 신경 쓰면서 일에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아.”



태휘의 말이 진심인지 핑계인지는 차치하고라도, 도림은 운명을 시험하고 싶어졌다.



<도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2000년 8월로 옮기자.”



전생에서 태휘는 2000년 7월 사망하였다.


도림이 제시한 2000년 8월은 태휘가 사망한 뒤이기 때문에,


도림은 그가 이 제의를 어떻게 받을지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태휘> “2000년 8월이면 2년 4개월 남았네.


그 정도 미뤄 줄 수 있다면 난 고맙지.


그때까지 회사를 열심히 한번 살려볼게.”



<도림> ‘어럽쇼. 이게 아닌데.’



도림은 운명이란 없는 것인지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망이 고정되어서 바뀌지 않는다면 출생 역시 고정되어서 바뀌지 않아야 옳았다.



<도림> ‘하지만 전생에 아기가 있었잖아. 내가 속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건 확실해.’



그러니 2000년 8월 결혼이란, 결혼 전에 임신을 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은 사람이 귀신이 되어 결혼을 하기라도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중간에 흔히들 ‘속도위반’이라고 하는 다른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는 말인지


도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윤정의 생에서 2000년 8월 있었던 일들 - 결혼과 전혀 무관했던 일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도림> ‘그건 그렇다 쳐도, 이 사람 이거 안 되겠네. 고작 채정인 그 여자 때문에 결혼을 늦추자고?’



물론 짐작일 뿐이었지만, 도림은 태휘의 행동이 정인 때문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태휘는 넋을 잃고 생각에 잠긴 도림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소녀 도림은 그 손을 슬그머니 뺐다.


멀쩡히 살아 있는 회사를 살리겠다는 거짓말부터 짜증이 밀려왔다.






한편 그 주 일요일, 태휘는 정인을 데리고 먼젓번 루비 목걸이를 걸어 주었던 그 주얼리샵에 또다시 방문했다.


이번에는 에메랄드 귀걸이를 해줄 참이었다.



그가 그리한 데에는 지후의 ‘칼날’을 칼집 속에 재워 준 정인에 대한 고마움 외에도,


언제부터 싹텄는지 모르는 그녀에 대한 묘한 감정 때문이었다.


이 감정은 마냥 사랑이라고만 하기도 어려웠고 굉장히 복잡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정인을 차지, 그것도 홀로 독차지하고 싶어졌다는 것이었다.



<태휘> “안녕하세요. 저희 기억하시는지요?”



태휘가 샵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


굳이 지난번 기억을 상기시킨 것은 저번에 루비 목걸이를 사 갔으니,


이번에도 잘 해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주인> “어서 오세요. 또 뵙게 되는군요.”



주인도 제법 반가운 체를 했다.


IMF 때라 보석을 찾는 사람이 거의 ‘멸종’하다시피 한 상태이니,


그것도 두 번씩이나 방문해 준 태휘가 주인은 실제로도 반가웠다.



여전히 주얼리샵은 그 연둣빛 은은한 리스가 제일 먼저 그들을 반겨 주었다.



<태휘> “에메랄드 귀걸이 좀 보러 왔습니다.”



태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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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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