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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28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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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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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컴퓨터 고장나던 날

DUMMY

이 말을 듣고 윤정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었다.


하지만 도림은 지금 정인이 아무런 감정 없이 하는 말인 줄을 알고 있었기에


이마에 괜한 주름은 잡지 않았다.



<도림> “정인 씨는 구절초차는 아닌 것 같은데, 뭐야?”


<정인> “저는 목련차예요.”


<도림> “목련은 꽃말이 어떻게 돼?”


<정인> “목련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 걸 외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제가 보기엔 꽃차가 이리도 많은 것을 보면, 사모님께서는 아실 것도 같은데요?”



정인은 입을 가리고 슬쩍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림> “구절초의 꽃말을 외고 다니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정인> “실은 저랑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저한테 금잔화 꽃바구니를 안겨 주고 떠나더군요.


그게 벌써 8개월이나 됐죠.


처음엔 그저 꽃이니 좋아라 했는데, 나중에 금잔화 꽃말이 ‘이별의 슬픔’이란 것을 알고는


멍청하게 눈 뜨고 당한 것 같아 속상하고 그랬지요.


그래서 꽃말을 조금 아는 모양이에요.”



윤정 때에 비추어보자면 지금 정인이 말하는 ‘결혼을 약속한 사람’으로 생각되는 이는 태휘였다.


더욱이 정인이 말하는 8개월 전은, 도림이 결혼한 그때와 정확하게 맞닿는 시기였다.


그녀는 태휘가 정인과 단순 불륜이 아니라 결혼까지 약속했는지 그저 놀랍기만 했다.



<도림> ‘니도 불륜이니 그래서 내 임신이 다른 사람 아이였다고 해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겠구나.


난 윤정이를 퍽이나 아껴 준 줄로 알았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불륜은 아니었잖아 그래도?


어디로 보나 내가 밑지는 장산데?’



입술이 저도 모르게 이죽거려졌다.



<정인> “사모님, 혹시 제가 불편하게 해 드린 거라도 있나요?”



정인이 도림의 이죽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물었다.



<도림> “아, 이런. 아냐. 딴생각을 좀 했네.


정인 씨랑은 상관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괜히 미안하네.”



<정인> “그러면 다행이지만······.”



정인은 어렵사리 구한 일자리인지라, 윤정의 때 그랬던 것처럼


그녀 자신은 물론 도림의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에도 온통 신경이 곤두섰다.



<도림> “자, 차를 다 마셨으니까, 이거 주방에 갖다 놓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도림이 말했다.


뒤에 있을 일, 즉 일부러 화장실에서 넘어지고 따귀를 쳤던 일, 그 상황이 다시 벌어질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정인은 이 말을 달리 받아들였다.


입술도 이죽거린 터에, 뭔가 불편한 것이 있으니 돌려보내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었다.



<도림> “그런 거 아니야.


처음부터 무리하면 탈 나요.


차차 적응해 가라는 뜻이니까, 내 말대로 해. 이만 돌아가도 괜찮아.”



도림이 이 말을 하고서야 정인은 집으로 돌아갔다.






- 12 -




이튿날은 윤정이 정인의 옷을 벗겨놓고 따귀를 치던, 도림으로서는 가장 낯뜨겁고 부끄러웠던 날이었다.


그녀는 천반산 목소리가 말한 ‘전생의 업’은 바로 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윤정의 생에서 그녀가 정인의 옷을 벗길 정도로 화가 났던 것은 정인이 컴퓨터를 ‘고장냈다는’ 이유 때문이었는데,


사실은 하루 전날 컴퓨터의 본래 하드디스크를 따로 보관하고


MBR(註1)을 날려버린 별도의 하드디스크를 붙여놓아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도 부팅이 안 되도록 만들어두었었다.


그래서 부팅이 되지 않은 것을 윤정은 정인의 실수 탓으로 돌려버리고


그녀에게 그 치욕을 안겨준 것이었다.



그러니 실상은, 자료손실은 하나도 없으면서 자료가 다 날아갔다는 구실을 대고


정인에게 옴팡 뒤집어씌운 갑질 중의 갑질을 퍼부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 1999년 4월(김윤정의 생)




그날은 윤정이 정인의 따귀를 두 대 치고 옷 벗은 값을 더하여 15만 원을 쥐여 주려 한 날이었다.


물론 정인은 치욕스러운 감정에 그 돈을 그날 받지는 않았지만,


그 이튿날 결국 받기는 했었다.



한편 정인이 돌아간 후 윤정의 집에 태홍이 왔다.


윤정은 태홍에게 그날 낮에 오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던 터였다.



<윤정> “삼춘, 어서 오세요.”


<태홍> “형수(註2), 무슨 일이에요?”


<윤정> “여기 채정인이 사진 있어요. 전에 말했던 그 사진.”



그러면서 윤정은 몰래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재생했다.


나신으로 뺨을 맞는 정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리고 말 그대로 적나라(註3)(赤裸裸)하게 찍혀 있었다.



그녀는 1월 태휘와 정인이 X 매트 사무실 앞에서 만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이 그림을 그려왔다.


흥신소에서 정인의 부친이 ‘오늘내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안길 구상을 했던 것이었다.



<윤정> “용 그림은 다 그려놨고, 이제 삼춘이 점만 찍어 주시면 돼요.”


<태홍> “그림 좋은데요? 이 정도면 형수 원하시는 대로 잘 될 것 같아요.”


<윤정> “부탁드려요.”






- 1999년 4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정인의 옷을 벗기기 전날 도림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윤정의 생에서처럼 MBR을 날려버린 하드디스크로 교체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두어야 할지.


하드디스크를 교체하면 억지로 만들어진 갑질상황일지라도 그녀가 참는,


즉 갑질을 하지 않는 모습을 연출할 수는 있었다.


이른바 ‘업’을 쌓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천반산의 그에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반면에 이 경우에는 정인의 ‘나신 촬영본’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물론 하드디스크를 교체하지 않더라도 ‘나신 촬영본’은 만들어지지 않지만,


그 경우에는 회귀한 목적이 없어지는 - 그럴 거라고 생각한 까닭에 고민이 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나신 촬영본’이 없으면 윤정의 생에서 진행된 많은 일들의 흐름이 바뀔 거란 생각이 있어 겁이 나기도 했다.



<도림> ‘어지간히 못되게 굴었어야지. 박해주한테 당해도 싸다니까. 내가 봐도.’



도림은 회귀 전 해주에게 당하던 일을 떠올렸다.



물론 초등학교 때는 어떻게 당했는지, 또 실제로 해주에게 당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이날은 괜히 그랬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림> ‘어느 경우든 정인의 옷은 벗기지 않는다.


그저 천반산 목소리한테 내가 <업>을 해결하려고 이렇게 노력한다는 모습이나 보여 줄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이야.’



그렇게 마음을 굳힌 그녀는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MBR을 날린 하드디스크로 교체해 버렸다.






이튿날 10시, 정인은 도림의 집에 왔다.


차림새는 여전히 집에서 굴러다니는 옷 아무거나 주워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청소는 대강을 어제 해놓은 터라, 설렁설렁 청소기 돌려 일단 마치고는, 그녀는 컴퓨터 방으로 들어갔다.


도림이 문을 슬쩍 열고 얼핏 보니, 정말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2시쯤 되어 도림은 컴퓨터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역시나 컴퓨터는 정상적으로 부팅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가 화를 낼 상황은 만들어야겠기에, 그녀는 몇 번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컴퓨터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예상대로.



도림은 정인을 불렀다.



<도림> “정인 씨, 컴퓨터 왜 이래?”


<정인> “전, ······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요.”



정인의 목소리는 그때처럼 기어들어갔다.



<도림> “이거 어떻게 하지? 여기 중요한 자료가 상당히 많은데······. 그거 다 날려 먹은 것 같은데 어쩌나.”


<정인>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먼지만 닦아냈을 뿐이에요. 뭘 건드린 건 정말 아무것도 없다구요.”



정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이 말하였다.



<도림> “이거 오늘 내로 고쳐. 당장 써야 할 데이터가 많단 말이야.”


<정인> “사모님도 아시다시피 컴맹인 제가 이걸 어떻게 고치나요.”


<도림> “음.”



도림은 전원 버튼을 눌러 컴퓨터를 끄고 방에서 나갔다.


역시나 이번에도 정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우는 사이,


도림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벽 두 개를 넘어 들려왔다.



<도림> “정인 씨, 정인 씨!”


<정인> “네!”



정인은 아직 닦아내지 못한 눈물을 훔치고 얼른 대답했다.



<정인> “부르셨어요?”


<도림> “불렀지. 내가 바르고 온화한 마음으로 태교에도 힘써야 해서


정인 씨한테 화는 안 내려고 해.


보아하니 정인 씨도 컴퓨터는 아주 젬병인 모양인데,


컴퓨터는 수리업자들한테 맡겨야 할 것 같아.


그리 알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



<정인> “죄송합니다.”


<도림>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



윤정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정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윤정의 때에는 따귀를 맞을까 하여 그랬다면,


이번에는 ‘일’을 잃을까 싶어 그랬다는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전날 도림이 입술을 이죽이며 그녀를 돌려보내려던 때처럼.





=== 주석


註1. 마스터 부트 레코드(master boot record, MBR) 또는 파티션 섹터(partition sector)는 파티션된 기억 장치(이를테면 하드디스크)의 첫 섹터(섹터 0)인 512바이트 시동 섹터이다. 가령 파티션 X와 Y가 있을 때 X에는 WINDOWS, Y에는 LINUX가 설치돼 있다면, X와 Y 중 어느 파티션을 먼저 구동할지를 MBR이 결정한다. MBR을 날리면 부팅이 되지 않는다.


註2. ‘도련님’이란 호칭과 마찬가지로 ‘형수님’이란 호칭도 들어본 일이 없다. 재벌가에서 ‘형수님’이란 호칭을 쓰는지는, 작가가 재벌, 혹은 재벌 2세나 3세가 아니라 모르겠다. 아울러, ‘형수님’을 지칭으로는 간혹 들어보기는 한 것 같다.


註3. ‘붉은 나신’이란 뜻으로 처음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말에는 ‘발가벗는다’는 뜻이 있고, 숨김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말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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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1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9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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