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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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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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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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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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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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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DUMMY

공장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태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라고 해서 봤는데 뭐가 문제냐는 눈빛이었다.



<태휘> “왜 그렇게 보시죠?


뭐가 문제인지 모르시는 눈치인 것 같은데,


이 달력, 저기 벽에 걸린 달력하고 똑같은데, 아니지, 저 달력을 찍었네.


그런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못 느끼신다는 건가요?”



<공장> “글쎄요.”



공장장으로서는 달력은 그냥 달력일 뿐이었다.


달력에 ‘IMF’가 있든 ‘IM8’이 있든, 그도 아니면 ‘1’ 대신 나무, ‘8’ 대신 눈사람이 그려져 있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숫자의 나열 - 연도를 표시한 숫자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 달력은 맨 앞장에는 ‘IMF’처럼 보이는 1998로 디자인이 되었지만,


한 달 한 달 넘어가면서 조금씩 숫자의 모습을 갖춰가고, 12월에는 온전한 ‘1998’로 변하는,


한마디로 올해 안에 IMF가 극복되기를 바라는 뜻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는 눈을 끔뻑거렸다.



하지만 맨 앞장만을 찍어놓다 보니, 영락없이 달력의 제작 의도가 왜곡, 편집이 되고 만 것이었다.



달력의 ‘편집된 진실’은 밑도 끝도 없이 화만 낸 셈이 되어 아쉬웠지만


태휘가 주목한 지점은 다른 것, 곧 ‘진실성’이었다.


즉 사진이 그의 공장에 있는 물건을 찍었다는 것이 사실인 이상,


“경축, IMF 구제금융”이라는 플래카드를 찍은 사진의 ‘진실성’ 역시 담보된다는 생각이었다.






<태휘> “허지후가 이 사진을 내밀면서 그러더군요. IMF가 와서 공장 사람들이 입이 귀에 걸렸다고.”



물론 실제 지후가 사람들 입이 귀에 걸렸다는 둥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없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지후가 건넨 플래카드 사진을 내밀었다.



<태휘> “자, 이 PC, 누가 걸었습니까? 도대체 왜 걸었냐구요?”


<공장> “밖에서 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거. 사장님, 오햅니다. 이 사진은 조작된 거라구요.”


<태휘> “내렸겠지! 달력이 있는데 조작이라고? 이 이사 눈엔 이 PC가 조작된 걸로 보여?”



그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더니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말했다.



<태휘> “가만, 이런다고 될 일이 아니지.


이사님, 왜 발뺌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노숙, 해 봤어요?


이 겨울에 길바닥에서 신문지 덮고 자 봤느냐구!


이 사진 나가면 이제 이사님 아니라 회사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까지······.”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괜히 말이 씨가 될까 싶어서였다.



<공장> “사장님, 그날 허지후는 우리 전기장판이 잘 나가니까 취재를 온 것 뿐입니다.


장판이 만들어지는 과정, 지금 이 시대에 왜 잘 팔리는지,


연탄과 비교해서 우월한 점은 뭔지, 화재 방지기술은 어떤지.


이런 거 묻고 갔어요.


저희는 취재에 응해 준 것 뿐이구요.”



<태휘> “그 취재를 왜 본사가 아닌 공장에서 하지?”



태휘는 ‘실토’를 하지 않고 계속 변명만 하는 공장장에게 화가 치밀어올랐지만,


이내 그에게 따진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사진’은 허지후의 손에 들어갔고,


그것이 신문에 나오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허지후, 그리고 데스크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진의 진실성 여부 따위는 그들에게는 문젯거리도 아니라는 것 역시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진실성이 문제 되지 않는 것)은 태휘 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길로 서울로 발길을 돌렸다.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것은 해가 짧아서 그런 것도, 갑자기 눈이 내려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미적분 문제를 눈앞에 둔 초등학생의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그렇다고 비켜 갈 수도 없는 문제를 앞에 둔 듯 마음이 복잡했다.



<태휘> ‘난마는 칼로 베어버리기라도 하지.’






취재는 제법 일찍, 그러니까 그가 추암 바다에서 일출을 보기 전에 해놓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데도 해가 바뀌도록 기사를 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리고 바로 그의 턱밑에 사진을 들이민 것을 보면,


인터뷰는 취재를 빙자한, 잘 설계된 ‘협박’의 일단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는 지후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칼집 속의 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저도 모르게 핸들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경적음이 크게 울렸다.



<태휘> “머리는 신이 내리신 생각의 감옥인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가 없네. 쓸데없이 단단하기만 하고!”






- 5 -




태휘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는 도림이 와 있었다.


도림, 즉 윤정이 태휘의 집에 온 것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었지만,


달리 보면 아직 ‘잡힌 물고기’가 되지 않기로 마음먹기 전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태휘가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적잖이 궁금했지만,


한편 아직 ‘권태’에 빠지기 전이므로 뻔히 예상은 됐다.



<도림> “왔어? 피곤했지?”



그녀의 말씨는 윤정과는 달리 제법 살가웠다.


그것은 윤정과 ‘다른’ 삶을 살기 위한 도림 나름의 선택이었다.


한편 17세 소녀의 감성으로 삼촌과도 같은 남자를 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궁금했다.



태휘는 분명히 2000년 7월 사망했는데,


내생으로 갔다면 지금 생의 기억은 소멸했을 텐데,


내생에서도 지금은 시간이 정지 중일 텐데,


과연 눈앞에 선 사람이 - 즉 그녀의 말을 듣고 반응하고 대답을 하는 저 사람이 스스로 지각은 하는 것인지,


지각한다는 것을 자각은 하는지, 자각한 것을 기억은 할지.



지각을 하되 자각하지 못한 사례,


그래서 지각한 기억조차 없는 사례가 윤정의 생에서 딱 세 번 있었다.


아기 때와 태휘에게 샤토 피작을 따라주며 수작을 부리던 때,


그리고 죽기 전 아기를 보육원 앞에 두고 홀로 길을 걷던 때.



<태휘> “집에 있었네? 말도 않고 어쩐 일이야?”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가뜩이나 지후 건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도림을 보니 지난해 12월 망상 바닷가를 여행한 뒤 숙소에서 루비에 에메랄드, 사파이어를 해주겠다던 일로 짜증이 확 밀려왔다.


원래 계획대로 여행을 했더라면 그딴 보석의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또 하필 그날 그 자리에 그런 브로마이드가 걸려 있을 것은 무엇이며,


마치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것처럼 여행을 하지 않겠다면서도 그 브로마이드를 보고 탄성을 지를 것은 무슨 속셈이란 말인지.


그것이 지금 지후의 일까지 겹치니 울화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해’라고 해야 불과 얼마 전 이야기였지만.



<도림> “삼춘(註1)한테 전화가 왔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그랬지.


중요한 일이면 집으로 갈 테니 근처에서 보자고.”



<태휘> “그녀석이? 왜? 그래서 중요한 일이래?”



그래도 그의 말은 차분했다. 어쩔 수 없었다. 참을 수밖에.



<도림> “급히 쓸 데가 있나 봐. 나한테 돈 좀 꾸어 줄 수 있느냐고 하시던데?”


<태휘> “왜 나한테 안 물어보구? 그래, 급히 쓸 데라는 건 어따 쓰겠다는 건데?”


<도림> “그거야 모르지. 말을 안 하시는데. 돈 없다고 그랬어. 안 그래도 IMF 때문에 힘들다고.”


<태휘> “그랬더니 뭐래?”


<도림> “어쩔 수 있나. 알았다고, 그냥 가시던데.”


<태휘> “싱거운 놈.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던 거야?”


<도림> “기왕이면 근처까지 온 김에 집에도 들르고, 겸사겸사해서 자기 얼굴도 좀 보려고 그랬지.”


<태휘> “온 김에 그러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



이렇게 해서 여행 이후로 오랜만에 도림은 태휘와 저녁을 같이 먹었다.



저녁은 저녁이고 도림이 답답했던 것은,


이 일(돈 없다고 한 일)이 1998년의 일이니 분명 천반산 목소리가 다시 살라고 ‘지정’한 전생에 포함되는 일인데,


무슨 일과 연결되는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녀의 ‘업’ 또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일로 연결된다면,


그리고 그리로 연결되는지 여부를 알았다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지 짐작이라도 했겠지만,


돈을 빌려주지 않고 무턱대고 없다고 한 것이 ‘업’으로 남는 것은 아닌가 하여 적잖이 걱정되는 것이었다.






이튿날 태휘는 정인을 청해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굳이 밥을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지후의 일로 누구에게라도 상의를 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런다고 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일이 그 누구도 아닌 태휘 본인에 의해 밖으로 나가는 것인 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혼자 끙끙 앓고 있다가는 회사 경영 차질을 걱정해야 할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고,


정인에 대해서는 그녀가 이 일을 밖에 내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인에게 저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털어놓으니 기분은 한결 나아지는 듯 했다.


해결책이 없으니 건성으로 들을 만도 한데,


뜻밖에 정인은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주었다.





=== 주석


註1.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남편의 결혼하지 않은 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주 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도련님’이란 호칭이 쓰이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작가의 주위에서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소설이나 드라마와 같이 이른바 재벌가에서는 ‘도련님’ 호칭이 쓰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서 태휘네는 재벌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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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5 0 11쪽
»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10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2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3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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