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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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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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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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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바다-윤정과 정인의 첫 만남

DUMMY

윤정은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믿기지가 않아 되물었다.



<흥신> “채정인이는 독한 여잡니다.


비단 부친 일이 아니더라도 방연에게 무릎을 내줄 수 있는 여자라는 거예요.(註1)


뭐 이건 세평이 그런 거니까 제가 보증은 할 수 없지만,


대궐 같은 저택에서 살다가 옥탑에 올라가기도 쉽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은 듭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채정인이 웃음 뒤에 어떤 비수를 감추고 있을지를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뭐······


아닐 수도 있죠.”



윤정은 ‘방연에게 무릎을 내어준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흘려들었다.



<윤정> “우리 남편이 채정인한테 걸려들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아니면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흥신> “그건 몰라요. 아무리 뒷조사를 해 봐도 연결고리가 없으니까요.


솔직히 L 식품 사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X 매트 따위,


아 이런, ‘따위’라고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그런 사람이 X 매트가 눈에 들어오기나 했겠습니까.”



<윤정> “언제부터 만나고 다녔죠?”


<흥신> “그게 아마 작년부터일 겁니다.


정확한 시기는 특정할 수 없지만, 작년에 만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요.


재작년에 만났다는 흔적은 잘 안 보이구요.”



<윤정> “대충 알겠어요. 채정인은 지금은 뭘 하고 다닌답니까?”


<흥신> “일자리를 알아보고 다닌다던데, 맘에 차는 일자리는 없는 모양입디다.


모르죠, 쓰겠다는 곳이 없는 것일지도.


요즘 실업률 올라가는 것이 현기증이 나잖아요.”



<윤정> “하긴, 직장인이면 대낮에 집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겠죠.


IMF가 아니었으면 식품회사 전무는 하고 있었을 사람이 안쓰럽게는 됐지만,


그런 마음마저도 내게, 또 내 남편에게 한 짓을 봐서는 그저 사치로밖에 안 보이네요.”



윤정은 정보에 대해 잔금을 치르고 심부름센터를 나왔다.


냉기가 감돌았던 계단은 이젠 왠지 모르게 싸하기까지 했다.



뭔가 알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에 부유했던 사람, 옥탑방에 살면서도 남에게 보이는 모습은 여전히 부잣집 딸내미인 여자,


그런 여자가, 더욱이 아빠가 사경을 헤매는데도 남의 남편을 만나고 다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아빠 병원비를 대기 위해 집을 팔았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 같으면 제일 먼저 처분했을 루비 목걸이와 에메랄드 귀걸이만은 아직까지 간직하고 다닌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어쨌든 요양병원에서 날짜 세고 있는 아빠 때문에 돈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리라는 것은 너끈히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옥탑방 사는 무직의 여자가 그 돈을 어디서 댈까는 여전히 궁금했다.






- 8 -




- 1999년 4월(김윤정의 생)




그 일이 있은 뒤로 두 달이 지났다.



윤정은 슬슬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태휘에게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렸다.


임신인 것 같다고.


태휘는 ‘임신’이라는 말에 놀라기는 하였으나,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고마움을 표하고 염려스러운 마음에 이것저것 물었다.



그러나 한편 속마음은 복잡했다.



윤정 역시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실상은 임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말을 하고 말았으니,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왼종일 걱정에 휩싸여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깨닫지 못하며 방 안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하여 윤정은 이젠 그럴 수 없는 줄을 알면서도 ‘임신’을 물릴까,


물려야 하나 하는 생각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물론 들어선 아기가 갑자기 사라지는 기이한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런 짓까지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날 저녁 태휘는 다른 때보다 일찍 집에 왔다.


손에는 딸기며 포도, 바나나며 키위 등 온갖 과일들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윤정은 과일바구니를 받으며 고마움을 표했고,


그 역시 그녀를 살짝 안아주며 임신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그는 생각이 있어 윤정에게 물었다.



<태휘> “병원에는 다녀왔어?”


<윤정> “아직. 근데 생리도 그렇고 입덧도 있고 해서.”


<태휘> “그럼 아직 몇 개월인지는 모르겠네?”


<윤정>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는 몰라.”


<태휘> “입덧 있다더니,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윤정> “지금은 됐고, 내일 올 때 귤이나 사다 줘.


그리고 자기야, 나 임신도 했고 해서 하는 말인데,


집안일 하는데 사람 좀 쓰면 안 될까?”



<태휘> “자기 좋은 대로 해.”


<윤정> “고마워, 고마워 자기야.”



윤정은 태휘에게 안기어 고마움의 인사치레로 볼에 키스를 했다.


태휘는 수염이 눌려 왼쪽 볼이 꺼칠꺼칠한 것이, 느낌이 다소 거북하긴 하였지만 표를 내지는 않았다.


물론 윤정이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입술이 거친 느낌이 있었을 뿐.






이튿날 낮, 윤정은 거실 소파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심중에 폭풍이 한차례 휘몰아치고 지나갔지만,


엊저녁 태휘의 태도로 보아 말끔히는 아니어도 하루의 걱정이 상당 부분 씻겨 내려간 것이었다.


그 덕에 마음이 어지간히는 평온을 되찾았다.


그때 집 전화벨이 ‘따르릉’ 하고 울었다.



<윤정> “여보세요.”


<윤정> “아, 오늘부터 일하기로 하신 분이시죠? 지금 어디라고요?”


<윤정> “그러면 거의 다 오셨네.


거기서 길 하나만 건너면 OO 아파트라고 있어요.


그 단지 안으로 들어오세요. 103동 1308호예요.”



얼마간 기다리자 이윽고 인터폰이 울렸다.


윤정은 기다리던 사람임을 직감하고 문을 열어주었다.



정인이었다.



그녀는 윤정에게 허리를 굽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의 옷과 헤어는 1999년 기준으로 하면 최대한의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일하러’ 온 사람이 목걸이와 귀걸이는 하지 않았다.



<정인> “처음 뵙겠습니다. 채정인이라고 합니다.”


<윤정> “어서 오세요. 말씀은 대충 들었어요. 자, 그러지 마시고 일단 들어오시죠.”



정인은 그제야 신발을 벗고 현관에서 거실로 조심스레 발을 들이밀었다.


윤정은 정인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녀를 등지고 눈살을 찌푸렸다.


파출부로 온 자리에서도 여전히 도도한, 아니 도도한 척을 하는 정인이 가증스러웠다.



일을 하자면 지금 입은 옷은 모두 갈아입어야 할 터였다.



<윤정> ‘저 때와 장소도 모르는, 그리고 가식적인 옷은 내가 벗기면 되지.’



윤정은 뒤돌아 정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구석에 있는 한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윤정> “일단 정인 씨는 저 방을 쓰세요.


일 하시는 동안은 옷 갈아입으실 일도 많을 테고, 아무리 제 집안일 도와주러 오셨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인 씨도 사생활이 있으실 거니까요.”



<정인> “네, 사모님. 감사합니다.”



정인은 목례를 하듯 고개를 까닥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윤정이 가리킨 그 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곱게 갠 흰 블라우스와 검은 치마, 그리고 앞치마가 놓여 있었다.



잠시 잠깐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이내 체념했다.



<정인> ‘어쩔 수 없지. 여기서 받는 돈, 구겨진 자존심 값이니까.’



정인은 옷을 갈아입고 방 밖으로 나섰다.


뜻밖에 윤정과 눈이 마주쳤다.


윤정이 그 방의 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자존심을 얼마만큼 내려놓고 나오는지 보겠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착잡했다.



<정인> “뭐부터 할까요?”



정인은 쭈뼛쭈뼛하며 물었다.


이런 일을 해 본 적도 없거니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도 아니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윤정> “점심, 아직 안 드셨죠? 점심부터 차려 보세요. 같이 먹죠.”



윤정은 정인의 음식 솜씨를 볼 생각이었다.


도도한 여자의 도도한 음식 솜씨,


과연 앞치마를 두르고도 여전히 ‘도도할’ 수 있을지 그녀는 보고 싶었다.



<정인> “네, 사모님.”



정인은 짧은 목례로 대답을 하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냉장고에는 돼지고기와 고추, 마늘, 버섯 등이 있었다.


김치 맛을 보니 절로 눈이 감길 정도로 시큼했다.



<정인> “아우 셔. 이건 찌개가 아니고서는 못 먹겠는데? 그럼 오늘은 김치찌개로 하자.”



그녀는 ‘요리의 기초’인 김치찌개를 끓이기로 하고는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우려냈다.


그리고 김치와 고기를 넣고는 썬 고추와 다진 마늘, 간장과 까나리 액젓으로 간을 했다.


찌개가 보글보글 끓자 그녀는 한 숟가락을 떠서 맛을 보았다.



<정인> “음. 이 정도면 괜찮겠지? 훌륭해, 훌륭해.”



정인은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를 둘렀다. 그리고 소박하게 점심상을 차려냈다.






<정인> “사모님, 점심 식사 준비됐습니다.”


<윤정> “어디, 솜씨를 좀 볼까요?”


<정인> “차린다고 차렸는데, 사모님 입맛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윤정> “나는 가리는 것 없이 웬만해서는 잘 먹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윤정은 밥과 찌개를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었다.


정인은 괜히 가슴이 뛰었다.



맛은 훌륭했다. 하지만 윤정은 일부러 눈살, 이맛살을 찌푸렸다.



<윤정> “훌륭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주름을 펴지 않았다.


그러니 정인으로서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인> ‘앞으로 일하기 뻣뻣하겠는걸.’





=== 주석


註1. 손빈(孫臏)은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5대손이다. 그는 방연과 함께 귀곡자(鬼谷子)의 제자였는데, 방연의 질투와 모함으로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는다. 손빈은 돼지우리에서 잠을 자는 등 미친 척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제나라로 탈출하여 군사(君師)가 된다. 그리고 방연과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자, 감조지계(減竈之計, 아궁이 수를 줄여 병사 수가 줄어든 것처럼 믿게 하여 방심하게 함)를 펼쳐 그로 하여금 오판하게 한다. 그러다 끝내는 마릉산 협곡에서 방연의 군대를 전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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