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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37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5.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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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DUMMY

그래서 그는 정인에게 저간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털어놓으니 기분은 한결 나아지는 듯 했다.


해결책이 없으니 건성으로 들을 만도 한데,


뜻밖에 정인은 그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 주었다.



<정인> “그 사진기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정인이 물었다.



<태휘> “허지후.”


<정인> “혹시 Q 신문 사진기자 아니야?”


<태휘> “네가 허지후를 어떻게 알아? 하긴, 너도 Q 신문을 봤을 테니 알 수도 있겠구나.”


<정인> “그분, 내 사진학과 선배야 오빠.


그 선배, 우리는 사진학과 나와서 신문사 취직하고 참 잘 풀렸다 그랬는데(註1) 이상하네.


참 곰살가운 분이었는데 왜 그렇게 변했을까?


물론 선배 얘기도 들어봐야 되겠지만, 오빠 얘기만 듣고 생각하면 참 많이 변한 것 같아.


내가 알던 선배가 아니야. 너무 어색해.”



<태휘> “신문사 들어간 게 잘 풀린 거라고?


네가 신문사 놈들을 몰라서 그래. 그런 양아치 새끼들도 없지.


기자를 Watch Dog라고 한다더니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명품 시계나 밝히는 개자식들.


어쨌든 믿기지 않는걸. 너랑 그놈이 선후배였다는 것도 그렇고,


곰살가웠다는 놈이 그렇게 욕심만 ‘곰살같이’ 뒤룩뒤룩 찐 놈으로 변하는 것도.


뭐 Q 신문사 들어가면 다 그런 모양이지.”



애초에 기대하고 마련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인에게 그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당나귀 귀를 외치는 대나무 숲 노인’만큼의 안정감은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정인이 그 문제의 허지후와 선후배 사이라니 뭔가 해결점이 보일 듯도 하여


그는 정인에게 지후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인연이 있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녀로 인하여 숨통이 트일 듯도 하니 태휘는 괜한 ‘이성적 호감’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무실에서 그는 IMF 구제금융 기사의 하단 기사 사진으로 쓴


‘절망하는 노인’ 사진이 실린 신문을 보여주었다.


정인은 신문을 받아 이리저리 살피며 사진을 뚫어지라 살펴보았다.



<정인> “이거, ······ 아닌데······.”


<태휘> “무슨 말이야?”


<정인> “이 사진, IMF랑 상관없어.”



절망하는 노인 사진에 대해 정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얼핏 보면 IMF 소식을 듣고 서울역 앞에서 절망하는 노인의 사진 같지만,


실은 ‘거지’(註2)에게 적선한 돈의 추이를 보고, 적선한 사람들에게 종이에 적힌 설문을 하도록 하여


그들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어느 대학 연구팀의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2년 전부터 진행된 프로젝트로, 계절별로, 그리고 장소별로


적선의 액수 추이와 적선자의 심성의 변화를 관찰하고자 하는 목적이며,


몇몇 사진을 찍어 일본의 사진전에 출품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했다.(註3)



정인은 지인이 대학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라서 잘 안다고도 했고,


노인의 사진을 몇 번 본 적도 있으며, 심지어 노인을 안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지후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노인의 옆에 두었던 종이뭉치는 일부러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잡았는데,


그래서 사진에 ‘왜곡’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태휘> “그러니까 다이어트 사진을 갖다가 굶주림 사진으로 썼단 얘기네?”


<정인> “굳이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태휘> “사진은 사진 그대로 진실인 줄만 알았는데, 세상 참 무섭다.”


<정인> “실은 사진이라고 해서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 건 아냐.


이 노인 사진은 사람의 의도가 개입돼서 왜곡된 경우지만,


의도가 개입되지 않더라도 왜곡이 발생해.


예를 들어 나무 아래에서 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 사진이 있다면


그 사람은 쉬고 있는 거라고 볼 수 있겠지, 사진만 보면.


하지만 그 사진 밖에 드라마 촬영용 카메라가 서 있다면 그 사람은 일하고 있는 거야.


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일하는 거지.”



<태휘> “그러면 일하는 사람 사진을 놓고 쉬고 있다고 선동할 수도 있겠네?”


<정인> “그렇지. 프레임 안과 밖은 사뭇 달라. 프레임 밖에 오히려 진실이 있는 경우도 많거든.”



태휘는 어지러웠다. 프레임 ‘안’도 어려웠는데


지후가 찍은 플래카드 사진의 프레임 ‘밖’은 도대체 뭐가 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정인>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거짓말은 사람이 하는 거지.


그러니 프레임의 ‘안’도 해석이 유도됐느냐에 따라 거짓말이 될 수 있어.”



<태휘> “내, 사진으로 거짓말 치는 놈을 허지후를 봤다.”



태휘는 혀를 끌끌 찼다.



<정인> “어쨌든 노인 사진은 그렇고, 오빠가 고민한다는 지후 선배 사진 줘 봐. 그것도 내가 봐 볼게.”



태휘는 “경축, IMF 구제금융”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건 모습을 찍은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인> “이건 잘 모르겠는데? 그대로 진실인 것 같은데? 공장에서는 진짜 이 PC 안 걸었대?”


<태휘>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정인> “근데 그건 말할 수 있겠네. 세상에 진실은 없다는 거.


그냥 사실이 있고 그에 대한 입장이 있을 뿐이야.


PC를 걸었다는 사진이 있고 그에 대한 허 선배의 입장이 있고 오빠의 입장이 있을 뿐이라는 거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그걸 알지 않을까?


그래도 입장이 있으니 각기 자기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게 진실인 거고.


실은 진실이라고 포장하고 우기는 거지만.”



<태휘> “그러니까 그놈이 왜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됐느냐가 궁금한 거야.


난 네가 내 입장을 존중해 줬으면 좋겠다.”



<정인> “일단은 내가 선배를 만나 볼게.”



정인도 동일한 사진 한 장을 놓고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상황이


한편 당혹스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 흥미롭기도 했다.


대립하는 두 당사자가 그녀가 아는 사람이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며칠 뒤 정인은 지후와 약속을 하고 그의 집에 찾아갔다.



4시의 햇살이 내리쬐는 그의 집은 상류층 사람들이 사는 시내에 적(籍)을 두지 못하고


버스 종점 같은 후미진 변두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런 집이었다.


흙벽 집을 연상케 하는, 어딘가에서는 꼭 메주 하나는 뜨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집.



<정인> “오랜만이에요 선배. 그간 잘 지내셨죠?”


<지후>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는걸? 혹시 그거 자랑하려고 온 거 아냐?”



지후가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인> “못 본 사이에 미적 감각이 더 세련돼지셨는걸요?”


<지후> “능청이 많이 늘었구나?”



정인은 배시시 웃었다.



<정인> “4신데······.”



정인은 문득 시계를 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註4)



<지후> “알고 온 것 아니었어? 나 지금 이렇게 된 거.”


<정인> “몰랐어요. 제 생각만 한 것 같네요. 일요일이면 선배도 당연히 쉬실 거라고······. 죄송해요.”


<지후>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 못 들은 지 오래됐다.


윤전기에 ‘글자’를 갈아 넣어야 밥이 나올 텐데, 밥 구경한 지도 오래됐고.


에그, 나 사는 얘긴 그만하자. 구질구질하다.”



<정인> “언니랑 미진이도 안 보이고······.”


<지후> “어디 좀 내려갔어. IMF 시대에 그래도 나는 양반이지 하며 위로하고 산다.


어떤 놈은 가장이 돼서 마누라한테 쫓겨나기도 했다는데,


그래도 저 사람은 날 내쫓지는 않았잖아.


지금은 애기랑 같이 친정에 있어.”



<정인> “어? 저건 소주? 아유, 선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다고 술로······.”



정인은 소주병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뜻밖에 잡히지 않아 할 말을 잃고는


놀란 토끼 눈을 한 채로 지후의 눈을 쳐다보았다.



<지후> “요샌 빨강색하고 빨간 오렌지색이 헷갈려. 하는 일 없이 팔도 아프고.


극사실주의라고 들어봤지?


소주를 마시고 싶어도 마시지 못하니 소주를 그려놓고 쳐다보면서 산다. 자린고비처럼.


짠 내 나지?”



<정인> “에휴······. 전 선배가 기자 되셨을 때 정말 부러웠는데, 이렇게 지내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차라리 사진을 찍으시지 그러셨어요?”



<지후> “그러지 마라. 술을 못 마신다는 것이 그럴 뿐이지


그것만 빼면 극사실주의 회화도 꽤 괜찮은 취미야.


차라리 사진 찍으라고 말하지만,


사진만으로 뭔가 부족할 때 내 느낌 담아 그릴 수도 있다는 게 매력인 거거든.”



정인은 머뭇거렸다. 원래는 신문에 실린 사진, 태휘에게 보낸 사진에 대해 묻고자 했던 것인데,


지후 사는 형편을 보니 그런 얘기를 하기가 민망해진 까닭이었다.





=== 주석


註1. 박정준 저, “미대 나와서 무얼 할까” 제2권 158쪽. “(사진가의) 수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어떨 때는 수입이 전혀 없다가 어떨 때는 대기업 다니는 분들의 연봉만큼 수입이 한꺼번에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이 다시 작업비용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수입이라고 할 수 없죠.”


註2. 1997년 IMF 때부터 이른바 ‘노숙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전에도 이와 비슷한 것은 있었지만, 그때에는 ‘부랑자’ 또는 ‘거지’라고 하였다. ‘노숙자’란 말도 이때 생겼다. 지금은 ‘노숙인’이라 칭하지만, ‘노숙자’란 말은 2010년대까지도 널리 쓰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가는 ‘노숙자’란 말을 선호한다.


註3. 강운구 저, 앞의 책, 69쪽, “일본의 아사히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살롱과 헤이본샤平凡社에서 발행하는 <국제사진연감> 등이 입선하기 꽤 어려운 권위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그곳에는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에서 출품한 것 중에서는 현실적인 어려움, 가난 등을 소재로 한 것만이 입선되었다. 그리하여 그런 것만 출품하는 데 열을 올렸다.”


註4. 안수찬 저, 앞의 책, 54-55쪽. “마감은 보통 오후 4시다. ······ 오후 4시쯤 송고된 기사는 다시 팀장, 부장, 차장의 교정 교열 과정을 거친다. 이 30여 분 동안 휴대전화에 불이 난다. ······ 일단 사람의 손을 떠나 윤전기가 돌아가는 오후 5시께부터 6시께까지가 기자들에겐 황금시간이다. 긴장이 풀린 기자들은 이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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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0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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