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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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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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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맷값

DUMMY

3. 만남





- 1 -




1999년 그해 4월,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듯 생각지도 않게 따귀를 두 대나 맞은 정인은


평생에 겪어보지 못한 잔인한 4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정인의 ‘따귀를 친’ 윤정은 그럼 온화하고 포근한 4월을 맞이하였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녀의 4월 역시도 말할 수 없이 잔인해지고 있었다.


영화 ‘정인 때리기’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해피엔딩’의 영화는 끝이 나고 ‘잔인한’ 속편이 시작될 줄을 그녀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지만,


봄이 오면 반드시 꽃이 피고 새싹이 움트는 법이었다.



그것은 4월을 일컬어 처음으로 잔인하다고 말한 토머스 엘리엇의 시 ‘황무지’와도 비슷했다.


4월 이전의 겨울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었고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 주었으며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註1)으로 먹여 살려 주었던 반면,


이런 것들이 모두 걷힌 4월의 봄은 겨울보다 더 ‘황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니,


엘리엇의 ‘잔인함에 관한’ 통찰은 윤정에겐 어찌 보면 또 다른 측면에서 잔인하다 하리만치 적확했다.



그녀는 아직은 ‘임신 2개월’의 보호막 안에 싸여 있었다.



하여 초봄까지는 그래도 결혼생활에 성실하지 않았어도,


또 임신했다고 확신이 없는 말을 했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4월부터는 달랐다.



태휘는 그녀가 임신한 줄로 알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윤정은 가사도우미를 들이겠다고 하였고,


또 4월부터는 임신 3개월 차가 되는 이상,


그녀 역시 그간의 보호막이 모두 걷히고 ‘황폐함’에 노출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도 ‘봄의 작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속편’이 시작하면 그녀는 4월의 작가가 되어서


공들여 짠 시나리오에서 옥의 티를 골라내야 했다.


그것이 과히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 자신이 명확히 자각하던 바였다.



우선 화사한 햇살 2그램이 증가할 때마다 ‘화사한’ 뱃살 200그램이 증가해야 했다.



누군가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하얀 꽃비에 흘러간 옛사랑 - 그것이 첫사랑이든 끝내 못 이룬 짝사랑이든 - 을 생각한다지만,


꽃비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벚꽃의 꽃말은 들키지 않을 거짓말이라고.(註2)


땅에 떨어진 벚꽃잎, 나비를 닮은 꽃잎을 보고 호기심 따위 품지 말라고.



그러니 4월의 봄바람이 그녀는 3월 꽃샘추위의 찬 바람보다 한층 더 차갑게 느껴지고야 말 터였다.






그날 저녁 태휘가 집에 왔을 때 윤정은 저녁상을 봐 놓고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윤정> “자기 위해서 내가 친히 마련하신 저녁상이야. 앉아.”



윤정이 밥과 국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태휘> “오늘부터 도우미 아주머니 일하신다 하지 않았어?”



태휘는 의아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윤정> “일하고 가셨지.”


<태휘> “왜? 실은 나도 그 아주머니 좀 만나 보려고 일찍 온 건데. 급한 일이 있었나 보지?”


<윤정> “아니, 일은 5시까지만 하라고 했어.”


<태휘> “왜? 자기 힘들까 봐 뽑은 가사도우미면,


점심 말고도 저녁도 책임져 주고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난 그 생각으로 가사도우미에 동의한 건데?”



<윤정> “아직은 내가 움직일 수 있으니까. 나중에 정말 힘들어지면 저녁까지 부탁할게.”


<태휘> “그래, 그럼.”


<윤정> “응.”



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휘> “그나저나 어때? 괜찮아? 일머리는 있고?”


<윤정> “죽을 좀 잘 쑤는 것 같아. 덕분에 오늘은 속이 좀 편했어.”



그녀는 오른손 손바닥을 가만히 응시했다.



<윤정> “그리고 얼굴도 이쁘장해. 나중에 자기도 보면 마음에 들 거야.”


<태휘> “다행이네. 무엇보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


<윤정> “그렇지.”


<태휘> “병원에선 뭐래? 몇 개월째인지 말은 안 해?”


<윤정> “2개월.”



윤정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윤정> “2개월쯤 됐을 거야.


병원엔 안 가봤고, 생리를 따져보면 그 정도 된 것 같아.


우리 애기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 같은데,


미세한 그 소리를 들으니까 이제 엄마구나 싶은 생각도 들어.


설레기도 하고 겁도 나는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태휘는 2개월이라는 대답에 생각이 깊어졌다.



2개월이라면 수정 및 착상은 1999년 1월이나 2월이라는 말이 되는 까닭이었다.


윤정이 주홍빛 무드등(Mood 燈) 아래 플라워 와인 파티를 준비한 그날,


그에게 샤토 피작을 따라 주던 그날,


그는 그녀의 도발적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태휘> “몸은 괜찮고?”


<윤정> “나른하기도 하고 미열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 참을 수 있고.”


<태휘> “다행이네. 고맙고. 근데······.”



태휘는 머뭇거렸다.



<태휘> “진짜 2개월이야?”



그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가까스로 물었다.



<윤정> “병원에 가 보면 정확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만, 2개월을 넘진 않을 것 같아.”



윤정의 목소리는 엄마 앞에 변명하는 아이의 말처럼 작아졌다.


그리고 태휘의 얼굴에 잡힌 주름도 잦아 들어갔다.






* * *






이튿날 10시, 정인은 윤정의 집에 왔다.



차림새는 집에서 굴러다니는 옷 아무거나 주워입은 듯 했다.


윤정은 굳이 나무라지 않았다.


어차피 남에게 잘 보여야 할 일도 아니고, 또 그녀가 준 작업복으로 갈아입을 터이니


옷 가지고 나무라 봐야 영만 서지 않을 게 뻔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지만,


명색이 고용주의 집인데 너무 일찍 풀어지는 것 같아 보기 언짢아지는 마음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윤정> ‘그래도 명색이 L 식품의 딸내미가 제집에서 뒹구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IMF라지만 옷감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대체!’



윤정은 절로 눈이 감기고 말았다.





정인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어제와는 달리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치울 거리를 만들어놓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미 청소를 한번 했던 터라 오늘은 ‘천삽’을 뜰 필요도 없었다.


그리하여 청소는 금세, 그리고 수월히 끝났고


그녀는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방과 책상, 컴퓨터를 청소했다.



컴퓨터 방의 대강은 어제 치웠다.


다만 컴퓨터 방을 마저 청소하기 전에 점심으로 김치 죽을 쑤다가


난데없이 따귀를 맞고는 쫓겨났기 때문에 끝까지 마치지 못한 것이었는데,


오늘만큼은 그런 실수는 하지 말자고 그녀는 거듭 다짐하였다.



컴퓨터 방에는 탁자처럼 생긴 긴 컴퓨터 책상에 컴퓨터 의자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책상 아래에는 컴퓨터 본체,


위에는 누렇게 때가 묻은 배불뚝이 모니터와 마치 모니터를 경호라도 하는 듯 세워진 스피커,


그리고 모뎀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각 기기의 연결 부위를 특히 조심하면서 먼지를 닦아냈다.






정인이 청소를 마치고 그녀와 윤정은 점심을 먹고 전날처럼 차를 같이 했다.


어제는 부디 이성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구절초차를 대접했지만,


윤정의 교양을 논하기 전에 그런다고 소용없을 줄을 알았기에


다시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괜히 구절초를 대접해서 화를 돋운 측면도 있는 것 같았다.



<윤정> “어젠 갑작스레 맞아서 많이 당황했지?”


<정인> “제가 잘못한걸요.”



정인은 또 무슨 ‘불상사’가 날까 하여 납작 엎드렸다.



맞은 것으로 치자면 지금껏 살아온 인격이 짓이겨진 것이니 그 모멸감이야 더 말할 것이 없겠지만,


모멸감이 남아 있고서야 윤정이 있는 곳에 발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장소에, 또 그런 사람 밑에 재차 자신의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스스로에게 모멸감을 내세울 구실이 없었고,


이 일에 관하여 말 한마디 얹기조차 또한 민망하였다.



<윤정> “자, 여기 약속한 10만 원.”



윤정은 약속한 ‘맷값’을 건네주었다.


약속은 어제 주어야 했으나, 정인이 받아가지 않았으므로 오늘 주는 거라고 말했다.



<정인> “감사합니다.”



정인은 그 돈을 두 손으로 받았다.


그녀는 또 하루가 지났다고 생채기 난 자존심이 많이 아문 듯이,


혹은 원래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자존심이 많이 무뎌진 듯이 그 돈을 넙죽 받는 자신이 한편 안쓰러웠다.






2시쯤 되어 윤정은 컴퓨터 방에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부팅이 되지 않았다.


늘 보던 하늘색 바탕에 WINDOWS98 부팅화면은 뜰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모니터는 시커먼 화면에 알 수 없는 메시지만 뱉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몇 번을 껐다 켜기를 반복했지만 컴퓨터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윤정은 정인을 불렀다.



<윤정> “아줌마, 도대체 뭘 어떻게 건드렸길래 컴퓨터가 이래? 응?”


<정인> “전, ······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요.”



정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또 따귀 맞을 생각을 하니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녀는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윤정>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여기 중요한 자료가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데, 응?


그거 다 날려 먹었잖아!


더군다나 그 태도는 또 뭐야?


문제를 만들어놓고 이제 나는 모른다, 될 대로 되라야?


어디서 눈을 감아 감기를, 응?”



<정인> “사모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 먼지만 닦아냈을 뿐이에요.


뭘 건드린 건 정말 아무것도 없다구요.”



정인은 울 듯이 말하였다.



<윤정> “이거 오늘 내로 고쳐놔!”


<정인> “사모님도 아시다시피 전 컴맹인데요. 이걸 어떻게 고치나요.”



IT를 조금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을 버는 세상에 남의 집 가사도우미 하는 사정도 몰라주고


컴퓨터를 고치라 하는 윤정이 정인은 매정하다 못해 야속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컴퓨터가 먹통이 될 만큼 뭘 건드린 것이 없는데


먹통 된 책임을 지라 하니 속에서 나는 열불을 식히자고 눈물방울을 하나, 둘 떨구고야 마는 자신이 안쓰러웠다.





=== 주석


註1. 고구마와 같은 구근식물을 일컫는다. 구근식물은 뿌리 모양이 마치 덩어리와 같이 생긴 식물들을 말한다.


註2. 벚꽃의 꽃말은 꽃마다 다양하다. 그중 수양벚나무의 꽃말이 ‘속임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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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맷값 23.05.20 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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