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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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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5.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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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만남-윤정, 유산하다...

DUMMY

속에서 부아가 치미니 마음 가는 대로 화는 냈어도, 그의 생각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것이었다.


혹시 그가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물어올지도 모르니 윤정이 거짓말을 부탁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까지 생각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간호사들의 말을 그대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윤정의 일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부탁을 했든 말든


어차피 들통날 일, 지금 들춰내서 좋을 일이 없었다.


잘못하여 원치 않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에게 꽤나 곤란한 일이 될 터이니,


오직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태휘> ‘여자의 임신이란, 10개월이 한계라서 참 다행이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태휘> ‘10개월이 지나고도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 넌 죽는다.’






- 5 -




- 1999년 7월(김윤정의 생)




그해 7월은 유난히도 더웠다.


윤정은 비록 태휘가 볼 때만일지라도 임신 패드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위와 배에 덧댄 무게로 인한 힘듦은 남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더운 것, 쓸데없이 배가 무거운 것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한여름 더위에 한겨울 니트 티셔츠처럼 그녀의 마음을 뒤덮은 걱정이었다.



이달 윤정은 계획대로 니트 티셔츠의 소매를 반은 덜어내듯


오랜 근심 하나를 덜어낼 생각이었다.



먼저 그녀는 연일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


그녀가 그리한 것은 단지 더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리함으로써 매끄러운 피부를 푸석푸석하게 해서


심신에 뭔가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함이었다.



7월도 중순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근처 산부인과로 찾아가 입원을 했다.


그리고 태휘에게 전화를 걸어 입원 사실을 밝혔다.



<태휘> - 왜 갑자기 입원했는데?



태휘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윤정> “내 아기, 내 아기 유산됐어. 죽었단 말이야.”



윤정은 울먹였다.


하지만 태휘는 지난 5월 병원에서 그녀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태휘> - 유산이라고? 왜?


<윤정> “아마도 저번에 굴러서 그런 것 같아.”


<태휘> - 조심하지 않고.


<윤정> “조심했지. 하지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태휘> - 미안해. 그때 내가 밀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태휘는 윤정이 비록 울먹이고는 있어도 진짜 아이를 잃은 엄마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다.


10개월 뒤 ‘자백’할 줄 알았더니 ‘유산’이란 수를 들고나온 것은 뜻밖이었다.


다만 그는 그녀가 언제까지 속일지 보고 싶어서 그 ‘수’에 속는 척 받아 준 것이었다.



<태휘> - 이따가 저녁때 찾아갈게. 일단 몸조리하고 푹 쉬고 있어.



윤정은 다른 사람이 봤으면 미친 여자라고 했을 정도로 싱글벙글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가 아니라


퇴근시간까지 기다려 병원에 들른다는 말에 화를 내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러나 마나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이렇게나마 임신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듯 마음이 가벼워진 까닭이었다.


그리고 아랫배도 상당히 가벼워졌다.


에어컨을 안 틀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배도 시원해졌다.


물론 진짜 안 틀면 더위 먹어 죽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이것이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될 줄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날 저녁 태휘는 콜라와 치킨, 마른오징어를 들고 윤정이 입원한 병실에 들렀다.



그녀는 못 먹었는지 다소 말라 보였다.


피부가 푸석푸석해서 더 그래 보였다.



그는 준비해 간 음식을 병상 식탁에 내려놓고 말했다.



<태휘> “먹어.”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


콜라와 닭, 오징어는 임부들이 기피하는 음식이었다.


콜라를 먹으면 아이 피부가 검어지고 닭을 먹으면 아이가 닭살이 되고


오징어를 먹으면 아이 뼈가 흐물흐물 무를 수 있다는 이유였다.


비록 속설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간 윤정은 그가 보는 앞에서는 이 음식들을 먹지 않았으며,


그 역시도 이들 음식은 권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태휘가 이 음식들을 사 오고 자기 앞에 펼쳐놓는 것을 보니,


이제 유산했으니 그간 못 먹은 음식들을 먹으라고 권하는 것인지,


임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러니 유산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 처신 잘 하라는 뜻으로 그리하는 것인지


그녀는 다소 헷갈렸다.



<윤정> “그간 너무 먹고 싶었어. 고마워.”



그녀는 일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한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태휘는, 유산의 슬픔보다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기쁨이 더 큰 듯 말하는 윤정이 오히려 소름이 끼쳤다.


더구나 아이를 잃은 엄마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다니.



윤정은 먼저 치킨 은박지를 열고 콜라 뚜껑을 땄다.



<태휘> ‘하기는, 그냥 치킨이잖아.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지도 모르겠네.’



달리 보면 ‘유산한’ 아내에게 겨우 치킨 한 마리 사주는 남편에게 그래도 고맙다고 말해 주는 아내가


더 마음이 넓다고 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임신부터 유산까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하는 윤정이 가증스러운 것은


아무리 너그러워지려고 해도 도리가 없었다.



<윤정> “자기도 먹어.”


<태휘> “괜찮아. 많이 먹어. 난 배불러.”



윤정은 확신했다.


태휘는 그녀가 임신을 했고 한정식집 그 일 때문에 유산한 줄로 알고 있다고.


이렇게 되면 ‘유산’으로 인하여 그녀가 태휘에게 ‘떳떳하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그녀는 이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한편 윤정의 ‘유산’ 소식은 정인에게도 들어갔다.


그녀는 한정식집에서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항상 두 사람에게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물론 태휘는 그때 보라매공원에서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이 말을 정인은 믿지 않았었다.


당연히 따귀를 그렇게 맞았으니 윤정이 임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뒤에 벌어진 일들과 연계해 생각하면 ‘따귀 사건’은 태휘도 그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녀 자신에 대한 고의의 패륜 행위로 여겨질 뿐이었다.



<정인> “차라리 날 떼어버리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랬니?”



그러니 정인으로 치면, 태휘와 윤정의 유산은


그녀에게 한 ‘짓’에 대한 대가로 벌 받았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는 ‘유산’ 이후에 있을 일들을 생각했다.



먼저 태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인> “오빠. 오늘 시간 있어?”


<태휘> - 무슨 일인데? 급한 일이면 만들어 볼게.


<정인> “그렇게 급한 건 아니고,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어서 그래. 기왕이면 오늘.”


<태휘> - 그럼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자.


<정인> “이따 저녁 7시까지 보라매공원 근처 한정식집에서 봐.”



정인은 그때 먹지 못한 ‘만찬’을 먹기 위해 굳이 ‘한정식집’을 택했다.



<태휘> - 한정식? 그래, 이번엔 근사하게 대접할게.


<정인> “저번에 나한테 말한 거 잊지 않았지?


윤정 씨랑은 이종사촌 관계일 뿐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거 확인시켜 줘.


오늘 호적부랑 주민등록등본 보여줘. 그러면 믿을게.”



<태휘> - 날 못 믿는 거니? 이거 섭섭한걸.


<정인> “그러니까 믿게 해 달라는 거야. 봄(태휘의 말)을 못 믿는 마음에서도 눈(의심)은 녹지 않아.”


<태휘> - 알았어. 이따 전화할게.



물론 정인이라고 사실혼(註1)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결혼식과 혼인신고 사이에 무수한 세월들이 있을 수 있음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는 법적인 부분을 보고 싶었다.






저녁이 되어 어둑어둑할 즈음, 정인은 약속한 한정식집으로 가는 보라매공원 옆길을 걷고 있었다.


한낮의 7월 더위는 사람을 불판 위에 올려놓고 사르는 것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살을 태우는 듯 따끔따끔하지마는,


무엇보다 습기가 덜하니 끈적끈적하거나 찐득찐득하지 않아서


저녁이면 오히려 시원하니 상쾌하기까지 했다.



<정인> ‘하지만 끈적끈적한 사람들, 내 주위엔 많지.’



그녀는 가마솥에 넣어 삶고 싶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수육을 하기 위해 가마솥에 고기를 넣었다 꺼내기를 반복하듯,


머릿속에서 태휘를 그 속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공원 근처 한정식집에 다다르자 먼저 도착해서 그녀를 기다리는 태휘가 보였다.



<태휘> “와 주었구나?”



태휘가 말했다.


말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평하게 했어도 그는 정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꽤 노심초사했다.



한정식집은 잘 꾸민 민속촌 속 한옥처럼 지붕과 처마, 기둥과 서까래가 위엄이 있었다.


간판의 고풍스런 한자 말고는 세월의 더께를 느낄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그래 봐야 지은 지 고작 10년도 안 되는 것이겠지만.



<정인> ‘평소엔 무명천 옷을 입고 다니다가도 여기를 통과하려면


꼭 당의를 갖춰 입어야 들여보내 줄 것만 같은 기분이야.


일종의 통행세랄까.’



정인에게 한정식집은 그런 느낌이었다.






안에 들어서자 홀이나 방이나 빈 테이블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손님으로 그득그득했다.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이다 보니 자리를 오래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두 사람은 굳이 방으로 비집고 들어가 한 상을 차지하고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정인> “윤정 씨는 잘 지내시지? 아기도 잘 크고 있고?”



정인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 주석


註1. 사실혼은 일반적으로는 혼인신고도 없고 결혼식도 치르지 않았으며 다만 혼인관계의 외양만 갖춘 부부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법적으로는 혼인신고 없는 모든 혼인관계를 가리킨다. 즉 혼인신고가 있는 법률혼 이외의 모든 것을 ‘사실혼’이라 한다.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마치기 전까지의 혼인관계 역시 ‘사실혼’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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