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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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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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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의 바다-그 바다, 받아들이기 힘든 전생의 설정

DUMMY

4. 도림의 바다





- 1 -




짧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도림은 생각에 잠겼다.(註1)



1997년 12월 이후로부터 아기를 F 보육원 앞에 놓고 떠날 때까지,


짧은, 하지만 또 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생으로 고꾸라진 때로부터 하루가 지난 지금도 그때의 생각, 감정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짧은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지만,


회귀해서 전생을 다시 살아야 하는 ‘긴 여정’의 출발점에 선 것이기도 했다.


또 그 여정은 단순히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천반산의 ‘그’가 바라고 그녀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돌려놓기까지 해야 온전히 마쳐지는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지금 편안하고 푹신한 차 안이 아니라


돌풍이 휘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배 -


거의 난파선이 된 배 위에 서서 풍랑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며


어서 빨리 구명조끼라도 찾아 입어야 산다는 절박한 상상에 빠지기가 일쑤였다.



<도림> ‘바다에도 이름이 있다지?’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곱고 아름답게 화장한 바다의 이름은 ‘여수’(麗水)이다.


같은 한자를 쓰는 지명 ‘여수’와는 무관하게, 그 바다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온순하고 편안하고 쉽다.


그래서 파랗다.(註2)


그러나 상처 입은 영혼에게 ‘여수’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도림> ‘여수의 파란 바다가 아닌 바다도 있을까? 지금 내가 떠 있는 바다가 여수라 하기엔······.’



그녀의 상처를 오롯이 담고 있는 지금 이 바다는,


그러하기에 ‘여수’의 파란 바다와는 달리 검었다. 검붉었다.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고 풍랑으로 해일이 이는 이 바다의 이름은


그래서 ‘고해’(苦海)라 해야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인생을 ‘고해’라 일컫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와 같이 누구나 가슴에 상처 하나씩은 있을 모든 사람들.



전날 낮 그녀가 섰던 망상 바다가 그랬다.(註3)


김윤정으로서의 삶을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다 보니 ‘고통’에서 만났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욕심, 즉 그 욕망의 투영이었던 루비 목걸이와 에메랄드 귀걸이,


사파이어 반지를 태휘의 죽음과 맞바꾸어 받은 셈이었으니 당연했다.


더욱이 그녀가 정인에게 했던, 또는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에게 저질렀을지도 모를 몹쓸 짓들이란


사람들의 시선에서 낯을 가리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운 것이었으니.



망상 바다도 먼저 갔던 추암(註4)(湫岩) 바다,


그 촛대바위가 선 녹색 바다처럼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의 색깔은 푸르렀다.



<도림> ‘어제 그 푸른 바다의 이름은 차라리 <소주>였으면 좋겠네.’



취하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 1997년 12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그 겨울 그 바다, 그 화장실에서 도림은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거푸 세수를 했다.


거울을 뚫어지라 쳐다보면서도 그녀는 물을 잠글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다.


추운 날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얼굴이 발개졌고 낯이 너무나 뜨거웠다.



물론 그렇다고 수도꼭지를 뜨거운 물 표시 쪽으로 튼다고 화장실 수도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김윤정의 생으로 회귀하게 된 것은


신도림으로 살 때 겪었던 그 숱한 괴로움이 전생의 삯이라는 천반산 죽도관문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하여, 도대체 무슨 잘못을 그리도 많이 저질렀기에


생을 버리고 싶기까지 한 고통을 -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 주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천반산 목소리에게, 아니면 그 누구에게라도 따져보고도 싶었다.



부끄러웠다.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특히 정인에게 했던 일들이 참을 수 없을 만치 수치스러웠다.



<도림> ‘족제비 낯짝이 원래 이렇게 빨갰나?(註5)


이제 와서 채정인한테 공감하는 건 또 뭐야.


이유야 어떻든 이 사람(태휘)을 죽인 여잔데.


같은 여자라서? 에휴, 옛날 생각은 그만하자.


전생에 떨어진 지 하루가 지났다고 옛날이라니, 그것도 웃기네.’



그녀는 옆에서 운전을 하는 태휘를 슬쩍 돌아봤다.






어쨌거나 이른바 ‘전생의 업’이란 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하게 됐다.


이제 원하는 어느 때, 또는 윤정이 죽기 전까지 신도림으로서 김윤정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그녀는 기억에 없는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김윤정의 삶이란, 신도림의 출생이란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멸한 기억,


그래서 ‘비눗갑’으로만 존재하는 그런 시간들이라고 해도 틀릴 게 없었다.



말하자면 윤정의 삶은 그녀 자신,


즉 도림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는 완전한 타인의 삶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전생 회귀로 인하여 기억이 공유되고


윤정이 ‘과거의 도림’이 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도림> ‘나의 김윤정으로서의 역할은 마치 동상에 걸린 발가락을 떼어내는 것처럼 아프기만 하구나.


새카맣게 썩어버린 발가락을 또깍또깍 분질러내는 것이야 감각이 없으니 일도 아니지만,


그런 줄 알고 잘라낸 발가락이 감각이 되살아나니 너무 아프다.’



그 되살아난 기억이 그녀를 아프게 찔러댔다.


그것은 아기를 F 보육원 문 앞에 놓고 돌아 나서는 순간까지의 기억이었고,


그 이후로는 기억에 없었다.


그때가 2001년 2월이고 도림으로 태어난 것이 2002년 6월이니,


아마도 오래지 않아 사망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사망한 이후부터 태어나기까지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 -


혹시 귀신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는지 - 역시 기억에는 없었다.



그녀는 도림으로서 읽었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을 떠올렸다.



그 소설에서 ‘진리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 프롤(최하층계급)을 비롯한 다른 진리부의 사람들까지 - 의 기억을 조작한다.


주인공 윈스턴 역시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일을 하여 밥을 먹고 산다.



그에 비추어보자면 지금의 도림은 2018년 사실상 ‘빅브라더의 세상’에서 온 터에,


그녀의 기억 - 전생의 기억 - 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으면 싶기도 했다.


잃어버린 5년의 기억과 5년을 잃어버렸다는 자각(기억),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천반산의 기억과 윤정의 기억까지, 차라리 그녀가 기억하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이었으면.



하지만 바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기억은 ‘덫’과도 같아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잡힌 발목을 끊을 듯 상처를 내며 조여들기만 할 뿐이므로,


거기서 도망치기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도림> ‘그래서 이불킥들 하는 모양이지.’



도림은 풋 하고 실없이 웃어버리고 말았다.



<도림> ‘그러네. 기억이 참 무섭네.


내가 사실인 줄로 아는 것이 실상은 거짓이고 착각이었다고 해도 그걸 내가 인지할 수가 없잖아.’



가령 천반산에서의 기억이 원래는 사실과 다르고 단지 조작된 것일 뿐이라고 하여도,


이제부터 도림은 그녀가 기억하는 천반산 목소리의 말대로 업을 쌓지 않기 위해,


또는 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윤정의 생을 돌이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루 전, 그 화장실에서 도림은 문득 하얀 포말을 내뿜으며 쏟아지는 물줄기를 내려다보았었다.


파도가 만들어내는 포말과도 같이 감정 기복이 심한 그녀 자신에 비하면 수도꼭지의 물줄기는 참 무심했다.



수도꼭지를 내리자 무심한 물줄기도 멈추었다.



연후에 그녀는 건물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었다.



<도림> ‘아마도 저 사람은 이런 내 모습, 아니 이런 김윤정의 모습을 다 알고 있겠지?


명색이 남편인데.


아, 지금은 남친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태휘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도림> ‘하긴, 저 사람도 그날 죽었고 또 내생이 있을 텐데,


어쩌면 다음 생에 태어나서 잠시 시간이 멈추었을지도 모르는데


내생의 <그>와는 기억이 공유되지 않을 것 아니야?


그럼 완전한 타인 아니냐고.


김윤정의 삶을 <돌이켜>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네.’



천반산의 목소리는 사람의 생사는 변경할 수 없다고 했었다.


궁금하긴 했다.


김윤정의 생에서 정인이 죽지 않았으니, 적어도 김윤정의 기억에는 정인이 죽는 장면은 없으니,


정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그녀가 신도림의 생으로 돌아갔을 때 정인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기억이 바뀌어 있을지.



어쨌거나 저만치서 도림, 아니 윤정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 있는 태휘가 달리 보였다.



결국은 정인에 대한 갑질이 없다면, 그로 인한 태휘의 죽음이 없다면,


그래서 그가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것이라면 내생에서의 고통도 없어진다는 말이라고 도림은 받아들였다.


별 의미는 없겠지만, 굳이 찾자면 내생, 곧 신도림의 삶을 편안히 사는 방편은 되는 셈이었다.





=== 주석


註1. 전생으로 회귀한 이튿날이다.


註2. ‘파란’ 색깔과 ‘푸른’ 색깔을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푸른 하늘’이나 ‘푸른 잔디’, 또는 ‘파란 하늘’이나 ‘파란 잔디’와 같은 용례로 보면 둘은 구분하기가 꽤나 어렵다. 작가는 풀과 같은 녹색 계열을 ‘푸른’ 색으로, 바다와 같은 청색 계열을 ‘파란’ 색으로 구분하여 썼다.


註3. 전생으로 회귀한 날이다. 전생으로 회귀하여 떨어진 바다는 망상해변으로 설정하였다.


註4. ‘촛대바위’라는 뜻이다.


註5.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는 말은, 예의와 염치가 없이 뻔뻔함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 도림은 윤정은 족제비에게도 있는 낯짝이 없어 후안무치의 행동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살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이제 그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을 ‘낯짝을 되찾은 족제비’에 비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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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1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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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남-손주를 노리는 할머니 23.05.25 8 0 11쪽
30 만남-꼭 살아남으세요... 23.05.24 6 0 10쪽
29 만남-태휘의 사망 23.05.24 6 0 10쪽
28 만남-이제 그만 경영에서 물러나시는 게... 23.05.23 7 0 11쪽
27 만남-윤정, 유산하다... 23.05.23 7 0 10쪽
26 만남-그 여자 누구야? 23.05.22 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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