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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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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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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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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DUMMY

그때 태휘는 지후의 간곡한 요청을 단칼은 못 돼도 ‘녹슨 면도칼’ 정도로 완곡하게 거절했었다.






<태휘> “무슨 기사를 내려고 하셨습니까?”


<지후> “사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협상이 타결된 뒤로 정리해고다 뭐다 해서 실직자가 급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지후는 태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가 말한 ‘협상’이라는 것은 IMF와 한국 정부의 외화지원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을 일컫는 것이었다.


이 협상으로 한국은 550억 달러를 긴급 지원받을 수 있었다.



태휘는 지후의 담배 연기가 단지 협상 타결로 인한 한국의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X 매트와 그 자신의 앞날에 낀 ‘안개’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나름 골초였지만, 이번만큼은 지후의 연기가 썩 달갑지 않았다.


별스러운 일이었다.



<지후> “그래서 각 기업마다 정리해고 현황과 실직자들의 고통에 대해 인터뷰 기사를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태휘> “아이템 좋군요.”



태휘는 마음에도 없는 말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지후> “그런데 뜻밖의 월척이 걸리리라곤 저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사진 보셨죠?”



태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저 타들어 가는 마음으로 지후의 입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품에서 사진 한 장을 더 꺼냈다.



<지후> “이걸 보시죠.”



1998이라고 적힌 형상이 뚜렷한 것으로 보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건 달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IΡϤ8” 형상에는 “IMF”라는 글자의 형상이 뚜렷이 들어가 있었다.



<지후> “왜 이런 걸 걸어놓았는지 물어봤습니다.


대답은 알아서 생각하시죠.


상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태휘> “왜 이런 것을······?”


<지후> “제가 궁금한 건 그겁니다. 여기에 과연 생산공장 직원들의 마음만 들어가 있었겠느냐?”


<태휘> “그래서, 내가 걸라고 시키기라도 했단 말이요 뭐요?”



태휘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지후>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직접 사주하셨습니까?”



지후는 ‘사주’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는 생산공장 직원들이 대량실직 시대에 일자리를 가진 것만으로도


상대적으로 우월감이 대단히 상승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태휘> “그래, 바라는 게 뭐요?”


<지후> “뭘 바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다만 이런 게 기사로 나간다면 X 매트에도 타격이 심대할 거예요.


그러니 그런 게 나가기 전에 사장님께 귀띔이라도 해 드려야 도리가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태휘> “반론권 보장치고는 꽤 세게 들어왔군. 물론 그게 다는 아니겠지.”



태휘는 지후의 말대로라면 굳이 소포를 보낼 이유는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지후> “맞아요. 그게 다는 아니에요.


저는 칼집 속의 칼을 찍어 보여 드린 거예요.


앞으로 칼이 칼집에서 나오고 싶을 일이 많을 테니,


그때마다 잘 봐 달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태휘> “이 일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지후> “당연히 생산공장 직원들이 알고 있죠. 그리고 그 직원들을 만난 제가 압니다.”


<태휘> “좋습니다. 칼집에서 칼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만약에 칼이 뽑힌다면 그 칼이 내 목만 겨누지는 않을 테니.”






지후를 돌려보내고 태휘는 상념에 잠겼다.



IMF의 구제금융이 확정되던 날 Q 신문에는


붉은 벽돌로 쌓은 르네상스식 2층 건물(註1)을 뒤로하고 앉은 노인의 사진이 실렸었다.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허옇게 센 머리를 붙잡아 두기라도 하려는 듯 눌러쓴 모자는 땟국물에 전 잿빛이었고,


꼬깃꼬깃한 옷과 시든 풀로 엮은 듯한 모포 한 장, 거무튀튀한 검버섯이 핀 얼굴, 초점 잃은 눈동자,


그리고 100원짜리 동전으로 1만 원을 담기에도 부족해 보이는 돈 그릇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망의 깊이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었다.



그 노인의 뒤로 유독 저녁놀은 붉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때 검은 바탕에 흰 고딕 글씨로 “IMF 지원금 550억 달러 확정”이라고 쓴 기사가 1면 머리기사였는데,


사진은 그 기사의 제목과 묘한 대비를 이뤘었다.



비록 다른 기사였지만 ‘나라의 희망’과 ‘개인의 절망’을 교묘히 병치시킨 그 기사,


그 사진이 바로 허지후의 ‘작품’이었다.



그 기사와 사진을 보고 누군가 항의했다는 말을 태휘는 듣지 못하였다.


교묘한 편집이었어도 그대로 기사의 취지를 드러내 주는 절묘한 사진,


그런 사진을 두고 진실 여부를 판가름할 여유나 이에 항의할 여유 따위는 당시 사람들에겐 사치였다.



<태휘> “그만큼 사진의 힘은 막강하지.”



태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후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그대로 진실은 아닐 터였다.


그의 고민은, 사진 한 장이 전하는 ‘진실’과 정반대되는 사실을 납득시키기는 천 마디 말로도 모자란다는 데 있었다.



하여 이 일을 입막음하기 위해 촌지를 쓰느냐,


아니면 X 매트의 파산을 감수하고라도 사진이 거짓이라는 ‘투쟁’을 감행하느냐 사이에서,


그는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후는 Q 신문사에서 해고된 이후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이 Q 신문에 실리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만도 없었다.






- 3 -




지난 1997년 7월.


Q 신문은 재정적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을 이유로 많은 기자들을 해고했다.


구실은 신문사 재정 건전성 확보였다.


말하자면 ‘구조조정’인 셈이었다.


주위의 신문사에서도 해고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구조조정’에 반발하려던 기자들도 명분은 부족했다.



물론 Q 신문의 목적은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고 ‘영혼을 갈아 넣은’ 기사를 쓰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지후가 포함되었다.



그때 지후는 눈앞이 캄캄했었다.


결혼해서 가정도 꾸린 데다가 이제 막 아이도 생겼기 때문에 실직은 어떻게든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기자의 책무’니 ‘기자의 양심’이니 하는 말들은 그저 배고파 보지 않은 자들,


세상의 찬 바람을 쐬어보지 않은 자들이 부리는 사치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풀칠하기 위해 노력은 해 보겠지만,


몇몇 기업들의 용돈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 뻔해 보였기에, 희망은 점점 작아지기만 했다.






그때 그가 주목한 것이 X 매트였다.



지후는 Q 신문사에 앞으로 3개의 큰 특종을 할 터이니, 연후에 반드시 복직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지금만은 못하더라도 간간이 Q 신문으로부터 용돈도 받아 쓸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다.



Q 신문이 이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 4 -




태휘는 생산공장 공장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경축, IMF 구제금융”이라니, 당치않은 일이었다.


설령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드러내놓고 그런 걸 걸어서는 곤란했다.



<태휘> “이 이사님, 나 도 사장이에요. 공장 건물에 플래카드는 왜 걸었습니까?”


<공장> “플래카드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태휘> “‘경축, IMF 구제금융’이라고 쓴 PC(placard, 플래카드) 말이에요. 왜 거셨느냐구요?”


<공장> “뭐, 뭐를 경축해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그런 거 건 적 없습니다.”


<태휘> “이사님이 안 거셨다고 해도 누군가 걸었을 거 아닌가요? 누구예요 도대체?”


<공장> “사장님, 제가 안 걸었다는 게 아니라 회사에 그런 물건이 걸린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태휘> “그래요? 그럼 제 손에 들린 이것은 뭔가요?”


<공장> “무슨 말씀이신지?”


<태휘> “공장 건물에 ‘경축, IMF 구제금융’이라고 쓴 PC가 떡하니 걸린 사진이 지금 제 손에 있는데,


이사님, 그렇게 발뺌하신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하필이면 신문사 사진기자한테 걸렸어요.


이 사진이 신문에 나간다면 우린 끝이란 말입니다.


이제 이 일을 어떡할 거냐고요?”



<공장> “그, 그런 사진이 있다고요? 그럴 리가요. 정말입니다. 저희는 그런 거 건 적이 없어요.”


<태휘> “최근에 공장에 다녀간 사람이 있나요?”


<공장> “며칠 전에 Q 신문사 기자가 다녀갔습니다.


취재기자랑 사진기자가······ 이름이, 허지후라고 네, 생각났어요.


그러고 보니 허지후한테 사진을 받으신 모양인데 맞나요?


아뇨, 지금도 그렇지만 허지후가 다녀갔을 때에도 공장 건물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어요.


제가 장담하는데 사장님께서 농담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그건 조작된 겁니다.”



<태휘> “알겠어요. 괜히 의심해서 미안해요. 이틀 뒤 방문하도록 할게요.”



태휘는 ‘IMF를 품은 1998년 달력’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공장에 방문했을 때 허지후가 말한 달력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그런 달력이 있다면 플래카드도 진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에,


그때를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태휘는 불시에 공장에 방문했다.


공장으로 가면서 전화를 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잠깐 일기도 했다.


아무래도 ‘진실’을 알자면 허를 찔러야겠지 싶어서였다.


그런데 그렇게 방문한 공장에는 허지후가 말한 달력이 떡하니 걸려 있는 것이었다.



태휘는 공장장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허지후에게 받은 ‘IMF를 품은 1998년 달력’ 사진을 건네며 따져 물었다.



<태휘> “이 사진 보세요. 허지후에게 받은 것입니다.”


<공장> “······?”



공장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리어 태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보라고 해서 봤는데 뭐가 문제냐는 눈빛이었다.





=== 주석


註1. 옛 서울역. 1997년에 역사로 쓰던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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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도림의 바다-사진, 왜곡하신 이유가 뭐예요? 23.05.28 9 0 11쪽
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1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0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0 0 11쪽
33 도림의 바다-그 바다, 받아들이기 힘든 전생의 설정 23.05.26 8 0 10쪽
32 만남-득남을 축하합니다!! 23.05.25 9 0 11쪽
31 만남-손주를 노리는 할머니 23.05.25 8 0 11쪽
30 만남-꼭 살아남으세요... 23.05.24 5 0 10쪽
29 만남-태휘의 사망 23.05.24 5 0 10쪽
28 만남-이제 그만 경영에서 물러나시는 게... 23.05.23 7 0 11쪽
27 만남-윤정, 유산하다... 23.05.23 6 0 10쪽
26 만남-그 여자 누구야? 23.05.22 6 0 11쪽
25 만남-오빠, 언제 결혼했어? 23.05.22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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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만남-벗어! 23.05.21 9 0 11쪽
22 만남-맷값 23.05.20 5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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