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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838
추천수 :
21
글자수 :
373,950

작성
23.05.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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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샤토피작으로 수작부리던 때

DUMMY

그녀는 운명을 다시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도림> “아니, 2000년 8월에 해. 그때까지 계획을 다 세워놨어.


물론 중간에 결혼을 하지 않는 걸 전제로 해서 말야.”



<태휘> “2000년까지는 기다리고 싶지 않아. 아니, 내가 힘들어.


그러니 아까 얘기한 대로 8월에 하자.”



<도림> “2000년 8월까지 미뤄 주니까 도리어 잘 됐다고 말한 게 누군데 그래?”


<태휘> “처음엔 그랬지. 근데 생각해 보니까, 군대는 한 번이면 족하겠더라고.


앞으로 남은 2년 2개월을 기다리려니, 너무 힘든 거야.


하필 또 군 복무 기간하고 똑같잖아.


세상에서 가장 느린 시계가 국방부 시계인 건 너도 알 거야.”



<도림> “8월이면 두 달밖에 안 남았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태휘> “넌 몸만 와.(註1)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소녀 도림은 머뭇거렸다.


17세의 결혼이 두렵기도 했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겁도 났다.


한편으로는 다른 일로 태휘를 떠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도림> “그러면 사파이어만으로는 부족하지.


내가 루비랑 에메랄드하고 사파이어를 해 달라고 했는데, 고작 사파이어를 해주고 결혼해 달라고?”



<태휘> “루비랑 에메랄드는 다음에 해줄게.


일단 오늘은 내 프로포즈를 받아 주면 안 될까?


루비, 에메랄드 때문에 프로포즈를 거절한다면 내 사파이어가 너무 무안해지잖아.”



<도림> “좋아. 그럼 8월달에 결혼하는 걸로 해. 대신 아까 말한 대로 난 몸만 갈 거야.”






두 사람은 윤정의 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1998년 8월 결혼에 이르렀다.


그리고 때가 때이니만큼 제주로 간소한 신혼여행을 떠났다.



<태휘> “내가 정인이 널 사랑한 게 아니라 L 식품과 그것을 물려받을 너의 지위를 사랑했나 보다.


그건 미안하다. 날 용서하지 마라.”



태휘는 제주에서 정인을 떠올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 10 -




- 1999년 1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1월은 도림에겐 중요한 달이었다.



윤정의 생에서 태휘에게 샤토 피작을 따라 주며 수작을 부리던 때인데,


술을 어떻게 마셨는지 ‘떡’이 되는 바람에 당시 술 마셔 기분 좋은 지각을 자각하지 못하였고,


기억조차 없는 딱한 신세가 됐었다.



도림의 생에서는 기필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녀는 알고자 하였다.


하지만 난감한 것은, 윤정의 때와 같이 ‘벨벳’을 입고 샤토 피작을 따라 주기가 난망했다는 것인데,


지금 그녀는 윤정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 이미 전생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비록 ‘운명’이 그녀를 윤정 때와 같은 길로 끌고 가고자 코에 낚싯바늘을 꿰고 끌고 가고 있었어도,


두 사람은 32세와 17세가 다른 만큼 달랐다. - ‘술자리’를 마련하기조차 어색했다.



그렇다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성격 괄괄한 아내’가 아니라 ‘17세 소녀’로 남아 있으면


윤정의 때와는 다른 흐름으로 운명이 그녀를 끌고 갈까 싶어 이래저래 고민이었다.



<도림> “어느 만큼 미친년이 돼야 하나?”



일전에 뒷조사를 해 두었던 정인은 윤정의 생에서처럼 여전히 아름다웠고 도도했고


루비 목걸이와 에메랄드 귀걸이를 차고 있었으며, 옥탑방에 살고 있었다.


아직 ‘흐름’은 같았다.



그녀는 늘 ‘다른 흐름’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감으로 마음이 짓눌렸다.


‘흐름’이 달라지면 ‘업’의 문제를 해결할 기회도 사라진다는 강박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운명을 시험할 생각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험을 하면 할수록 운명이 존재한다는 믿음만 굳어질 뿐이었다.


하여, 그녀는 윤정으로 돌아가 ‘괄괄한 아내’가 되기로 했다.



물론 도림의 마음으로 잘 될 까닭이 있었겠는가마는.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운명의 그 날이 밝아왔다.



도림은 저녁때 태휘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때처럼 왼쪽 쇄골과 어깨를 드러낸 채 색깔만 아슬아슬한 레이스 레드벨벳 나이트가운을 입고 얼굴을 황도 비슷한 색깔로 화장했다.


물론 회귀한 생에서는 처음 하는 ‘패션’이었다.



윤정은 이날을 준비하면서 반드시 태휘와 관계를 맺으려고 했었다.


당연히 소녀 도림은 삼촌 같은 남자와 관계를 한다는 것이 적잖이 겁이 났지만,


그보다는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자 하는 욕망이 두려움보다 컸다.


더욱이 천반산 목소리는 사람의 생사는 결단코 바꿀 수 없다고 했으니,


만약 전생에서 관계가 있었다면 회귀한 생에서도 반드시 관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녀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았다.


걱정이 안 돼서 그런 게 아니라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잘 될 까닭이 있었겠는가마는.



그날 밤 늦은 시각, 초인종이 울리자 도림은 태휘임을 직감하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현관으로 사뿐사뿐 걸어 나갔다.


윤정 때 그랬던 것처럼.



<태휘> “나 왔어.”



그의 첫 마디였다. 역시 그는 ‘복숭아’는커녕 ‘나이트가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도림> “자기야, 이제 와? 고생 많았지?”



도림은 ‘자기야’에 10년 치 애교를 섞어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태휘의 가방을 받아 들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태휘는 역시나 뜬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림으로 결혼했을 초기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 며칠 ‘미친 척’ 했다고 소 닭 보듯 할 수 있을까, 그녀는 괜히 섭섭했다.



<태휘> “왜 그래? 평소 같지 않게.


‘자기야’는 또 뭐야. 그 옷 입은 건 또 뭐고? 겨울이야. 추워.”



도림은 생각이 많아졌다. 그때와 같은 흐름이라고 좋아해야 할지,


아니면 이토록 냉정해진 그에게 서운하다 해야 할지.



<도림> “얼른 씻어. 자기하고 플라워 와인 파티 하려고 케잌하고 와인 준비했어.”


<태휘> “저녁 먹었어.”


<도림> “칼로리를 먹자는 게 아니야. 무드를 마시자는 거지.”



태휘도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말을 던져놓고 방에서 편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욕실에서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불이 꺼져 온통 어두운 상태에서 주홍빛 무드등(Mood 燈) 불빛이 이끄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정 때처럼 탁자에 앉은 도림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고


볼은 무드등의 불빛을 바로 받아 제법 짙붉은 홍조를 띠었다.



<태휘> “직접 준비한 거야?”



태휘가 와인이 담긴 잔을 들며 물었다.



<도림> “샤토 피작(Chateau Figeac)이야.”



도림은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대답했다.



<도림> “붉은 벨벳 빛깔이, 맛이 훌륭할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봉긋 솟은 가슴을 그에게 들이밀며 온갖 아양을 떨었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태휘> “음. 언제 이런 안목을 키웠데?”



태휘가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도림> “글쎄. 태초에?”



도림은 까르르 웃었다.


그러면서도 술은 입술만 축였고, 혹시 마시기라도 하면 화장실에서 입안을 헹구어냈다.



<태휘> “취했구나?”


<도림> “아, 아니. 이제 향만 조금 맡았을 뿐인데 취하기는.”



도림은 고개를 내저었다.



한편 윤정 때와는 달리 와인을 따라 달라고 잔을 내밀거나 탁자를 달그락거리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되도록 와인이고 소주고,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온갖 궁리를 다 했다.



<태휘> “아, 내 정신 좀 봐.”



태휘는 도림의 잔에도 샤토 피작을 따라주려고 와인 병을 들었다.


그때 도림은 얼른 잔을 입으로 가지고 갔다.


웬만해서는 마시지 않겠다는 의지였지만,


그의 손이 심각하게 부끄러워진 까닭에, 모양만 우스워지고 말았다.



<도림> “조금만 따라 줘.”



도림이 말했다. 어색한 장면에 분위기마저 어색해질까 싶어서였다.






얼마 뒤 탁자 밑에서 향초가 올라왔고 불이 붙었다.


이어서 그때까지 분위기를 ‘밝혀’ 주던 무드등은 꺼졌다.


촛불은 전등이 내지 못하는 또 다른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기억하는 대목이었고,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없었다.


도림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향초에서 퍼지는 향기는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윤정이 단단히 준비했었다며 감탄하고 있었다.


특히 ‘살아난 기억’이 감동스러웠다.


물론 이 순간 그것이 되살아난 ‘기억’인지, 아니면 도림으로서 새로 사는 ‘인생’인지


그녀는 알지도 못했고 신경 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준비한 와인이 떨어지자 태휘가 소주를 한 잔 달라고 했다.


도림은 소주를 한 잔 따라 주고 자기 잔에도 따라 입술만 축였다.


그러고는 소주가 두어 잔 들어가자 태휘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도림은 온갖 앙탈을 부리며 그를 막고 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하지만 태휘는 그대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버렸다.



<도림> ‘이거였나? 이렇게 끝났던 건가? 그래서 윤정이는 혼자 소주 마시다가 꽐라가 된 건가?’



그렇게 알고 싶었던 그 과거가 이토록 싱거울 줄은 몰랐다. 괜히 허탈해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그날 태휘와의 관계는 없었다는 사실.


물론 윤정의 생과 똑같다는 전제에서 그러했지만, 도림은 신경 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정신이 번쩍 뜨였다.


관계가 없었다는 말의 뜻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윤정은 이날 관계를 맺은 것으로 가정하고 임신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태휘는 이날 관계가 없었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이날로부터 기산한 임신 2개월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의미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 주석


註1. 당시만 해도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여자들의 로망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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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0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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