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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작가 윤도경의 찻집

신도림역 7번출구

웹소설 > 자유연재 > 추리, 드라마

윤도경
작품등록일 :
2023.05.10 10:25
최근연재일 :
2023.06.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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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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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도림의 바다-루비 목걸이

DUMMY

그는 딸의 대답에서 어려운 회사를 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줄 짐작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작년 초 한국에 불어닥친 태풍은 H 그룹이 쓰러질 정도였으니 L 식품은 댈 바도 아니었지만,


겨우 숨만 붙어 깔딱깔딱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몸이 아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안타까워만 했었다.


물론 몸이 아프지 않았더라도 밀려오는 채권의 만기지급청구를 막을 도리는 없었겠지만.



한평생 일구어 온 L 식품이 쓰러지면 그의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생각에


떡 덩이가 명치에 걸려 버티고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숯덩이가 명치에 걸려 타오르는 것처럼 답답하고 쓰라리기만 했다.






한편 그 주 일요일, 태휘는 정인을 데리고 시내 고급 주얼리샵에 방문했다.


샵은 연두색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화관처럼 생긴 리스가 그들을 반기는 곳이었다.



<정인> “오빠, 여긴 보석가게잖아.”


<태휘> “너한테 해주고 싶어서 그래.”


<정인> “그래도······.”



정인은 적잖이 부담스러워했다.


사진을 캐비닛 속에서 잠자게 한 값으로 보석이라니,


IMF 상황이 아니라면 모르겠지만,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태휘> “그냥 받아.”



그러는 사이 샵 주인이 나와 인사를 했다.



<주인> “어서 오세요.”


<태휘> “안녕하세요. 일전에 주문했던 루비 목걸이, 완성됐나요?”


<주인> “물론입니다.”



주인은 보석함에서 루비 목걸이를 꺼냈다.


흰 장갑을 끼고 목걸이를 조심스레 다루며 설명을 했다.



<주인> “보세요. 주문하신 대로 3단으로 돼 있어요.


상단은 W자형 스틱, 중단은 원포인트 조각과 꽃빵 모양으로 장식했고,


하단 루비는 물방울 모양인데 위쪽이 좁고 아래쪽이 살짝 넓어지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루비 주변은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했고요.


77개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체인을 잡고 정인의 목에 걸어 주려 하였다.


그러자 태휘가 이를 제지했다.



<태휘> “잠깐만요. 걸어 주는 건 제 몫이죠. 이리 건네주세요.”



태휘는 목걸이를 건네받아 정인의 목에 살포시 걸어 주었다.



<태휘> “이야, 이쁜걸!”


<정인> “고마워. 내가 이걸 받아도 되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정인은 그녀 자신도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퍽 감격했다.


더욱이 ‘불꽃 사랑’이라는 루비의 의미를 생각하자면,


지금 받은 루비 목걸이의 의미를 조금은 짐작하겠는 것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아빠’, ‘병원’, ‘결혼’ 등의 단어들이 지나갔다.



<정인> ‘그러고 보니 이 루비는 산수유 열매를 참 많이도 빼닮았어.’



정인은 산수유에 관한 그 시(註1)가 생각났다.


열병에 걸린 아들의 열을 내리기 위해 민간에서 해열제 대신 쓰던 산수유 열매를 따기 위해


아버지가 눈밭을 헤치고 따왔다는 그 열매.



<정인> ‘이 루비가 그 산수유만큼은 될까?’



그녀는 계속해서 가슴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괜히 설렜다.


이 순간만큼은 그 산수유를 닮은 루비만큼 귀한 여자이고 싶었다.






- 7 -




- 1998년(회귀한 신도림의 생)



사진의 일로 정인이 태휘와 저녁을 먹고 그에게서 루비 목걸이를 선물 받던 때,


지후는 나름 세게 준비했던 특종이 물거품이 됨으로 말미암아 몹시도 낙담했다.


아내와 딸을 서울로 불러들여 같이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특종을 해야 했다.


그것이 정인의 부탁 아닌 부탁으로 일단은 헛물만 잔뜩 들이킨 셈이 되었다. 일단은.



<지후> “떠난 님(돈)은 언제쯤 돌아오시려나.”



그러나 그러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채비를 하고 집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에 들어섰다.


딱히 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1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가서 신의 은총을 ‘충전’받고 돌아오는 주위의 사람들처럼


그도 신의 은총을 ‘충전’받고 싶었다.



<지후> ‘물신도 신인데 뭐. 카메라 뺏기고 노동의 현장에서 쫓겨난 마당에,


교회라도 내게 신의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쯤.’



교회에서는 처음 나타난 그에게 퍽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차도 마시고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도 나누고 여럿이 모여 저녁밥을 먹는 자리에 끼어


오랜만에 ‘만찬’의 즐거움을 향유할 수도 있었다.


목사라는 이와 신앙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


물론 사람마다 관심은 달랐겠지만,


교회에 대한 그의 관심도 사람들의 관심과 달랐으니 나무랄 것은 없었다.



하지만 허했다.



<지후> ‘역시 물신의 은총은, 신은 못 베풀어 주는구나.


하긴 뭐, 신도 전지전능은 하지만 돈은 사람들이 바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데, 볼 장 다 봤지.’






이튿날 그는 태홍을 만나 사진 일에 대해 상의했다.


원래라면 두 사람은 아직 만날 단계가 아니었지만,


뜻하지 않게 정인이 그의 계획에 끼어듦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었다.



<태홍> “허기자님, 계획하신 일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태홍이 물었다.



<지후> “그게······.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어요.”



지후가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했다.



의례적인 물음일 뿐이었고, 계획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지후에게서 이런 대답이 나오리라고는 태홍은 조금도 예상치 못하였다.


그는 뭔가 틀어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조바심에 어서 빨리 설명하라고 눈짓으로 그를 채근했다.



지후는 정인과의 일을 소상히 설명했다.



<지후> “그래서 계획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태홍> “좀 늦어지겠는데요.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늦어질지도 모르겠네요.”



태홍 역시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후> “윤정 사모님 쪽은 어떻습니까?”


<태홍> “거기도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


작년 IMF 터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해 들어서면서 사람이 아주 바뀌어 버렸어요.


전혀 딴사람이 된 것 같다니까요.”



<지후> “도 사장님한테만 그런 거 아닐까요?”


<태홍> “처음엔 저도 그렇게 생각했죠.


근데 한두 번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겠지만,


갑자기 여고생 감성이 되신 것 같기도 하고.


대차게 나가질 않아요.


그렇다고 대놓고 예전엔 이러저러하셨는데 무슨 일 있으신 거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돈 없다고 앓는 소리만 해대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지후>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다. 이번 일은 꼭 성공해야 합니다.”



지후는 태홍에게 그의 계획을 소상히 일렀다.


그의 말을 다 듣고 태홍은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또 조금은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태홍> “그렇게 하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아시다시피······.”


<지후> “물론 한 시가 촉박하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라 하지 않습니까.


괜히 어설피 조였다가 고속도로에서 나사 풀리면 골로 갑니다.”



지후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일전에 태홍은 이미 윤정, 즉 도림에게 찾아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려 했었기 때문에,


지후는 그를 꽤 신뢰하는 편이었다.


말하자면 한배를 탄 운명임을 잘 알기 때문에 나름 끈끈하다고 생각해서랄까.


한편으론 딴마음 품으면 바로 ‘끈끈한 늪’으로 빠져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거라고 협박을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이것을 태홍이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지후는 관계치 않았다.



<태홍> “역시 참 기자이십니다. 제가 날이 갈수록 사람 보는 눈이 훌륭해지는군요.”



태홍은 입을 슬쩍 가리고 웃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그는 지후의 계획에 동의했다.






- 8 -




- 1998년 4월(회귀한 신도림의 생)



1998년 3월 윤정의 생에서 그녀는 태휘에게 결혼을 미루자고 했었다.


‘잡힌 물고기’가 되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서였다.


그때 태휘는 펄쩍펄쩍 뛰면서 얼마 남지 않은 결혼을 미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집을 꺾지 않아 결국은 8월 결혼으로 타협을 봤었다.



도림은, 그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3월이 되었어도 결혼을 미루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결혼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을 때 이 일이 어떻게 풀려갈지도 보고 싶었다.


굳이 윤정의 생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결혼을 미루지 않을 경우 5월 결혼으로 예정이 돼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그녀 자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음은 물론


태휘로부터도 이에 관한 아무런 말이 없었기 때문에


‘결혼을 미루는’ 일은 전생의 흐름과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도림> “내가 나서서 말을 해야 하나? 그렇다고 흐름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그녀는 운명을 ‘살짝’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만큼 운명의 흐름을 바꾸는 일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마음 역시 컸다.






그렇게 한 달이 넘도록 이 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달 어느 날 태휘는 그녀를 회사 근처로 불렀다.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는 것이었다.


도림은, 전생으로 봐도 요 근래에 없던 일인지라 처음엔 수상히 여겼지만,


이내 저녁 같이 먹는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나 일어나겠나 싶어 큰 의미는 두지 않았다.





=== 주석


註1.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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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도림의 바다-이 사진, IMF랑 상관 없어! 23.05.28 12 0 11쪽
36 도림의 바다-IMF 플래카드로 인한 스트레스 23.05.27 9 0 10쪽
35 도림의 바다-IMF 경축 플래카드 23.05.27 10 0 10쪽
34 도림의 바다-허지후, 여행을 서울로 되돌리다... 23.05.26 10 0 11쪽
33 도림의 바다-그 바다, 받아들이기 힘든 전생의 설정 23.05.26 8 0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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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남-손주를 노리는 할머니 23.05.25 8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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