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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의 서재

세계의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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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본
작품등록일 :
2020.01.20 21:43
최근연재일 :
2021.06.2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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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9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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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This Illusion(1)

DUMMY

즉시 집으로 돌아온 아미는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땀과 분노로 범벅된 몸에 따뜻한 물이 흐르자 오늘 있던 모든 감정이 쓸려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샤워를 끝낸 아미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했지만, 시영의 성격상 단정한 옷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 가지각색의 옷은 아쉬움과 함께 도로 넣었다.


이어 앞치마를 두르고는 요리를 시작했다. 서툴렀지만 정성 가득하게 하나씩 장만했다. 음식의 선별에도 신중하던 중 스마트폰이 시끄럽게 울었다.


“언니네?”

그것은 오늘은 늦게 들어갈 것 같다는 언니의 연락이었다. 토요일이었음에도 바쁜 것에 아쉬워했지만, 그녀는 선생님이었기에 업무가 밀려 그렇다고 여겼다.


아이돌이기 이전에 학생인 아미. 그녀의 학교도 주말에는 특별 활동으로 바쁜 사람들이 있었다. 언니와는 다른 학교였지만, 별 차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 못할 건 없었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니에게 시영을 소개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남은 요리에도 정성을 다하는 아미. 그렇게 어느 정도 완성되자 시영이 찾아왔다. 반가움에 아미는 그에게 버선발로 달려갔다.


“침착하게, 휴.”

문 앞에서 심호흡으로 긴장을 없애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조금 전에 봤음에도 아미는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시영은 아까와 같은 옷이었지만 갈아입었는지 찢어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평소와 같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미는 자신의 옷을 살펴보고는 그를 보며 새댁처럼 은근히 요염하게 “당신.”이라고 뻐끔거렸다.


“좋은 일 있으세요?”

정작 시영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지금이 꿈만 같아서요.”

“꿈이요?”

시영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아미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시영은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바깥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슬쩍 시간을 본 아미는 지금이 5시 30분 정도가 된 걸 확인했다.


“저녁은 드셨나요?”

“아직 안 먹었어요. 제가 조금 늦었죠?”

“늦었다뇨.”

아미는 미소를 지었다.


“좋은 시간에 와주셨는걸요?”




아미가 준비한 요리는 신기하게도 전부 시영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이루어졌다. 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노력과 정성만큼은 시영에게로 전부 전달되었다.


“맛있어요.”

시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미소로 바뀌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만드느라 고생하셨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그의 말처럼 5시간 동안 요리를 준비했기에 나름대로 고생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인내의 시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진심으로 맛있게 먹는 시영의 모습에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입에는 맞으세요?”

“그럼요. 많이 먹고 싶은데요?”

시영은 보란 듯이 아미가 만든 새우튀김을 한입에 먹어버렸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 덕분에 아미도 허기가 몰려왔고, 문득 자기 요리 실력이 궁금해졌다.


아미는 떡갈비에 젓가락을 가져갔고, 마찬가지로 그것에 젓가락을 가져가던 시영과 부딪쳤다. 묘한 느낌에 서로가 얼굴을 붉히며 먼저 먹기를 권유했다.


정작 누구 하나 먹지 않았고, 분위기에 취한 아미는 조심스레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시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떡갈비를 4등분으로 나눠 한 조각을 그녀의 작은 입에 넣어주었따.


“정말 맛있네요. 헤헤.”

아미는 바보처럼 웃으며 오물거렸다. 시영은 자기가 만든 요리가 아니었음에도 아미의 해맑은 미소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얼마 뒤, 시영은 아미가 만든 요리를 전부 비웠다. 전부 좋아하는 음식이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배고팠던 그가 다 먹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답으로 설거지를 하려 했지만, 아미의 강력한 제지로 그녀가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렇게 설거지가 끝나고, 차를 가져온 아미는 다소곳이 앉아 시영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럼,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 알려주세요.”

따스한 차를 두 손으로 잡은 시영이 입을 열었다. 아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뜨거운 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몇 가지 묻고 싶어요.”

“네, 말씀하세요.”

“시영 씨는 절 싫어하시나요?”

아미는 순간적으로 울컥하는 마음만은 감추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먹이려는 모습에 시영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요.


“시, 싫어하다뇨. 제가 왜 아미 씨를 싫어해요?”

“하지만 시영 씨는 저와 같이 있는 걸 싫어하잖아요!”

“네?”

영문을 모를 투정에 시영은 당혹스러웠다.


“만나려고 다가가면 어느새 사라지고, 의뢰인은 전데 정보상하고만 같이 있으려 하고···”

아미의 눈은 한순간 질투를 가득 품었다. 묘하게 몇 시간 전 베이스타카토를 들고 있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시영은 긴장을 느꼈다.


“아미 씨가 의뢰하러 오기 전에도 여러 번 봤었죠. 하지만 절대 아미 씨가 싫어서 그런 건 아녜요. 저도 일이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대부분 절 보면 좋아했었죠. 시영 씨와 만날 때와는 서로 특별한 이끌림을 느껴서 시영 씨도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생각 없으셨나 보네요?”

조금은 서운함을 느끼는 아미. 시영은 새삼 그녀가 아이돌임을 자각했다.


“이끌림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했지만, 특별한 무언가를 느끼긴 했어요.”

“정말이요?”

한순간 아미의 얼굴에는 미소의 꽃이 개화했다. 시영은 옅은 미소와 함께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행이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아미. 정작 시영이 느낀 특별함은 그녀와의 이끌림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저, 그거 때문에 제가 싫어한다고 생각하셨나요?”

“네···”

“제가 아미 씨를 싫어할 이유는 없잖아요.”

“···정말이죠?”

“아미 씨가 제게 거짓말을 안 했는데,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 아미 씨는 제 소중한 의뢰인인데.”

시영은 차를 마셨고, 아미는 긴장을 삼키며 심호흡했다.


“그럼 시영 씨··· 제가 어떤 말을 해도 믿어주실 건가요?”

“당연하죠! 제가 아미 씨를 안 믿으면 누가 믿나요?”

시영은 아미와 눈을 마주쳤다. 차츰 그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아왔다.


“제가, 뮤즈예요.”

고민하던 아미는 숨겨왔던 진실을 고백했다. 한순간 뺨이 붉어져 올 정도로 힘겹게 입을 열었음에도 정작 진실을 들은 시영의 눈빛은 묘하기 그지없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이내 못 믿겠다는 확신에 찬 시영은 고개를 세게 저었다.


“제가 정말 뮤즈예요.”

아미는 자신의 가슴을 두어 번 두드리며 호소했다. 진실을 알렸음에도 믿지 않음에 답답해졌지만, 그럴수록 시영은 믿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증명할까요?”

억울함이 가득해지자 당장에라도 피아노라도 치려 했지만, 시영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자, 잘 들어보세요.”

시영의 말에 아미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This Illusion에 두통을 느끼는 사람들은 광대에 속한 사람들이죠. 광대에 소속된 사람들은 예술가가 많아요. 아미 씨가 소개한 종희 씨, 의도 씨, 이분들은 아이돌 연습생, 아이돌도 예술가로 분류될 수 있기에 광대에 속하죠. 그렇기에 이분들이 두통을 느낀 거예요.”

아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단, 마찬가지로 두통을 느끼는 제가 왜 광대로 분류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고속 씨의 말대로라면 아미 씨는 광대고 저는 아미 씨와 이끌림을 느끼기 때문에 광대라고는 하는데··· 솔직히 이대로라면 말이 안 돼요.”

“이유를 들어봐도 될까요?”

아미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러 이유가 있고, 아직 제가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결론만 말할게요. 광대인 아미 씨가 광대에게 영향을 주는 This Illusion을 만들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아미 씨가 뮤즈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시영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은 눈빛으로 아미를 바라보았다. 아미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영 씨라면 더 알아냈을 것 같은데···”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서 광대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됐어요. This Illusion이 광대와 관련된 [기술]이라는 것도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두통을 일으키는 노래가 어떤 기술인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래요?”

눈을 감은 아미는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많이 조사하셨네요?”

“당연하죠. 아미 씨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죠. 그러니까 아미 씨가 뮤즈라는 농담은 하지 마세요.”

“시영 씨.”

아미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저도 시영 씨에게 거짓말 안 해요.”

“···진짜 아미 씨가 뮤즈라고요?”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이랍니다.”

아미는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This Illusion은 광대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기술이에요. 전 그걸 노래로 표현했고요. 제가 왜 이 노래를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알려주세요.”

시영은 긴장을 삼켰고, 아미는 손짓으로 차를 마시길 권유했고, 그가 그것을 조금 마시자 입을 열었다.


“시영 씨는 우리가 처음 만날 날을 기억하세요?”

“잊을 수가 없는 날이죠.”

시영은 아미를 보며 다시 나타난 긴장을 차와 함께 삼켰다.


“저도 그래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어느샌가 태양은 지고 달이 떴다. 아미는 그날과는 다른 붉지 않은 달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사실 그날은 사장님과 불화가 있었어요.”

“불화요?”

“원래 제 꿈은 아이돌이 아니었거든요.”

아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미 씨는 인기 아이돌인데, 아이돌이 꿈이 아니었다고요?”

“믿기 힘드시죠? 원래 꿈은 작곡가였거든요.”

시영은 [크레이지록 페어 폼]에서 느낀 음악가(작곡가)를 떠올렸다.


“그런 제가 아이돌이 될 수 있었던 건, 우연히 지금 사장님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아이돌이 될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도 파격적인 조건과 특히 제 음악성을 숨김없이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신 덕분이에요.”

“후회는 없었나요?”

“그냥 음악만 할 수 있었으면 좋았거든요. 상관없었어요.”

피식거리며 입꼬리를 올린 아미. 묘하게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느낌의 옅은 미소였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어요. 제가 만든 노래가 페어리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열심히 만든 노래가 부정당했어요. 어떻게든 설득을 하려 했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사장님은 폭언까지 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죽어버릴까 생각했거든요.”


시영은 아미의 싸늘한 마지막 말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그런 제가 느낀 이끌림, 그래요, 시영 씨와의 첫 만남이었죠. 짧은 만남이었지만 전 그 속에서 운명을 느꼈어요.”

아미는 시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정작 또 다른 당사자인 시영은 그 만남이 이렇게까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시영 씨와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마석 사건이 끝나고 사흘 동안 시영 씨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죠. 하지만 시영 씨는 언제나 사라졌어요.”

시영은 20번을 넘게 만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유독 아미를 많이 만난다고 생각만 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에 닭살이 돋았다.


“만날 때마다 깜짝 놀랐잖아요, 솔직히 그건 귀여웠어요. 하지만 조금만 대화를 늘리려 하면 사라져서 서운했어요.”

“항상 사건이 터지니까요··· 위험하지는 않았나요?”

“이 도시는 D-Zero 이후 항상 위험했었죠. 맞아요. 하필이면 시영 씨가 사라진 뒤에는 항상 사건이 터졌어요. 사건이 터져서 시영 씨가 사라졌다는 게 맞는 말이겠죠? 저도 사건이 터지면 이끌림 느끼지 못해서 항상 놓쳐버리고 말았어요.”

아미는 그때를 생각하니 상당히 분해 보였다. 시영은 미안함에 고개를 숙이며 식어버린 차를 절반 정도 마셔버렸다.


“그래서 생각했죠. 시영 씨와 만나도 될 계기를 만들기로요. 항상 사건이 터져 사라지는 시영 씨를 만나기 위해선 제가 그 사건에 관련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가까워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This Illusion을 만들었어요. 사장님도 듣고 만족했어요. 최고라는 극찬과 함께요.”

시영은 수첩이 찢어졌기에 그녀가 했던 모든 말을 적지 못했지만, 적을 수 있었다면 ‘아미 씨는 음악의 천재’라고 적었을 심산이었다.


“광대의 기술, This Illusion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어요. 그건 깨우치기 위해선 두통을 느껴야 한다는 점이죠. 광대가 광대에게 전수하는 기술, 그게 바로 [This Illusion]이에요. 전 그걸 노래로 표현했어요. 그러니까 동영상 사이트에 얼굴 없는 가희라는 이름으로 This Illusion이란 노래를 업로드한 건···”

이내 아미는 방에서 노트북을 가져왔고, 동영상 사이트에서 사용하는 자신의 계정을 보여주었다.


“바로 저예요.”

그것은 얼굴 없는 가희의 계정이었다. 보란 듯이 업로드한 동영상은 [사랑의 시나리오. 티저]와 [This Illusion]의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럼 제가 두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네요.”

“그게··· 알고는 있었지만, 너무 괴로워하셔서 죄송했어요.”

“전 괜찮아요. 그나저나 그럼 뮤즈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온 건가요?”

“그건 제 또 다른 이름이에요.”

아미는 뮤즈 메모리 스크롤을 보여주었다.


“그럼 왜 얼굴 없는 가희인가요?”

시영은 아미의 계정을 가리켰다.


“그건···”

“말하기 어려우신가요?”

“시영 씨가 그랬죠. 제가 웃고 싶지 않아 한다고요. 어쩌면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저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닌, 그저 미소를 연기할 뿐이라는 걸요.”

시영은 아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슬플 때도 웃는 얼굴로, 힘들 때도 웃는 얼굴로 지내다 보니까 마치 가면을 쓴 것만 같았어요. 마치 제 얼굴(표정)이 없어진 느낌이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얼굴 없는 가희라는 이름이 나온 것 같아요.”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나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구나.’

시영은 안타까움에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정작 그녀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유는 알겠어요. 하지만 아미 씨, 저 말고도 두통을 느낀 사람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랬잖아요. This Illusion은 광대의 기술이라고요.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거쳐야 할 계단과도 같아요. 이걸로 문제가 있다면 이미 터졌을 거예요.”

“그 말은 두통을 느낀 사람들은 괜찮다는 건가요?”

“네,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아미의 확답에 시영은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소문에 불과했기에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럼, 절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신 이유가 뭐죠?”

그렇기에 시영은 이 말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 했다. 어쩌면 오싹한 동영상이란 사건 자체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간단해요.”

아미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시영 씨가 절 구해준 그 날, 저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아미 씨를? 에이, 그런 적 없어요.”

시영의 부정에 아미는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영 씨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는 지금 여기 없었을지도 몰라요.”

순간, 시영은 아미와 사장이 싸우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찔한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음악밖에 모르던 제가 처음 느낀 감정, 시영 씨는 느끼셨나요?”

“잘 모르겠어요.”

문득 시영은 유마의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하고 싶은 건, 아이돌이나 작곡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죠.”

아미는 시선을 돌렸다. 다시 돌아오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원래대로면 의뢰인으로 가까워진 제가 시영 씨를 도와서 점점 가까워지려 했어요. 전 이걸 [사랑의 시나리오]라고 이름 지었어요. 모든 건 시영 씨를 위한 각본이었죠. 주연은 저와 당신. 하지만 시영 씨는 보란 듯이 언제나 각본을 벗어났어요.”

아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정보상도···”

아미는 이를 바득 갈았고, 시영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어졌다. 그날 이후 서로 이렇게까지 오래 대화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미가 의뢰인으로 찾아왔을 때보다 길었다. 그랬기에 서로가 입을 열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시영 씨.”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아미였다. 시영은 조금이지만 아미에게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아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새빨개진 뺨과 함께 입을 뻐끔거렸다.


“저, 저를···”

“저를?”

시영은 눈을 깜빡거렸다.


“저를 받아들여 주세요!”

아미는 훌륭한 성량을 자랑하듯 크게 말했다. 사실상의 고백과도 같은 그 말에 시영은 당황하여 커진 눈을 깜빡거렸다.


“예?”

“두, 두 번은 말 못 해요!”

부끄러움이 몰려온 아미는 쿠션으로 얼굴을 가렸다. 새빨간 하트 모양의 쿠션. 어쩌면 아미의 마음과 별반 다르지 않을 물건이었다.


“죄송합니다.”

시영은 입을 열었고, 아미는 조심스레 쿠션을 내리며 초점이 사라진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제가··· 싫은 건가요?”

“아니요.”

“제가 죄송해요. 제가 한심하게 보이실 수도 있어요. 이, 이런 말은 조금 더 분위기를 잡았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성급했나요? 죄송해요. 제, 제가 싫어지신 건 아니죠? 안 돼요. 제가 노력할게요. 잘할게요. 시영 씨가 싫어하는 부분을 고칠게요. 그러니까···”


“전 지금 누군가를 사랑할 여유가 없어요.”

시영의 대답에 아미는 초점이 돌아온 눈을 깜빡거렸다.


“사랑할 여유?”

“저는 D-Zero의 진실을 밝히고 싶지만, 그날을 기억도 못 해요. 유일하게 기억나는 키워드는 미소 하나뿐이죠. 그렇다고 이 미소가 뭘 의미하는지도 몰라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그 누구를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어요.”

시영은 어느샌가 다 비워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남은 물기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지만, 그마저도 몇 방울 되지 않았기에 잘 보이지 않았다.


“시영 씨···”

아미는 잠시나마 그의 슬픔을 느낀 기분이었다. 평소 그에게 느껴지는 이끌림은 너무나도 따스했지만, 이번만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죄송해요. 저도 D-Zero에 대해서 알려드릴 말은 없어요. 하지만 응원이라면 할 수 있어요. 그러니 This Illusion을 연주해도 괜찮을까요?”

“네? 아, 아뇨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시영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이미 두통을 느꼈으니까요.”

아미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했다.


“부끄럽지만 들어와 주세요.”

이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곳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갈하게 정리된 침대와 책상이 보이는 방이었다.


시영이 그곳을 조금 둘러보자 여러 가지 악기가 눈에 들어왔다.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 바이올린 등등! 시영 씨는 어떤 악기를 좋아하세요?”

“피아노요.”

“그럼, 거기 앉아주세요.”

아미는 피아노가 잘 보이는 곳을 가리켰다. 시영이 자리에 앉자 아미는 피아노에 앉아 손을 풀었다.


“휴, 조금 떨리네요.”

과거 피아노 콩쿨을 나가서도 떨지 않았던 아미였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앞에서는 긴장이 되었다. 이내 여유를 찾고는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로 연주를 시작하려 했다.


“아, 참.”

즉시 피아노에서 내려온 아미. 근처에 놓인 검을 천을 가져왔다. 그것은 얼굴 없는 가희가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용한 물건이었다.


아미는 뒷머리를 잡고 검은 천을 얼굴에 썼다. 손을 놓자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펄럭였다.


문득, 시영은 사건이 아미의 사랑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었다면 자신과 아미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잘 들어주세요.”

하지만 그런 의문도 마치 음악회에 온 것만 같은 분위기에 손뼉을 치며 깨끗이 잊어버렸다.


아미는 This Illusion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몽환적인 도입부는 피아노의 음에 따라 신비롭게 변화하며 1분 정도 연주가 진행되었다.


두통을 느끼기 시작한 부분이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손을 든 시영. 하지만 피아노의 편안한 음에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영은 단지 연주를 들을 뿐이었지만, 신기한 경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피아노의 음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고 긴장되었던 몸을 나른하게 풀어주었다.


그렇게 4분 남짓한 연주가 끝나자 시영은 손뼉을 쳤다. 최고의 연주를 눈앞에서 본 감동도 있었지만, 자신만을 위한 노래를 훌륭하게 연주한 아미에게 향하는 찬사가 더욱 컸다.


“이 일은 정말 죄송해요. 시영 씨가 D-Zero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텐데···”

아미는 지금에서야 서연이 말한 시영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뇨, 저야말로 여러 가지로 죄송합니다.”

“D-Zero의 진실을 밝히는데 이 This Illusion이 도움이 되길 바라요. 마음 같아서는 도와드리고 싶지만, 당분간은 바쁘거든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뮤즈로서 활동해야 해서요. 아마 다음 주부터 바쁠 것 같아요.”

“아.”

시영은 단번에 이해했다.


“그리고 시영 씨의 마음을 얻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당당하게 선언하는 아미. 시영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야기는 끝났다. 시영은 오싹한 동영상 사건이 단지 소문으로 끝났기에 다행으로 여겼다. 피해자가 없다는 사실과 의뢰인이 계획한 일이었지만,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기에 이렇게라도 마무리가 되어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돌아가려는 찰나, 아미가 입을 열었다.


“시영 씨, 의뢰인으로··· 아니, 이제는 아니죠. 그럼 제 투정을 한 번만 더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뭔가요?”

“오늘을 기념하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 스크롤을 한 개씩 교환할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렇게 해요.”

시영은 제로 메모리 스크롤을 아미에게 건넸다.


“이건, 메모리 스크롤이잖아요?”

“저한테도 한 장 주세요.”

“시영 씨, 정말 이걸 주셔도 괜찮겠어요?”

“예? 제 스크롤은 저거밖에 없기도 하고,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걱정스럽게 묻는 시영과는 달리 아미는 두 손으로 제로 메모리 스크롤을 소중하게 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기뻐서요.”

아미의 눈시울은 떨어지는 이슬처럼 일렁였다. 이어 엄지로 눈물을 닦고 록 스크롤을 시영에게 건넸다.


“시영 씨!”

“네, 아미 씨.”

“오늘 일은 비밀이에요.”

검지를 입술에 가져간 아미. 곧 부끄러운지 배시시 몸을 꼬았다.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셨네요.”

시영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봐요. 대신,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오지는 말고요.”

“그, 그럼 가끔 연락은 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시영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감사해요!”

아미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했다. 시간이 멈추길 바랐지만, 시영은 정중한 인사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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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Episode 05. 잠자는 공주-노바의 소원(1) 20.09.21 25 0 14쪽
78 Episode 05. 잠자는 공주-포우를 향한 증오(2) 20.09.20 20 0 13쪽
77 Episode 05. 잠자는 공주-포우를 향한 증오(1) 20.09.19 20 0 14쪽
76 Episode 05. 잠자는 공주-차가운 심장의 기사(3) +2 20.09.17 23 1 13쪽
75 Episode 05. 잠자는 공주-차가운 심장의 기사(2) +2 20.09.16 28 1 14쪽
74 Episode 05. 잠자는 공주-차가운 심장의 기사(1) 20.09.15 37 0 13쪽
73 Episode 04. 황금의 괴도-액셀러레이터, 해산(3) 20.09.14 26 0 19쪽
72 Episode 04. 황금의 괴도-액셀러레이터, 해산(2) 20.09.12 26 0 17쪽
71 Episode 04. 황금의 괴도-액셀러레이터, 해산(1) 20.09.11 25 0 18쪽
70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를 향한 반격(3) 20.09.10 24 0 18쪽
69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를 향한 반격(2) 20.09.09 22 0 15쪽
68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를 향한 반격(1) 20.09.07 23 0 12쪽
67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의 선언(2) 20.09.06 20 0 17쪽
66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의 선언(1) 20.09.05 25 0 15쪽
65 Episode 04. 황금의 괴도-만날 수 없어(2) 20.09.03 22 0 13쪽
64 Episode 04. 황금의 괴도-만날 수 없어(1) 20.09.02 19 0 12쪽
63 Episode 04. 황금의 괴도-제미니의 협력(3) 20.09.01 20 0 12쪽
62 Episode 04. 황금의 괴도-제미니의 협력(2) 20.08.31 22 0 14쪽
61 Episode 04. 황금의 괴도-제미니의 협력(1) 20.08.30 24 0 13쪽
60 Episode 04. 황금의 괴도-독행은 후회를 낳는다.(2) 20.08.28 18 0 11쪽
59 Episode 04. 황금의 괴도-독행은 후회를 낳는다.(1) 20.08.27 23 0 14쪽
58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의 습격(3) 20.08.26 23 0 12쪽
57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의 습격(2) 20.08.25 22 0 15쪽
56 Episode 04. 황금의 괴도-괴도의 습격(1) 20.08.24 20 0 14쪽
55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This Illusion(3) 20.08.23 22 0 17쪽
54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This Illusion(2) 20.08.21 19 0 13쪽
»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This Illusion(1) 20.08.19 25 0 24쪽
52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PAradox IRruption(3) 20.08.18 21 0 17쪽
51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PAradox IRruption(2) 20.08.17 19 0 15쪽
50 Episode 03. 얼굴 없는 가희-PAradox IRruption(1) 20.08.16 21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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