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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식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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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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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9.11.14 00:35
최근연재일 :
2020.01.16 17:00
연재수 :
2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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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779
추천수 :
1,137
글자수 :
1,122,955

작성
19.12.2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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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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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129화

DUMMY

천하무식 천마 129화






천마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상황은 종종 있어왔다. 대부분의 경우는 그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거나, 뜻밖의 장소로 이동해 있어서 시선이 따라가지 못한 경우였다.

슬기는 천마가 안보이자 이번에도 당연히 그런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천마가 죽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래, 이 아저씨는 틀림없이 어디론가 내뺐을 거야, 이 자식은 누구한테 맞고 뒈질 인간이 아니거든.”

슬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망루에서 성채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상당한 높이였지만, 슬기는 별 무리 없이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아가씨!”

광개토가 슬기를 부르며 역시나 뛰어내렸다. 그러자 뒤를 이어 실리엔도 따라 움직였고, 빌만 여전히 망루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헐레벌떡 천마가 싸웠던 전장으로 뛰어가며 슬기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야, 죽은 척 하지 말고 튀어 나와. 이 아가씨 손에 뒈지기 전에 말이야. 응?”

초인적인 청력을 가진 천마라면 이런 혼잣말도 놓치지 않을 것이었다.

그때,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던 천마군 진영에서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진열을 정비하며 회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 천마군 놈들? 왜 돌아가지 말입니다?”

광개토의 말대로 회군하는 천마군들의 모습에 슬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야!! 어디 가냐, 이 새끼들아!! 아직 안 끝났어!! 싸움 안 끝났다고!!”

천마군이 철수한다는 말은 전투가 끝났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천마가 사라져 버렸다는 이 현실이 정말 ‘현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안 끝났어, 이 새끼들아!! 아저씨는 안 죽는다고!”

슬기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천마군들을 붙잡아다 다시 전장으로 복귀시킬 작정이었다.


“저 년이 미쳤나? 잘 돌아가는 천마군을 어쩌자고!! 어허!!”

망루 위에서 슬기의 행동을 지켜보던 시온군 유저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감사하게도 천마군들이 알아서 돌아가는데 웬 미친X 하나가 산통을 깨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회군중인 천마군은 그런 일개 유저의 지랄발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중상을 입었던 혈마와 검마, 권마가 끝내 사망하자, 천마군은 일단 철수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질서정연하면서도 신속하게 회군하는 천마군의 이동 속도는 슬기가 달려가서 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래도 슬기는 악착같이 뛰어갔다. 점점 멀어지는 천마군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의 발걸음이 느려서 도저히 붙잡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슬기는 정말 악착같이 뛰어갔다.

그런데 그때 광개토의 귓말이 들려왔다.

-아가씨, 여기 망토가 하나 떨어져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사부님 꺼.. 같지 말입니다.

그 귓말이 열심히 달려가던 슬기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슬기가 천마군의 뒤를 쫓는 동안, 천마의 전장으로 갔던 광개토가 바닥에 떨어진 잿빛 망토를 발견한 것이었다.


“정말...아저씨 꺼야?”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귓말 벌레도 꺼내지 않고 그렇게 질문하던 슬기는 곧 광개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개토와 실리엔이 서 있는 그 황폐한 장소에는 정말로 눈에 익은 잿빛 망토 하나가 형편없이 구겨진 채 땅에 널부러져 있었다.

망토를 집어 든 슬기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게 아저씨 건줄 어떻게 알아? 이딴 망토는 시장에만 가도 수백 개는 사겠다!”

슬기의 부정에 광개토가 슬그머니 망토를 만졌다. 한껏 더러워진 망토인데도 손끝을 통해 시원한 청량감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투박하게 꿰매진 바느질 자국. 과거 ‘더 원’의 공격대장 중 한명인 에릭이 천마의 망토에 칼자국을 내버려서 그녀가 꿰맸던 흔적이었다.

그 꿰맨 자국을 본 슬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슬기가 우두커니 서 있는데, 광개토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럼 사부님은 지금 캠프에 계시겠지 말입니다? 거기가 우리 부활 지점 아닙니까?”

그 말에 슬기가 퍼뜩 고개를 들며 웃었다.

“아, 그래!! 맞지? 아놔! 나 바보인가 봐!”

유저들은 불사의 존재들이었다. 게임을 하다보면 죽는 것은 일상다반사였고, 죽은 후에는 다시 살아나면 그 뿐이었다. 한낱 유저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감정적이 되는 건 오바였다.

슬기가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귓말 벌레를 꺼냈다. 노란 빛을 내뿜는 콩알만한 벌레가 귀엽게 꿈틀거리자 슬기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귓말을 보냈다.

“천마에게, 아저씨! 뭐하는 거야, 대체? 왜 뒈지고 지랄이야! 쪽팔리게 망토나 떨구고! 키키. 전송.”

하지만 전송 명령어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귓말벌레는 허공에 둥둥 뜬 채로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며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얘, 뭐야? 버근가? 아, 귓말 벌레니까 귓말 버그가 맞구나, 그렇네! 버그네, 그치? 히히히.”

슬기가 광개토에게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그럼 제가 해보겠습니다.”

광개토가 귓말 벌레 한 마리를 꺼내서 다시 귓말을 시도했다.

“천마에게, 사부님, 어디시지 말입니까? 저희는 아직 여기.. 그러니까 사부님께서 싸우시던 거긴데 말입니다. 전송.”

그러자 광개토의 귓말벌레도 슬기의 벌레 옆에서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슬기의 강렬한 발차기가 허공을 갈랐다.

파삭-, 소리와 함께 귀엽게 웃던 두 벌레가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이 벌레 새끼들이 돌았나, 어디서 실실 쪼개고 지랄이야!”

어느새 울먹임이 섞인 목소리로 성질을 부리는 슬기의 모습에 광개토가 얼른 귓말 벌레를 더 꺼내서 천마에게 전송을 시도했다.

하지만 네댓 마리가 함께 귀여운 고갯짓을 하는 걸 보고 나자, 슬기가 여전히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 그냥 캠프로 가자! 아무래도 오늘 벌레들은 다 버그인가 봐!!”

잿빛 망토를 툭툭 턴 슬기는 그걸 그대로 등에 착용하고는 몸을 돌려 성채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움직이자 광개토와 실리엔도 그 뒤를 따라 그 곳을 떠났다.


천마군의 철수와 함께 결계막이 해제되었던 까닭에 슬기 일행은 곧 성좌 지역을 떠나 시온군의 캠프 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빌도 다시 일행에 합류한 상태였다.

사람 하나 없이 황량한 캠프를 돌아보며 슬기 일행은 천마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저씨!”

“사부님!!”

“천마님!!”

“그..저기요!!”

빌은 외치다 말고, 그를 쳐다보는 일행들의 눈총을 느끼고는 다시 말을 바꾸어, “천마님!!”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불러도 천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재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캠프를 한 바퀴 돌고 온 광개토가 슬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사부님은 여기에 없으신 거 같습니다. 어쩌면 사부님은 우리랑 부활 지점이 다르신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항상 같이 다녔는데.. 아니야,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부활 지점을 설정하려면 잠을 자든지, 휴식을 취하든지 해야하는 데, 아저씨는 잠을 안 자잖아.”

“네?”

천마가 잠을 안 잔다는 사실을 몰랐던 광개토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아니, 진짭니까? 사람이 안 자고 어떻게 살지 말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호들갑을 떨던 광개토는 입술을 깨물고 선 슬기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슬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고!”

슬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천마의 행방을 모르겠다는 것인지, 천마가 사람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천마가 사라진 후부터 느끼고 있는 이 마음의 공허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인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스러운 학살 현장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해서, 마치 일곱 살 난 악동같은 그의 행동에 분노하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걱정했던 지난날들이 슬기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처음에는 잔인한 연쇄 살인마였고, 악마였다가 그 후는 괴물이었다가 어느샌가 든든한 보호자가 되었었다.

항상 밥 내놓으라고 투덜거리고, 모르는 건 또 왜 그리도 많은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알려주기보다는 그저 닥쳐!! 하고 소리 지르며 그의 입을 막았던 기억이 훨씬 많았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에게 아저씨가 되었고, 보호자가 되었으며 언제부터인가 항상 옆에 있어 주는 버팀목이 되었었다. 그녀는 아직도 그녀의 목걸이를 찾아주겠노라고 약속하던 두 달 전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이나 강함,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들이 일관되게 알려주고 있는 그 사실..들이 그녀의 마음 에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지만.

“..사람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거든.”

슬기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가 그저 동명이인이 아닌 정말로 천마라는 존재인지도 모르지만, 슬기는 다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상관없거든, 그딴 거...그러니까..”

항상 차갑고, 무섭게만 굴었던 그였지만, 그로 인해 그녀는 과거의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한때 잃어버린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죽을 만큼 슬퍼했던 노스텔지어의 목걸이를 어느 땐가부터 더 이상 찾지도, 생각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저씨와 함께 하면 할수록 그녀는 그렇게 치유받고 회복하고 변화해 왔던 것이었다.

“빨리 나타나라고, 죽었으면 이제 다시 살아나야 할 거 아냐? 응?”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슬기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기 시작하더니 곧 거친 욕설로 바뀌었다.

“야이, 병X아!! 그딴 새끼들도 제대로 못 처리하고 뒈지냐?!! 고금제일 같은 소리하네!! 고금 제일의 고수 라는 게 그렇게 쉽게 뒈지냐!!?”

마구 소리를 지르던 슬기가 광개토를 노려봤다.

“야, 개토. 넌 사부가 널 두고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냐? 얼른 너도 욕해!! 빨리!! 욕 하라고!!”

슬기의 억지에 광개토도 할수 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네.. 사부님..바보.. 사부님 바보!!”

광개토가 바보 소리를 욕설 비슷하게 주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내지르자, 슬기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본디 천마는 욕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응징하는 인물이라 들을 귀만 있다면 순식간에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광개토의 욕설 소리가 두 배, 세 배로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천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씨X...병X아, 어디 간거야..흑.”

결국 슬기는 자기도 모르게 천마가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기 시작했다.


*


그날 오후, 되살아난 여섯 수장을 필두로 칠천에 이르는 천마군이 다시 성좌로 들이닥쳤다.

삽시간에 성문과 성벽을 허물어뜨린 천마군은 쾌도난마의 기세로 시온군들을 학살해 나갔고, 전투가 시작된 지 불과 20여분 만에 성좌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여섯 명의 레이드 보스가 들이 닥치자, ‘더 원’의 다섯 공격대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전멸하고 말았다.

북서쪽 성탑의 건물구조를 이용하여 슬기 일행이 최후까지 분전하였지만 마침내 난입한 권마 때문에 형편없이 밀린 끝에 슬기와 실리엔, 빌이 모두 목숨을 잃었고, 시체 사이에서 광개토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15일간의 전투 끝에 동끝별의 성좌, 성 엘리나의 봉인도 끝내 파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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