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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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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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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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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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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0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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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부 3화. 푸른 곤룡포

DUMMY

<2018.09.22 토요일 / 경기도 용인>


16년 만에 집에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규진은 다시 가방을 챙겼다.


목적지는 강원도 영월. 이른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규진은 대문을 밀었다.


‘빵빵’

길 건너에서 울린 클락션 소리에 규진은 화들짝 놀랐다. 운전석에는 유엔이 앉아 있었다.

“너 운전면허증 있었어?”

일부러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찍 나섰는데, 규진은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당연하지. 뒤에 타. 거기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조수석에 앉은 시노가 바람개비처럼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하루 만에 또 봐도 반갑지? 나 이제 너희들 여행 가는데 빠지지 않으려고.”



둘을 본 규진의 마음이 불편했다.

‘이번에는 혼자 가려고 했는데, 정말.’


규진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 유엔의 찢어진 눈썹은 아직 제대로 아물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를 돕다가 최대식과 다마루 나나미가 죽었다. 그리고, 원한으로 가득한 관계이긴 했지만, 박재열도 피살되었다. 며칠 사이에 죽고 다친 사람을 떠올리며 규진은 무거운 마음의 짐을 느꼈다.



규진이 생각에 잠긴 사이 유엔의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노 내비 찍어줘. 강원도 영월군 솔말안길 107.”


‘가재리 19-3번지라고 이틀 전에 말했는데 그걸 외우고 도로명주소를 찾아본 건가.’

규진은 속으로 감탄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 맞아? 가재리 새덕마을? 폐광의 아픔을 이겨낸 마을의 변신. 신비로운 푸른빛의 천연 염색? 규진, 우리 여기 가는 거 확실해?”

시노가 핸드폰 검색 결과를 내밀었다.


“나도 몰라. 일단 가보면 알겠지. 거기에 뭐가 있는지.”


* * *


“제대로 찾아온 거 같은데?”

시노가 핸드폰 검색 화면과 마을 입구 표지석을 비교하더니 기지개를 켰다.


새덕마을 회관 앞에서 규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부들이 공동 생활하던 낡은 건물이 마을 안쪽에 보이는 것 빼고는 평범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었다. 산으로 향하는 마을 안길의 좌우로는 깔끔한 단독주택이 늘어서 있었고, 마을 회관 뒤에 자리 잡은 천연 염색 공방에서는 사람 소리가 들렸다.

“저기 가서 물어볼까?”


유엔은 왼쪽 눈을 찡그리고 마을을 둘러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규진에게 다가왔다.

“내일 다시 오더라도 밤늦기 전에는 산에서 내려가겠다고 약속해줘.”

유엔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뭐야? 그렇게 귀신이 많아?”

시노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궁금하다면 설명해줄 수 있긴 한데, 정말 듣고 싶어?”

유엔은 조금 전에 끔찍한 장면을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자갈 밟히는 소리가 들리자 세 친구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을 청년 한 명이 세 친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어요? 혹시 천연 염색 체험하러 오셨나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청년은 친절하고 고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체험하러 온 건 아니고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규진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누구를 찾아오셨습니까?”

“할아버지를 만나러 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누구신데요?”

“판 자, 석 자 쓰십니다. 할아버지 성함이 박판석입니다.”


“그런 분은 모르겠는데요.”

청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쉽지 않군. 실망한 규진이 얕은 한숨을 내쉬다가 뭔가 생각난 게 있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냈다.

“혹시 칠대양이라고 하면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마을 청년의 눈은 휘둥그레 커졌다.

“네? 칠대양 어르신을 찾아오셨다고요? 정말 칠대양 어르신 손자분 됩니까?”


“제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규진의 물음에 청년은 회관을 돌아봤다. 일단,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청년은 쏜살같이 건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찾기는 제대로 찾아온 거 같네.”

시노가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엔은 비탈진 길가에 석축을 쌓아 지은 낡은 건물을 응시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 같은데.”


“적산가옥? 그게 뭐야?”

시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유엔은 어두운 낯빛으로 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혹시 할아버지 고향이 어딘지 아니?”


“할아버지 고향은 몰라. 하지만, 아버지 고향은 강원도 태백이야. 어제 곽 경사가 말한 대로야.”

규진의 대답을 들은 유엔은 긴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라고 시노가 물어도 유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넋을 놓고 낡은 건물만 바라보았다. 길이가 긴 처마를 얹은 일본식 건물이었다.



헐레벌떡 마을 회관으로 뛰어 들어갔던 청년이 다시 규진에게 달려왔다.

“일단 들어오시랍니다.”


주어가 생략된 문장을 듣고 규진이 누가, 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청년은 벌써 뒷걸음질 치며 건물 입구로 규진을 안내하고 있었다. 규진은 오른팔을 앞으로 저으며 유엔과 시노에게 같이 들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 * *


마을 회관 응접실 우드 슬랩 테이블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규진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박규진이라고 합니다.”


뒤에 선 유엔과 시노도 상냥하게 머리를 숙였다.



“칠대양 어르신을 찾아오셨다고?”

중년의 남자가 놀란 얼굴로 묻더니 이내 안색을 바꾸며 덧붙였다.

“일단, 이쪽으로 앉으시게.”


규진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는 성질 급하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자네 할아버지가 여기 계신 줄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가?”



“16년 전에 쪽지를 남기셨습니다.”

딱 그 정도만 설명하겠습니다. 더 듣고 싶으시다면 본인 소개부터 하시죠,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규진은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은 않았지만, 앙다문 입술은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세영 씨 여기 귀한 손님 오셨는데, 차 한 잔 부탁해도 될까요?”

남자는 고개를 돌려 마을 회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윤세영은 규진 일행이 들어오기 전부터 차가운 샘물로 우려낸 국화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윤세영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넓은 대접을 가득 덮은 국화꽃은 찻물 위에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정성스레 국화차를 우리는 모습을 보던 유엔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손님이 오기로 약속된 건가? 유엔은 마을 회관 구석구석을 뚫어지라 관찰했다.



느티나무 통원목을 잘라 만든 탁자를 양손으로 가볍게 내리치며 남자는 낮게 소리쳤다.

“칠대양 어르신은 지금 마을에 안 계시네. 그렇지 않아도 우리도 애타게 찾는 중인데, 뭐 그건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나는 이 마을 조합장을 맡고 있는 김한평이라고 하네. 칠대양 어르신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아, 혹시 모르시나? 우리 마을 협동조합을 설립한 분이 바로 어르신인데.”

남자의 얼굴에는 불쾌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소개를 받았으니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요. 규진은 몸을 앞으로 살짝 구부렸다.

“제가 성인이 되어야 내용을 볼 수 있는 쪽지를 할아버지는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16년 동안 집안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찾으려고 애썼지만,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살아계신다는 말은 저도 얼마 전에 우연히 들었습니다.”


“우연히? 우연히 누가 그걸 말해줬나?”

김한평은 눈꼬리를 올리며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규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경찰이 알려줬다고 말할 수는 없지. 그런데, 지금 그걸 궁금하게 생각할 타이밍이 아닌데? 규진이 고개를 기울이며 의외의 말을 던졌다.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마을 어른 중에 정범팔이라는 분을 뵙고 싶습니다.”


김한평이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그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 건가?’ 라고 중얼거리듯 혼잣말한 뒤 또렷하게 덧붙였다.

“그분은 오래전에 마을을 떠나셨네.”


“혹시 연락처를 알고 계시는가요?”

누구의 연락처? 할아버지, 아니면 정범팔? 주어가 생략된 질문에 김한평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뜻밖의 상황에 유엔과 시노의 표정이 여러 방향으로 일그러졌다. 우리에게 알려준 건 강원도 영월 가재리 17-3번지 주소가 전부였잖아. 정범팔은 또 누구야? 그 쪽지에 또 뭐가 적혀있었던 거야? 유엔은 서운한 표정으로 규진을 노려보았지만, 규진은 김한평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김한평이 낯빛을 바꾸더니 몸을 숙였다.

“그나저나 여기 숙녀 두 분은 손녀 되시나?”

“아, 아니에요. 저희는 친구예요. 친구.”

시노의 경쾌한 대답에 김한평은 묘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친구? 김한평의 혼잣말이 끈적하게 툭 던져졌다.


윤세영이 찻잔 네 개에 국화차를 부어 테이블에 놓고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자네도 같이 앉으시게.”


“저 말씀이신가요?”

윤세영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런 자리에 굳이 제가 앉을 이유가 있나요? 라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지으며 윤세영은 눈치를 살폈다.


“일단 우리 마을에 오신 손님이니 마을 구경을 시켜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가?”

“감사합니다.”

질문은 윤세영에게 했지만, 대답은 규진이 했다.


김한평이 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세영 씨 이분들 염색 공방 안내 좀 부탁할게요.”


세 친구는 도원결의에 나선 사내들처럼 단숨에 국화차를 들이키더니 시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시게. 나는 여기서 기다림세.”

김한평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규진의 어깨를 툭 쳤다.


* * *


마을 회관 뒷문은 공방과 바로 이어져 있었다. 바로 윤세영이 설명을 시작했다.


“1960년대 우리나라 수출 품목 1위가 뭔지 아세요? 바로 텅스텐입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폐광투성이지만, 한때는 강원도 영월이 우리나라 수출 산업의 가장 큰 효자였습니다. 우리 새덕마을도 텅스텐 광산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은 주변 광산과는 다르게 특별한 광물로 유명했습니다. 이게 바로 신비의 색, 울트라마린 안료를 만드는 청금석입니다.”


“사파이어처럼 푸른 보석 속에 황금색 별이 반짝이는 게 보이시죠? 이게 바로 청금석입니다.”

윤세영은 반지를 낀 손을 앞으로 뻗어 규진에게 보여주며 말을 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었다는 라피스라줄리,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이 청금석을 갈아서 안료로 만든 게 바로 울트라마린이라는 물감입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유명한 미술 작품 아시나요? 베르메스라는 그 화가가 이 색을 즐겨 사용하다가 물감 가격이 너무 비싸서 파산했다고 하는데요, 중세 유럽에서는 금보다 귀한 물감으로 불리며 성모 마리아님의 옷을 칠할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윤세영은 유엔과 시노에게도 청금석 반지를 보여주며 계속 설명을 이었다.

“kg당 가격이 무려 1,500만 원이나 하는 물감이라고 하니 감이 오시나요? 마침 청금석으로 염색한 명주 옷감이 공방에서 작업 중입니다. 운이 좋으신 거예요. 저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염색한 천은 손바느질로 두루마기를 만드시는 누비장 선생님께 특별히 부탁해서 곤룡포로 만들 계획입니다.”


“그런데, 곤룡포는 붉은색 아닌가요?”

시노가 손을 들어 밝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네, 맞습니다. 조선 시대 임금님 대부분은 붉은 곤룡포를 입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청색으로 물들인 푸른 곤룡포를 지어 입으신 분이 딱 한 분 계십니다. 누군지 아시겠어요? 바로 태조 이성계 임금님입니다. 우리 새덕마을에서는 쪽빛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신비의 푸른색, 울트라마린으로 태조 이성계 임금님의 곤룡포를 재현할 계획입니다. 바로 이 청금석으로 말입니다.”


윤세영은 반지 속에 박힌 작은 청금석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였다.


작가의말

마을 회관에 걸린 단체사진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유엔은 몸이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역시 예상대로였어, 유엔은 낮게 중얼거리며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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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부 5화. 다락방 비밀의 문 19.05.15 54 1 14쪽
102 2부 4화. 새덕 마을의 비밀 19.05.13 55 1 15쪽
» 2부 3화. 푸른 곤룡포 19.05.09 48 1 12쪽
100 2부 2화. 광산의 실 소유주 19.05.08 52 0 15쪽
99 2부 1화. 사고로 위장한 살인 19.05.07 58 0 13쪽
98 단편 외전-4. 유엔의 각성 19.05.02 61 1 13쪽
97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하) ※공포 주의※ 19.04.30 52 1 13쪽
96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상) ※공포 주의※ 19.04.29 62 1 13쪽
95 외전-2. 크고 예쁜 도토리 19.04.28 56 1 13쪽
94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19.04.26 66 1 12쪽
93 32장 마지막 질문 (1부 최종화) 19.04.25 72 2 16쪽
92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2) 19.04.24 72 2 14쪽
91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1) 19.04.23 70 2 15쪽
90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2) 19.04.21 72 2 15쪽
89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1) 19.04.20 70 1 14쪽
88 29장 사건의 전말 (3) 19.04.19 84 1 12쪽
87 29장 사건의 전말 (2) 19.04.17 68 0 11쪽
86 29장 사건의 전말 (1) 19.04.15 73 1 12쪽
85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9) 19.04.12 77 0 13쪽
84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8) 19.04.10 64 0 13쪽
83 27장 박쥐 사냥 (3) 19.04.08 73 1 13쪽
82 27장 박쥐 사냥 (2) 19.04.05 83 0 12쪽
81 27장 박쥐 사냥 (1) 19.04.03 77 0 11쪽
80 26장 위험한 갈림길 (2) 19.04.01 74 0 13쪽
79 26장 위험한 갈림길 (1) 19.03.29 80 1 13쪽
78 25장 볼모가 된 세자 (3) 19.03.27 74 0 11쪽
77 25장 볼모가 된 세자 (2) 19.03.25 79 1 13쪽
76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19.03.23 87 0 12쪽
75 24장 가짜 열쇠 (3) 19.03.20 8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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