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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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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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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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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0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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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가짜 열쇠 (3)

DUMMY

이지영이 정말로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박재열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안색을 바꾸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가족인데, 어떻게 한 결혼인데, 설마?


오만가지 방향으로 엇갈리는 박재열의 표정을 보더니 시노는 재생 중이던 파일을 일시정지했다.


“파일은 따로 드릴 테니 시간 날 때 들어보세요. 오늘은 좀 바쁘니까 다음 이야기부터 한 번 들어볼까요? 이지영 씨가 곧바로 사람들을 잔뜩 모아 회의를 열었거든요.”


시노가 파일을 재생하기 전부터 박재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설마가 아니었군.



[이제 남편을 버리시겠다, 그 말인가?]

오은명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바로 낯익은 이지영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밖에서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걸 참아주는 것도 정도껏 이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을 저 자리까지 올려줬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이거 어디야?”

박재열이 힘없는 소리로 묻자, 시노는 재생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오은명 씨 집이에요. 부인분이 꽤나 급하셨나 봐요, 거길 다 찾아가고.”


“좋아, 음악은 잘 들었고 본론으로 넘어가지. 오늘 넘기기로 한 박규진은 어디 있지?”

박재열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시노에게 거칠게 물었다.


시노는 대답 대신 빈 손바닥을 내밀었다.

“먼저 잔금부터 주세요.”

돈 몇 푼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박재열의 생각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다.


박재열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흰 봉투 네 개에 나눠 담은 돈뭉치를 내밀었다.

“CCTV 틀고, 바로 주소부터 대. 안 실장이 사람들 데리고 준비 중이니까.”

“아까 그 녹음을 다 듣고도 아직 안 실장을 믿으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박재열은 속으로 짚이는 게 있으면서도 아닌 척 반문했다.


“경호원이고 비서고 전부 이지영 씨가 장악했다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혼자만 모르시나 봐요?”


“그런 잔꾀에 누가 속을 줄 알아?”

하지만, 얼굴은 표정에는 찜찜한 기분이 그대로 묻어 나왔다. 주말에 다녀온 골프 여행 중 안 실장의 낯빛이 평소와 달랐다는 건 이미 박재열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럴 때 특기 한 번 발휘해 보세요. 거짓말할 때마다 50점 감점입니다, 이런 거 잘하시잖아요. 한 마디 딱 던져서 상대가 거짓말하는지 아닌지 알아내는 거.”

시노의 제안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재열이 전화기를 꺼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안 실장이 전화를 받았다.

[네, 대표님.]

“안 실장. 오늘 와이프한테 전화 받은 거 있어, 혹시?”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말씀이긴, 그냥 묻는 거지. 전화 받은 거 있냐고?”

[아, 아니 없었습니다.]

“그래? 이상하네. 뭔가 시킬 게 있다고 하던데.”


[아, 아침 일찍 한 통 받았습니다.]

“어, 뭐라고 하던가?”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늘 일 처리 잘하라고.]

안 실장이 말을 얼버무리기도 전에 박재열이 말을 치고 들어갔다.

“그래? 이상하네. 나 오늘 최자현 만나는 거 집사람한테 얘기한 적 없는데.”


[네? 그, 그, 그러면 다른 얘기 하신 거 아닐까요?]

“그럴까 아닐까는 전화를 받은 자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안 그래? 안 실장!”


박재열이 화내려는 순간 시노가 크게 손을 저으며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 아니야.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다시 전화할 테니까 일단 대기.”

간신히 화를 참은 박재열은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 뭔가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낀 박재열의 얼굴은 금세 창백해졌다.


“제 말 맞죠? 50점 감점이죠? 시간 되시면 다른 직원들도 한 번 확인해보세요. 아마 전부 다 50점씩 감점일 겁니다.“

시노가 태연하게 덧붙이자, 박재열은 고개를 들어 시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우리 거래했잖아요. 거래처 상대가 곤경에 처했는데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드리는 게 도리죠.”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겠구먼.”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좋아요. 방금 받은 돈은 이걸로 충분히 값을 치른 거 같으니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시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박재열을 쳐다보았다.


“잠깐. 그것보다 먼저 약속대로 CCTV부터 보여주는 게 순서 아닐까?”

“방금 전화해서 상황 파악하셨으면 뭔가 발전이 있으셔야죠, 박 대표님. 참 답답하시네.”

시노는 고양이가 아니라 날렵한 포식자가 되어 날카로운 발톱을 마음껏 휘둘렀다.


박재열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계속해봐, 라는 뜻으로 손목을 돌리며 삐딱하게 앉았다.


“변호사 사무실로 가시죠. 지금 바로 택시 타면 안 늦게 도착할 수 있겠네요.”

시노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거기 누가 있는데?”

“평소답지 않게 왜 그러세요? 계속 답답한 소리만 하시고. 오늘 누구 만나러 온 건지 잊으셨어요? 저는 돈 받고, 박 대표님은 조카 만나시고. 콜?”

시노는 생글생글 웃으며 호텔 입구를 향해 앞장서서 걸었다.


박재열은 넋 나간 표정으로 시노 뒤를 따랐다. 자기도 몰랐던 자식이 태어난다는 소식, 아내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 믿었던 부하들이 배신했다는 소식에 이미 박재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 * *


서초구 K 변호사 사무실에는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택시 안에서 그 광경을 본 시노는 과장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더니 박재열의 어깨를 쳤다.


“이 정도면 제대로 찾아온 거 맞겠죠?”

“아는 얼굴이 많네.”

자기도 모르게 이 정도 사람을 동원했다는 게 놀라운지 박재열의 턱은 이상한 방향으로 벌어졌다.


뭔 건달이 이렇게 많아, 박재열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택시에서 내렸지만, 시노는 따라 내리지 않고 창문으로 고개만 내밀었다.

“필요하면 전화 주세요. 거래는 언제든 환영이니까요. (기사님 저는 안 내릴 거니까 차 돌려주세요.)”


박재열은 택시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었다. 까마귀 떼처럼 변호사 사무실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이 일제히 박재열을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 중에는 박재열의 경호원 강 민수도 있었다. 강민수는 어색하게 박재열에게 인사하더니 고개를 돌려 이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재열은 씁쓸한 표정으로 변호사 사무실에 올라갔다.


* * *


박재열이 모습을 드러내자, 규진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더니 변호사에게 소개했다.

“제 작은아버지십니다. 앞으로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해주실 겁니다.”


최 변호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박재열을 모를 리 있나? 동광무역은 최 변호사의 오랜 고객이고, 박재열은 동광무역의 사장이다. 물론, 이 유산 때문에 박재열이 골머리를 앓았다는 것도 최 변호사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최 변호사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건 지난주 금요일부터였다. 박재열의 부인 이지영이 전화를 걸어와 남편에게는 비밀로 하라며 이것저것 요구한 것도 불편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수십 명의 건달이 변호사 사무실 주변에 죽치고 있다. 변호사 체면이 말이 아니다.


대검찰청과 법원을 코앞에 둔 명당자리에 사무실을 차린 잘나가는 변호사 생활이 몇 년인데, 이게 무슨 꼴인가. 대놓고 건달을 풀어 변호사 앞에서 의뢰인을 협박하다니. 최 변호사는 그래도 일단 참기로 했다. 중요한 고객이니까.



“박 대표님 오셨습니까?”

최 변호사는 환한 얼굴로 반갑게 인사했다. 박재열이 등장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잘된 일이다. 게다가 의뢰인이 작은아버지가 맡아서 해 주실 거라고 친절하게 소개까지 하지 않는가? 마음에 걸리던 게 시원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오은명의 목소리가 들리자, 박재열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형수님 나오셨습니까?”

최근 10년 사이에 박재열이 이렇게 정중하게 오은명에게 인사한 건 처음이었다.


테이블에는 오은명, 박규진, 박재열 그리고 최 변호사가 앉았다.

“오시기 전에 신분증, 가족관계증명원, 인감증명서 확인은 모두 끝났습니다. 의뢰인이 상속받을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상속은 간단합니다. 여기 열쇠가 든 상자, 봉인된 채 그대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여기 상속집행확인서 마지막에 인감도장만 찍으시면 끝입니다.”


“잠깐만요.”

규진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려는 변호사의 말을 멈추더니, 봉투에서 위임장을 꺼내 박재열에게 내밀었다.

“듣자 하니 작은아버지가 요즘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고 해서 준비했습니다. 위임장입니다.”


박재열이 위임장을 읽는 동안 최 변호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박재열은 온 정신을 집중해서 위임장을 읽고 또 읽었다.



“최 변호사님 잠깐 자리 좀 피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형수님도.”

마침내 박재열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뇌 풀가동으로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기분까지 들었지만, 박재열은 도무지 위임장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오은명은 잠시 주저하다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수 없이 최 변호사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응접실로 향했다.

“그럼 저는 동광무역 2대 주주님 모시고 차 한잔하고 있겠습니다.”

최 변호사는 잔뜩 여유를 부리고 싶었지만, 찡그린 인상 탓에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규진과 둘만 남게 되자 드디어 박재열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위임받는 대리인이 이지영이라고 적힌 위임장을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장난해?”

“대신에 작은아버지는 열쇠를 갖게 될 테니까요. (진짜 열쇠.)”

마지막 말은 입 모양만 움직여 소리 나지 않게 말하더니 봉투를 열어 가짜 열쇠를 보여주었다.


“계속해봐.”

“밖에 까마귀 떼가 저렇게 몰려들었는데 저도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저는 오늘 은행에 찾아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작은아버지가 위임장과 봉투 안의 (가짜) 열쇠를 이지영 씨에게 전해주시면 됩니다.”

규진은 일부러 작은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이지영이라고 이름을 불러 관계를 부정했다. 가짜 열쇠라고 말할 때도 일부러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혹시나 모를 도청을 의식한 탓이다.


“아직도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위임장이야 언제든 제가 또 쓸 수 있는 거고, 그러면 (열쇠를 가진 사람이) 유리한 게임 아니겠습니까? 위임장 마지막 읽어보셨죠? 일주일이란 시간 동안은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언제부터 자네랑 내가 우리가 됐지? 갑자기 왜 나랑 손잡자는 거야? 아니 그보다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박재열은 의문사를 잔뜩 던지며 규진을 행해 진짜 이유를 알려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변호사 사무실 온 김에 유언장이나 하나 쓰시죠? 할아버지가 쓰신 것처럼.”

질문은 여러 개였지만, 규진의 대답은 간단했다.


“뭐? 유언장?”

“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과 똑같은 작전을 쓰세요.”


나 박재열이 죽으면 보관된 유산은 박물관에 기증하여 세상에 공개한다,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지영 씨가 작은아버지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소식은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요?


규진은 몇 마디를 생략하고 박재열에게 생각할 시간을 줬다. 규진은 자리에 앉은 채 손가락으로 창밖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박재열을 노리는 건달이 수도 없이 많다는 의미였다.


“날 돕겠다는 이유가 뭐야?”

박재열의 질문에 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천천히 걸으며 말을 꺼냈다.

“얼룩말이 살아남는 방법은 한가지뿐이죠. 서로 힘을 합쳐 사자를 향해 발길질하는 것. 아무 준비 없이 여길 나갔다간 까마귀들이 산 채로 저를 찢어 먹으려고 달려들겠는데요. 비슷한 운명을 가진 사람끼리 힘을 합치자는 게 이윱니다.”

창밖을 내다보던 규진의 얼굴빛이 흐려졌다.


박재열도 같은 곳을 쳐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잠깐만 기다려봐. 일단 내 목숨값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작가의말

까마귀 떼처럼 모여든 건달들 속에서 규진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박재열의 목숨값이 가벼워질수록 빈틈은 커지고 있습니다. 적의 말을 한 칸만 움직이면 외통수가 눈 앞이라는 규진의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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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부 5화. 다락방 비밀의 문 19.05.15 54 1 14쪽
102 2부 4화. 새덕 마을의 비밀 19.05.13 55 1 15쪽
101 2부 3화. 푸른 곤룡포 19.05.09 48 1 12쪽
100 2부 2화. 광산의 실 소유주 19.05.08 53 0 15쪽
99 2부 1화. 사고로 위장한 살인 19.05.07 58 0 13쪽
98 단편 외전-4. 유엔의 각성 19.05.02 61 1 13쪽
97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하) ※공포 주의※ 19.04.30 53 1 13쪽
96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상) ※공포 주의※ 19.04.29 63 1 13쪽
95 외전-2. 크고 예쁜 도토리 19.04.28 57 1 13쪽
94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19.04.26 67 1 12쪽
93 32장 마지막 질문 (1부 최종화) 19.04.25 72 2 16쪽
92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2) 19.04.24 73 2 14쪽
91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1) 19.04.23 70 2 15쪽
90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2) 19.04.21 72 2 15쪽
89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1) 19.04.20 70 1 14쪽
88 29장 사건의 전말 (3) 19.04.19 84 1 12쪽
87 29장 사건의 전말 (2) 19.04.17 68 0 11쪽
86 29장 사건의 전말 (1) 19.04.15 74 1 12쪽
85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9) 19.04.12 77 0 13쪽
84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8) 19.04.10 64 0 13쪽
83 27장 박쥐 사냥 (3) 19.04.08 73 1 13쪽
82 27장 박쥐 사냥 (2) 19.04.05 83 0 12쪽
81 27장 박쥐 사냥 (1) 19.04.03 78 0 11쪽
80 26장 위험한 갈림길 (2) 19.04.01 74 0 13쪽
79 26장 위험한 갈림길 (1) 19.03.29 80 1 13쪽
78 25장 볼모가 된 세자 (3) 19.03.27 75 0 11쪽
77 25장 볼모가 된 세자 (2) 19.03.25 79 1 13쪽
76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19.03.23 87 0 12쪽
» 24장 가짜 열쇠 (3) 19.03.20 8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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