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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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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최근연재일 :
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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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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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글자수 :
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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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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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DUMMY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잠깐만 기다려봐. 일단 내 목숨값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확인해야겠어.”



박재열은 얼굴에서 가짜 웃음을 지우고, 아내 이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표독스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당신 거기서 뭐 해?]


“유산 상속 참관인이 돼 달라고 조카에게 부탁을 받아서 변호사 사무실에 왔지.”

박재열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느긋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왜?]

이지영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다.

“그러게, 나도 아침에 갑자기 연락받았어.”



[일은 끝났어? (사모님 여기 상속포기각서.) 조용해요. 지금 전화하는 거 안 보여요?]


전화기 너머 이지영 목소리 뒤로 다마루 나나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속포기각서? 상속을 포기하면 남편을 죽이겠다는 이지영의 녹음 파일 내용이 박재열의 머리를 스쳤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박재열은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옆에 누가 있나 봐?”


[별거 아니야? 상속은 끝났냐니까?]

“응, 방금 끝났어. 조카가 친절하게 위임장을 준비했네.”

박재열의 억양 없는 말투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위임장?]

“일단 만나서 얘기하지.”


[강 과장 거기 있을 거야. 내가 말 해놓을 테니까 같이 움직여.]

“알았어. 오후 1시. 강남 S 호텔에서 만나.”

[알았어.]


박재열은 핸드폰을 쥔 손이 떨리는 걸 감당하지 못하고, 왼손으로 폰을 옮겨 통화를 종료했다. 박재열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화 너머로 들린 ‘상속포기각서’ 라는 말은 다마루 나나미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이지영 씨 옆에서 누구 목소리가 들렸길래 그렇게 놀라셨어요?”

규진은 짐짓 모른 척하고 물었다.

“별거 아니야.”

박재열은 태연한 척 손사래를 쳤지만,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아시죠? 가짜 열쇠가 발각되었을 때 제가 잡혀 있으면 끝이라는 거. 안전한 곳에 피하고 나면 연락드릴게요. 새로운 위임장을 써드리든지 아니면 같이 은행에 가든지 방법은 천천히 고민해 보죠.”

“진짜 유산을 나한테 넘긴다는 걸 어떻게 믿어?”

박재열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한 가지는 약속할게요, 진짜 유산을 넘기든 아니면 진짜를 넘긴 척하든 둘 중 하나는 꼭 해드리겠다고.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에요? 어차피 그 유산, 작은아버지 안전 보장용으로 사용한다면 가짜든 진짜든 안전한 곳에 맡겨두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16년 동안 목숨을 부지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혈육 아니겠습니까?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규진의 말에 박재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규진에게 떨리는 손을 흔들더니 눈을 치켜떴다.

“좋아.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달라는 대로 해 주지. 단, 조건이 하나 있어.”


“뭐죠?”

“보험을 하나 들어줘야겠어. 가장 아끼는 걸 내게 맡겨줘야겠어. 난 지금 내가 가진 전부를 걸었는데 나도 뭔가 중요한 패는 하나 정도는 들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가장 아까는 거? 규진이 화들짝 놀라자, 박재열은 비열한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위로 펼쳤다.

“둘 중 하나를 골라. 유엔이든 시노든.”


* * *


변호사 사무실에서 차를 돌린 택시는 멀지 않은 곳에 다시 정차했다. 법원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시노는 택시에서 내렸다.


시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법원 건물을 가로질러 걸었다.


약속한 대로 유엔은 법원 청사 내부의 카페에 앉아 있었다. 시노가 나무 의자에 앉으며 바로 말을 꺼냈다.

“박재열이 변호사 사무실로 들어갔어.”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안 좋아. 건달 수가 너무 많아.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안 실장이 따로 데리고 있던 사람들도 아마 곧 합류할 거야.”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유엔은 바로 걱정스러운 말을 쏟아냈다.


“어차피 힘 싸움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는 거 알고 시작한 거잖아. 우리는 이제 안전한 곳에 피해 있는 게 좋겠지?”

서두르는 시노를 보더니 유엔은 고개를 저었다.

“일이 잘못되면 규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멀리서라도 지켜봐야 안심이 되겠어. 장소 이동하면 정 대리 아저씨가 알려주기로 했거든.”


“정신 차려.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생긴다고 쳐도 네가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거야? 이젠 규진에게 맡길 때야.”

시노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잖아. 그래도 여차하면 바로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내가 어떻게든 돕지 않겠어?”

유엔은 손바닥을 비비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 * *


오후 1시. 강남 S 호텔 주변 분위기는 갑자기 어두워졌다.


아침에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 앞에 모였던 까마귀 떼가 장소를 옮겼기 때문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고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수십 명이 호텔 주위를 에워쌌다.


호텔 중식당 테이블에 앉은 건 오은명, 박규진, 박재열, 이지영 네 명이었다.

저마다의 비밀을 숨긴 채 상대의 속내를 짐작하느라 다들 분주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가장 초조한 사람이 제일 먼저 입을 여는 법이다.


“시간은 걸렸지만, 조카가 현명한 결정을 했어.”

박재열이 이지영에게 위임장과 열쇠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물론 열쇠는 가짜였다.


이지영은 꼼꼼히 위임장의 내용을 읽더니 피식, 웃었다. 결과가 흡족하다는 의미인지, 얕은꾀가 훤히 보인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생각이 조금 바뀐 모양이네요?”

의중을 알기 어려운 말을 던지며 이지영이 오은명의 눈빛을 살폈다.


“그거 없이도 잘 살아왔는데, 굳이 필요 없는 물건 때문에 걱정거리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능청스럽게 둘러대는 말이긴 했지만, 오은명에겐 그게 진심이기도 했다.


손해 볼 거 없는 거래다. 이지영의 미소는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수가 훤히 보인다. 사람을 바보로 아나? 저를 그렇게 멍청하게 봤다면 사람 잘못 본 거다, 이지영은 미소 뒤에 사악한 표정을 감추었다. 속마음이 훤히 다 보인다. 하지만, 상관없다. 악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뜻하는 바를 이루겠다는 속셈이겠지만, 둘 중 하나는 토사구팽. 어느 쪽이 먼저 ‘팽’ 될지 구경만 하면 된다. 웃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지영은 밝게 미소지었다.


규진에게 남은 길은 벼랑 끝 외줄타기뿐이다. 그 길을 건너지 않으면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차·포·마·상을 잃은 장기판에 외통수를 날릴 방법은 하나뿐이다. 적의 장기 말을 하나만 움직이면 된다. 모서리로 자리를 옮긴 적장의 퇴로를 적의 사(士)가 막아야 한다. 외통으로 가는 유일한 수단이다.


“제가 은행 근처에서 멀어질수록 두 분이 안심하실 테니, 저는 가능하면 멀리 떠나겠습니다. 작은아버지께서 설악산 백담사 템플스테이를 알아봐 주신다고 하니 저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제는 잠적하는 일만 남았다. 궁지에 몰린 박재열이 최대한 반격에 나서 주길 기대하며 가짜 열쇠가 들키기 전에 몸을 피해야 한다. 한쪽이 치명상을 입은 다음에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하고 규진은 속으로 되뇌었다.


갑자기 이지영이 소리 내어 웃었다.

“혼자?”


“혼자 보내기 그러면, 내가 간만에 운전 좀 할까? 조카랑 밀린 얘기도 할 겸.”

박재열이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이지영의 눈치를 살피며 머리를 굴렸다.


자기를 죽이겠다는 얘기를 꺼내기 전부터도 박재열에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아내였다. 숙부 이장세 의원의 후광도 대단하지만, 가공할 힘을 가진 동광회가 뒤에 버티고 있다. 섣불리 반격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가장 확실한 생명보험, 은행 금고의 유산을 손에 넣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아내가 안심한 틈을 타 규진을 빼돌려야 한다. 진짜 열쇠를 숨겨야 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박재열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주머니 속에서 뾰족하게 끝을 세운 열쇠는 따끔하게 박재열의 손을 찔렀다.


이지영이 능글맞은 얼굴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왜 설악산에 간다는 거야? 그걸 순진하게 믿으라는 거야?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라지. 이지영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운전이야 안 실장 시키면 되는 거고, 당신은 나랑 같이 은행 가야지.”

자기 핏줄을 이어받은 사생아가 누구 배 속에서 자라고 있는 줄 아직도 모르고 있겠지? 이 한심한 인간아, 당신은 내 옆에 있어야지. 내 손 닿는 거리에 말이야. 속마음을 감추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지영이 피식 웃는 걸 모두 보았다.


이지영의 속내를 짐작한 오은명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백담사 가는데 바쁜 사람 움직일 필요 있나?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알아서 갈 테니까.”


“형님도 참 답답하시네. 지금 운전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이러는 거 같아요?”

누가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오은명은 대답하지 못하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이렇게 큰일 치르는데 보험 정도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지영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슨 보험?”

오은명의 눈빛이 흔들렸다.


“잘 아시면서, 볼모 같은 거 있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볼모가 되어 주지.”

오은명이 숨 쉴 틈도 없이 대꾸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체스 말이 되어주겠다.


“형님! 볼모가 뭔지 모르세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는 건 조선의 세자가 아니겠습니까? 대비마마를 끌고 갔다가 어디 초상 치를 일 있습니까? 그리고, 왜 지금까지 호사를 누리고 살아오셨는지 모르시나 봅니다. 동광무역 2대 주주가 의문사라도 당하면 누가 제일 먼저 의심받겠습니까?”

이지영은 기분이 좋아서인지 말이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의문사? 은연중에 진심이 새어 나온 건가? 규진의 눈빛이 바빠졌다.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없다. 박재열이 이지영에게 진짜 열쇠만 빼앗기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예측 가능한 변수일 뿐이다.

“별 볼 일 없는 저를 세자라고 불러주시는데 작은어머님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은명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끝까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라며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규진은 태연하게 미소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짐은 혼자 짊어질 테니. 그래도, 빈틈을 노리려면 서두르는 게 좋겠지요? 상대가 준비할 시간이 많아질수록 불리한 게임이니까. 규진은 호텔 중식당에서 끝도 없이 나오는 코스 요리를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빨리 먹어치워야 여길 빠져나갈 수 있다.


“전복 가리비 냉채가 조카 입에 맞나 보네. 아니면 이런 음식 처음이라서 그런가? 누가 잡으러 오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먹어.”

이지영이 비웃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생각보다 고분고분하네. 괜히 걱정했나?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 식탐을 부리다니, 한심한 핏줄은 못 속이는 건가? 이지영은 광대 승천한 표정을 짓다가 별안간 안색을 바꾸었다. 아니면, 일부러 저러는 건가? 저 잔머리 굴리는 표정 좀 보라지. 도망이라도 가겠다는 속셈인가? 좋아, 그렇다면 뭐라도 준비를 좀 해 볼까? 볼모가 한 명인 것보다는 여럿인 게 유리하니까.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이지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밖에서는 안 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가의말

이지영을 처음 본 규진은 뱀처럼 차가운 기세에 눌려 몸을 떨었습니다. 애써 준비한 계획이 허술하게 느껴졌지만,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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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부 5화. 다락방 비밀의 문 19.05.15 54 1 14쪽
102 2부 4화. 새덕 마을의 비밀 19.05.13 55 1 15쪽
101 2부 3화. 푸른 곤룡포 19.05.09 48 1 12쪽
100 2부 2화. 광산의 실 소유주 19.05.08 53 0 15쪽
99 2부 1화. 사고로 위장한 살인 19.05.07 58 0 13쪽
98 단편 외전-4. 유엔의 각성 19.05.02 61 1 13쪽
97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하) ※공포 주의※ 19.04.30 53 1 13쪽
96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상) ※공포 주의※ 19.04.29 63 1 13쪽
95 외전-2. 크고 예쁜 도토리 19.04.28 57 1 13쪽
94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19.04.26 67 1 12쪽
93 32장 마지막 질문 (1부 최종화) 19.04.25 72 2 16쪽
92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2) 19.04.24 73 2 14쪽
91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1) 19.04.23 70 2 15쪽
90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2) 19.04.21 72 2 15쪽
89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1) 19.04.20 70 1 14쪽
88 29장 사건의 전말 (3) 19.04.19 84 1 12쪽
87 29장 사건의 전말 (2) 19.04.17 68 0 11쪽
86 29장 사건의 전말 (1) 19.04.15 74 1 12쪽
85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9) 19.04.12 77 0 13쪽
84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8) 19.04.10 64 0 13쪽
83 27장 박쥐 사냥 (3) 19.04.08 73 1 13쪽
82 27장 박쥐 사냥 (2) 19.04.05 83 0 12쪽
81 27장 박쥐 사냥 (1) 19.04.03 78 0 11쪽
80 26장 위험한 갈림길 (2) 19.04.01 74 0 13쪽
79 26장 위험한 갈림길 (1) 19.03.29 80 1 13쪽
78 25장 볼모가 된 세자 (3) 19.03.27 75 0 11쪽
77 25장 볼모가 된 세자 (2) 19.03.25 79 1 13쪽
»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19.03.23 88 0 12쪽
75 24장 가짜 열쇠 (3) 19.03.20 82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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