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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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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최근연재일 :
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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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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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26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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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DUMMY

[배경 소개]

이 이야기는 유엔이 처음으로 환각을 보았던 2015년 2월의 일입니다.

산소 부족으로 손상된 유엔의 후두엽이 차츰 회복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 * *


물은 차가웠다.


손에 잡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수면은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안간힘을 써도 팔은 느리게 움직였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깼지만, 여전히 물 속이다. 허파에 불쾌한 것이 훅, 하고 들어왔다. 뱉어 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싶다가 다시 정신이 또렷해졌다. 이대로 쉽게 포기한다면 엄마를 볼 면목이 없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엄마에게 혼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다시 눈을 뜨고 팔다리에 힘을 줬지만, 사고 충격 때문인지 오른쪽 다리가 돌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왼팔을 위로 쭉 뻗었다. 눈앞이 잠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누가 손을 잡았다. 아빠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아빠. 죽을 힘을 다해 몸을 웅크리자 물속에서도 쿨럭, 기침이 났다. 왼쪽 다리를 파닥거리며 수면으로 헤엄치는 도중 다시 정신이 흐려졌다.


유엔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사고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난 건 처음이다. 지난번에 기억하지 못했던 장면까지 떠올랐다. 아빠는 왼손을 뻗어 물위에 둥둥 뜬 페트병 하나를 유엔의 옷 속에 집어넣었다. 몸에 힘을 빼고 눕자 귀는 물에 잠겼지만, 입은 둥둥 떴다. 차가 사고로 떨어진 곳은 곡류로 흐르는 강물의 굽은 등쪽이었다. 수심이 깊고 물가로 기어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위를 올려다보니 풀뿌리들이 제멋대로 머리카락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물살이 빨라졌다. 콜록, 기침을 하자 아빠는 오른손으로 유엔의 날개죽지를 들어올렸다.


물살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소용돌이 근처에서 몸이 저절로 반바퀴 돌았다. 앞에 큰 바위가 보였다. 손만 닿으면 기어올라갈 만한데 물살은 강 가운데를 향해 빠르게 흘렀다. 있는 힘껏 아빠가 미는 게 느껴졌다. 자유형 자세로 몸을 돌리다가 물을 한 번 먹었지만, 용케 바위에 손이 닿았다. 간신히 왼발을 걸치고 돌 위에 올라가서 유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곳에서 뭔가 잠깐 떠올랐다 가라앉는 걸 본 게 마지막이었다.


모든 게 기억난 유엔은 고개를 숙이고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러운 울음 소리를 들은 엄마가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이희경이 유엔을 안았지만, 몸은 계속 떨렸다.


기억하지 않아도 돼. 잊어도 괜찮아.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유엔은 작은 소리로 부르짖었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절대로.”


* * *


남편을 잃은 충격은 컸지만, 이희경은 하나뿐인 딸을 키우기 위해 현실적인 문제도 고민해야 했다. 호칭은 거창하게 집사라고 불렸지만, 고향 언니의 가정부 노릇으로 버는 돈으로는 가정을 꾸리기 힘들었다. 남편의 빈자리는 크고 공허했다.


아직 남편의 사망 보험금과 퇴직금은 고스란히 통장에 쌓여 있었다. 이희경이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딸 대학 학비와 결혼 자금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여윳돈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은 이희경은 토지주택공사에서 공매하는 단독주택용 택지 분양에 관심을 가졌다, 경쟁이 치열해서 번번히 추첨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고모, 복권 사는 셈 치고 한번 신청해 보라니까요? H 신도시 근처라서 앞으로 전망도 좋아요.”

유엔 입장에서 부르는 호칭인 ‘고모’라는 통화 상대는 이희경의 시누이, 그러니까 죽은 남편의 누나였다. 누나라고는 해도 남편에겐 보호자나 다름없는 존재였기에 각별한 관계였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고모부 인감도장 줄 테니까 올케가 알아서 해.]

위중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유엔의 고모부는 간경화를 앓고 있어서 고모 입장에서 여기저기 신경 쓸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만큼 이희경을 믿는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기도 했다.


* * *


보름 뒤.


유엔의 고모부 명의로 신청한 택지 분양 추첨이 운 좋게 당첨되었다. 계약 문제도 상의할 겸, 유엔은 고모 댁을 방문했다. 사고 후 좀처럼 밖에 나가지 않던 유엔에게는 오랜만의 주말 외출이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고모였다.

“동생 그렇게 가고 우리 여원이 시집은 어떻게 보내나 걱정했는데, 좋은 소식 있어서 다행이네. 이건 우리가 분양 받더라도 나중에 여원이 앞으로 물려줄 생각이니까 다들 그렇게 알아.”


고모가 온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행여나 누가 욕심내는 일 없도록 단단히 다짐을 받겠다는 심산이었다. 다행히 고모부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럼, 그래야지. 우리 애들이야 다 시집, 장가보냈는데 뭐가 걱정이야.”


고모부는 이희경이 돌려준 인감도장을 쓰윽, 되돌려주며 덧붙였다.

“처남댁이 갖고 있다가 일 끝내고 돌려주세요.”


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간경화 탓인지 고모부의 손등은 꽤나 어두운 색이었다.


* * *


고모부가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은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고모부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 이희경과 유엔은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체온과 맥박이 불안정한 상태로 병원에 도착해 응급 조치를 받았지만, 응급실에 도착한지 두 시간 만에 고모부는 숨을 거두었다.




유엔은 고종사촌들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밤을 지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힘이 되어준 고모네 식구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 유엔은 수고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장례를 챙겼다.


둘째 날 밤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찾는 사람이 눈에 띄게 줄더니 둘째 날 저녁부터는 조문객의 발길이 끊겨 장례식장이 텅 비게 되었다. 밤 10시가 넘자 상주들은 모두 가족 휴게실에 쉬러 들어갔고, 유엔만 혼자 남아 빈소를 지켰다


그 때였다.


조문객 한 명이 신발도 벗지 않고 훅 들어오더니 영정 앞에 섰다.


유엔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직감했다. 가볍게 목례한 다음 조문객을 맞이할 상주를 모셔오려고 몸을 트는 순간, 유엔의 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찾아온 손님은 신발을 벗지 않은 게 아니라, 원래부터 흙투성이 맨발로 들어온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 사람은 조문객이 아니었다.


“고모부?”

유엔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몸이 굳어 버렸다. 유엔 앞에 선 건 틀림없이 고모부였다. 어제 돌아가신 고모부가 본인의 장례식에 찾아왔다.


일단 앉으시죠, 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물이라도 한 잔 드려야 하나? 유엔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향 더 피울게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유엔이 딴청을 부렸다. 영정 앞 향로에 새로 향을 꽂으며 유엔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동안 돌봐 주시고 후원해 주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유엔은 허리를 90도로 굽혀 고모부에게 격식을 갖춰 인사했다. 그것 말고는 유엔이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인사를 받더니, 고모부의 검은 낯빛에 화색이 도는 듯했다. 고모부는 자리에 풀썩 주저 앉더니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중얼거렸다.


[들짐승들이 조문을 온다는 걸 간신히 막고 오는 길이다. 알지? 내가 등산 갈 때마다 산속에다 다람쥐 굶지 말라고 도토리도 뿌리고, 옥수수도 던져주고 그랬던 거 말이야. 그거 좀 받아먹었기로서니 멧돼지가 상갓집에 문상을 온다는 게 말이 되나? 안 그래, 조카?]


“아무리 짐승이라도, 그래도 손님인데 어떻게 배 굶겨서 보냅니까? 있다가 제가 막걸리라도 한 대접 갖다 놓을 테니까 먹고 가라고 하세요. 장례식장 뒤에 보니까 산길 올라가는 화강석 계단 있던데, 거기에 땅콩도 한 접시 깔아 놓겠습니다.”

허황된 말의 내용과는 달리 유엔의 말투는 진지했다.


유엔이 대꾸했지만, 고모부는 들은 척도 않고 다시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인감도장은? 집에 인감도장이 없어서 어제 저승 가는 명부에 도장을 못 찍었어. 저승사자 말로는 지장 찍어도 된다고 하던데 멀쩡한 인감도장 놔두고 내가 뭣하러? 안 그래, 조카? 내가 서운한 게 있어서 달라는 건 아니야. 좀 서운할 수도 있긴 하지만.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 아무튼 내일까지 원래 자리에 도장 갖다 놔. 안 그러면 나 못 올라가.]


혼잣말처럼 두서없이 중얼대는 고모부의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했지만, 유엔이 냉큼 대답했다.

“네, 엄마한테 말씀드려서 내일까지는 인감도장 꼭 돌려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모부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아서 유엔은 최대한 또박또박 큰 소리로 반복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라고 사과할 때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과장된 몸동작으로 인사도 했다.



그 순간 희미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얘.”

“눈 좀 떠 봐.”

“한쪽 눈은 뜨고 있는데요?”

“얘가 왜 이래? 여원아 정신차려.”


엄마가 유엔의 등짝을 내리친 다음에야 유엔은 두 눈을 모두 떴다. 앞에 앉은 고모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엔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길래 들어가서 자라니까.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 좀 봐.”


이희경은 물 한 잔을 내밀며 소리 내어 헛웃음을 웃었다.

“누구한테 뭘 얼마나 잘못했길래 그렇게 빌어? 얼마나 죄송하길래. 흐흐.”


“어? 어, 고모부. 고모부 오셨어. 엄마, 인감도장 원래 자리에 갖다 놓으래.”

“뜬금없이 뭔 소리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엄마와 고모를 뒤로 하고 유엔은 성큼성큼 장례식장 주방으로 걸어갔다. 주섬주섬 땅콩이며 마른 안주를 큰 접시에 담더니 점퍼 주머니에 막걸리까지 한 병 찔러 넣으며 밖으로 향했다.


“너, 어디 가는 거야?”

이희경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손님 오셨대. 내가 살짝 갔다 올 테니까 신경쓰지 마.”


* * *


산 중턱에 위치한 장례식장으로 늦겨울의 찬바람이 훅, 불어왔다.


유엔은 산으로 들어가는 임도 입구에 땅콩 접시를 내려놓고, 그 옆에 막걸리 한 사발을 붓더니 산을 향해 크게 허리를 굽혔다.


“고모부 장례식에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크지 않지만 또박또박한 말투로 인사한 유엔이 몸을 틀어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산속에서 웅웅, 소리가 들렸다. 어찌 들으면 ‘형님’ 하고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보니 ‘흠흠’ 하며 들짐승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유엔이 왼쪽 눈을 감고 다시 보니, 덩치 큰 짐승이 웅숭그레 몸을 굽히더니 습습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게 보였다.


“어린 새끼 안 굶기고 도토리 한 알이라도 더 먹이려다 정작 자기 명줄이 끊어졌구려, 삼동(三冬) 먼 길 발길도 시릴 테니 막걸리라도 한 잔 적시고 가시오.”

유엔이 막걸리가 담긴 사발에 술을 첨잔하며 소리쳤다.


가볍게 눈인사를 한 유엔이 뒷걸음질 치다가 계단 끝에 발을 헛디뎠다. 몸이 휘청거리고 나서야 정신이 퍼뜩 든 유엔은 제 입에서 나온 말이 무슨 소린지 스스로 놀라며 종종걸음으로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내가 왜 이러지? 내가 왜 이래? 유엔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떨었다.


내가 귀신을 보나? 설마?


작가의말

귀신을 보는 능력이 생긴 건가? 아니면, 귀신을 본다는 환각에 빠진 건가? 정신을 차린 유엔이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엔은 답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보는 동안 유엔은 낯선 감정을 느꼈습니다. 온전하게 자기 정신을 지킬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유엔은 몸을 잔뜩 웅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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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2부 5화. 다락방 비밀의 문 19.05.15 54 1 14쪽
102 2부 4화. 새덕 마을의 비밀 19.05.13 55 1 15쪽
101 2부 3화. 푸른 곤룡포 19.05.09 48 1 12쪽
100 2부 2화. 광산의 실 소유주 19.05.08 53 0 15쪽
99 2부 1화. 사고로 위장한 살인 19.05.07 58 0 13쪽
98 단편 외전-4. 유엔의 각성 19.05.02 61 1 13쪽
97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하) ※공포 주의※ 19.04.30 53 1 13쪽
96 단편 외전-3. 사악한 빙의 (상) ※공포 주의※ 19.04.29 63 1 13쪽
95 외전-2. 크고 예쁜 도토리 19.04.28 56 1 13쪽
» 외전-1. 죽은 자의 혼령 19.04.26 67 1 12쪽
93 32장 마지막 질문 (1부 최종화) 19.04.25 72 2 16쪽
92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2) 19.04.24 72 2 14쪽
91 31장 그녀가 있던 자리 (1) 19.04.23 70 2 15쪽
90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2) 19.04.21 72 2 15쪽
89 30장 풀잎에 달린 이슬 (1) 19.04.20 70 1 14쪽
88 29장 사건의 전말 (3) 19.04.19 84 1 12쪽
87 29장 사건의 전말 (2) 19.04.17 68 0 11쪽
86 29장 사건의 전말 (1) 19.04.15 74 1 12쪽
85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9) 19.04.12 77 0 13쪽
84 28장 염곡동 살인사건 (8) 19.04.10 64 0 13쪽
83 27장 박쥐 사냥 (3) 19.04.08 73 1 13쪽
82 27장 박쥐 사냥 (2) 19.04.05 83 0 12쪽
81 27장 박쥐 사냥 (1) 19.04.03 78 0 11쪽
80 26장 위험한 갈림길 (2) 19.04.01 74 0 13쪽
79 26장 위험한 갈림길 (1) 19.03.29 80 1 13쪽
78 25장 볼모가 된 세자 (3) 19.03.27 75 0 11쪽
77 25장 볼모가 된 세자 (2) 19.03.25 79 1 13쪽
76 25장 볼모가 된 세자 (1) 19.03.23 87 0 12쪽
75 24장 가짜 열쇠 (3) 19.03.20 8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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