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3화 : 개시 (2)
파도처럼 덮쳐오고, 폭풍처럼 몰아치며.
수십 개의 칼날로, 백 개의 총탄으로.
압착해 달아오르며 꿰뚫려다가 폭발해 비산해서 시야와 청각을 방해한다.
프록시마의 얼굴엔 즐거움과 가벼운 속상함이 공존하고 있다. 같은 출력인데도 공격이 잘 안 통한다는 게 실망스럽겠지.
그도 그럴 게 나는 세 개의 S랭크 스킬로 프록시마를 상대하고 있고 지금 프록시마의 <스타더스트>는 안타깝게도 B랭크.
나도 프록시마를 빠르게 쓰러트릴 기술은 갖고 오지 않았지만 내 역할은 그게 아니라서.
어쨌거나 정말 타고난 전사다. 필요하면 피를 보는 데 주저하지 않고 그 과정과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고 농담을 했지...
내가 키브엘이었어도 가장 먼저 스카웃했을 거야.
<스타더스트>가 움직이는 유리조각들이 공기와 마찰하는 것만으로 주변의 눈이 녹아 바닥이 질퍽거린다. 방어만 하면 주도권을 아주 넘겨줄 수도 있으니 간간이 윤슬아 소대장의 <방패 무리>를 빌려서 반격하지만 그때마다 반사광이 눈으로 집중되어 조준을 놓친다.
햐, 이거 참. 정말 많이 느셨어요. 프록시마.
<세이프하우스>로 작은 공격을 막고 <전하 붕괴>로 큰 공격을 상쇄한다. 프록시마가 조금씩 내 <전하 붕괴>를 익히고 있는데... 패턴을 파훼당하고 있는 보스몹이 된 기분이네 이거.
프록시마가 공격을 멈추고 고민한다. 크게는 두 가지 선택지, 라미로를 불러서 날 여기서 탈락시킬지, 아니면 내가 레드 팀을 공격해 점수를 얻지 못하게 견제만 하면서 상황이 달라질 걸 기다릴지를 고민하겠지.
저쪽 팀은 각자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나? 당연히 팀플레이 경험은 우리 쪽이 훨씬 많으니 팀 운용으로 승부하는 걸 피하고 개인 단위에서 판단하며 움직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어디...
내 대미지 누적치는 11%. 한참 공격을 받아낸 것 치고는 잘 막았다고 쳐줬네.
프록시마는 혼자 날 공격하는 게 이득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더 공격하지 않고, <스타더스트>로 유리를 별 모양으로 만들더니 하늘 높이 올린 다음 이리저리 회전하며 소리를 낸다. 우리가 효진이에게 봉화 역할을 시킨 것과 같은 맥락.
그후 조금 먼 곳에서 커다란 소리. 정보 교환을 두 번에 걸쳐서 하네. 그러면 오해할 여지가 줄어들고 한 쪽이 탈락해도 계속 알릴 수 있지.
나는 묻는다.
"그만 공격하려고요?"
"이득이 안 생기네. 재미없게."
나도 프록시마도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웃는다. 프록시마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조금 실망스럽다는 듯 말한다.
"같은 출력이면 좀 다를까 싶었는데."
"제가 누굴 만나도 발목 잡고 늘어질 세트로 가져와서."
"공격은 저격수가 하고?"
"그건 비밀입지요."
경유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효진이에게 플레이어를 공격하지 말라고 해 두었다. 우리 중 마지막으로 남았을 때 가장 승산이 높은 쪽이 학선이인데 경유진이 학선이 천적이라, 불리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경유진부터 먼저 탈락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리고 저쪽에는 효진이처럼 먼 거리에서 공격할 사람이 없으니 효진이를 먼저 탈락시키는 게 좋은 선택일거다. 양 플레이어의 수가 줄어들어 출력이 올라갈수록 효진이는 신나게 공격을 퍼부을거다. 지금 <매그넘>의 랭크도 B지만 상대 팀에 A랭크 이상의 방어 기술이 있는 사람은 TG와 키브엘 둘뿐.
프록시마가 날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한 다음 뒤돌아 달린다. 어라, 이거 무슨.
그에 맞춰 저기 왼쪽에서 급격히 다가오는 에너지는...
낯설고 부담스러운 느낌. 키브엘이다.
이렇게 빨리?
평소처럼 잔잔하게 웃고 있지 않고... 좀 신나보인다. 눈에 힘이 들어갔어.
이 순간을 오래 기다렸다, 같은 거냐? 아마 서로 다칠 필요 없이 전력을 다 해보는 걸 기대했겠지.
<규칙 위반>은 쓰지 못하지만 화학계가 할만한 건 모두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렇게, 막는 팔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를 실은 발차기라거나. 맡으면 머리가 핑 도는 녹색 가스 생성이나. 가스 공격을 할 때 투명한 건 생성하지 않기로 해서 아주 잘 보인다. 과장 좀 보태서 서울 한 구 정도는 30분만에 꽉 채울 것처럼 가스가 쏟아지며 바닥을 타고 흐른다.
어쨌거나 <이그니션>을 가져온 게 이 때문. 지면에 불을 붙여서 가스가 가열되어 상승해 흩어지도록 한다. 그렇게 내 스킬을 하나 묶은 다음 다른 걸로 공격해오겠지?
음... 아 이런. 이런 걸 하네? 이그니션에서 열기를 확 뽑아내더니 내게 던지듯 쏟는다! 그 직후 다시 주변의 온도를 한껏 떨어트리는 공격... 갑자기 안개가 생기고 질척이던 바닥이 얼어붙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다.
별 수 없다, 쓰지 뭐. 상민이가 여기 안 와서 부담없이 쓸 수 있다. <타이탄>.
키브엘은 조금 놀라는 표정. 그럴 만도 하다. 방어에 집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탈락할 게 분명하니 체력을 좀 희생하더라도 몰아치기로 해 두었으니. 나는 몸집은 약간만 키우고 강도와 속도 쪽에 집중한다음 키브엘의 공격을 받아내며 반격한다. 울퉁불퉁한 바닥을 깨서 딛으며, 수증기가 얼어붙어 만들어진 단단한 벽을 부수며.
예전에 봐 뒀던 <절대영도>와 비슷하지만 훨씬 에너지 전환이 빠르고 소실되는 에양도 적어. <규칙 위반>없이 이 정도... 그래도, 싸울 수 있다.
빠르게 내지른 오른주먹이 얼어붙는 대신 키브엘이 올린 가드 위를 세게 때린다. 어흐, 손끝만 얼어붙듯이 차가우니 기분이 이상해.
내게 누적된 대미지는 23%. 키브엘은... 방금 그걸로 14%정도 되었으려나.
고민이다. 효진이는 날 지원할만한 위치에 있겠지만 학선이도 그 범위 안에 둬야 한다. 하늘에 표시된 시간을 보면 학선이가 녹색 그룹 NPC를 공격할 때인데 내가 학선이에게 가까이 가느냐, 아니면 효진이의 지원을 포기하고 계속 키브엘과 싸우냐가 있네.
다시 TG가 내는 게 분명한 소리가 난다. 조금 가깝네. 키브엘은 그에 맞춰 조금 다른 방법으로 공격해온다.
"이거 막을 건 안 갖고 있더라고."
젠장.
<세이프하우스>는 번개에 특히 약하다. 좁은 곳에 급격히 집중되는 에너지를 막기 위해 설계된 기술이 아니라서.
아예 공중에 떠올라 전류를 뿜어내며 쉴 새 없이 때려대는데 이거는 막아서 시간을 벌 문제가 아니다. <전하 붕괴>를 응용해서 전기가 나갈 통로를 만들어야 해.
물론 내가 자주 그러듯이 번개가 빗겨간다고 땅에 에너지가 축적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이 에너지가 날 한꺼번에 공격하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키브엘이 공중에서 전류를 뿜어내다 급강하해 바닥에 두 손을 댄다! 다른 방법은 없다. 지금 노출시키긴 싫었지만 지금 체력을 왕창 잃을 순 없으니까.
나는 <회전감옥>을 나 자신에게 걸어서 공중으로 치솟아올랐다. 키브엘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는다... 어처구니 없다는 얼굴.
모든 투명화된 기술은 금지되었으니 <회전감옥>도 조금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이러면 구조가 보이고 파훼법도 알 수 있어 이점이 없어지지만... 갑자기 공중으로 올라오려면 이뿐이라서. <비행>은 금지됐으니까.
원래는 기습으로 한 명 띄운 다음 집중공격하려고 가져온 스킬인데 들켜버렸네. 내가 여기서 탈락하는 것보다는 낫다.
나는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키브엘은 다시 공격할 에너지를 모으며 말을 건다.
"그걸 가져왔다고?"
"경우에 따라 좋아서. 방금도 잘 썼고."
"더 쓸모있는 걸 가져올 줄 알았거든."
"여러 경우를 생각해서 준비했으니까."
나도 싸우며 좀 들떴나. 편하게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왜... 어째서 익숙하지, 지금 이 기분.
언제라도 튀어나올 수 있는 자세, 그에 따라 늘어진 긴 머리. 매섭게 반짝이는 눈, 한 번에 많은 에너지를 운용할 수 있는 뒤로 뻗은 손.
낯설지 않다. 기억에는 없지만.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그럼 작전상 후퇴."
"어?"
빠르게 뒤돌아보지 않고 달린다. 키브엘이 나를 따라오는지 효진이를 찾으러 가는지는 효진이가 직접 알릴 거다. 하늘 위로 투사체를 쏘아올려 소리를 내서.
피이잉 하는 소리가 연달아 두 번, 시간차를 두고 작은 소리, 큰 소리.
나를 따라 움직인다! 나는 계속 우리 시작지점을 기준으로 오른쪽 앞을 향해 계속.
와, 이거 뒤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등 뒤에서 불꽃이 화살처럼 날아오는 거 좀 그렇네? 그리고 왜 눈이 녹아 쏟아지다가 얼어붙는데? 부딪쳐 깨느라 속도가 줄어들잖아.
이제는 한참 먼 곳에서 TG가 내는 소리가 들리고, 슬슬 숨이 차서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미라가 앞에서 달려와 나와 교대한다.
"키브엘뿐이네. 잠시 쉬어."
"부탁해."
휴우.
이러면 우리가 포인트 획득에서 잠시 불리하지만 나와 미라가 가까이 있으면 상대에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이 필요하다. 설령 키브엘이어도.
키브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련없이 뒤를 돌아 달리고, 미라가 쫓는다. 키브엘의 견제를 이리저리 쳐내면서.
내 누적 대미지 33%... 쉴 틈은 없다. 좀 회복될 때까지 약한 역할을 맡은 엔피씨를 공격해 포인트를 얻어야 해.
학균이 놈이 저 앞에서 그 역할을 맡고 있지. 아직 남아있으면 밀린 이야기도 나눌 겸 잡으러 가야겠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