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02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09.12.10 17:52
조회
2,705
추천
25
글자
21쪽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2)

DUMMY

살롱에서의 모임이 끝난 시각은 11시경이었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돌아오는 마차 속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프레이르가 몸을 움츠리자 포르테빌 대공은 옆에 있던 담요를 꺼내어 프레이르의 몸에 덮어주었다. 프레이르는 잠결이었지만 담요를 깊게 끌어당기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입가에 미소는 정말이지 전 왕비였던 레아첼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은 듯 나긋나긋했다. 방금 전까지 살롱에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말을 쏘아붙이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그 모습에 대공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 왕자 전하는...”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평민가정에서 15년을 생활한 주제에 하나하나 쏘아 붙이는 공격적인 말투는 이미 어엿한 귀족이었다. 포르테빌은 살롱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프레이르가 했던 말을 곱씹어보았다.


살롱에서의 대화는 처음부터 프레이르에게 불리한 장이었다. 진지한 해학과 날카로운 비평, 신랄한 빈정거림이 모두 공존하는 곳, 바로 이 살롱은 철학, 문학, 예술은 물론 정치, 역사, 과학에 깊은 조예가 있어야만 무시를 당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이었다. 즉 이곳에서의 대화는 정치적 역량이 아니라 얼마나 우아하고 멋스러운 귀족적 취향을 보여줄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프레이르는 응접실에 앉아 있는 그 누구보다도 어려운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물론 알타미라 후작부인이 화제의 주제를 미리 건네주어서 도움을 주었다. 또한 프레이르가 15살인 것을 감안했을 때 사람들이 그에게 공격적인 질문은 되도록 삼갈 것이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레스터 공작파가 다수 이 살롱에 앉아 있는 이상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포르테빌 대공은 좌불안석이었다.

처음의 주요 화제는 ‘용기에 대한 정의’였다. 알타미라 후작부인이 말해주었던 화제의 내용이었고 프레이르에게 이 정도로 대답하라고 일러두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되었다. 지금은 세리프 남작이 시가에서 연기를 뿜어대며 멋들어진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레스터 공작의 심복이었으므로 프레이르에게 화제를 넘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것만이 용기라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용기는 내면에 있는 이성에 의해서 저절로 드러나는 덕목의 일종이지 의식하지 못한 채 드러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평민들은 사막에서 만난 오크와 맹렬히 싸우는 용병들을 보고 용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검을 들고 오크들을 베는 것을 가리켜 용기라고 한다면 이것은 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례로 제 하인이 기르는 사냥개도 오크들을 보면 명령이 없어도 이빨을 세우고 달려듭니다. 이런 개들을 가리켜 우리들은 '용기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의 이런 행동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즉 용기란 이성에 기반을 둔 덕목으로 봐야합니다”

사람들이 셰리프 남작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보스웰 자작은 셰리프 남작의 의견에 반대했다.

“미친 개들에게서 도망가는 건 이성적으로 볼 때 옳은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남작님의 말씀에 따르면 개들에게서 숨을 헐떡이며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걸 보고 우리는 '아, 거 참 용맹무쌍한 인간이로군!'이라고 감탄해야만 합니다.”

청중들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농담으로 운을 뗀 자작은 살짝 거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물론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 남작님의 말씀대로 짐승을 살펴본다면 이성에 기반을 두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짐승의 행동은 감정이 아니라 본능에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베릴렌가르드의 철학자 아라스 바치오에 따르면 동물이란 인간과 달리 감정과 이성 모두 존재하지 않으며 동물의 행동이란 잘 짜여진 회중시계에 불과합니다. 즉 동물과 인간의 행동을 비교한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를 예로 들며 인간의 용기가 이성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에, 용기란 감정적인 변화에 의해 발생하는 심리적 상태의 일종입니다. 우리는 불의를 보았을 때, 이러이러하고 저러저러해서 용기있게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이성적 판단보다, 불의를 보았을 때 일어나는 적개심과 의협심이 용기로 이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만 봐도 용기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도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이것은 불의가 무엇인지 아는 선택받은 인간에 한정되긴 하지만요.”

셰리프 남작의 말에 대한 반박이었다. 과연 인간의 이성보다 감정과 믿음을 중요시하는 보스웰 자작다운 반론이었다. 그리고 프레이르의 차례가 왔다. 딱히 그 순서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보스웰 자작의 눈이 가장 마지막으로 프레이르에게 머물렀기 때문에 청중들은 프레이르가 말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잠시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글쎄요. 저는 이성이니 감정이니 하는 것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용기란 것이 어떤 하나의 특성으로서 그 사람에게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용기는 그런 것보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 쪽에 가깝지요.”

‘오’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프레이르는 포르테빌 쪽을 살짝 쳐다보았다. 대공은 잘 하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비겁한 자도 한순간 용기라는 야생마가 움직이면 그 누구보다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고 평소에는 용기 있는 사람도 이 야생마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겁을 먹게 마련입니다. 지난 역사를 볼 때 앙시벨 3세 시절, 루이 드 퍼시발 알타미라 백작은 결투신청을 거부했기 때문에 한동안 겁쟁이로 치부되어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앙시벨 3세의 폭정에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그에 맞서는 글을 쓰다가 참수 당했지요. 그런 알타미라 백작에게 겁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습니다. 용기란 이렇게 한순간에 불타오를 수도, 사그라들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치 있는 답변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15살 소년으로서는 믿기지 않을만큼 훌륭한 이야기였다. 이 심오한 고찰이 담긴 답변에 청중들은 감탄하며 ‘과연 샤를 폐하의 후계자’ 운운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레스터 공작은 잠시 심기가 불편한 듯 몸을 들썩였으나 곧 몸을 바로 세웠다.

사실 프레이르의 이야기는 거의 모두 포르테빌이 일러준 것이었다. 궁성에 들어간 지 하루 밖에 안 된 그가 이 정도로 해박한 역사 지식을 품고 있을리 없었다. 역사적 지식뿐만 아니라 알타미라 후작의 살롱에서 알타미라 후작가가 가장 자랑하는 인물인 루이 드 퍼시발 알타미라 백작을 치켜세우는 이런 능숙한 기법 또한 프레이르로서는 아직 구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프레이르의 이 훌륭한 답변의 반 정도는 포르테빌 대공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스터 공작과 그 일파 역시 곧 이 점을 눈치 챘다.

“허허허, 사람에게 비겁함과 용기가 모두 함께 존재한다라... 참으로 올바른 의견입니다.”

알타미라 후작의 뒤편에 앉아 있던 성직자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다만 <신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이란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의지하는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가 올바른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겁함과 죄악 속에 빠진 인간이 주님께 갈구하면 어느 정도의 용기를 얻어 두 가지 특성이 모두 마음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늙은 성직자의 교훈적인 주석에 일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번에는 베아트리체 알타미라가 프레이르에게 조금은 짖궂은 질문을 했다.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전하께 묻고 싶습니다. 전하께서는 어느 쪽의 특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비겁함인가요? 아니면 용기인가요?”

프레이르는 순간적으로 ‘쿡’하고 작게 웃었다. 아까 말한 이야기와 긍정적인 반응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찾은 모양이었다. 그가 말했다.

“아름다운 분 앞에서는 용감해지고 혼자 있을 때는 비겁해지겠죠. 남자의 용기는 머리가 아니라 아랫도리에서 나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요. 물론 포르테빌 대공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전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지만요.”

프레이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혀를 날름 내밀며 포르테빌에게 말했다. 이 경박한 말에 다소 와인에 취한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었고 심지어는 베아트리체와 숙녀들조차 쿡하고 작게 웃었다.

소탈한 프레이르의 유머가 좌중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레스터 공작과 그 일행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웃고 있었다. 하지만 포르테빌 대공은 이들의 눈이 싸늘하게 식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이런 식의 대화가 수시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본질과 현상은 어떻게 존재하는가?’하는 철학적인 이야기와 ‘인간이 다른 선민종족에 비해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하는 화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정치체제가 가장 이상적인가’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넘어갔다. 이 화제에 대해서는 포르테빌 대공이 역설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역시 공화정입니다. 국민 모두가 참여하여 의견을 내고 토론하며 투표로서 결정하는 체제이지요.”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사람들은 잠자코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계에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정치에 참여할 수 없을뿐더러 민중들의 뜻이 항상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공화정은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우민들에게 휘둘리거나 군사정치에 전복 당할 가능성 또한 매우 큽니다. 농부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총자루를 쥔 군대가 위에 올라서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군화 발에 짓밟히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귀족들은 웃으며 포르테빌 대공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하지만 몇몇 시민계급 인사들은 살짝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 한 남성이 포르테빌 대공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대공님께서는 어떤 정치체제가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귀족정이지요.”

포르테빌은 단호하게 말했다. 비록 샤를과 행동을 함께 하기는 했지만 포르테빌 대공은 확고한 귀족주의 신봉자였다.

“국왕의 일인 독재는 일사불란하지만 잘못된 길에 접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유능하고 고귀한 혈통인 다수의 귀족들이 국가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유능한 귀족들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의무를 다하며 백성들을 보호하는 국가. 그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갖춘 국가겠지요.”

“존경하는 포르테빌 대공 각하, 이것을 무례로 여기시지 않으시다면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이번에 말을 걸고 들어온 것은 보스웰 자작이었다. 포르테빌 대공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해도 좋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다면 그 귀족정에서 국왕의 역할은 뭡니까? 국왕은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는겁니까?”

날카로운데다가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포르테빌은 아차 싶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을 준비했다. 열에 들떠 너무 속내를 보여줬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보스웰 자작은 곧바로 말을 끊으며 끼어 들어왔다.

“아, 이 의견은 프레이르 전하께 들어보고 싶군요. 전하께서는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중에서 왕가를 대표하시는 분이니까요.”

‘저 자식이!’

포르테빌은 자신의 실언으로 저들에게 공격할 빌미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한 소리를 해서 프레이르에게 이런 정치적인 화제가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포르테빌은 설마 이 정도로 공격적인 질문을 프레이르에게 던질 거라 예상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무른 생각이 큰 화근이 될 판이었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은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포르테빌에게 화제를 넘길 수도 없었다. 방금 발언했던 자신에게 다시 발언을 넘긴다는 것은 너무 부자연스러웠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짜고 이야기를 했다는 증거가 될 터였다. 포르테빌이 모든 이야기를 짜고, 프레이르가 말한 것은 그것을 앵무새처럼 읊조렸다는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살롱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또한 질문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이런 질문을 거부한다는 것은 ‘왕가는 이 나라에 필요 없습니다.’라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진퇴양난이로군.'

포르테빌 대공은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 대공을 프레이르가 흘낏 바라보며 눈빛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여부를 물었다. 어쩔 수 없이 포르테빌 대공은 ‘적당히 대답하며 얼버무리십시오’라는 사인을 보냈다. 이제 공은 오로지 프레이르에게 돌아갔다.

“글쎄요. 전 아직 궁성에서 배워야할 것이 많아서 말이죠. 다만 나라를 대표하는 기둥이 있어야 그 나라가 바로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포르테빌은 프레이르의 무난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하지만 보스웰 자작은 집요했다.

“기둥이 여러 개여도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볼 수 있죠. 전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포르테빌 대공은 보스웰 자작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적대세력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15살의 왕자에게 ‘국왕이 필요 없다’라는 고해성사라도 들을 셈인가? 그는 레스터 공작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시켰다가는 위험하다고 여긴 포르테빌이 나서려는 순간 프레이르가 입을 열었다.

“전 아직 어려서 그런 어려운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동화 하나를 자작님께 들려드리고 싶군요.”

프레이르는 숨을 골랐다. 포르테빌 역시 침을 삼켰다. 그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프레이르가 무슨 말을 하든 포르테빌 자신이 일러준 내용은 아니었다. 그는 프레이르에게 동화를 말해준 적이 없었다. 지금 이 어린 왕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순수하게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왕자에게 지혜를 내려달라고 아벨 신에게 기도하는 것 밖에 없었다.


프레이르는 조용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에 한 뱀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뱀은 머리와 몸통, 꼬리로 나뉘어 있었는데 뱀의 머리에는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눈, 맛있는 음식을 찾아내는 혀, 그리고 적을 단번에 물어 죽일 수 있는 독니가 있었습니다. 뱀의 머리는 몸통과 꼬리를 이끌고 맛있는 사과가 있는 곳으로 이끌기도 했고 따뜻한 땅굴 속으로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몸통과 꼬리는 그런 머리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 우리는 항상 머리를 따라가야만 하는거지?’, ‘우리도 머리보다 더 잘 이끌 수 있어!’ 곧 몸통과 꼬리는 머리에게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머리가 대답했습니다. ‘너희들은 앞을 보지도 못하고 음식을 찾아낼 수도 없고 적을 무찌를 수도 없잖니. 그냥 내가 너희들을 이끄는 것이 낫지 않겠어?’ 하지만 몸통과 꼬리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래서 머리는 할 수 없이 먼저 꼬리에게 자신들을 이끌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신이 난 꼬리는 이리저리 뱀을 이끌며 다녔습니다. 하지만 눈이 없는 꼬리는 곧 가시덤불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꼬리가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뱀은 가시덤불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결국 머리의 노력으로 뱀은 간신히 가시덤불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온 몸에 가시가 박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몸통이 앞에서 나서겠다고 말했습니다. 꼬리의 고집 때문에 죽을 뻔했던 머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몸통이 자신이 이끌지 않으면 머리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하며 버티자 어쩔 수 없이 몸통에게 뱀을 이끌도록 시켰습니다. 신이 난 몸통은 머리와 꼬리를 이끌고 질질질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뱀은 금세 사냥꾼의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머리가 사냥꾼을 물려했지만 몸통은 막무가내로 앞으로만 나아가느라 머리의 움직임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뱀은 사냥꾼에게 붙잡혀 끓는 물 속에 던져져서 맛좋은 뱀탕으로 푹 익혀지고 말았습니다.”

프레이르의 말에 좌중은 한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지어 포르테빌 대공마저도 멍청한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바라볼 뿐이었다.

프레이르의 우화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뱀은 레인가드를 의미했다. 머리는 국왕이고 몸통은 귀족이며 꼬리는 평민이었다. 신에게 선택 받은 머리가 다른 부위를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그 중에 아르첼 밖에 없었다.

“이상입니다.”

프레이르는 빙긋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며 좌중은 다시 혼란을 느꼈다. 이 어린 왕자가 방금 했던 이야기에 깊은 뜻을 두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보스웰 자작이 말문을 열었다.

“...음... 뭐, 재밌는 이야기로군요. 다만 동화라서 그런지 조금 말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물론이죠. 어떻게 뱀이 말을 하겠어요?”

“아뇨,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보스웰 자작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애초에 그 뱀의 머리에만 눈, 독니, 혀가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모여 있을리 만무합니다.”

프레이르는 더욱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리가요? 눈과 독니와 혀가 독사의 머리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설마 뱀에 꼬리에 있진 않겠죠.”

프레이르의 이 순수한 답변에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 보스웰 자작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린아이에게 놀림을 받자 그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 그렇지만! 그럴리 없습니다.”

“저한테 따지시면 안 돼요. 뱀의 머리를 만든 것은 아벨 신이니까요. 지금 신에게 따지겠다는 건가요? 불경하네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보스웰 자작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그, 그야 그렇지만! 이건 다른 경우입니다!”

“뭐가 다르다는 건지 전 전혀 모르겠어요.”

프레이르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 귀여운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프레이르의 얼굴에는 어느새 비아냥거리는 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 모습에 보스웰 자작의 얼굴은 평정심을 잃고 일그러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말이 안 됩니다. 꼬리가 머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그러면 진정한 머리와 기능을 갖춘 몸통은 함께 죽고 말겁니다! 어떻게 그... 그... 뱀의 한 부분이 자신이 머리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자각할 수 있습니까? 꼬리가 머리 행세를 하고 있다면요?”

“그럼 저도 묻고 싶네요, 자작님.”

프레이르의 비웃음은 이제 노골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 어린 왕자가 이렇게 싸늘한 조소를 짓는 것에 포르테빌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프레이르는 차가운 어조로 보스웰 자작에게 쏘아붙였다.

“자작님은 어째서 본인이 몸통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확신하세요? 자격도 없으면서 몸통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그 쪽은 스스로 몸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죠?”

프레이르의 말에 장내는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프레이르가 말하는 ‘그 쪽’이 어느 쪽을 의미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다. 레스터 공작 부부와 보스웰 자작, 셰리프 남작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고작 15살의 소년이 날카로은 풍자로 수많은 귀족들을 꿀먹은 벙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기나긴 침묵이 방안을 무겁게 눌렀다.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보스웰 자작의 거친 숨소리만이 방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마침내 이 살롱의 개최자인 알타미라 후작부인이 중재에 나섰다.

“프레이르 전하, 너무 저 나이 드신 자작님을 놀리시면 못 씁니다. 따지고 드는 남자는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없어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떴나 봐요. 이런 곳은 처음 와보는 촌뜨기라.”

그녀와 프레이르의 농담에 겨우 분위기가 밝아졌다. 보스웰 자작은 여전히 웃음거리가 된 것에 대해서 화가 나 있었지만 레스터 공작은 겨우 다시 침착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롱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로라시아연대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8 로라시아 연대기 - 9.명예로운 자와 거짓말쟁이(3) +5 09.12.17 2,123 17 8쪽
27 로라시아 연대기 - 9.명예로운 자와 거짓말쟁이(2) +6 09.12.16 2,106 14 9쪽
26 로라시아 연대기 - 9.명예로운 자와 거짓말쟁이(1) +7 09.12.16 2,184 16 11쪽
25 로라시아 연대기 - 8.왕족의 식사(3) +4 09.12.15 2,318 16 6쪽
24 로라시아 연대기 - 8.왕족의 식사(2) +9 09.12.14 2,216 15 14쪽
23 로라시아 연대기 - 8.왕족의 식사(1) +6 09.12.14 2,393 16 18쪽
22 로라시아 연대기 - 수상한 남자 +3 09.12.13 2,491 15 8쪽
21 로라시아 연대기 - 7.공작의 반격(2) +4 09.12.12 2,666 16 13쪽
20 로라시아 연대기 - 7.공작의 반격(1) +3 09.12.12 2,707 20 13쪽
19 로라시아 연대기 - 비밀치안대 +1 09.12.11 2,695 18 4쪽
18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4) +2 09.12.11 2,786 19 7쪽
17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3) +2 09.12.11 2,784 22 7쪽
»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2) +4 09.12.10 2,706 25 21쪽
15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1) +2 09.12.10 2,901 17 11쪽
14 로라시아 연대기 - 살롱이란? +3 09.12.10 2,978 16 2쪽
13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3) +4 09.12.10 3,034 22 17쪽
12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2) +3 09.12.09 3,179 20 7쪽
11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1) +5 09.12.08 3,483 19 7쪽
10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3) +1 09.12.08 3,525 19 7쪽
9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2) +3 09.12.07 3,571 19 7쪽
8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1) +2 09.12.07 4,011 21 11쪽
7 로라시아 연대기 - 3.코라 가족(2) +4 09.12.06 4,575 20 15쪽
6 로라시아 연대기 - 3.코라 가족(1) +4 09.12.06 6,119 24 17쪽
5 로라시아 연대기 - 이냐크 대성당 화재 사건에 관한 보고서 +4 09.12.06 5,834 18 2쪽
4 로라시아 연대기 - 1.주교의 보증(3) +9 09.12.06 7,238 20 20쪽
3 로라시아 연대가 - 1.주교의 보증(2) +11 09.12.06 10,877 27 27쪽
2 로라시아 연대기 - 1.주교의 보증(1) +10 09.12.06 16,363 29 9쪽
1 로라시아 연대기 - 프롤로그 +14 09.12.06 20,497 56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