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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15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09.12.0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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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글자
20쪽

로라시아 연대기 - 1.주교의 보증(3)

DUMMY

이냐크 대성당을 빠져나온 샤를과 마틴 경은 수도 카시네예프로 말머리를 향했다.

어느듯 태양은 가을하늘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태양이 레인가드 서쪽의 웅장한 아라랏 산에 걸려 짙은 노을을 흩뿌릴 즈음 샤를이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틴 경,”

“예, 폐하.”

“브조니 주교가 준 편지 말이네. 그 안에 뭐라 쓰여 있을 것 같나?”

샤를의 말에 마틴 경이 즉각 대답했다.

"그 늙은이의 태도로 봐선, 모르긴 몰라도 폐하와 곧 태어날 아기씨를 찬양하는 내용이 쓰여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만."

마틴 경의 대답에 샤를이 대답했다.

"나와 같은 생각이군."

샤를은 이렇게 말한 뒤 가만히 말을 몰아갔다. 그러자 마틴 경이 말했다.

"그 따위 늙은이의 헛소리 따위 그냥 무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까짓 편지는 그냥 공개하지 마시지요. 어차피 아무도 그런 편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겠지."

샤를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편지가 정말 내 아이의 미래를 보증하는 편지라면?"

샤를이 마틴 경에게 되물었다.

"만약 이게 정말 내 아이의 삶이 축복될 것이라고 보증해주는 편지라고 한다면 한번 확인해볼만한 가치가 있지 않겠나?"

"확인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열어보기 전에는."

마틴 경이 말했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편지를 열면 봉인이 훼손 될거고, 봉인이 훼손되면 어차피 공증서로 인정받지 못할 텐데요."

"봉인이라......"

샤를은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품 속에서 편지와 함께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마틴경은 짐작조차 못했다. 그 순간 샤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편지의 봉인 부분을 뜯어냈다. 마틴 경이 그 불경한 행동에 깜짝 놀라 뒤로 주춤했다. 그러나 샤를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일단 일이 터지고 나면 이런 작은 사실을 캐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겠지. 중요한 건 이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가 뿐이네."

샤를은 대담하게 말하며 편지 봉투를 열어 편지를 끄집어냈다.

"이 편지가 내 아이의 운명을 쥐고 있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공개할 수는 없지."

마틴 경은 성직자가 봉인한 인장조차 불경스럽게 훼손해버리는 샤를의 태도에 조금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편지 내용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샤를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마틴 경 역시 샤를과 마찬가지로 브조니 주교의 예언에 대한 관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윽고 샤를은 말 위에서 천천히 편지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말도 안 돼..."

샤를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건 음모야... 이럴 리가 없어."

아까부터 샤를은 이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브조니 주교의 편지를 읽은 뒤로 죽 이 상태였다.

반면 마틴 경은 편지를 쥔 채 분노로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그는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주교의 머리를 이 검으로 내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놈은 이 편지를 대중 앞에 공개하라고 한 건가?'

마틴 경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 미친 늙은이는 이 나라를 완전히 파멸시킬 작정인가?'

마틴 경이 자기 자신에게 되묻듯 중얼거렸다.

주교가 보낸 편지는 <로드4경>이라는 예언서를 인용한 편지였다. 예언서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다는 그 경전을 통해 주교는 저주와도 같은 폭언을 앞으로 태어날 왕자에게 퍼부어대고 있었다. 이런 폭언을 보증하여 봉인까지 한 것은 국왕 샤를과 그 아이를 파멸시키고자 작정하지 않고서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마틴 경은 가슴 속에 불이 지피어 오른 것 같은 느낌으로 몇 번이고 편지를 곱씹어 읽고 있었다.

반면 샤를은 그 편지를 읽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냉철한 그였지만 자신의 자식의 미래에 대해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가 그토록 저주의 말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한 글이 아닌 예지 능력이 있다는 브조니 주교의 편지여서 더더욱 그러했다. 자신과 사랑하는 여인의 자녀가 끔찍한 운명을 불러올 거라는 사실에 그는 경악하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는 순간 그는 눈 앞이 캄캄해져 말을 몰기조차 힘들어질 지경이었다.

잠시 후,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샤를이 말했다. 평소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듯한 샤를이었다.

“자네는 이 일을 누설하지 않겠지?”

샤를답지 않은 힘없는 물음에 마틴 경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래, 그대만 믿겠네.”

샤를은 서쪽 하늘의 노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귀족들이지...”

그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마틴 경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폐하, 다른 귀족들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겠습니까? 저희는 분명 아무도 모르게 신전을 방문했는데요?”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리처드는 저 하늘의 별보다 많은 첩자들을 거느리고 있고, 알타미라 후작은 거미줄보다 질긴 정보망을 가지고 있지. 그리고 레스터 공작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수백 명의 성직자가 있네.”

“그,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이 붉은 노을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의 지적인 푸른 눈 또한 붉게 물들어있었다.

로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이 펼쳐져 있어서 아벨 신이 직접 강림하여 인간들의 수도를 점찍어주었다는 전설이 내려져오는 성산(聖山)을 넘어서자 어느새 거대한 카시네예프의 성채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며 60만 명이 사는 세계 최대의 도시 카시네예프가 언덕 아래에 놓여 있었다. 마틴 경이 물었다.

“폐하, 그럼 브조니 주교는 어떻게 합니까?”

샤를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마틴 경은 말의 고삐를 늦추며 말했다.

“그 늙은이가 재수 없는 예언을 나불대고 다니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평판도 떨어질테고 곧 태어나실 왕자 전하께도 위해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래서 자네라면 어떻게 할텐가?”

“입막음을 해야죠. 죽은 개는 물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마틴 경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아무리 혈기왕성한 20대 장군이라지만 너무나도 비정치적이고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샤를은 머리에 손을 얹으며 탄식했다.

“마틴 경...”

샤를이 혀를 끌끌 찼다.

“자네는 지금 비밀로 해야 할 일을 온 세상에 떠벌리려는 생각인가? 그런 짓을 했다간 이 편지에 관한 소문이 레인가드는 물론 로라시아 대륙 전체에 퍼질 걸세.”

“그,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놈을 몰래 납치해서 강에다 던져버리는 것은 어떨까요?”

조금은 분별 있는 대답이었지만 여전히 그 과격성은 수그러들지 않은 답변이었다. 아마도 마틴 경의 사고방식은 ‘입막음 = 살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정치꾼인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겠군.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브조니 주교를 조금 더 자세히 지켜봐야겠어.”

그러나 마틴 경은 샤를의 ‘방법’을 들을 수 없었다. 카시네예프 성으로부터 울려 퍼진 은은한 포성이 그들의 대화를 중단시켰기 때문이었다.

“폐하, 저 소리는 대포 소리가 아닙니까?”

다시 포성이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대포소리가 늘어날수록 샤를의 굳어져 있던 얼굴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포소리가 12번 울리자 지금까지 절망 속에 빠져 있던 샤를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축포로군. 그것도 왕실의 경사를 의미하는 12발이야. 프레이르가 태어난 모양이네.”

이건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아직도 예정일은 십여일 이상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럴수가... 내 아이의 출산을 놓치다니..."

샤를이 안타까움과 환희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요란한 종소리와 함께 시내 곳곳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샤를은 환하게 웃으며 마틴 경에게 말했다.

“자, 마틴 경. 어서 가보세. 내 아이가 태어났어!”

샤를은 말고삐를 늦추더니 쏜살같이 말을 몰아 달려갔다. 마치 어깨에 머무르고 있던 걱정을 떨어뜨리려는 듯 샤를은 숨을 헐떡일 정도로 말을 거칠게 몰아 궁성을 향해 질주했다. 마틴 경 역시 말을 몰아 그 뒤를 좇았다.

말을 몰아가는 동안 마틴 경은 자신의 조카이자 이 나라의 왕자가 태어난 사실에 기뻐해야 했겠지만 그의 마음 한 곳에는 역시 샤를과 마찬가지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아기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그 브조니 주교라는 작자의 편지가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주교의 불길한 예언이 끊임없이 눈 앞를 맴돌며 그를 괴롭혔다.

“제길! 그 망할 자식이 괜히 좋은 일에 초를 쳐 놓아가지고...”

마틴 경이 왕궁으로 향하는 왕도를 달리며 중얼거렸다.

도로는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심란한 마틴 경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 군중들은 경사를 즐기기 위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교회의 종이란 종은 모두 울려대고 있었고, 군인들과 위병들은 흥에 겨워 하늘을 향해 총을 쏴댔고 술집마다 넘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도로 양쪽에서는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들의 찬양과 기쁨의 노래로 가득 찼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그 넓은 도로의 가장자리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흥분되고 행복한 상황에서도 마틴 경은 결코 기뻐할 수만은 없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지닌 채 샤를을 따라갔다.

그들은 카시네예프의 거대한 서문을 지나 카뮈르 궁전에 들어갔다. 화려한 황금 독수리의 문장이 새겨진 동상 아래에서 말을 내린 그들은 대전 앞에서 시종들에게 말을 맡긴 후 왕비가 있는 후궁으로 향했다. 후궁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는 수많은 시녀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매우 분주했다. 샤를과 마틴 경은 급히 왕비의 방인 내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들어섰다.

“메르센!”

샤를이 한 시녀를 불러 세웠다. 중년의 시녀는 크게 당황한 듯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머뭇머뭇 거렸다. 그녀는 왕비의 침실을 담당하는 내실에서 가장 높은 직책인 시녀장 메르센이었다.

“메르센!”

또다시 샤를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어두운 낌새를 눈치 챈 마틴 경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수많은 일 때문에 흥분 상태에 빠져 있던 샤를은 이 수상한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 샤를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시녀장에게 물음을 건넸다.

“레아첼이 출산했지? 아들인가? 딸인가?”

“아들입니다, 폐하.”

메르센이 착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과 마틴 경의 눈이 마주쳤다. 그 검은 눈이 비탄에 잠긴 것을 발견하자 마틴 경의 불길한 예감은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여전히 흥분에 휩싸인 샤를은 메르센의 이상한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들이라고! 그럼 역시 프레이르겠군! 레아첼을 닮아 초록색 눈이면 좋겠구나... 어서 가자. 그 아기를 봐야겠다.”

샤를은 웃으며 레아첼의 방으로 힘차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샤를은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복도를 지나가는 시녀들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종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소곤거리고 있었다. 복도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샤를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건...”

샤를의 물음에 메르센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샤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중년의 시녀장은 거의 통곡하다시피 하며 샤를에게 용서를 구했다.

“흑, 요, 용서하세요, 폐하! 흑. 왕비님께서.. 흑흑... 왕비님이...”

“레, 레아첼이?”

“와, 왕비님이... 흑흑흑...”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자 샤를은 자제심을 잃고 시녀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아 일으킨 뒤 사납게 흔들었다. 평소에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이성적인 샤를이었지만 지금 그는 불안감으로 이성을 잃고 있었다. 총명했던 그의 머릿 속이 새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오직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냔 말이다!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다, 제길!”

메르센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마치 실성한 것처럼 입술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러나 그 비탄에 잠긴 모습은 무언으로도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비극이 벌어졌음을 깨달은 젊은 국왕이 현기증을 느낀 것처럼 비틀거렸다.

“아아... 이런... 바보 같은...”

그는 마치 그 자리에서 혼절할 듯이 무너져 내렸다. 마틴 경과 메르센은 깜짝 놀라 샤를을 붙들었다.

그러나 샤를은 그 두 사람의 도움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두 사람에게 물러나 있으라는 표시를 해보였다. 온 힘을 다해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선 그는 흔들리는 모습으로 한 발짝, 두 발짝 내실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뒤를 따라 메르센과 마틴 경이 천천히 걸어갔다.

샤를은 내실 안에 들어갈 때까지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내실에서 레아첼이 달려와 여느 때처럼 그의 품 속에 안기며 수줍은 입맞춤을 해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레아첼은 틀림없이 그의 발자국 소리를 알아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문을 젖히고 천진난만하게 그의 품 속으로 뛰어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내실이 가까워질수록 샤를은 점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레아첼이 있는 내실은 쥐죽은 듯한 고요함과 함께 흐느끼는 소리만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최후에 최후까지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두 눈으로 레아첼의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그는 절대 멈출 수 없었다.

마침내 샤를은 시녀들이 눈물짓고 있는 내실 안으로 들어갔다. 열댓 명의 시녀들이 침대 곁에서 작게 흐느끼고 있었다. 샤를은 침대의 커튼을 젖히며 침대 안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침대 위에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레아첼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히, 그리고 샤를이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레아첼의 죽음을 발견한 마틴 경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평소에는 용감한 장군인 그였지만, 한 몸처럼 아끼는 누이의 죽음앞에 그는 애통해하는 청년에 불과했다. 마틴 경은 망연자실했다.

그 사이 샤를은 절뚝거리며 더욱 가까이 레아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된 샤를은 레아첼을 붙들고 죽은 자의 얼굴에 얼굴을 맞대어 비벼댔다. 동시에 그는 쉴 새 없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이의 이름을 불렀다.

"레아첼, 레아첼, 레아첼... 아, 레아첼, 레아첼!"

그는 이미 온기가 사라져버린 그 시신을 다시 껴안으며 죽은 자의 입술에 셀 수 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싸늘히 식어버린 그녀는 샤를의 입술에 결코 화답해주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이 샤를을 절망에 빠뜨렸다.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레아첼의 시신 옆에서 통곡했다. 통곡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간간이 레아첼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운 샤를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레아첼의 곁에 앉았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오른손을 붙잡은 샤를은 말없이 그 손을 쓰다듬으며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방울이 계속해서 그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샤를이 지난날 얼마나 왕비를 아끼고 소중히 여겨왔는지 알고 있는 시녀들은 그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레아첼의 손을 붙잡고 있었던 샤를이 목멘 목소리로 메르센에게 물었다.

“프레이르는... 무사한가?”

메르센은 울음을 참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를 이리로 데려오거라.”

메르센은 매우 지쳤지만 샤를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만약 그녀가 샤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아기를 데려오기는커녕 꼭꼭 숨겼을 테지만 그녀는 샤를이 생각하고 있는 예언의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곧 아기보에 싸인 작은 아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 샤를의 품에 안겨졌다. 아기는 궁성 안의 소란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깨끗이 씻겨진 몸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본 샤를의 마음속에 일순간 망설임이 일었다. 그토록 마음을 다잡았는데도 프레이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이 약해져버린 것이다.

‘죽여야 한다!’

샤를은 스스로에게 호통을 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반대로 그의 몸은 전혀 그의 명령을 따르려하지 않았다.

‘그 어머니의 피를 볼 것이라는 예언이 이루어졌다... 브조니 주교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어. 분명 죽여야 후환이 없을 것이다.’

샤를은 그의 품 속에 단검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왼팔... 왼팔을 들어올려 단검을 꺼내어 찌른다면 이 작은 악마를 없앨 수 있었다...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샤를은 초인적인 노력으로 그의 오른팔을 들어 프레이르를 받쳐 들었다. 그 순간 프레이르의 입가를 감쌌던 아기보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리고 잠자고 있던 아기의 얼굴이 모두 드러났다. 그 얼굴을 확인한 샤를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프레이르를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아기를 감싸 안은 팔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결연하게 다물어졌던 그의 입술 역시 격렬하게 달싹거렸다. 온 몸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경악하여 마치 경련하듯 덜덜 떨려왔다.

‘그럴 리가 없다... 이런 갓난아기가 웃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기가 웃고 있었다! 그 작은 아기, 이제 갓 태어난 아기가! 아기는 분명히 그 작은 입가에 미소가 띠고 있었다. 그 것도 샤를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미소를...

프레이르는 분명 샤를을 닮았다. 그러나 입가에 담긴 부드러운 미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레아첼과 너무나 똑같았다. 그 신비로운 미소를 띤 아기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맞는 단잠을 즐기며 메르센의 품 속에 안겨 있었다.

그 미소를 발견한 샤를은 이제 더이상 그의 품속에 든 단검을 꺼낼 여력이 없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아, 주님, 어찌하여 이 저주받은 자식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미소를 깃들어 놓은 겁니까?’

샤를은 신을 원망했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잔인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신에게 탄식하고 또한 저주했다. 어째서 신은 이 아기에게 하필이면 그가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레아첼의 미소를 남겨 주었는가? 정말이지 신은 가혹하고 또한 잔인했다.

갈등과 절망감, 그리고 무력감에 고뇌하던 그는 결국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끝내 품속에 넣어둔 단검을 꺼내지 못했다. 샤를은 아기를 다시 메르센의 품에 안겨줬다. 메르센은 보물을 껴안듯 그 아기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샤를은 시녀장의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을 확인하며 모두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시녀까지 모두 방을 나가는 순간, 샤를은 다시 한 번 레아첼의 옆에서 통곡을 하고 말았다.


작가의말

브조니 주교의 편지

이것은 대현자 카이베리안의 말이니라.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한고. 해가 기울지 않았건만 열국 중 으뜸이요, 열방 중 가장 큰 자가 이제는 열강의 웃음거리로 떨어졌도다. 무너진 성전 위에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음은 이미 끝난 고난에 인함이 아님이여, 여전히 끝나지 않은 고난에 인함이로다.

저주의 샛별이여. 위대한 별들이 떨어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나 그가 비치는 길은 오직 사신에게 향하는 길이노라. 샛별이 비치는 길은 국가가 국가를, 아들이 아버지를, 부인이 남편을, 저속한 혈통이 고귀한 혈통을 대적하는 길일지어다. 사랑하는 자 없고, 위로하는 자 없고, 애통해하는 자 없나니, 오직 있는 것은 배반하는 자와, 원수하는 자와, 억누르는 자 뿐이라.

고귀한 혈통에서 난 파멸의 씨앗이여. 어미의 배속에서 싹 튼 사망이여. 아래는 아홉 인을, 위로는 한 사람의 피가 그 손에 묻어 있도다. 구원자의 이름을 칭하나 죽음을 가져오는 자의 옷을 입고 있으니 그 이름에 아벨 신의 진노가 있을 지어다.

대저 그 이름을 기억할 지니 그 이름은 구원자요 별이지만 그 어미의 피를 마시고 태어난 자요, 그 아비의 살을 먹고 자란 자요, 레인가드의 뼈를 꺾고 살아갈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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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4) +2 09.12.11 2,786 19 7쪽
17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3) +2 09.12.11 2,785 22 7쪽
16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2) +4 09.12.10 2,706 25 21쪽
15 로라시아 연대기 - 6.독사의 머리(1) +2 09.12.10 2,901 17 11쪽
14 로라시아 연대기 - 살롱이란? +3 09.12.10 2,978 16 2쪽
13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3) +4 09.12.10 3,035 22 17쪽
12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2) +3 09.12.09 3,179 20 7쪽
11 로라시아 연대기 - 5.루크와 목걸이(1) +5 09.12.08 3,483 19 7쪽
10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3) +1 09.12.08 3,525 19 7쪽
9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2) +3 09.12.07 3,571 19 7쪽
8 로라시아 연대기 - 4.대중과 서커스(1) +2 09.12.07 4,011 21 11쪽
7 로라시아 연대기 - 3.코라 가족(2) +4 09.12.06 4,575 20 15쪽
6 로라시아 연대기 - 3.코라 가족(1) +4 09.12.06 6,119 24 17쪽
5 로라시아 연대기 - 이냐크 대성당 화재 사건에 관한 보고서 +4 09.12.06 5,834 18 2쪽
» 로라시아 연대기 - 1.주교의 보증(3) +9 09.12.06 7,239 20 20쪽
3 로라시아 연대가 - 1.주교의 보증(2) +11 09.12.06 10,877 27 27쪽
2 로라시아 연대기 - 1.주교의 보증(1) +10 09.12.06 16,363 29 9쪽
1 로라시아 연대기 - 프롤로그 +14 09.12.06 20,497 56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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