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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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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3.10.23 13:25
최근연재일 :
2024.03.04 08:10
연재수 :
136 회
조회수 :
4,798
추천수 :
277
글자수 :
784,850

작성
24.03.04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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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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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21쪽

DUMMY

"즐겁지 않아? 난 너무 즐거운데!"


프라우스가 어두운 나의 표정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사실 내 마음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비록 나는 현재 역대급으로 최악인 검은균열에 갇혀있고, 인간세상은 멸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놈을 죽일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긴 했지만, 나의 예상일 뿐이다. 한 마디로 확실한 건 아니라는 거다.

그렇지만.


'분명히 내 예상이 맞을 거야.'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프라우스가 친절하게 지껄여 준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프라우스를 죽이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 다른 방법 따윈 없어.


"너의 그 표정을 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피데스의 얼굴이 떠오르는군. 혹시 유스티오, 너도 그때 봤었나? 피데스의 애처로운 그 눈빛을?"


...본 적은 없다. 내가 어떻게 그 분의 마지막 눈빛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스터께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는데.


"너도 그때 봤었어야 했어. 피데스가 애처롭게 날 바라보는 그 눈빛을 말이지. 지금까지 내게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이었거든. 그 노인네는 허구한 날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고."


좋지 않은 과거라도 떠올리는 것인지, 프라우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디케교 원로들은 물론이고, 그 노인네는 항상 나를 나쁜놈으로만 몰아가곤 했지. 하지만 그새끼들이 처음부터 나에게 그런 건 아니었어. 오히려 처음에는 나를 천재라고 치켜세워줬었거든. 너도 기억하지? 내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말이야."


당연히 기억한다.

프라우스는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유명했었으니까. 오죽하면 날 때부터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겠는가. 신성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때는 무슨, 내가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떠받들어주곤 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늙은이들이 자꾸만 나를 외면하더군. 나한테서 얻어갈 건 다 얻어가 놓고서, 나를 무시했어."


무시라기보다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는 그저 프라우스를 '신동'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신동'이 아닌 '악동', 아니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뭐, 상관없어."


과거회상이 끝난 것인지, 프라우스가 날 보며 씩 웃었다.


"이제 그 늙은이들은 다 죽었으니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지."


놈이 나를 중심으로 빙빙 돌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검은균열 특유의 무거운 기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는데, 놈이 빙빙 도니까 더 어지러웠다.


"유스티오, 솔직하게 말해서 난 너에게 악감정 따윈 갖고 있지 않아. 뭐, 너는 나한테 꽤 잘해 줬었거든.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넌 날 동경했었어. 알지?"


알지. 너무 잘 알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시멘트에 머리 박고 죽고 싶을 정도로 알고 있지. 내가 왜 저딴 새끼를 동경했을까.


"나를 사랑하는 팬을 배신하는 듯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난 연예인이 아니니까 상관은 없을테지. 아무튼 유스티오, 이제 나에게 넌 그닥 필요한 존재가 아니야."


...한 마디로 잘 이용해 먹었으니 죽여버리겠다는 말이로군. 토사구팽인가.


"날 죽이려는건가?"

"글쎄, 죽인다는 험한 표현보다는, 이제 네 역할이 끝났다고 표현하는 게 좀 더 예쁘게 들리지 않겠어?"

"......하하."


웃음이 나온다.

봇물 터지듯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은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 의지로 웃고 있는 건가?

아니다.

이건 그냥 나오는 웃음이다.

기뻐서 웃는 것도 아니고, 슬퍼서 웃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이 웃겨서, 그래서 그럴 뿐이다.


"곧 죽을 놈이 별 짓을 다 하는군. 이봐, 실성하기라도 한 거야?"

"하하, 아니. 실성은 무슨. 그냥 죽는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서러워서 그래."

"...서러워?"


의아하다는 듯, 프라우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유스티오, 네가 서러울 게 뭐가 있어? 너는 딱히 재능도 없고, 아무것도 뛰어난 게 없는 나약하고 아둔한 사제에 불과하다고. 그런 삶에 애착이라도 갖게 된 건가?"


....프라우스. 넌 정말로 변한 게 없구나.

저 이야기는 예전에, 내가 신학생이었을 때 프라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저 이야기를 한 두번 듣는 게 아니었지.


-유스티오, 인간이든 사제든, 이렇다 할 재능이 없는 이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뭐? 그래도......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삶이라는 건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닐까?

-재능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남들과 똑같이 둔재로, 또 범인(凡人)으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그런 범인들이 삶을 지속해 봐야 뻔한 삶만 살게 될 뿐이야. 게다가 범인들의 능력으로 대체 뭘 할 수 있지? 뭐 하나 제대로, 특출나게 하는 것 없는 그런 놈들은 그냥 죽는 게 나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당시의 나는 프라우스의 말에 동의하곤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동의라기보다는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히 프라우스가 하는 말은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지만, 그땐 아니었다.

변명이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멍청했고, 또한 프라우스의 재능을 동경했었기에 제대로 된 사리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래, 내가 자비를 베풀어 주도록 하지."


프라우스가 선심쓰듯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삶의 마지막을 장식할 한 마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줄게. 자, 뭐라고 할 거지? 너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건가? 아니면, 네가 만난 그 예쁜 인간여자에 대해 말할 건가?"


마지막 말이라. 유언을 하라는 건가.


"프라우스."


글쎄, 나는 딱히 유언을 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는데.


"음? 왜? ......아하, 나에 대해 말하려고? 역시 유스티오. 넌 죽이기엔 좀 아깝다니까. 날 그렇게까지 좋아하다니 말이야. 근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두자고. 난 여자 좋아해."

"하늘에서 검은비가 내렸을 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감탄했다."


프라우스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누가 만든 마법인데. 너는 건드리지도 못할 수준의 마법이라고."

"맞아. 엄청난 수준의 마법이야. 만약 피데스가 이곳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너의 검은비 마법을 파훼할 수는 없었을 거야."

"그래서?"


프라우스가 계속하라는 듯 손짓했다.


"어디 그뿐인가? 아무리 인간이었다곤 하지만, 나름 큰 영향력을 보여주었던 마신을 이용해, 너의 영혼을 쪼개어 보관했지. 사실 말이 쪼개는 거지, 영혼을 분리시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럼, 당연하지."


프라우스가 또다시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어려운 일이었어. 아무리 나라고 해도, 영혼을 쪼개는 건 꽤나 버거운 일이더라고."

"그렇게 마신의 육신에 너의 영혼을 쪼개어 보관했지만, 결국 그 육신이 공격받고 말았지."

"그래. 피데스의 짓이었어. 그 여우같은 늙은이......"

"그렇게 공격받은 마신의 육신이 찢어지고, 마력덩어리들, 그러니까 너의 영혼이 빠져나왔지. 조각난 채로 말이야. 그 영혼들, 그러니까 마력덩어리들은 곧 인간세상에 떨어졌어. 나는 그것들을 모았고, 지금 여기 갖고 있지."


나는 마력덩어리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를 들어보았다. 프라우스는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내게 손짓했다.


"그래, 맞아. 아주 잘 알고 있네. 내가 한 말을 잘 새겨들은 모양이군. 자, 유스티오. 이제 그걸 내게 가져와. 걱정하지 마. 넌 아프지 않게 죽여줄 테니까."


.....이 마력덩어리가 프라우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세상은 그대로 멸망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한국만 멸망하겠지만, 더 나아가서는 일본, 중국, 러시아와 미국까지 전부.


"근데 말이야 프라우스. 조금 궁금한 게 있어."

"......궁금한 거?"


상자를 들고 프라우스에게 걸어가고 있던 내가 걸음을 멈추자, 프라우스는 짜증스러운 듯 예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궁금한 거라니? 뭔 소리야?"

"너를 동경하는 하나의 팬으로서 물어보고 싶어. 영혼을 쪼개면, 어떤 기분이야?"

"흠...... 어떤 기분이냐고?"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놈이 입을 열었다.


"글쎄, 이건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분이지.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살아있는 채로 파쇄기에 들어간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영혼을 쪼갤 때만 그런 기분을 느끼고, 이후로는 느끼지 않아. 다만, 영혼을 쪼갰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완전할 수는 없지. 예전만큼의 힘을 얻기 어려워."


프라우스가 상자를 가리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네가 필요했던 거야. 네가 모아준 마력덩어리, 즉 나의 영혼을 도로 회수해야 했으니까."

"그렇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상자를 품에 꽉 안았다.

프라우스가 답답한 듯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상자나 내놔. 자꾸 그렇게 질질 끌면 널 죽이고 강제로 빼앗는 수밖에는 없어. 내가 좋게 말할 때 빨리 내놔."

"내 질문 아직 다 안 끝났어, 프라우스."


초조한 목소리로 짜증을 내던 프라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참! 유스티오. 네가 날 좋아하는 건 잘 알겠는데 말이야, 자꾸 그러면 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아."

"걱정 마. 마지막 질문이니까. 아니, 아까 네가 그랬지. 나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허락해 주겠다고."

".....그랬었지."

"그러니까 이건 질문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야."

"......어디 해봐."

"프라우스. 너는 너의 부활 재료로 나를 이용했지."

"그랬지."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참 고맙게 생각해."

"......뭐?"


진심이야, 프라우스.

만약 네가 나를 이용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널 어떻게 죽여야 했을까?


"진심으로, 진심으로 고맙다, 프라우스."

"......자, 잠깐!!!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간발의 차였다.

나는 빠른 속도로 품 속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고 마력덩어리가 든 상자를 찔렀다.

다행히 내가 더 빨랐기에 망정이지, 만약 프라우스가 좀 더 빨랐다면, 놈이 좀 더 빨리 눈치를 챘다면.


"아아아아아아악!!! 유스티오!!!!!"


그랬다면, 성공하지 못했겠지.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내놔! 당장 상자를! 아아아아아악!!!"


나는 있는 힘껏 상자를 찔렀다.

이 단검은 유덱스가 아까 나로 인해 반강제로 마트로 피신하기 전, 내게 건네주었던 단검이다.


-혹시 모르니까, 갖고 있어.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유덱스의 고집으로 갖고 있길 잘했군.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상자를 찌를 때마다 사방으로 검은 피가 튄다. 마치 분수처럼 콸콸 흘러나온다.

이것은 프라우스의 피였다. 프라우스의 영혼 조각들이 흘리는 검은 피.

타락해 다시는 회생이 불가능해진 더러운 영혼이 흘리는 검은 피.


"안 돼.... 안 된다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프라우스는 몇 번이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놈은 나의 옷깃 하나 붙잡을 수 없었다.

이미 검은균열은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쩌저저저저적!!!


"도대체, 어떻게 그런, 어떻게 그런 발상을......!!"


무너지는 검은균열을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프라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알아내진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저 예측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다만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 예측에 모든 것을 걸은 것 뿐.


'물론 확률이 높은 예측이긴 했지만.'


놈은 분명 나를 잘 이용했다. 똑똑하긴 했다. 나와 피데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마력덩어리들을 모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프라우스의 그 똑똑함이 놈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결국 적에게 성의 열쇠를 쥐어준 꼴이 되었으니까.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마력덩어리가 무엇인지 미리 눈치챘었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조금은 달라졌을까?


콰르르르르르르르!!


상자를 몇 번이나 찔렀을까.

검은균열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내리던 검은비도 그친 채였다.


"헉.... 헉......"


더 이상 상자에서는 피가 나오지 않았다. 프라우스의 영혼이 완전히 죽은 것이다.

나를 향해 찢어질듯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던 프라우스 역시 조용했다.


죽었다.


털썩-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쳤다.

아무리 내가 프라우스를 죽일 방법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나는 검은균열에 있었던 거니까. 뭐가 되었건 간에 프라우스는 분명 나보다 강했으니까.


"아......"


칠흑처럼 어두웠던 하늘에 붉은 태양이 나타났다.

다시는 이 땅에 빛이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마스터......"


눈이 감긴다.

어떻게든 버티고 싶지만 무거워진 눈꺼풀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저......."


마트, 마트에 가봐야 하는데.


"잘했습니까?"


어떻게.... 가야.... 하는데........


*

*

*


물에 젖은 모래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뜨니, 눈 앞에 피죤이 있었다.


{드디어 일어난거냐구구!!}


녀석이 내게 달려들었다.


{영원히 안 깨어나는 줄 알았다구구!!}


피죤이 오랜만에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정열적으로 부리를 들이댔다.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몸에 힘이 없어 피죤을 밀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받아들여야지.


"여긴....."


목소리도 다 쉬었다. 아주 그냥 쇳소리가 나온다.

피죤에 의하면, 나는 일주일 넘게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여긴..... 어디지......?"


내가 말한 게 아니라 남이 한 말이었다면,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내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으니까.


{디케교신전이다구구!}


용케 피죤이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잠깐만. 디케교신전이라고?


"신.....전......?"

{물론 여긴 간이신전이다구구. 인간들로치면 컨테이너박스 같은거다구구.}


이제 보니 나는 간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피죤의 말에 의하면, 마신은 물론이요 프라우스도 사라졌고 그들의 잔당 역시 모두 사라졌기에 디케교를 다시 세울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아, 물론 호라이신전도.


"일어났어? 빨리 회복해야 신전 세우지."

".....유덱스?"


이제 보니 옆에 유덱스도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시야가 좁다.


"마스터사제라는 놈이 그렇게 누워서 빈둥거려도 되는 거야? 얼른 회복해서 일어나라고."


.....방금 뭐라고?


"마스터사제? 나? 내가?"

"그래, 네가 마스터사제지 그럼 누가 마스터사제야?"

"...내가 왜 마스터사제야?"

{우리가 정했다구구!}

"......어?"


유덱스가 피죤이 장난기 섞인 얼굴로 실실 웃는다.

이 새끼들이?


"...내가 잠자는 사이에 둘이 별 짓을 다 했나보군."

"딱히 별 짓 하진 않았는데. 너 옷도 안 벗겨져 있고."

"아오 진짜!"


어우, 머리 아파. 쇳소리는 이제 사라져서 내 목소리가 잘 나오긴 하는데, 목은 여전히 아프네.

어쨌거나 유덱스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엉망이 된 한국은 사제들이(아모르가 특히 힘들어했다고한다) 힘을 모아 복구를 완료한 상태이며, 인간들의 기억은 모두 지워졌다고 한다. 다른 에우노미아나 에이레네교 사제들은 각자의 신전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하긴, 그쪽 신전들도 다 파괴되었었지.'


아, 정중재랑 김건우도 저기 오는군. 밖에 있었나.


"형니이이이이이이이임!!!!!"


인간피죤도 아니고, 정중재가 내게 달려들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아니까 그냥 내버려두는 거지, 만약 아니었다면 조금 무서웠을지도.


"그래, 나는 괜찮다."

"정말 다행입니다 형님! 저 진짜 걱정 많이했다고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거대한 대형견처럼 앵기는 정중재와 달리, 김건우는 역시 김건우였다. 행동은 얌전하지만, 그의 붉어진 두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래,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안다, 김건우.


"정의 씨......?"


...아니, 한 사람 더 있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간이신전에 들어온 여자.


"...지연 씨."


천지연이었다.


"음, 그러니까, 이젠 유스티오......? 라고 불러야 하나요?"


생각해보니, 천지연이 모든 걸 알게 됐겠구나.

하긴 모를 수가 없겠지.


"...정체를 숨겨서 미안합니다."

"왜 그동안 말을 안 했어요?"


왜 안 했느냐고?

그야......


"사제랑 인간은 이어질 수 없는 사이거든요."


유덱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내가 녀석을 노려보자, 유덱스는 '내가 뭘?'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유스티오 씨는... 인간이 아닌 거예요?"

"생긴 건 인간입니다만, 정확히 따지면 인간은 아닙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천사 같은 거죠."

"그럼... 이제 다시는 한국에 못 오는 거예요?"

"아예 못 오는 건 아닙니다."

"그, 그럼 한국에서 같이 살아요! 상관 없잖아요!"

"...그건 안 됩니다."

"......왜요? 혹시 저 때문이라면..."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신전이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간이 신전이다.

신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낡았고, 볼품없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곳에 남아서, 마스터사제로서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천지연이 말끝을 흐렸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애써 누르는 모습이다.

.....젠장, 왜 가슴이 이상하지.


"지연 씨. 이걸 받으세요."


나는 천지연의 손에 황금색 비둘기가 새겨진 동전 하나를 쥐어주었다.


"딱히 큰 선물은 아닙니다만, 그게 있으면 앞으로 살아가는데 꽤나 유용할 겁니다."

".....!"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천지연이 나에게 달려들더니 내 품에 안겼다.

피죤과 김건우, 정중재는 서로 눈짓하더니 간이신전을 빠져나갔다. 유덱스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 하더니, 곧 신전을 나갔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저도 지연 씨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저도 잊지 않......?!"


......그 다음은, 굳이 얘기하지 않겠다.


*

*

*


약 5년 후.

멸망까지 치달았던 한국은 곧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사제들의 도움이 컸다).

천지연은 민트색 레이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으악!"


그때 어떤 미친 K5 한대가 천지연에게 위협적으로 달려들었는데.


끼기기긱-


사고가 날 뻔하던 찰나, 황금빛의 줄기 하나가 나타나더니 곧 K5는 정상적으로 운전하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기다란 황금빛은 곧 비둘기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천지연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비둘기를 보며 씩 웃었다.


한편.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분이요? 아.... 있지요. 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은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지금은 안 계시긴 하지만."


정중재의 채널은 이제 더 이상 커질 수 없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박이 난 채였다.


"그래도 저는 늘 그분을 생각합니다. 제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지,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그는 한 유명 MC연예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정중재가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MC가 말했다.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시는데, 혹시 그 은사분께서 하늘을 좋아하셨나요?"

"하하, 아니요. 특별히 하늘을 좋아하신다기보다는, 가끔 저렇게 하늘을 보다 보면."


정중재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거 보세요. 비둘기가 있네요."

"오! 진짜네요! 어? 뭐지? 저게 뭘까요? 황금색 비둘기라니! 와, 진짜인가 비둘기가 하늘 날 수 있었나요??"


호들갑을 떠는 MC를 보며 정중재가 미소지었다.


"저렇게 비둘기가 보일 때가 있어요. 그분이 비둘기를 참 좋아하셨거든요."


하늘을 부유하던 비둘기가 창문에 내려앉았다.

MC를 비롯한 다른 관계자들은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정중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비둘기를 볼 때면, 그분이 떠올라요."


놀라움만을 남겨둔 채, 비둘기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아름다운 황금빛의 잔상 뿐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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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함정 24.02.17 11 1 11쪽
119 갑자기? 24.02.16 12 1 11쪽
118 영원한 건 절대 없다 24.02.15 11 1 13쪽
117 술 처먹고 뺑소니 하지 맙시다 24.02.14 12 1 11쪽
116 전동킥보드는 술 먹고 타도 되나요? 24.02.13 11 1 12쪽
115 앵무새 24.02.12 13 1 11쪽
114 저희가 잘못한 거예요, 이거? +2 24.02.11 17 2 12쪽
113 잊고 있었네요 +2 24.02.10 13 2 13쪽
112 어쨌든 약속은 지켰잖아? +2 24.02.09 13 2 17쪽
111 스틱스강에 맹세 +2 24.02.08 13 2 13쪽
110 신들의 의리 +2 24.02.07 14 2 12쪽
109 물고기? +2 24.02.06 14 2 12쪽
108 미끼 +2 24.02.05 13 2 16쪽
107 추락 +2 24.02.04 16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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