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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3.10.23 13:25
최근연재일 :
2024.03.04 08:10
연재수 :
136 회
조회수 :
4,797
추천수 :
277
글자수 :
784,850

작성
24.02.22 08:10
조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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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솔직히 이건 너무했지

DUMMY

분명 평화로운 주행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A7차주에게는 말이다.


A7차주 이현호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중고 모하비만 끌다가, 얼마 전 새로 뽑은 A7을 타고.

본래 인간은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던가. 이현호는 차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차도 좋은 것을 타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는 법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보라. A7을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의 모습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란 말인가.


"이게 운전이지."


이현호는 현재 추월차선에 있었다. 주변에 차량들도 없으니 속도를 좀 더 내도 되건만, 계기판의 바늘은 숫자 8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마저도 70으로 훅, 떨어질 때도 있었다.

허구한 날 막히곤 하는 경부고속도로야 70으로 달리면 '오늘은 좀 덜 막히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고속도로야 어디 그런가? 시내에서도 70으로 달리는데 고속도로에서 70으로 달릴 거면 뭐하러 고속도로를 가겠는가. 고속도로의 '고속'이 무슨 뜻인지는 유치원생도 알 것이다.


"여유롭고, 차는 기깔나고. 끝내주지."


여유로워도 너무 여유로운 것은 아닐까. A7 뒤를 따라오고 있던 민트색의 레이가 갑자기 2차선으로 차선을 바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현호는 레이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다. 도로로 나가면 툭하면 보는 레이인데, 뭐하러 신경을 쓰겠는가.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이현호는 '경차'를 얕보는 습관이 있었다. 경차는 운전을 잘 못하는 것들이나 타는 쓰레기 같은 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그의 앞에 레이의 모습이 나타났을 때였다.

그러니까, 2차선으로 옮겼던 레이가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추월차선으로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는 부아앙,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갔다.


"......저 미친년이?"


이현호는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난 수준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레이 주제에 누구 앞으로 끼어들어? 왜 나를 추월하지?


"쳐돌았나 씨발!"


추월차선의 의미가 무엇일까. 이현호는 추월차선의 의미를 알고 있긴 한 것일까? 추월차선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긴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A7의 계기판은 여전히 8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민트색 레이는 이미 저 멀리 가버린 뒤였다.


"기분 존나 개같네."


대충 한손으로 운전하던 이현호가 드디어 양 손으로 핸들을 잡았다.

그러더니.


부아아아아아앙!


망설임없이 거칠게 악셀을 밟았다. 급가속이었다. 요란한 배기음 소리와 함께, 계기판의 숫자가 순식간에 100을 훌쩍 넘었다.

그때 커브길이 나타났고, 이현호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숫자가 다시 80으로 뚝, 떨어졌다.

커브가 심한 것도 아니고 완만한 편이기에 굳이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는 없을 테지만, 이현호는 아니었다. 차는 좋은 것을 타고 있긴 하지만, 정작 그의 심장은 개미보다도 못한 심장이었으니까.

다행히 뒤에 차량이 없으니 망정이었다. 만약 뒤에 따라오던 차량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니까.


"개새끼 찾았네."


커브같지도 않은 커브길을 지나 다시 직선도로가 나오자, 이현호는 다시 악셀을 밟았다.

빠르게 110이상 치솟은 속도. 멈추지 않고 달리니 아까 이현호를 추월했던 민트색 레이가 보였다.

대충 어림잡아 보니, 120정도로 달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넌 뒤졌어."


만약 추월한 상대 차량이 제네시스였다면? 아니면 벤츠였다면? 포르쉐나 페라리 같은 고급차량이었다면?

이현호는 지금처럼 행동했을까? 이현호는 우측 사이드미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2차선으로 홱, 차선을 변경했다. 빠른 속도였기에, 핸들을 급하게 돌렸더니 차체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이씨."


저속에서 차체가 흔들리는 것과, 고속에서 차체가 흔들리는 것의 체감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저속에서 아무리 흔들려봐야 무섭지 않지만, 고속에서 흔들리는 건 전해져 오는 느낌이 다른 것이다. 이현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에 차선을 급하게 바꾸면서 느꼈던 그 소름돋는 느낌을 애써 털어냈다.


"넌 뒤졌다."


무언가 잘못을 했으면 그 잘못에 대한 반성을 하고 교훈을 얻어야 정상일 테지만, 이현호는 아니었다.

자기가 조금 전 핸들을 확 돌려서 사고가 날 뻔 했다는 것을 금세 망각해버린 것이다.


빵빵!


이현호가 예고 없이 1차선, 그러니까 추월차선으로 들어갔다. 레이와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은 상태였기에, 레이는 거칠게 경적을 울렸다. 이현호가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늦게 잡았다면, 혹은 레이가 겨우 브레이크를 잡지 않았다면 크게 사고가 났을 것이다. 애초에 현재 속도는 110을 훌쩍 넘은 상태. 사고가 나지 않은 게 기적인 수준이다.


이현호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끼이이-!!


110으로 달리던 이현호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곧 110을 훌쩍 넘던 속도가 80으로 줄어들었다.

80도 느린 속도는 결코 아니겠지만, 급하게 속도를 30 이상 줄여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빵! 빠아아아아아앙!!!


레이가 미친듯이 경적을 울려댄다. 경적은 결코 인간의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레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훤히 보인다. 아마도 '이 미친 새끼가 쳐돌았냐?! 운전 제대로 안 해?!' 라고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일반도로에서 이런 짓을 해도 위험한 판국에 고속도로라니.

그러나 이현호는 실실 웃으며 백미러로 레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위협운전하는 새끼 참교육해줬다, 내가."


이현호는 위협운전의 의미를 모르는 것일까? 위협운전의 '위협'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닐까?

나름 서울에 이름 있는 대학까지 나왔으면서 위협운전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건, 어쩌면 교육의 실패일지도 모른다.


"어?"


위협운전하는 빌런을 제대로 참교육해줬다는 만족감에 젖어들고 있는데.


"뭐야?!"


레이가 갑자기 2차선으로, 아니 3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어디 가?!"


3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한 레이는, 더욱 속도를 내더니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새끼, 왜 저기로 가?!"


이현호 역시 2차선으로 서둘러 차선을 변경했다.

그가 생각했을 때, 레이는 절대로 3차선으로 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 뒤에서, A7에 가로막힌 채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왜 저기로 간단 말인가? 저 레이는 아직 제대로 된 참교육을 받지 못했는데?


"설마, 도망가는 거야? 하!"


이현호는 확신했다.

레이는 지금 도망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나한테서 말이다.

그렇다면 빌런을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도관이 탈옥한 죄수를 도로 붙잡아 오듯이, 레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소한, 이현호가 생각했을 때는 말이다.


부아아아아앙!


이현호가 다시 한 번 거칠게 악셀을 밟았다.

너무 급하게, 또 갑작스럽게 악셀을 밟은 터라 순간 이현호의 몸이 뒤로 크게 쏠렸다.

물론 그는 그런 것 따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자신의 운전 스타일이 거지같다는 생각따윈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그저, 아우디 특유의 고급짐 때문일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듯이, 이현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생각에 줏대 따윈 없고, 기준도 없고, 그냥 내 기분이 내키는대로. 그저 그 뿐이다.


"어딜 도망가!!!"


순식간에 A7이 레이를 따라잡았다. 사실, 차 자체로만 본다면 A7이 레이를 따라잡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주변에 차량도 얼마 없었으니까.


홱!


이현호가 3차선을 향해 핸들을 꺾었다. 어찌나 격하게 꺾었는지, 차체가 또다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빵! 빠아아아아아아아아앙!


레이가 경적을 울렸다. 지금 이 고속도로에서만 몇 번의 경적이 울린 것일까. 물론 이현호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지금 레이는 다시 내 뒤에 있고, 내가 제대로 운전교육을 시켜주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레이 이 새끼는 친절하게 내가 무료로 교육을 시켜주고 있는데 왜 성질을 부리는 걸까? 예의라고는 어제 남은 김치찌개에 밥 말아 먹기라도 한 것마냥?


"내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이 짓을 하고 있잖냐. 고맙게 여기라고."


그러나 레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레이가 다시 4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했다. 이현호 역시 마찬가지로, 차선을 변경했다. 사이드미러 따위는 보지도 않고,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였다.

레이가 다시 3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했고, 이현호도 3차선으로 돌아왔다.

이런 속이 답답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바로 그때.


[000휴게소 3km]


휴게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이현호는 딱히 휴게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담배를 피우고 싶긴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이었기에 딱히 신경쓰지 않았는데.


".....휴게소 가냐?"


레이가 4차선으로 차량을 변경했다. 저 차선으로 쭉 가게 되면 그대로 휴게소로 진입하게 될 텐데.


"그래, 얼굴이나 보자."


어떤 상판인지 한 번 확인이나 해 봐야겠다, 하는 심정으로 이현호는 레이의 뒤를 따라붙었다.

얼마나 가까이 붙었는지, 레이와 A7사이 간격이 겨우 몇십미터 밖에 되지 않을 정도였다.

빠르게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바싹 붙어 쫓아가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니지만, 이현호는 신경쓰지 않았다. 딱히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위협적으로 바싹 붙는 것 역시 위협운전에 해당되지만, 이현호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어쨌거나 금방 3km를 지나 휴게소 입구 표지판이 보였다. 레이가 급하게 휴게소로 진입했고, 이현호 역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다행인지, 휴게소 주차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딱히 휴가철도 아니고 평일이기도 하니 당연하겠지만.


"그래, 그래. 얼굴 좀 보자."


휴게소와 가까운 곳에 레이가 주차를 완료했다. 이현호는 레이 바로 옆에 주차를 했다.

곧 시동을 끄고, 레이 차주가 운전석에서 하차했다.

굉장히 예쁘고 귀엽게 생긴 여자였다. 그 모습을 본 이현호는 생각했다.

나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어린 여자다. 그렇다면 운전경력도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운전선배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봐요."


이현호도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레이 차주를 가로막으며 운전선배로서 적절하고 권위있는 훈계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비켜, 이 새끼야!!!!!!!!!"


사색이 된 여자가 이현호를 밀치더니 화장실로 냅다 달려갔다.

마치 전설적인 흑인 육상선수같은 몸놀림이었다.


"뭐, 뭐야?!"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남들이 뱉은 침이 가득한 바닥에 철퍽 엎어진 이현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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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앵무새 24.02.12 13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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