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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힘법사의 서재입니다

빌어먹을 세상의 구원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1.02.02 18:25
최근연재일 :
2021.07.01 18:30
연재수 :
1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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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5
추천수 :
249
글자수 :
937,572

작성
21.06.30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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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154. 되찾은 시간

DUMMY

(?)


머리가 아프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도끼로 마구 두드리는 것만 같다. 누군가 내 뇌를 채칼로 갈고 있는 것만 같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파괴되었다. 채널이 파괴되었다. 완전히.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 채널을 파괴한 것이다.


비형랑의 구슬과 채널의 전원 버튼인 데우스, 그리고 채널의 관리자인 마키나가 힘을 합쳐 채널을 파괴한 것이다.

그 세 명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소위 말하는 '진짜 인간'들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희생했다.


소위 말하는 '진짜 세상'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짜 세상'을 부숴버렸다.

소위 말하는 '진짜 삶'을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짜 삶'을 포기했다.

나와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 하고, 떠들고, 웃고, 울고 했던 수많은 존재가 채널 속에 묻혀버렸다.

채널이라는 거대하고 방대한 가짜 세상 속의 가짜 존재들이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나와 함께 다니던 그들은 과연 진짜 인간이 아니었을까?

나와 함께 웃고 떠들던 그들은 그저 환영일 뿐이었을까?

그들은 고통을 느꼈다. 슬픔을 느꼈다. 웃음을 짓고 눈물을 흘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다.


{크으윽..... 이민준.....}


주위는 온통 하얀 배경 뿐이다.

동서남북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얀 배경이다.

어디까지가 끝인지, 어디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르는 하얀 배경이다. 마치 코마처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가상 세계 더 월드는 파괴된 것이다.


{이민준.......}


찼수의 백신 덕에 호문쿨루스의 몸집은 평소의 절반 이상으로 작아졌다.

끈적하고 질척거렸던 호문쿨루스의 검은 몸의 색은 많이 옅어져 있었다.

그의 힘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찼수를 재설정하다니..... 그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마 난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설령 회복할 수 있다 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게야....... 난...... 우리 메카닉족은... 이렇게 멸족하는가........ 허무한 계생이로군......}


마키나의 도움으로 호문쿨루스라는 거대한 바이러스를 공격할 수는 있었지만,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찼수를 재설정하면서 찼수가 본래 가지고 있던 백신의 위력을 모두 되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 마키나도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찼수에게 이 세계의 운명을 거는 무모한 도박을 한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허나 이민준... 넌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


이제는 내 키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문쿨루스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찼수의 백신으로 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순 있었겠지만, 결국 찼수도 나와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야. 찼수는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뭐?}


마키나는 채널의 관리자다.

관리자에게는 채널 속 프로그램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마키나는 찼수의 백신이 능력을 발휘한 후, 본래의 찼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공장 초기화가 진행되도록 설정했어."

{......}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찼수는 무사할 거야. 원래의 모습도 되찾을 수 있겠지. 이제 찼수는 다시는 고양이로 변하지 않을 거야."

{하하하하!}


호문쿨루스가 웃는다.

저 웃음은 기뻐서 웃는 웃음이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웃음도 아니다.

허무함과 허탈함, 공허함. 그리고 허망함이 가득한 빈 웃음이다.


{정말 부럽구나, 찼수의 존재.}


호문쿨루스의 저 표정, 처음 보는 표정이다.

호문쿨루스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질투와 부러움, 그리고 서글픔이 섞인 인간의 표정이다.

감정을 지닌 인간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이다.


{내 주위에는 나를 걱정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 나는 그저 모두의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나의 존재는 그저 공포, 그 자체일 뿐이었다.}


당연히 그랬겠지.

당에서 그 많은 돈과 자원을 들여 키운 가디언즈와 박사들, 그리고 사상경찰은 결코 호문쿨루스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거나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출세와 명예, 부와 권력을 위해 호문쿨루스에게 잘 보이려 했을 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결코 영원할 수 없다.

그들 모두 말로는 호문쿨루스에게, 죽은 총통에게 충성한다고 했지만 그 누구도 진심을 다해 호문쿨루스와 죽은 총통을 위해 희생하거나 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개인적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딱딱하고 사무적인 관계였을 뿐이었다.


{내가 부활하기 전, 죽은 총통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

{김박사가 채널 속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고 하더군.}

"......"

{원래 김박사와 데우스는 채널을 이용해 더 월드라는 국가를 집어삼키려고 했었지.}


뭐?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 둘의 태도가 180도 바뀌었거든.}

"......"

{데우스 그 놈은 욕심이 많은 놈이다. 출세욕도 있고, 명예욕도 있지.}

"......"

{그런 탐욕 덩어리가, 갑자기 태도가 확 바뀐거야. 난 이해할 수 없었어.}

"......"

{알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군. 들어보겠나?}

"......"


끄덕—






(NN 년전 - 채널 - 템플)



'그래서, 김박사랑 손 잡고 채널 사람들을 모두 배신하겠다는 거냐 데우스?'

'......네가 뭔 상관이야.'

'네 동생은? 너를 존경하고 따르던 템플의 존재들은? 금지된 곳에 있는 흑귀들은? 네펜데스는? 드래곤들은? 센트럴의 사람들은?'

'...그런 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비형랑.'


쯧쯧—


'이봐 데우스. 욕심이나 탐욕이 많은 게 꼭 나쁜 건 아냐. 욕심과 탐욕은 때론 촉진제의 역할을 해낼 때가 있으니까.'

'......'

'하지만 우린 이성을 가진 존재잖아. 욕심과 탐욕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해서 그것들을 이용해 누군가의 인생까지 망쳐서는 안 되는 거야.'


울컥—


'인생?! 우리한테 인생이라는 게 있기는 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가짜야! 여긴 채널 속이야! 난 채널을 벗어나 진짜 인생을 살고 싶다고!'

'이미 살고 있잖아?'

'......뭐?'

'지금 넌, 네 인생을 살고 있잖아?'

'......'

'뭐가 가짠데? 뭐가 진짠데? 뭐가 진짜 인생이고 뭐가 가짜 인생인데?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진짜 인생을 살 수 있는 건데?'


꿀꺽—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넌 이미 살아있어. 지금 당장 네 오른손을 들고 입을 틀어 막아 봐. 빨리!'

'하, 진짜......'

'빨랑! 빨랑!'


슥—


'했어.'

'냄새를 맡아봐! 네 입냄새! 아주 고약할 거다. 너랑 얘기할 때마다 그 냄새를 맡아야 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나를 떠올려 보렴.'

'이 개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난 지금 엄청 진지하다고!'


하하하—


'야, 깨비야! 데우스 꼴 좀 봐라. 아까부터 청승떨면서 자기가 사는 건 진짜 인생이 아니네 뭐네 하면서 자꾸 저 지랄을 한다.'

{비형랑님, 데우스님을 놀리면 못 써요!}

'안 놀리게 생겼니? 늦은 사춘기라도 온 건지 요즘 밤마다 라르에 와서는, 하늘에 떠 있는 붉은 태양을 바라보면서 눈시울을 붉히시는데?'


울컥—


'입 닥쳐, 비형랑! 네가 뭘 알아! 네가 내 마음을 알아?! 이건 사춘기가 아니야! 난 정말로 내가 살아있는지, 진짜 살아있는 게 맞는 건지, 내가 사는 이 세상이 그저 가짜인 것은 아닌지 궁금할 뿐이야! 이게 그렇게 잘못됐어?!'


쯧쯧—


'누가 잘못 됐다고 했냐? 왜 혼자 소리는 지르고 그래? 그냥 네 행동이 웃겨서 그런 거지.'

'뭐?'

'네가 김박사랑 손을 잡고 더 월드를 정복한다고 쳐. 그럼 더 월드는 진짜 세계냐?'

'.....뭐라고?'

'더 월드는 정말 진짜 세계가 맞을까? 더 월드도 가짜면 어떡할래? 채널처럼 가상세계면 어쩔래?'

'......'

'이 세상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우리가 신이 되는 수밖에는 없는 거야. 신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다고들 하잖아?'

'......'


흐음—


'마키나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냐?'

'......무슨 생각?'

'김박사랑 함께 손 잡고 채널을 없애려는 생각? 그런 다음 권력을 쥐려는 멍청한 생각?'

'......'

'네 동생이 고통 속에 죽어가도 괜찮아?'

'내 동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라.'


킬킬킬—


'그럼 됐네!'

'뭐가?'

'네가 네 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건, 템플에 있는 놈들 다 알걸? 깨비도 알지!'

{맞아용!}


킬킬—


'네 동생은 네 하나 뿐인 가족이야! 그거 하나만으로도 네 존재가 진짜라는 게 증명되는 것 아닐까?'

'......'

'데우스. 지금 이 순간, 너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면서 살아. 네 주위에 있는 이 모든 사람들은 결코 영원히 네 곁에 머물지 않으니까. 당연히 내 옆에 영원히 존재하고 나와 함께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존재들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도 있어.'

'......'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면서 살아. 그냥 이 순간을 살아. 현재를 살라고.'

'......'

'네 인생을 살아.'






(?)



데우스가 욕심을 부리고, 탐욕을 부렸다는 것 그 자체가 데우스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비록 채널이라는 가상 세계 속의 가상 인물이었지만.... 데우스는 인간이다.

그는 인간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을 논하겠나. 내 패배를 인정한다.}


뭐?


{나의 수많은 메카닉 군인들과 나의 삶 전체를 바쳐 만들었던 더 월드와 더 월드의 존재들..... 모두 죽었다. 한 순간에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나의 수고가, 나의 노력이, 나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든 존재들이..... 모두 죽었다.}


그런데 여긴 어디지?

김박사와 김진수, 김지호, 임정연, 정지희 그리고 찼수.

모두 어디 있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난 데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민준 네가 날 이끌었다.}


내가 호문쿨루스를 이끌었다고?


{다른 놈들이 어디있는지 궁금하겠지. 김박사나 다른 놈들은 지금쯤 아마 현실 세계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눈을 뜨고 나면, 자신들이 기계 속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챘겠지.}


호문쿨루스가 진짜 세계에 만들어놓은 기계?

그러고 보니 호문쿨루스를 죽여도 진짜 세계에 가서 할 일이 아주 많이 남아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지금쯤 메카닉족이 모두 사라진 진짜 세계에서는 기계 속에서 깨어난 인간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에 관해 궁금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헌데 찼수는 진짜 세계에서 산 적이 없어. 체셔나 체사라면 모를까, 찼수는 고향이 채널이거든. 그래서 찼수는 진짜 세계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었지. 그런데,}

"......"

{내 예상과는 다르게...... 찼수는 진짜 세계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형아!"


찼수?


{채널이 파괴되면서 그대로 죽을 줄 알았더니...... 용케 이민준 널 따라온 모양이다.}


찼수다.

더 이상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도 않았고, 몸이 흐려지거나 사라지지도 않았다.

찼수는 자신의 원래 모습, 즉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완전하고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내가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호문쿨루스의 몸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내 키의 절반만 하던 호문쿨루스의 몸은 이제 거의 내 손바닥 만큼이나 작아졌다.


{공책은 사라졌겠구나.}


그렇지. 마키나가 죽었으니까.


{끌끌끌...... 내가 꿈을 꾸었도다. 헌데..... 이제 그 꿈이 모두 사라져 버렸구나.}


손바닥 만했던 호문쿨루스의 몸은 이제 거의 엄지 손가락 크기만큼 줄어들고 있었다.


{이민준, 너의 시간을 돌려주겠다. 너의 미래를 돌려주겠다.}


호문쿨루스는 코딱지 만큼 작아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시간이 멈췄던 진짜 세상은, 이제 다시 시간이 흐르게 될 것이다. 내가 죽으면 그 즉시 멈췄던 시간은 다시 흐를 게야.}


호문쿨루스의 몸은 이제 손톱만큼 작아졌다.


{네 인생을 살거라, 이민준. 네 사람들과 함께..... 네 인생을 살아라. 너의 시간을 돌려주겠다.}


스르르르륵—


{꿈에서 깰 시간이다.}


2021년 6월 30일. 오후 18시 30분. 진짜 세계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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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 되찾은 시간 21.06.30 31 1 13쪽
154 153. 마지막 인사 (3) 21.06.29 22 1 13쪽
153 152. 마지막 인사 (2) 21.06.28 27 1 13쪽
152 151. 마지막 인사 (1) 21.06.27 26 1 12쪽
151 150. 새끼 고양이 (4) 21.06.26 23 1 11쪽
150 149. 새끼 고양이 (3) 21.06.25 21 1 13쪽
149 148. 새끼 고양이 (2) 21.06.24 24 1 12쪽
148 147. 새끼 고양이 (1) 21.06.23 22 1 13쪽
147 146. 메멘토 모리 (4) 21.06.22 28 1 12쪽
146 145. 메멘토 모리 (3) 21.06.21 22 1 12쪽
145 144. 메멘토 모리 (2) 21.06.20 23 1 13쪽
144 143. 메멘토 모리 (1) 21.06.19 25 1 12쪽
143 142. 메모리아 (3) 21.06.18 23 1 12쪽
142 141. 메모리아 (2) 21.06.17 23 1 12쪽
141 140. 메모리아 (1) 21.06.16 26 1 13쪽
140 139. 김박사의 아들들 (3) 21.06.15 27 1 13쪽
139 138. 김박사의 아들들 (2) 21.06.14 25 1 13쪽
138 137. 김박사의 아들들 (1) 21.06.13 29 1 13쪽
137 136. 김박사의 하드 디스크 (3) 21.06.12 26 1 12쪽
136 135. 김박사의 하드 디스크 (2) 21.06.11 24 1 13쪽
135 134. 김박사의 하드 디스크 (1) 21.06.10 26 1 12쪽
134 133. 시스템 관리자 (3) 21.06.09 22 1 13쪽
133 132. 시스템 관리자 (2) 21.06.08 23 1 13쪽
132 131. 시스템 관리자 (1) 21.06.07 28 2 13쪽
131 130. 겁쟁이의 용기 21.06.06 25 1 13쪽
130 129. 인간은 흔적을 남긴다 21.06.05 24 1 13쪽
129 128. 매운 맛? 순한 맛? 21.06.04 27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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