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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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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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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9.01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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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DUMMY

2월 17일.

<C-POP Artist season 5>의 방송도 오늘을 제외하면 이제 두 번밖에 남지 않았다.


“9시 전에는 오겠지?”

“8시 반에서 40분 사이에 온댔어.”

“넌 준비 다 했어?”

“한소끔 끓이기만 하면 돼. 너는?”

“당면만 삶으면 끝.”

“그럼 우리도 방송이나 볼까?”


서희는 아리 부부의 신혼집에 와 있었다.

정완과 우진은 잠시 후에 있을 생방송 무대 특별공연을 마치고 여기에 와서 함께 식사할 것이다. 아리는 갈비찜을, 서희는 잡채를 준비했다.


“아! 소주 마시고 싶다.”

“소주 없는데, 사올까?”

“아니. 너 이따 라디오 있잖아.”

“그럼 내일이나 모레쯤 같이 마실까? 아주버님도 이제 좀 늦게 출근하시잖아.”

“응. 이따 물어볼게.”


여우비의 데뷔 일정은 정해지지 않았다.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 6월부터 공연할 창작 뮤지컬에 대한 준비에 들어갔는데 은별이 여기에 출연하고 싶어 해서였다.

그래서 은별은 요새 배우 선발 오디션을 위해 뮤지컬 배우들과 맹연습 중인 반면, 서희는 은별과 함께 나서는 행사나 카페 공연을 제외하고 스케줄이 없다.


더구나 은별은 광고모델이나 화보촬영 등의 섭외가 들어와서 단독 스케줄도 여러 번 소화했지만 서희는 연예활동을 혼자 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회사에서 뭔가 강요하는 순간 계약을 해지해버리면 그만이다.


“근데 너, 아무것도 안 하면 안 심심해?”

“하는 거 많아. 안 심심해.”

“뭐하는데?”

“쉬고 있고, 책 읽고 노래도 많이 들어. 그리고 요새는 카페 공연 레퍼토리 내가 짜. 은별이 바쁘니까.”

“다 좋은데, 연예인 계속할 거면 어디든 간간이 나가야 돼. 아님 SNS라도 하든가.”

“그렇긴 하겠지.”

“아주버님이 너 활동하는 거 싫어해?”

“아니. 그냥 내가 집순이고 생각이 많아서.”


아리가 이런 말을 꺼내는 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평온해 보이는 서희의 성질을 긁을 수 있는 말.


“그래도 너, 화장품 모델은 한다면서?”

“···!”

“그것도 아주버님이랑 같이?”


서희의 얼굴이 민망함에 확 뜨거워졌다.


“사랑스러운 연인과 나의 피부 스타일 3단계에 따라 아홉 개 중에서 선택하는 맞춤형 커플 화장품.”

“야!”

“좋겠다. 돈도 벌고, 카메라에 대고 예쁜 척도 막 할 수 있겠네.”

“뭐어?”

“우리한테는 그런 거 안 들어오거든. 솔직히 우리가 아주버님이랑 너보단 비주얼 딸리지. 그리고 부부가 그런 거 광고하면 팔리기나 하겠어?”


서희의 눈에 쌍심지가 돋자 아리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이 광고는 지상파 TV에도 나갈 예정이므로 정완과 서희의 성격대로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서희에게 이 화장품 모델을 부탁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 화장품 회사가 그녀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회사의 주요 거래처였기 때문이다.


지난 월요일 밤, 서희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서울에 올라와 두 사람을 불러내어 이 일을 상의했고, 이후의 일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소속 가수가 CF모델로 캐스팅된 것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가 창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야, 이제 예린이 하겠다.”

“어.”


서희는 아리를 한 번 째려본 후 TV로 눈을 돌렸다.


그 시각, 정완은 예린과 함께 무대 밑의 대기 장소에 있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한 팀이 세 곡을 부르는데, 먼저 무대에 오른 ADHT와 함윤명 모두 세 번째 노래에서 실수를 저지르며 심사위원 점수를 똑같이 받았다.


“제가 실수만 안 하면 좋은 점수 받겠죠?”

“너 지금까지 고득점 받으려고 노래한 거 아니야. 마이크 잡으면 그런 생각 하지도 않는 애가 무슨.”

“···.”

“어깨 좀 두드려도 될까?”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네 노래만 보여주면 된다. 실수해도 되니까 편하게 해.”

“네.”

“예린 씨, 이제 올라갈게요.”


제작진의 손짓에 예린은 계단을 오르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정완이 말했다.


“어떻게 하라고?”

“편하게.”

“조금 더 자세히.”

“선생님들이고 관객이고 신경 쓰지 말고 아까 했던 것처럼 편하게요.”

“그래.”


예린이 무대로 올라가자 정완은 천천히 반대편으로 갔다.

우진이 모니터를 바라보다 그에게 손짓했다.


“예린이 잘하네.”

“그래?”

“어제보다 더 나은 게, 쟤는 정말 무대 체질인가 봐. 심사위원 점수는 걱정 없겠어.”

“그럼 우리 거 해보자.”

“훗, 이제야? 참 빠르네.”


우진이 픽 웃었다.


“나도 방송 무대는 1년 만이야. 긴장 된다고.”

“긴장하면 뭐 바뀌어? 어차피 할 거 그냥 해.”

“형은 그냥 해도 최고고 난 아니잖아.”

“어휴. 말 많네. 제수씨 불렀어야 했어.”


두 사람이 잠시 후 부를 노래를 듣던 중에 예린의 노래가 끝나고 심사 결과가 나왔다.


예린은 심사위원 점수에서 379점을 받아 다른 두 팀을 6점 앞서고 무대 뒤로 내려왔다. 정완과 우진이 노래를 들으며 합을 맞추고 있었다.

정완은 예린에게 기다리라고 손짓한 후 우진과 노래를 마저 맞추고서야 이어폰을 뺐다. 모니터에서는 특별공연의 첫 순서인 지노의 인터뷰 후 무대로 이어졌다.


정완이 우진을 보며 물었다.


“야. 얘 내일 뭐 시킬까?”

“이제 화요비 할 수 있겠는데.”

“네?”


우진의 말에 예린은 순간 겁났다. 그녀는 <C-POP Artist season 5> 참가 전까지 화요비 노래를 완벽하게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너 내일 첫 미팅 때 <그런 일은>(화요비) 불러.”

“저, 저기 PD님···.”

“형, 가자. 스탠바이야.”


정완과 우진은 당황한 예린을 내버려두고 다시 반대편 대기 장소로 갔다.

이윽고 스튜디오 모니터와 TV 화면에 두 사람의 인터뷰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이자 GF 밴드의 기타리스트 HAP입니다.”

“순정남녀의 리더이자 순밤지기의 지기, 그리고 이분의 동생인 서우진입니다.”

“저희가 <C-POP Artist season 5> 준결승전 특별무대에서 부를 노래는.”

“형이 작사, 제가 작곡한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저희가 서로를 알기 전에 따로 겪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진이가 만든 곡을 듣고 한 웹툰의 대사가 생각나서 가사를 썼어요. 어쩌다 보니까 재미없을 뿐 아니라 무거운 노래가 되었습니다. 방송에 나와도 되나 싶을 만큼요.”

“그래서 제가 이거 부르고 싶다고 밀어붙였죠. 저는 앞으로 이런 노래 못 만들 것 같아서요. 다른 분들이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이 무대에서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편히 들으시길 바라지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 프로 출연자도 아닌 저한테, 이런 노래로 무대를 허락해주신 제작진 분들과 시청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TV를 보던 아리와 서희는 이 영상을 보고 더 궁금해졌다.


“대체 얼마나 무겁길래 그러지? 정말 무겁고 재미없으면 음원 순위 못 드는 거 아냐?”

“그런 거 생각하고 만든 노래 아니랬어. 그리고 제작진들이 오케이 했으니까 나가는 거겠지.”

“손봉규 PD가 들어보지도 않고 뭐든 괜찮으니 하라고 했대. 어차피 우진이는 저거 아니면 안 할 생각이었거든.”

“근데 저분들 안 차려입어도 멋있다.”

“아유! 뭐는 안 멋있겠어.”

“네 신랑도 멋있다고.”

“됐거든?”


형제가 다소 허름한 옷차림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자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정완은 스포트라이트 한쪽에 준비된 키보드 앞에 앉았고 우진은 그의 옆에 마이크를 들고 섰다.


우진이 감정을 잡고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은 연주를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의 <환상적 소품 Op. 3>의 제 2곡으로부터 노래의 전주로 이어졌다.


아리와 서희뿐 아니라 스튜디오의 심사위원과 관객들도 숨을 죽이고 피아노 연주곡 같은 노래를 들었다.





<재미없는 이야기> 작사 : HAP / 작곡 : 서우진


(HAP's song)

여기가 이렇게 넓었던가. 텅 빈 연습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오래 전 선물 받은 펜이

먼지를 머금은 채 한구석에 있었네.

이제는 아련해진 친구와의 추억이 생각나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슬픈 얼굴의

원장님께 인사하고 내 짐은 달랑 기타 하나.

들쳐 메고 돌아서니 한숨이 떨어지네.

이렇게 세 번째 일터는 방금 문을 닫았네.


(우진's song)

난 알아. 넌 정말 다했어.

최선 이상으로 모든 것을 쏟았어.

그런데 또 실패했고 지워졌어.

그래서 이제 무엇도 더는 할 수 없겠지.


넌 아마 더 고단해지는

이 현실에 더는 미련 없었을 테지.

실패한 네 경험도 소중할 텐데

여기는 그 경험을 애써 외면해주니.


(간주)


(HAP's song)

일등을 못했으니 상 못 받는 건 알지만

정말 열심히 했는데 난 또 혼자가 됐네.

[그러니 이제 난 돌아서야 하겠지.]

백점 왜 못 받았냐는 핀잔과 함께 문 탁

닫고 들어가는 어른 보는 구십오 점 아이처럼.


(우진's song)

수십 번 실패하고 쓰러지다 끝내 일어선 사람들

책 읽고 얘기 들으며 수없이 나를 반성했지만.

[한때 난 그들이 혼자 일어선 줄 알았어.]

거기엔 혼자가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없었고

혼자였던 우린 단 한 번에 힘없이 내쳐졌어.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

최선을 다한 게 죄는 아닐 텐데

왜 이 세상은 이들에게 벌을 내릴까.

이들은 따듯한 손길에 보듬어질 자격도 없을까.


(간주)


(HAP's song)

치열한 영혼들이 배경이 된 세상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는 이 땅에서

내 널 우러르며 마음을 다지는 건

네가 쓰러진 이를 향한 따듯한 손길을 가져서지.


그러니 나도 돌아온 이 땅에서

너와 함께하는 좋은 사람들에 끼어

힘 한 번 더 내어 손을 내밀고

우리 손을 잡는 이들과 함께 나아갈 수 있겠지.


(합창)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더 많은 세상

최선을 다한 게 죄는 아닐 텐데

왜 이 세상은 이들에게 벌을 내릴까.

이들은 따듯한 손길에 보듬어질 자격도 없을까.





정완은 노래하는 동안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단 한 소절에서 고개를 높이 들고 우진을 올려다보며 노래했다.

그게 그가 계획한 유일한 퍼포먼스였다.


“와아.”

“하아.”


노래를 들은 아리와 서희는 저마다 감탄사와 한숨을 내뱉었다.


“아주버님 가사 진짜 잘 쓰셨다.”

“그러게. 우진 씨 파트도 PD님이 다 쓰셨다던데. 우진 씨는 가사 안 고쳤대?”

“자기 파트 글자 몇 개만 바꿨다고 들었어. 근데 저 노래, 우리 노래랑 내용은 비슷한데 정말 무게가 있네.”

“그냥 필요한 단어만 나열한 것 같은데 여길 팍 때리는 게.”

“그러니까. 난 그냥 우리 얘기만 쓴 건데 아주버님은···. 와아.”


아리가 말한 ‘우리 노래’는 순정남녀의 정규 1집 타이틀곡이었던 <누구나 뭐 하나는 잘한다던데>다.

지금까지 발표한 순정남녀의 노래는 크게 고단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나뉘는데, 순정남녀 팬들은 고단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더 좋아했다.


그런데 우진은 이제 자기 현실이 고단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런 분위기의 곡을 쓰겠다는 마음으로 몇 곡을 만들어두었다.


우진은 정완이 준결승전 특별공연을 결정한 다음 날, 즉 정완과 서희가 연인이 된 후 처음으로 만나지 못한 날 정완에게 제 곡을 내밀었다.

정완은 우진이 만든 곡을 듣자마자 자신이 몸담았던 음악학원이 망했을 때의 경험과 으뜸상사 업무를 인수인계 받은 날 버스 안에서 들었던 생각을 토대로 가사를 썼고, 우진은 정완의 가사에서 자기 파트만 약간 수정했다.

두 사람은 그 날 밤 텅 빈 녹음실에서 두세 번의 수정을 거친 후 노래를 완성했다.


“와아아!”

“잠깐만요.”


함성과 박수가 잦아들려는데 객석 한쪽에서 외침이 들렸다.

지노가 자기 무대를 마치고 돌아오다 외치자 수휘는 제 마이크를 들려다 내려놓았다.


“시간이 약간 있으니 두 분에게 질문 좀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영기의 말을 들은 정완은 그 허락의 권한이 영기에게 있을까 생각하며 멈추어 섰다.

지노가 자리에 앉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 노래가사, HAP 씨가 다 쓴 건가요?”

“작사는 제가 90퍼센트, 작곡은 우진이가 90퍼센트입니다. 서로의 결과물에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끔 약간 수정했지요.”

“경험으로 쓴 게 확실하니 그건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사 듣고 제가 많이 놀랐어요.”

“후후후. 그러니까 제가 먼저 얘기해야지요. 얘기할 시간 드릴게요.”


수휘가 재빨리 끼어든 후 말을 이었다.


“HAP 씨는 자기가 작곡한 노래는 가사도 자기가 거의 다 썼어요. 다른 밴드의 노래에 작사만 한 적도 있고요.”

“그렇군요.”

“제가 알기로 저 친구는 주로 서경시(敍景詩) 같은 가사를 써요. 별이나 산, 호수, 나무 같은 자연의 경치뿐 아니라 지하철역 계단에 붙은 껌딱지, 빌딩 창문 같은 도시적인 경치 얘기까지요. 요새 GF 밴드 공연하는데 <덮일 기억>이죠? 흰 눈이 쌓인 길에 남긴 발자국 얘기했죠.”

“예.”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경치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실패한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지금 성공가도를 달리는 프로듀서가 이런 가사를 쓴 게 의외예요. 이유가 뭐죠?”

“우진이가 만든 곡을 듣고 생각난 이야기가 이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희 양이랑 노래를 만들 때는 서희 양의 이야기에 맞춰 곡을 썼고, 우진 군이랑 할 때는 곡의 분위기에 맞춰 가사를 썼다는 건가요?”

“누구와 하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겁니다.”

“그렇지요. 제가 정리해드리자면, HAP 씨한테는 가사와 곡을 서로 번역하는 시스템, 일종의 자기만의 번역앱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렇군요.”


지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휘의 설명에 자기 말을 이었다.


“수휘 심사위원 얘길 들으니 가사 중에 ‘치열한 영혼들이 배경이 된 세상’이 이해가 가는군요. 이게 노래 속 주인공이 바라본 경치이니 본인의 가사 속 세계관을 유지한 겁니다. 특히 이 노래의 배경은 치열한 영혼들이고 노래 속 화자도 그렇다는 뜻이니, 결국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배경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는 뜻이 담겼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래서 이 노래는 재미없고 무거울지 모르지만 모두가 반드시 곱씹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원장님께 인사하고 짐이 기타 하나라는 건 음악학원이 망한 상황 같은데, 꼭 학원이 아니더라도 해고된 아르바이트생이나 재계약 안 된 비정규직 분들도 가슴이 찔릴 만한 이야기죠.”

“예.”

“그래도 이 노래의 핵심은 ‘내 널 우러르며 마음을 다지는 건 네가 쓰러진 이를 향한 따듯한 손길을 가져서지’에 있다고 보이는데, HAP 씨가 다른 데선 고개 숙이고 노래하다 이 부분에서는 우진 군을 우러르면서 노래했거든요. 그러니까 HAP 씨가 실패해서 팽개쳐진 뒤에 우진 군을 통해 희망을 보았다는 뜻이지요.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은 이유가 아마도 이 부분에 있는 듯합니다.”


지노의 말에 정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토리가 가슴을 팍 찔러서 여운이 남고, 노래를 만든 이들에 대해 궁금해 하고, 그래서 그들의 뒷이야기를 찾게 되는 과정. 시청자 분들이 가수와 작사 작곡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이렇죠. 실제로 시청자 분들 중에도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분들 많을 겁니다. 혼자만의 힘으로 일어서고야 말겠다는 딴 세상 스토리처럼 들릴 이야기가 아니라서, 지금의 현실을 가감 없이 반영한 이야기라서 저는 좋았습니다.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자! 이렇게 하여 HAP 씨와 서우진 군, 핫한 형제의 특별무대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재미없는 이야기>의 음원은 오늘 자정에 발매될 예정이며, 음원의 수익금은 난치병 아동들의 치료를 위해 전액 기부될 예정입니다.”

“와아아!”

“이제 오늘의 최종 결과를 발표할 차례입니다. 세 팀은 다시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지요.”


영기가 재빨리 멘트를 치자 여원이 고개를 저으며 들려던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지노와 수휘 때문에 자신이 말할 시간이 사라져버렸다.


정완과 우진은 제작진의 손짓에 따라 재빨리 무대 뒤로 퇴장했다.

반대편에서는 오늘의 참가자들이 무대로 오르고 있을 것이다.


“제작진한테 음원 줬지?”

“응. 옷 갈아입을까?”

“됐어. 여기 스티커나 하나 붙여줘.”


정완이 제 인중을 가리키자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다시 반대편 입구 쪽으로 갔을 때 무대의 영기가 말했다.


“<C-POP Artist season 5>! 오늘은 결승전에 진출할 두 팀을 먼저 발표하고 결승전 미션을 전달하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두 팀이 해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와아!”

“그래서 바로 발표하겠습니다. 결승전에 올라가게 된 두 팀은···.”


객석이 침묵에 휩싸였다.


“ADHT, 그리고 선우예린입니다. 축하합니다!”

“와아아!”

“안타깝지만 함윤명 군의 무대는 오늘까지였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이야아! 됐다.”


아리와 서희는 합격자 발표를 듣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번 주도 잘 지나갔어. 예린이 긴장 타겠다.”

“이제 일주일 남았네. 내일 또 총동원령 떨어지겠지?”


서희가 뭔가를 더 얘기하려는데 두 사람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각자의 짝이 조금 전 불렀던 노래의 음원을 보내온 것이다.


“와아. 방송 끝나고 보낸다더니 바로 보냈네.”

“방송 끝나고 들어보자. 미션이 뭔지는 봐야지.”


아리와 서희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을 때 CBC 미디어센터 스튜디오에서는 전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생방송이 끝나면 제작진들이 퇴장을 안내해야 하는데 오늘은 정완과 우진이 무대로 뛰어 올라왔다.


“잠깐만요! 관객 여러분. 저희에게 5분, 5분만 주십시오!”

“어?”


주위가 약간 조용해지자 우진이 말했다.


“방송에서는 제가 부르고 싶었던 무거운 곡을 했으니까 지금은 형이 부르고 싶었던 안 무거운 곡 하겠습니다.”

“와아!”


우진은 허름한 모습 그대로였지만 정완은 금테 안경을 쓰고 인중에 검은색 스티커를 점처럼 붙이고 값비싼 코트를 덧입었다.


카메라가 두 사람을 촬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제작진과 사전 약속한 이 무대의 영상은 <C-POP Artist> 홈페이지에 올라갈 것이다.


술렁거림이 멎자 우진이 신호를 보냈다.

북소리에 이어 추임새가 들리자 노래를 알아챈 관객들이 눈을 크게 떴다가 박자에 맞추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흥보가 기가 막혀> 원곡 : 육각수


(합창)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우진's song)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 하니

어느 곳으로 가오리오. 이 엄동설한에.


어느 곳으로 가면 산단 말이요.

갈 곳이나 일러 주오.


지리산으로 가오리까.

백이숙제 주려죽던 수양산으로 가오리까.


(HAP's rap)

아따 이놈아!

내가 니 갈 곳까지 일러주랴.

잔소리 말고 썩 꺼져라.


(우진's song)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간주)


(우진's song)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쉬어진 눈물이 머금어진다.

무거워진 가슴을 어루만져 멀어진 기억 속에 담는다.

어슴푸레져가는 노을 너머로 소리 내어 비워본다.


어디서부터 잘못 됐나. 이제 나는 어디로 가나.

갈 곳 없는 나를 떠밀면 이제 난 어디로 가나.


(간주)


(우진's song)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고, 여보 아리야.*

형님이 나가라고 하니 어느 명이라 안 가겄소.

자식들을 챙겨보오.

큰자식아 어디 갔냐. 둘째 놈아 이리 오너라.

이삿짐을 짊어지고 놀부 앞에다 늘어놓고

성님! 나 갈라요.

[오오냐. 썩 꺼지랑게!]


해지는 겨울들녘 스며드는 바람에

초라한 내 몸 하나 둘 곳 어데요.

어디로 아, 이제 난 어디로 가나.

이제 떠나가는 지금. 허이여.


(합창)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흥보가 기가 막혀.]





다음 날로 넘어가는 자정. 정완과 서희는 벽에 기대어 앉아 차를 마시며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을 들었다.

이 프로 제작진들은 우진에게 아까의 특별무대에 대한 뒷이야기를 많이 풀어달라고 부탁했고 청취자들 역시 그걸 바랐다.


정완과 우진이 부른 <재미없는 이야기>뿐 아니라 방송 후 홈페이지에 올라온 <흥보가 기가 막혀> 무대 영상도 화제에 올랐다.

이 노래는 옛것을 멋스럽게 되살린 명곡이고 흥을 돋우는데 적합한 데다, 노래 속 상황처럼 형제가 부른 점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노래가사가 흥부 입장의 이야기였기에 노래도 우진이 모두 불렀고, 놀부 역할을 맡은 정완은 꺼지라는 랩과 화음의 일부만 맡았다.

그래서 더 웃겼고 현실감 있었다고 했지만, 정완이 놀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잘생기지 않았냐는 의견도 있었다.


“몇 분께서 음원 수익 다 기부하면 저희 밥도 못 먹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이건 우진 씨가 알려주세요.”

“수익금 전액을 기부한다고 해서 제 수입이 전혀 없진 않습니다. 작사 작곡하는 인건비는 받아요. 형이랑 저는 이 중 절반을 또 기부했죠.”

“음원 만드느라 쓴 노동의 대가는 받는다는 뜻이죠.”

“예. 이 노래가 스트리밍이나 다운로드 될 때마다 저희 몫의 저작권료가 나오죠. 거기서 인건비 제외한 금액은 모두 기부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음원 유통사에서도 저희처럼 필수비용 제외한 수익을 모두 기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감사하죠.”

“아까 생방송 끝나고 아주버님이랑 강서희 양까지 넷이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이 얘기가 나왔어요. 우진 씨는 단독 활동으로 돈을 벌면 저보고 꼭 파스타 먹으러 가자고 그러거든요. 얘가 재작년에 저랑 썸 탈 때부터 그랬는데, 저는 지금도 그게 되게 웃겨요.”

“형도 이상하게 생각하던데 저는 이해가 안갑니다. 이런 일로 버는 돈은 저한테 보너스 같은 겁니다. 보너스 받으면 사랑하는 사람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은 게 당연하죠. 다들 그러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데 다른 건 안 되고 꼭 파스타여야 한다니까 그런 거죠. 저는 삼겹살에 소주도 좋고 삼계탕 같은 것도 좋거든요. 근데 아주버님이 그 얘길 들으시더니···. 풉!”

“까르르!”

“뭐야. 이 얘길 왜 라디오에서 해?”


스튜디오의 아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웃었고 서희 역시 정완의 말을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정완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게 되게 웃겼는데 제가 얘기하긴 좀 그래요.”

“얘기하시죠. 청취자 분들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안 한다고요?”

“그게 아니라 이건 저보다는 아주버님께서 직접···. 지금 전화 연결해도 돼요? 되죠?”


아리가 마주앉은 PD에게 묻자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취자들은 라디오 메신저에 너나없이 글을 올리고 있었다.

정완은 아리에게 전화해도 된다고 메시지를 보내며 서희에게 ‘쉿’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전화가 울리자 서희는 라디오 소리를 재빨리 끄고 입을 틀어막았다.


“예.”

[아주버님. 저예요.]

“너는 뇌가 파스타 사리냐?”

[풉!]


정완은 아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까처럼 데퉁맞게 답을 말했다.

스튜디오의 PD가 고개를 푹 숙이자 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이거였어요. 아주버님 감사해요.]

“감사할 일은 아닙니다만 제수씨는 뭐 이런 걸 갖고 전화까지 하세요.”

[이게 제가 올해 들었던 말 중에 제일 웃겼어요. 그리고 아주버님은 우진 씨한테 말할 때 특유의 톤이 있는데 그건 제가 못 따라하거든요.]

“예. 어쨌든, 갑작스럽지만 <순밤> 청취자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프로듀서 HAP입니다.”


정완은 뒤늦게 인사를 전했다. 궁금한 것부터 해결해주자고 생각해서 답을 먼저 말한 것이다.


[전화 연결된 김에 몇 가지만 여쭤도 될까요? 우리 청취자 분들이 <흥보가 기가 막혀> 불렀던 이유 궁금해 하시거든요.]

“그 노래는 우진이가 곡을 못 만들면 하려고 했어요. 생방송 끝나고 부르자고 얘기해서 하게 된 겁니다. 노래 스토리가 형제가 부르기에 딱 맞고, 제수씨는 잘 알겠지만 제가 우진이 대할 때는 좀 놀부 같은 면이 있죠.”

[네. 그리고 저랑 서희 씨도 <재미없는 이야기>는 무대 전까지 어떤 노랜지도 몰랐어요. 가사 어떻게 만드셨는지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는 여우비 프로듀싱 끝나기 며칠 전에 새 직장을 구하고 인수인계를 받았습니다. 가사는 인수인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거리의 사람들을 보다가 떠올린 생각이에요. 창밖에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밖에 안 보였는데, 그 이유가 치열하지 않으면 버려져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네.”

“당시 저는 음악에 대해 미련이 없었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지쳐 있었습니다. 우진이의 곡을 듣자마자 그때가 떠올라서 가사가 금방 나왔죠.”


정완은 <C-POP Artist season 5> 결승전 준비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아리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저도 올해 들은 얘기 중에 그게 제일 웃겼어요.”

“다행이긴 한데 걱정이네. 너 웃길 자신은 없는데.”

“괜찮아요. 근데···.”


서희는 통화를 다 들은 후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그땐 그랬지.”

“음악 하는 게 힘들던 때여서요?”

“응.”


정완은 고개를 한참 끄덕이다 말했다.


“힘들긴 했는데 네 덕분에 끝까지 할 수 있었어. 그때 넌 열심히 따라왔고, 그런 널 보는 게 좋았으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음악이 아예 직업이 됐는데?”

“괜찮지. 직업이니까.”

“하기 싫은 걸 직업으로도 모자라서 취미로도 하는데요. 밤늦게까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그리고 나한테는 밴드도 직업이야. 이젠 그렇게 싫지 않은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

“네 덕분이야. 힘들지 않으니까 걱정 마.”

“네.”


두 사람은 찻잔을 정리하고 오늘의 일과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하마터면 오늘을 그냥 보낼 뻔했네요.

늦었지만 한 편 올립니다. 내일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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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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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9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8 5 37쪽
»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9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1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6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5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5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4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7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8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9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70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6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7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9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9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7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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