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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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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2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7.07 01:09
조회
168
추천
10
글자
22쪽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DUMMY

캄캄한 밤을 달리는 냉동탑차가 어느 새 양평에 접어들었다.

조금 전까지 쉼 없이 대화를 나누어서일까. 정완과 서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완은 눈에 힘을 주고 차선밖에 안 보이는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했다.

평소와 다른 이 모습에 대해 그는 차를 달리는 도로가 평소와 달라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자신을 빤히 보려고 아예 몸까지 돌려놓은 예쁜 여자 때문이었다.


정완은 오른쪽 얼굴의 따끔거림을 참지 못하여 입을 열었다.


“여우비 생방송 갔지?”

“네.”

“재대결로 올라간 거 맞아?”

“어떻게 알았어요? PD님은 그런 것도 예상이 돼요?”

“제수씨가 네 노래 완전 대박이라며. 네가 솔로곡 불렀다는 뜻이겠지.”

“아, 네.”


서희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제가 지금 정신이 좀 없네요.”

“왜?”

“네? 아니···. 노래 들어볼래요?”

“여기다 꽂아.”


서희는 말을 얼버무리며 카오디오와 스마트폰을 연결한 후 <넌 언제나>를 재생했다.

정완도 지노처럼 인트로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올렸다가 다소 굳은 표정으로 노래를 들었다.


“어땠어요?”

“모노 노래를 스테레오로 불렀네.”

“네?”

“감성이든 임팩트든 최고야. 너한테 무기 많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농담 섞인 정완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제수씨 말이 맞아. 너 이제 보컬리스트 해야겠다.”

“그래요?”

“트레이닝을 아주 제대로 받았어. 이제 고음이 북처럼 그냥 탕탕 나오는구나.”

“그래봤자 은별이만큼 높이 올리지도 못해요.”

“그건 생각하지 마. 음역은 개인마다 다르니까. 기술적으로도 훌륭한데 가사랑 표현이 딱 맞아서 좋았어.”

“그래요?”

“고마워.”

“네? 아니에요. PD님 덕분이죠.”

“네가 잘한 거지.”


서희는 정완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자신이 부른 노래에 그가 담겼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노래도 들려줄래?”

“네.”


정완은 아까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대에게 옮은 감기>를 듣다가 노래가 끝난 후 미소를 지었다.


“이건 내가 우진이한테 준 곡이구나.”

“그게, 저희가 갑자기 카페에서 공연하게 됐는데···.”


정완은 서희에게 이 노래를 여우비가 부르게 된 이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래로 나갔으면 재대결 안 했겠는데?”

“다들 카페 공연에서만 쓰기 아깝다고 했는데 제가 그렇게 했어요. 공연이 시급한데 다른 방법이 없어서.”

“잘했어. 뮤지션한테 항상 시간이 많은 건 아니니까. 회사에서 음원으로 내잔 얘기는 안 해?”

“했는데 안하겠다고 했어요. 오디션 끝나지도 않았는데 방송 외적으로 자꾸 이슈 되는 게 싫어서요.”

“그래. 여기저기서 말 나오면 그게 뭐든 경연 준비하는데 집중력 떨어지지. 정말 잘했어.”


서희가 <그대에게 옮은 감기>의 음원 발매를 거절한 것은 경연 준비나 집중력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최근에 진심을 담아 부른 노래는 모두 슬픈 곡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슬프고 원래부터 주목받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슬픈 마음으로 인해 주목받으니 더 힘들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희와 은별의 의견이 갈라졌지만 서희는 저작권자 자격으로 다른 이들의 입을 다물려 버렸다.


“이건 우진이 솔로로 불러보라고 만들었는데, 우진이가 아무리 잘 불러도 이것보단 못할 거야. 그놈도 알 걸?”

“그래요?”


서희는 또 배시시 웃었다.


“가사는 디테일하게 꽂히고 편곡이랑 연주 최상이고, 곡에 감성도 딱 맞고 훌륭하네.”

“연주는 한미연사가 해줬어요. 근데 우진 씨도 그러더라고요. 이건 순정남녀 노래가 아니라고.”

“편곡이야 가능하겠지만, 어차피 내가 만든 노래는 제수씨가 안 부를 텐데 뭐.”

“그래서 PD님이 우진 씨한테 여러 사람들이 돕고 고마워하게끔 만들라는 것 같다고 했어요.”

“그놈이 그래?”

“네.”

“쓸데없는 데다 의미부여 잘하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쓴 거 아니야. 그럼 이 노래가 제일 먼저고 <넌 언제나>가 마지막이었어?”

“네.”

“다른 노래도 다 들려줄래? <그대에게 옮은 감기>부터 <넌 언제나>까지, 시간 순으로.”

“네.”


서희는 <그대에게 옮은 감기>에 이어 매치 오디션의 경연곡 <여우비>와 <Someday>, <넌 언제나> 순으로 재생했다.

정완은 <여우비>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거 가사가 네 스타일이랑 좀 안 맞는데?”

“···.”


대답이 없기에 돌아보니 서희가 자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잠들어 있었다.

때마침 졸음쉼터가 나타났고, 정완은 그녀의 의자를 뒤로 젖히고 무릎에 덮은 담요를 가지런히 놓은 다음, 이따 만날 거래처 사장들에게 예약 문자를 보낸 후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은데 물건 때문에 시동조차 끄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 불편한 데서···. 낮부터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겠지? 세은 씨야 점심시간 쪼개서 나왔을 테니까. 근데 정말 내 마음대로 해도 될까?’


정완은 잠에 빠진 서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차를 출발했다.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던 날과 많이 달라진 서희를 보고 그는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희망을 되새겨 보았다.


실력과 미모를 갖춘 인기가수와 지방 소기업의 계약직 배송기사는 누가 봐도 맞지 않는 조합이다.

지난날의 상처가 아직 다 아물지 않았는데 또다시 상처를 입고 밀려난다면 그때는 음악뿐 아니라 세상도 싫어질 것이다.


정완은 그 해답을 ‘우리’에서 찾고 있었다. 지난날 은별과도 그렇게 버텨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물론 그는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논리적으로 계산하고 가능한 경우를 전부 예상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일은 안 됐어. 어쨌든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같이 갈 수만 있다면 해답이 나오겠지. 어차피 내가 굳이 이 일을 계속할 필요도 없고···. 난 좋든 싫든 내가 선택한 일에 후회한 적은 없으니까.’


정완 역시 아까까지의 굳은 표정을 모두 풀고 길을 살피며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으음.”


기어봉을 쥔 손에 돋은 힘줄이 서희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완의 두 손은 모두 핸들에 있었다.


“어어.”

“깼어?”

“어? 저 잤어요?”

“응.”


서희는 민망함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죄송해요. PD님 힘들게 운전하는데 저만.”

“저기. 있잖아, 서희야?”

“네.”

“내가 너한테 그러지 않았어? 사과하지 말라고?”


서희는 이 말에 대꾸하지 못하다 다른 얘기를 꺼냈다.


“PD님 서울도 오죠?”

“응.”

“언제 와요?”

“지금.”

“네?”


안 그래도 터널을 통과한 후 보인 풍경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바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도로였다.

잠이 한 방에 깼다.


“이러면 PD님 늦잖아요.”

“안 늦어.”

“여기서 안성 가려면 한 시간 이상 걸릴 텐데.”

“성남부터 가기로 했어. 거래처 사장님들한테 문자 보내놨어.”

“괜히 저 때문에···.”

“사과 금지.”


서희는 ‘죄’를 말하려다가 삼켜야 했다.

잠시 후 그녀는 같은 질문을 또 했다.


“다음엔 서울에 언제 와요?”

“주당 한 번은 오는데 서울은 일정이 자주 바뀌어. 전날 알려줄게.”

“일은 몇 시에 끝나요?”

“아침 7시 반이면 끝나. 속초 가면 10시 반쯤이고.”

“그럼 낮에 자겠네요?”

“응. 보통 오후 2시에 자서 밤 10시쯤에 일어나.”

“네.”


서희의 눈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정완의 시간은 자신과 정반대였다.

정완은 그녀를 힐끗 보고 말했다.


“나 내일 의왕이랑 안양, 광명인데, 끝나고 서울로 올까?”

“네?”

“모레 쉬는 날이라 내일은 점심 먹고 가도 돼. 차는 6시 전에만 갖다놓으면 되니까.”


이 말에 서희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제가 점심 사드릴게요. 이제 저한테 밥 얻어먹으세요.”

“알았어.”

“PD님 돈가스 좋아하시죠? 저희 집 근처 시장에 돈가스집 있는데 정말 맛있어요. 사장님이 장인정신으로 정성껏 만들어주셔서 대접받는 느낌이 확실히 들고요. PD님도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정완은 이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포방터 시장 말하는 거지?”

“네.”

“그 돈가스집 알아. 나도 한 번도 못 가봐서 가보고 싶었는데, 거기 이제 못 가.”

“왜요?”

“거기 최근에 방송 나와서 떴어.”

“네?”

“이젠 아침에 줄 서서 번호표 받아야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래요?”

“다 왔다.”


서희의 집 앞이었다.

정완은 패딩을 벗으려는 서희를 말린 후 다른 키를 이용하여 차문을 잠갔다. 냉동고에 실린 물건들 때문에 시동을 끌 수 없어서다.


“춥지 않아?”

“따뜻해요.”


두 사람은 서희의 집을 향해 걸었다.


“은별이는 집 뺐어요. 팀원들 전부 회사 옆에 숙소 받았는데 걔는 아예 거기로 옮겼어요. 저도 같은 방인데 어쩌다 힘들 때만 거기서 자요.”

“그렇구나.”

“그리고 걔, 만나는 남자 생겼어요.”

“잘됐네.”

“며칠 안 됐어요.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썸 정도 같아요.”


서희는 정완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는데, 무덤덤한 정완의 반응 때문에 어물쩍거리다 민재에 대해 이야기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는 현관문 앞에서 정완에게 패딩을 벗어주었다. 문득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듯 온몸이 서늘했다.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어제 아침부터 여기저기 다니다 멀리까지 왔는데 차도 편한 데다 못 태우고.”

“PD님은 그 먼 길 매일 다니시잖아요.”

“나야 이게 직업이니까.”

“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그래.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게. 그러니까 너도 하지 마.”


서희의 가슴에 뭐가 콱 하고 지나갔다. 지금 그가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정완이 자신에게 사과하지 말라고 말하던 게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 늦겠어요. 가요. 운전 조심하시고요.”

“들어가면 갈게. 보일러부터 켜고 따뜻한 물로 씻어.”

“네. 저 들어갈게요.”

“응.”


서희는 문이 닫히자마자 창가로 뛰어갔다.


“이, 이거 왜 이래? 죽을 뻔했잖아.”


창밖에 정완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안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안 좋을 수가 없는 상황뿐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느낌이 아까부터 가슴에 몽글몽글 자라나 있었다. 저 남자도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서희는 미소 띤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저기. 지금 저 혼자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오늘은 뒤돌아보지 마세요. 되게 창피할 것 같···. 앗!”


서희는 정완이 걷다가 멈추자 깜짝 놀랐다가,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다시 걷자 짧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했다.


“제 얘기 들으셨어요? 다행이네. 하마터면 창피할 뻔했어요. 근데 뒤돌아봤어도 나쁘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한편 정완은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은 후 몸을 돌렸다.

가슴이 따듯해진 이 느낌은 얼마만일까.


‘좋다. 고마워.’


정완은 회사 앞 나무에서 비를 긋는 서희를 보자마자 제 자가용뿐 아니라 시간마저 멈추었다.

차문을 닫는 쾅 소리와 함께 마음에 담아두었던 모든 벽과 응어리가 풀려버렸다.

아닐 거라고 안 된다고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진심뿐 아니라,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진심도 각자의 마음속에서 더 깊어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한 번 더 아플 감정은 있겠지? 아까 많이 채웠으니까. 쟤는 다 집어던지고 왔으니까. 말하기 힘들어서 몸으로 보여줬으니까.’


결심은 완전히 세워졌다. 아니, 서희가 일으켜 세워주었다.

오늘 그녀는 행동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이 제 부족함을 채워주었듯 이제는 제가 채울 차례라고.


정완은 건물을 나와 걷다 멈칫했다.

헤어지던 날처럼 뒤돌아보고 그때와 다르게 환히 웃고 싶었지만 민망한 마음에 그대로 걸었다.


‘이 타이밍에 회사 상황이 변하는 것도 운명일까? 그럼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정완은 문득 자신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서희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졌다.

의동생 우진이 생각났다. 별명을 붙이는 것은 그의 주특기일 것이다.


‘푸후후. 그놈이 신수길 이름 앞에 ‘풍’자 붙였다고 했을 때 웃겨 뒤집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놈한테 자문이라도 구해야 하나···. 근데 내가 중요한 걸 빼먹었네. 서울에 어떻게 온지도 모르겠고, 한수 형님 얘기까지 줄줄 하지 않나. 어휴. 내가 정신이 없구나, 정신이.’


이것저것 생각하며 탑차에 오르는 정완의 눈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을 줄줄 내뱉었다는 게 민망했지만 뿌듯했다.


그런데 그 시각.


“이런 미친년!”


서희는 눈에 미소를 가득 담고 정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가 사라진 후 ‘중요한 것’을 떠올리고 절규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전부 뜯어버릴 것처럼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힘들었던 마음은 자신을 향해 따듯하게 다가온 그를 본 순간 빗방울에 씻겨 내려갔다.

오늘 그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좋았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자신이 했던 최대한의 긍정적인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는 자신을 걱정하며 편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더없이 포근한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았으며, 자신을 중심으로 이야기했고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었다.

그 사이에 엿보인 새로운 모습도 아주 많았고 모두 멋졌다.


그런데 단 하나.


“멍청한 년. 까먹어도 이걸 까먹어? 이럴 거면 거기 왜 갔냐고! 아 씨, 나 지금 뭐해야 해. 메시지 어떻게 보내냐고오오!”


전화번호를 받지 않았다.


서희는 정완을 만났을 때 해야 할 일을 수첩에 적어놓을까 하다가 말았던 게 못내 후회가 되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말했지? 서울 오기 전날 알려주겠다고. 어! 내일이었어. 의왕이랑 안양, 광명에서 일하고 와서 점심 먹자고.”


그런데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 포방터 돈가스집이 왜 갑자기 방송을 타고 떴단 말인가.

설마 장소 안 정했다고 연락 안 하는 건 아니겠지 하면서도 아까와 다른 의미로 가슴이 계속 콩닥거렸다.


“이 상태로 하루 이상을 기다려야 해? 재수 없음 일주일? ···아우, 씨!”


서희는 화장대에 주저앉아 몇 시간 만에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비를 맞아서인지 아이라인이 조금 흘러내려 있었다.


“하아. 이게 뭐야? 내 꼬라지가 웃겨서 그렇게 많이 웃었던 거였어?”

딩동.


이상한 생각에까지 옮겨가려던 차에 스마트폰이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어? ···아! 와!”


저장되지 않은 발신번호의 뒤 네 자리는 제가 아는 번호와 같았다.

서희는 정신없이 패턴을 풀다 한 번 틀렸다.





오해할 것 같아서 얘기할게.

아까 그 말, 네 얼굴 보고 말하기 너무 쑥스러워서 바비 보면서 말한 거야.

그거 너한테 한 얘기였어.


너한테 늘 고마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야.

현명한 사람과 의미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좋았어.

네 덕분에 기뻤고, 그래서 마음껏 웃을 수 있었어.

그래서 고맙다. 그리고 또 고마워.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건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더라.

감기 안 걸리게 따뜻하게 하고, 잘 자.

안전운전 할 테니까 답장하지 마. 민망하니까.





“아까 그 말?”


바비는 새끼 고양이였다. 지극히 정완다운 단순한 작명에 웃음이 터졌던 일.

하필이면 가장 얼빠져 있을 때 했던 말이라니.


그런데 아까 그 말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서희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화장대로 톡 떨어지며 두 손이 뜨거워진 얼굴을 가렸다.

피가 얼굴에 한껏 몰리고서야 아까 그 말이 정완의 들뜬 듯한 목소리로 한 글자씩, 자신의 랩 발음처럼 똑똑 떨어졌다.


‘잘 왔어. 보고 싶었어. 안 그래도 예쁜 애가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그게 나한테 한 거였어? 냥이한테 한 게 아니고? 앗!”


자신에게 깊고 기쁘고 슬픈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넉살스런 말투와 논리적인 언변으로 우진과 이야기하기 전에, 아니 미소 띤 얼굴로 운전하기 전에, 그는 이미 이야기했던 것이다.

보고 싶었다고. 예뻐졌다고.


서희는 흐트러진 머리를 마구 쓸어내리며 침대에 앉아 정완이 보낸 메시지를 또 읽었다.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건 그와 함께 있지 않을 때라는 문장과 자신의 경험으로 얻었다는 뜻의 ‘더라’라는 어미가 설렘의 화살로 날아와 팍 꽂혔다. 따라서 그 누군가는 바로 서희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짧은 그의 문장이 한용운의 명작 <나 그렇게 당신을 사랑합니다>보다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이, 이걸 어떻게 답장을 안 해!”


혼자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서희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품에 껴안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 채 발을 굴러댔다.





5시가 약간 넘은 시각.

정완은 성남의 재래시장에 도착하여 거래처인 ‘화평상회’의 사장과 물품을 확인하고 인수인계서에 서명을 받은 후 가게 안까지 물건을 함께 옮겼다.

탑차에 부려놓은 순서와 반대로 물건을 꺼내야했기에 움직임이 많았지만 몸은 이상하게 가벼웠다.


“서울에 급한 일 있다더니, 잘 해결됐어?”

“예. 덕분에 잘됐습니다. 근데 제가 사장님 일찍부터 고생하시게 만들었네요. 죄송합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나오는데 뭘. 천천히 준비하면 되니까 이게 더 좋아. 간만에 재고나 맞춰봐야겠네.”

“감사합니다.”

“수고해!”

“많이 파십시오.”


정완은 화평상회 사장에게 깊숙이 인사한 후 잰걸음으로 탑차를 향했다.

메신저 톡이 울리자 그의 눈이 커졌다. 지금은 서희와 헤어진 지 한 시간도 넘은 때였다.


“아직까지 안 잔 거야? 오후에 은별이 만난다더니?”


정완은 운전석에 앉으며 스마트폰을 열어보았다.

보낸 사람은 그의 예상대로 서희였다.


“푸후! ‘죄송한데’가 아니라 ‘죄송하지 않은데’네.”


서희가 사진과 함께 ‘죄송하지 않은데, 답장을 안 하고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어서요. 운전 조심해요. 그리고 저도 많이 고마워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에는 하얀 종이에 캘리그라피 글씨가 예쁘게 수놓아져 있었다.





지금은 갔을까요

제가 춥지 않기를 바라는 그대의 마음만큼

기나긴 하루를 내달리는 이 새벽

저는 그대의 앞길이 안전하길 바랍니다.

빗방울의 차가움이 그대의 따뜻함에 씻기고

제 주위 어둠이 그대의 미소 따라 밝아지니

함께 있지 않음에도 즐거워지는 건

제 마음이 이상하지 않음을 알아서일까요.

아아. 혼자가 되니 더 떨리는 제 마음을

햇살이 씻어낼까 두렵습니다.





“아름답구나.”


정완은 이렇게 말하다 세상의 눈치라도 보는 양 차창 밖을 힐끗 보며 픽 웃었다.

글이 아름다운 건지 글을 쓴 사람이 아름다운 건지 헷갈렸고, 말할 일이 거의 없었던 단어가 자연스레 나온 게 신기했다.

그는 사진 속 글을 여러 번 읽다가 사진을 다운받아 자신의 메신저 프로필에 올렸다.


“얘는 재주가 참 많구나. 난 캘리그라피도 모르고 향가도 못 쓰는데.”


서희는 시인을 꿈꾸며 국문과로 진학했지만 자신의 실력과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꿈을 포기했다고 했다.

꿈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처럼 꿈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서희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했던 그 생각이 너무도 건방졌음을 깨달으며 정완은 서희에게 미안했다.

그는 답장을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가 화면을 그대로 캡처하여 보낸 후 차를 출발했다.


서희는 잠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답장을 받았다.


“말 한 마디도 참 예쁘게 하네요.”


서희는 짧은 글을 한 글자씩 차분히 읽어 내려갔다.





글 잘 읽었어.

이 아름다운 글의 독자로 초대해주어서 기쁘고,

너에게 참 고마워.


그런데 서희야.

이제 정말 자야지.

그래야 네가 열심히 일할 때 나도 편히 잘 수 있어.

답장하지 말고 어서 잠들기를 부탁한다.

이따 연락할게. 잘 자.





서희는 답장을 읽으며 마음에서 뻐근함을 느꼈다.

그가 편히 잠들어야 자신도 즐겁게 일할 수 있고, 그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네. 답장 안 할게요. 근데 왜 이렇게 보냈어요?”


정완은 메시지를 타이핑한 후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창에 나타난 그대로의 화면을 캡처하여 전송했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차마 보낼 수 없는 말을 타이핑한 화면을 캡처한 후 인터넷 커뮤니티에 답답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이렇게 한다.


“저기. 그런 거 아니잖아요···. 어? 이게 뭐야?”


정완이 이렇게 보낸 이유는 사진의 맨 위에 있었다.

메신저 톡의 채팅 화면 맨 위에 상대방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정완의 화면에는 ‘다솜아지 서희’라고 쓰여 있었다.

즉 그는 제 전화에 저장된 서희의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솜아지가 뭐지? 어감은 예쁜데 뜻이 있나? 우진 씨처럼 ‘앓이’, 이런 거 직관적이고 얼마나 좋아. 내 이름으론 힘들려나? 아님 PD님 작명이 너무 단순해서?’


향가 형식을 빌려 편지를 썼더니 더 골치 아프게 만드는 건가 싶었지만, 서희는 국문과 출신답게 이 단어를 해석해보기로 했다.


‘단일어면 바로 알았을 거야. ‘다솜’이랑 ‘아지’로 나누면 ‘아지’는 강아지, 송아지 같은 데 쓰이는 접미사로 봐야겠지? 어쨌든 대상이 어리다는 의미고, 남은 건 ‘다솜’인데 설마 씨스타 다솜? 드라마에서 연민정한테 당했던 여자? 근데 그 이름 뜻이 무슨 순우리말 단어라고 하지 않···.’

“앗!”


서희는 제 별명을 떠올리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다 눈을 치켜뜨며 육성으로 소리쳤다.

얼굴이 또다시 빨개졌다.


“호, 혹시 사랑? 그쪽에서 본 것 같은데!”


그녀는 서둘러 국립국어원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옛말 사전에서 ‘다솜’의 의미를 찾아낸 후 이불을 뒤집어썼다.


“끼야아! 어떡해. 하나도 안 단순하잖아! 이러고서 자라고? 이건 죽으라는 얘기지!”


다솜은 ‘애틋하게 사랑한다’는 뜻의 옛말 명사형을 현대 국어로 표현한 단어다. 따라서 ‘다솜아지’는 ‘어린 애틋한 사랑’, 즉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애틋한 사랑’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서희는 ‘좋아 죽겠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작가의말

화요일입니다. 저는 휴일이라 놀고 있어요. ^^

글에 집중하다가 한 편 올립니다. 즐겁게 읽으셨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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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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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완결에 따른 공지입니다. 21.09.08 41 0 -
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8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8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8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7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70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9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7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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