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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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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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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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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DUMMY

서희는 팀원들을 데리고 녹음실로 올라갔다.

부스 앞에 잔뜩 놓인 음향기기에 정완이 앉아 있었고, 아까 그 세 사람은 그의 옆에 앉았다.

정완의 반대편 옆자리는 비었다.


그 뒤에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에는 큐걸즈 멤버인 윤지와 유지 자매가 있었다. 팀원들은 그 옆자리에 일렬로 앉았다.

홍태가 말했다.


“시작 안 하나?”

“제일 중요한 놈이 안 와서요. 죄송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일 중요한 놈이 들어왔다.


“어?”


빈조는 녹음실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정완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예? 예.”


정완은 몸을 돌려 뒤에 앉은 큐걸즈와 팀원들을 보았다.


“다들 시간 괜찮아?”

“네.”

“고맙다. 내가 너희들을 여기 부른 건 고민되는 일이 있어서야. 빈조 이 친구의 정규 3집이 내년 초에 나와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걸 아직 결정 못했다. 특히 이 녀석은 4월에 입대 예정이라 이번 앨범이 잘돼야겠지.”


빈조의 정규 3집 앨범에는 열한 곡이 실릴 예정이다.

곡에 대한 최종 검토까지는 완료되었고, 타이틀곡은 빈조가 작사, 우진이 작곡한 <봄이 가는 날>로 일찌감치 결정되었다.


<C-POP Artist> 첫 시즌에서 9위를 차지했던 빈조는 내년 2월 말에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만료되며, 회사에서는 그와 재계약하지 않을 것을 이미 통보했다.

정완은 그런 사람일수록 최선을 다해주고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빈조를 혼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빈조는 우진을 쓰러뜨린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이다.


서희는 정완이 빈조를 ‘방법하려고’, 즉 주술적으로 저주를 가하려고 이 일을 벌인 걸 직감했다.

그래서 그녀는 스마트폰을 켜고 동영상 녹화를 시작했다.


“<봄이 가는 날> 어쿠스틱 버전은 우진이가 편곡했고 일렉트로닉 버전은 유문갑 선배님이 하셨지. 둘 다 앨범에 올릴 건데, 둘 중에 어떤 곡을 타이틀로 놓고 활동할지를 못 정했어. 난 어쿠스틱이 좋지만 그건 내 성향이 그쪽이라 그런 거고, 여기에 대해서 우진이랑 빈조의 의견이 다른 상황이야. 유 선배님은 뭐든 상관없다고 하셔서 나한테 넘어왔지.”

“예.”

“노래 들어보고 의견 얘기해줬으면 한다.”


정완은 <봄이 가는 날> 두 가지 버전을 모두 들려주었다.

노래가 끝나자 팀원들뿐 아니라 홍태 등 세 사람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다. 여원이 누나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네.”

“네 동생 노래 정말 잘 만든단 말이야. 왜 못 정했는지 이해가 가. 막상막하야.”

“어렵다.”


봉길과 소향, 홍태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정완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예. 어려워서 선배님들을 모신 겁니다.”

“이건 우리도 답 못해. 둘 다 좋잖아.”

“저도 이것만으로는 답이 없어서 모신 거라니까요.”


정완은 열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홍태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홍태는 아까 정완으로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들었다.


“민 선배님께서 도와주시지요.”

“들어가면 되나?”

“예.”


홍태는 <봄이 가는 날>의 악보를 받고 녹음실 부스로 들어가 헤드셋을 쓰고 마이크 높이를 올렸다.

봉길과 소향 부부는 정완의 의도를 알기에 빙글빙글 웃었다.

정완이 마이크를 켜고 말했다.


“어느 버전부터 하시겠습니까?”

“둘 다 줘. 어쿠스틱부터.”

“예. 바로 이어서 일렉트로닉 가겠습니다.”


정완이 전주를 플레이하자 빈조가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PD님. 저건 제 노랜데.”

“가이드 해주시는 거다.”

“녹음까지 끝난 노래를요?”

“들어.”


전주가 끝나고 홍태의 노래가 시작되자 모두의 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홍태는 <봄이 가는 날>의 첫 멜로디를 한 옥타브 높여 자신의 특기인 가느다랗게 찍어 때리는 고음으로 시작하여 핵심 부분인 이별 감성을 무덤덤하면서도 듣는 사람의 마음이 시리도록 불렀는데, 감성뿐 아니라 음정이나 박자, 고음 처리까지 모두 완벽했다.


노래가 끝나자 소향은 홍태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고, 서희는 정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실의 사람들이 모두 놀란 반면 정완은 무덤덤했다.


“자. 다음, 일렉트로닉 가겠습니다.”


부스 밖 사람들은 여기가 녹음실인지 객석인지도 잊어버리고 홍태의 노래를 감상했다.

심지어 이 노래의 주인인 빈조마저도 그랬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나오셔도 됩니다.”

“한 번만 다시. 두 군데 틀렸어.”

“제 생각엔 선배님이 부르신 게 더 좋습니다.”

“아니. 악보가 더 좋아.”


정완은 홍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이들은 ‘뭐야. 어디가 틀렸다는 거야?’라는 봉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렉트로닉에서 긴장을 조금만 더 주십시오.”

“알았다. 어쿠스틱부터.”


정완은 반주를 또 플레이했고 홍태는 <봄이 가는 날>의 두 버전을 또 불렀다. 부스 밖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또 멍하니 감상했다.

아까 노래도 아주 좋았는데 이번에는 힘의 강약을 조금 다르게 조절하여 더 완벽해져 있었다.

뒤늦게 출근한 도진이 팀원들을 찾다 여기에 들어와 부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나오세요.”

“괜찮나?”

“훌륭합니다.”

“곡 좋다. 어떤 인간이 만든 것보다.”


홍태가 부스 밖으로 나오다 도진과 눈이 마주치자 도진이 허리를 팍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보스턴 고사리’ 기타리스트 윤도진이라고 합니다.”

“음.”

“혹시 민홍태 선배님 아니십니까?”

“그래, 보스턴 고사리. 석윤호는 잘 있나?”

“예. ···헉!”


도진은 정완의 옆을 보다가 봉길과 소향까지 알아보고 몸이 굳었다.


“아. 너 보스턴 고사리였어? 혹시 우리도 알아?”

“남소향 선배님, 여봉길 선배님 아니십니까?”

“오오. 아네? 근데 너 방송에는 할렘가 거지처럼 나오더니, 여기서 보니까 생각보다 멀쩡하구나?”

“예? 예.”

“그래. 이렇게 멀쩡하게 하고 다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인디는 다 저러나 하잖니.”

“예.”

“자아. 잠시만요.”


홍태가 자리에 앉자 정완이 모두를 집중시키고 팀원들에게 말했다.


“노래 들으면서 대충 답은 나왔을 거라 본다.”

“네.”

“근데 선배님께서는 두 버전을 조금 다르게 부르셨다. 두 버전은 음정이랑 템포가 완전히 같으니까 선배님 목소리를 바꿔 넣고 들어보자. 그럼 확실히 알 수 있을 거다.”


정완은 어쿠스틱 버전에서 불렀던 홍태의 목소리를 일렉트로닉 버전의 MR과 합쳐 재생한 후 반대로도 해보았다.

그걸 들은 후 모두의 답이 일치되었다.


“답 나왔나?”

“일렉트로닉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저도요.”

“나도.”


소향이 눈을 반짝이며 손을 들자 정완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후 빈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 말대로 하자. 일렉트로닉으로.”

“···예.”

“이거 끝난 거지? 나 커피.”


빈조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때 소향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있었다.


“정완아. 우리 여기 휴게실 가도 돼?”

“예. 거기 커피랑 쿠키 많습니다. 마음껏 드세요.”

“와아, 좋네. 가자. 선배님, 가요.”

“일 보고 와.”


홍태가 정완에게 말하면서 도진의 어깨를 툭 쳐주고 녹음실을 나갔다.

세 사람이 나가자 정완은 다시 자리에 앉아 빈조에게 말했다.


“빈조야. 과제가 있다.”

“예?”

“설마 자기 노래를 가이드 보컬보다 못 부르는 가수는 없겠지? 그것도 타이틀곡을.”

“···!”


빈조의 눈이 커졌고 서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두 사람의 눈이 커진 이유는 달랐다.


“두 버전 다 민홍태 선배님 이상으로 부를 수 있게 준비해. 선배님이랑 똑같이 불러도 된다.”

“···.”

“모레 정오에 재녹음한다. 들어봤는데 아니다 싶으면 어쿠스틱 자르고 열 곡으로 앨범 나간다.”

“예?”

“도진이랑 미란이는 트레이닝 준비해. 미팅은 끝나고 하자.”

“아, 예.”

“간다.”


정완은 서희를 향해 눈웃음을 주고 녹음실을 나갔다.

도진이 빈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안됐다. 네 가이드 보컬을 다른 분도 아니고 민홍태 선배님이 하시다니.”

“저분 누구세요?”

“휘민락 4기 메인보컬이셨다. 당대 신에서 원톱이었고 휘민락 메인보컬 중에서도 톱이야.”

“예?”

“수휘 선생님은 휘민락에 자기보다 더 주목받는 사람이 있는 걸 용납하지 않으셔. 저분이 그래서 그만두신 걸 거다.”

“아!”


도진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가 물었다.


“다른 분들도 거기 계셨어요?”

“여봉길 선배님은 ‘기븐 저크(Given Jerk)’의 드러머, 남소향 선배님은 백합송이 키보디스트야. 다들 몇 년 전에 인디밴드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분들이야. 소속 팀을 톱에 올린 일등공신 멤버들인데, PD님은 전에 그 밴드들 싱글앨범 프로듀싱하신 적이 있어.”

“저분들이 우리 앙코르 무대에 세션 해주실 거야.”

“예에?”


서희의 말에 도진마저 눈을 크게 떴다.


“민홍태 선배님은 베이스기타 하신대. 일렉기타는 PD님이 잡으실 거고.”

“각 밴드의 톱 멤버들이 모여서 우리 세션을 하신다고요?”

“저 엄청난 밴드에 맞춰서 <Butterfly>···.”

“이따 전체 미팅 때 맞춰볼 거야. 정말 잘해야겠지?”

“네!”

“와아! 잘됐어요.”


서희의 말에 팀원들은 굳은 의지를 다지며 고개를 끄덕였고 큐걸즈 멤버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도진이 서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PD님이 제 무대에 세워줄 수 있다던 밴드도 저분들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이번엔 노래만 하지?”

“그래야겠습니다. 저분들 앞에서 제가 감히···.”


도진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잊힌 불쌍한 빈조는 자신이 방법당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밤 10시.

여우비와 예린의 트레이닝이 끝났다.


“야아. 다들 잘하네. 특히 예린이 표현이 정말 좋아졌어.”

“감사합니다.”

“슬픈 영화 많이 봤다더니 도움이 됐나보네. 어쨌든 잘됐고 이제 쉬어라. 고생들 했어.”

“감사합니다!”


주성락 트레이너가 연습실을 나가자 예린은 기지개를 길게 켜고 손을 툭툭 털었다. 이제부터 화요일 저녁까지는 휴식이다.

예린이 미소 지으며 서희에게 말했다.


“언니 빨리 가요. 남자친구랑 놀아야죠.”

“어어.”

“우리 갈게요. 언니 주말 잘 보내요.”


은별이 손을 흔들고 재빨리 나갔고 예린이 부리나케 그녀를 따랐다.

2층 복도 안쪽에 있는 정완의 작업실은 불이 켜 있었지만 서희는 커피를 뽑겠다는 생각에 휴게실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서서 길을 꺾자 정완이 나타났다.


“어?”

“끝날 것 같아서 내려왔어.”

“고마워요.”


서희는 정완이 건넨 커피를 받으며 미소 지었다.

이 남자는 제가 하려는 일을 딱 한 타이밍 먼저 한다. 조금 더 빨랐으면 커피가 식을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두 사람은 작업실 창가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정완은 작업실을 받자마자 조그만 테이블과 의자를 갖다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이유를 눈치 채고 그 의자에는 앉지 않고 있다.


서희는 정완이 하루에 커피를 꼭 석 잔만 마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출근한 후 한 잔, 오후 3시쯤 한 잔, 그리고 지금이다.

자신을 위해 공간과 시간을 준비해두는 마음씀씀이가 좋았다.


“여긴 사내커플이 많아서 다행이에요.”

“놀 거면 안에서 놀라는 게 우리 회사 주의니까.”

“그렇죠. 근데 저는 PD님이 우리 회사라고 하는 게 아직도 신기해요.”

“나도 신기해. 음악 일을 하는데 이렇게 편한 게 처음인 것도 그렇고.”


한참 말이 끊겼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이것도 무척 즐거웠다.

맑은 겨울밤 변두리의 고즈넉한 풍경도, 따뜻한 커피의 신선한 향기도, 눈이 마주칠 때마다 보이는 마주앉은 사람의 미소도 좋았다.


“좋다.”

“네. 저도요.”

“내가 말없어서 답답하지 않아?”

“말해야 할 때는 많이 하잖아요. 오늘은 하루 종일 말 많이 했고.”

“그거야 일 때문에 그런 거지.”

“일 때문에 그런 거니까 그래요. 저랑 있을 때는 힘든 건 하지 말아요. 얘기고 뭐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고마워.”


이럴 때 은별은 정완에게 ‘왜 아무 말도 안 해요?’라고 묻곤 했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를 뿐.

정완은 마주 앉은 여자로 인해 다른 세상에 왔음을 새삼 깨닫고 한동안 창밖을 보며 고개만 끄덕였다.


이때 서희는 ‘저를 향해 있는 그대의 마음. 그 마음을 즐기는 침묵의 이 순간이 행복해요.’라는 문장을 수첩에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그 문장을 아예 외워 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서희가 말했다.


“아까 정말 좋았어요.”

“뭐가?”

“대선배님들이랑 <Butterfly> 부를 때요. 라이브로 연주를 듣는데 소름이 돋더라고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다들 잘하니까.”

“그리고 PD님이 빈조 방법하는 영상 찍어서 아리한테 보냈어요. 걔가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안 그래도 아까 제수씨가 전화했는데 못 받았더니 문자 보냈더라고.”

“빈조를 그렇게 완벽하고 세련되게 찍어버릴 줄은 몰랐대요.”

“그래? 나한테는 애한테 좋은 걸 깨닫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던데.”

“네. 빈조가 어렸을 때 데뷔해서 다들 오냐오냐하니까 좀 엇나갔나 봐요. 올 초에 싱글 할 때도 우진 씨가 고생이 많았고.”


서희는 커피 향기를 깊이 맡고 말을 이었다.


“PD님은 처음부터 빈조한테 음악으로 방법하려던 거였죠? 걔가 우진 씨를 괴롭힌 사람이어도 음악적으로 더 발전하라고.”

“응. 멘탈이고 뭐고 아주 박살내 버릴까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같은 회사고 애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민 선배님한테 부탁했지.”

“PD님이 가이드 보컬을 했어도 됐을 텐데.”

“아니. 찍소리 못할 압도적인 보컬이어야 했어. 그래서 이건 처음부터 민 선배님 아니면 안 되는 거였어. 내가 했으면 그 녀석은 기분만 상하고 성장은 못할 거야.”

“그래요?”

“거기서 어쿠스틱으로 결론이 나 버리면 빈조 입장에서는 자기 앨범에 자기 의견이 무시당한 거지. 곧 나갈 사람이라고 막 대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겠네요.”

“우진이한테 일렉트로닉으로 정하겠다고 양해 구했고, 민 선배님한테 그걸 더 잘 불러달라고 부탁했어. 난 그렇게 못하니까.”

“선배님들이랑 우진 씨랑 빈조까지 전부 다 살리는 방법이었네요.”


정완이 객관적인 판단에 따라 우진의 의견을 지지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고 홍태에게 일렉트로닉 버전을 더 잘 불러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빈조는 저번 앨범이랑 이번 앨범 사이에 발전한 게 없었어. 타이틀곡에서라도 좋아진 모습을 보여줘야 다음에 어디서든 더 잘할 수 있겠지.”

“네. 잘했어요.”


서희가 한참 생각하다 조심스레 화제를 바꾸었다.

얼마 전부터 하려고 마음먹었던 얘기였다.


“PD님.”

“응.”

“저희 부모님이 PD님 보고 싶어 하세요.”


정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뵙고 싶었어. 부모님 괜찮으신 시간 언제야?”

“우리 시간에 맞추겠다고 하셨어요. 서울로 올라오실 수도 있다고.”

“그건 안 돼. 말씀하시는 시간에 가자. 나 일하는 시간이어도 상관없어.”

“평일 저녁이나 주말이면 아무 때나 괜찮을 거예요. 지금 물어볼게요.”

“지금 주무시지 않아?”

“이렇게 일찍 안 주무세요.”


서희는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 답장을 받고 눈이 커졌다.


“왜?”

“내일 같이 점심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래요. 동생이랑 외식하려고 했는데 같이 보면 좋겠다고.”

“응. 가자.”

“PD님 내일이 첫 휴일이잖아요. 이번 주에 힘들게 일했는데 쉬어야죠.”

“너랑 같이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휴식은 없어.”

“아, 진짜.”

“나도 부모님 뵙고 싶어 한다고 꼭 말씀드리고. 응?”


정완은 마음 한쪽에 생겨난 긴장을 누르며 미소 띤 눈으로 서희를 바라보았다.



***



다음 날 오후.

정완과 서희는 부모님과의 만남을 마치고 서희의 집을 나서 두 사람의 첫 추억의 장소로 향했다.

서희는 조그만 상자를 들고 있었다.


“괜찮아요? 밥도 제대로 못 먹던데.”

“괜찮긴 한데 밥이 넘어가야 말이지. 휴우. 나 정말 실수한 거 없었어?”

“없어요. 아주 잘했다니까요. 저한테 의지한다더니 제 얘기 안 믿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노래하다 음정 틀린 것도 자꾸 걸리고, 나 그런 실수 잘 안 하는데···. 최악의 무대를 하필 거기서 하냐.”

“엄마가 이상한 거죠. 딸 남친이 잔뜩 얼어있는데 초면에 노래를 시키는 엄마가 어디 있어요? 강서준 그것도 그렇고.”

“나중엔 너도 나한테 연주 시켰잖아.”

“PD님 긴장도 풀린 것 같고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 그랬죠. 그게 치는 거랑 PD님이 치는 거랑 비교도 안 되니까 아빠 귀 좀 호강하라고요.”

“그래도 가족 분들이 다들 음악을 좋아하셔서 다행이었지. 근데 동생은 너보고 아는 여자라고 하던데 너는 그거야?”


정완에게 이 자리는 대통령과 마주앉은 것보다도 어려웠다.

연인의 부모님으로부터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일이 처음이었던 데다가, 은별의 부모님과 마주했을 때 좋은 기억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서희의 아버지는 정완에게 취업 준비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딸을 웃게 한 점, 그리고 꿈을 이루어주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점에 대해 고맙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공개된 사람들이니 행실을 조심하라고, 특히 공공장소에서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식사 자리에서 정완은 ‘우리 딸이 했던 얘기 중에 제일 기억에 남았던 게 무엇인가?’라는 아버지의 질문에 서희조차도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은 정완이 서희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여우비를 프로듀싱한 지 사흘째 되던 날, 퇴근하는 차 안에서 서희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될 것이기에 지금을 바꿈으로써 과거도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 생각과 의지로 될 일이라면 생각을 바꾸고, 불가능한 일이라면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정완은 중요한 일을 혼자 판단해야 할 때가 많았고, 자기 생각이 늘 옳지는 않더라도 거기에 책임지면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우비를 프로듀싱하며 자신의 말에 책임지고자 벌인 일 때문에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을 버거워하곤 했다.

그래서 서희의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혔고,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있었던 지난날을 돌아보게 했다.


그날 이후 정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희의 말처럼 하려고 노력했고, 음악적인 부분이든 음악 외적인 부분이든 그녀에게 의지했다.

그는 서희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실력과 경험만을 내세워 여우비를 프로듀싱했다면 이 팀이 지금만큼 잘되지 않았을 것이며, 지금은 서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결론을 말씀드렸다.


서희의 어머니는 정완에게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물었고 정완은 한동안 자신의 일을 설명했다.

서준은 정완에게 은별을 소개해 달라고 졸라서 서희를 기함하게 만들었고, 정완은 ‘걔 만나는 사람 있는데.’라며 난감해했다.


식사를 마친 후 정완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집에 들어와 차를 마셨다.

어머니는 <사랑나무 아래 소녀>를 좋아한다면서 정완과 서희에게 불러달라고 청했고, 정완은 서준의 방에 있던 피아노를 연주하며 서희와 함께 노래를 불러야 했다.

서준은 자신이 요새 연습하는 피아노곡 <River Flows in You>(이루마)에서 어려웠던 부분을 정완에게 물었고, 정완은 그 부분에 대한 서준의 운지법을 확인하고 교정해주는 한편, 서준의 부탁을 받고 그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서희가 정완에게 <아드리느를 위한 발라드>(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연주를 부탁했고, 정완은 그 곡뿐 아니라 <캐논 변주곡>(조지 윈스턴)까지 연주하여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를 어리게 했다.


정완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집을 나올 때 어머니로부터 ‘또 놀러와.’라는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기억난다. 이 문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에 등나무가 있었는데.”

“네.”


두 사람은 도서관 안쪽 등나무에 앉았다.

서희는 상자를 열고 정완에게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정완이 꿈에서 보았던 노란 리본이 달린 파란 머리띠가 있었다.


정완은 서희의 머리에 머리띠를 씌워주었고, 서희는 정완의 어깨에 기대어 그 옛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적었던 노트를 펼치고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9년 전 여기서 나는 이 사람의 나타샤가 되었다.’는 상태 메시지와 함께 서희의 메신저 프로필에 올라갔다.


정완은 서희의 노트를 한 장씩 넘겨가며 적혀있던 시를 모두 읽었다.


“전부 아름다운 시들이네.”

“네.”


서희의 시선이 땅을 향해 있었다.

초겨울 맨바닥이 마치 들꽃이 만발한 땅인 것만 같았다.


“저 요새 하루에 열 번씩 좋다는 말만 해요.”

“응. 나도 좋아.”

“좋은 데 가고 맛있는 거 먹고 영화나 뮤지컬 봐도 좋겠지만, 저는 이런 얘기할 수 있는 게 더 좋아요.”

“응.”

“PD님 속초에서 책 많이 읽었댔죠? 시도 봤어요?”

“응. 지난달에 바닷가에 차 세우고 창문 열어놓고 커피 마시면서 <겨울 바다>(김남조) 읽을 때 정말 좋았어. 그 뒤로 시집은 천천히 읽게 됐어.”

“네.”

“이제 갈까? 추워지는데.”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다 눈을 빛냈다.

정완과 자신 모두 내일까지 휴일이다.


“우리 속초 갈까요?”

“지금?”

“네. 사랑나무도 가보고, 차 세워놓고 시집 읽어요. <겨울 바다> 저한테 읽어주세요.”

“지금 가면 빨라야 밤에나 도착할 텐데.”

“···!”


서희는 아차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지금 가자는 건 밤을 함께 보내자는 뜻으로 해석될 것이다. 연인이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 뭘 하겠는가.

그런데 그걸 위한 준비는 무엇도 되어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에 아직까지 서로의 입술도 맞대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서희는 정완이 자신을 원한다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도를 한 번에 끝까지 나가버리면 그 후에 어떻게 될지 가늠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자신을 대하는 이 남자의 따듯함이 너무 빨리 식을까 하는 점이었다.


서희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려는데 정완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정완은 서희에게 발신자를 확인시켜준 후 아리의 전화를 받았다.


“어, 여보세요. 제수씨?”

[네, 아주버님. 저예요.]


서희는 정완이 자기 말투로 전화를 받자 긴장을 풀고 픽 웃었다.

정완은 서희의 얼굴 가까이에서 통화했다.


“제수씨 오늘 많이 바쁘죠? 식사는요?”

[네. 좀 전에 먹고 이동하고 있어요. 아주버님 어디세요?]

“서희랑 대전에 왔어요.”

[아. 걔 부모님 만나셨어요? 얘기는 잘 됐고요?]

“나쁘게 보시진 않은 것 같은데 긴장돼서 혼났습니다.”

[잘하셨겠죠. 오늘 서울 올라오세요?]

“글쎄요···.”


정완이 말끝을 흐리자 서희의 눈이 떨렸다.

이 남자가 속초에 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으면 자신은 꼼짝없이 가야 한다.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저어, 아주버님. 부탁이 있어요.]

“예. 말씀하세요.”

[이따 밤에 저희 라디오프로에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예에?”


아리의 뜬금없는 말에 서희의 눈이 커졌다.


[저희 <목소리 초대> 코너에 오늘 나오기로 했던 가수가 출연하기 어렵게 됐거든요. 그랬더니 제작진이 아주버님한테 연락해 보라고.]

“어어.”

[요새 청취자 게시판에 출연요청 제일 많은 분이 아주버님이거든요. 동생이 하는 프로에 형이 나와야 하지 않겠냐고.]

“···.”

[통화로 하셔도 되긴 한데, 여기 PD님은 이왕이면 아주버님이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서 청취자 분들한테 노래도 들려주시면 좋겠다고 하세요.]

“그래요?”

[서희랑 같이 나오시면 좋겠지만 걔는 지금 씨팝 말고는 출연 못하거든요.]

“어휴. 가수도 아닌 놈 뭐가 궁금하다고.”


서희는 정황을 파악하고 웃었다.

우진이 전화했다면 정완은 ‘난 아티스트가 아니니까’라며 거절했을 게 분명하다.


우진은 아리가 말해야 정완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아리는 형한테는 동생이 얘기하라고 말하며 서로 떠밀었을 것이다.

자신들이 소녀 노래를 만들었던 차 안에서 부부가 투덕거리다가 아리가 전화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는 모습을 생각하니 자꾸 웃겼다.


정완은 서희가 예상했던 반응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갈게요.”

[아! 네. 감사해요. 회사에 제가 연락해놓을게요.]

“아니요.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제수씨는 걱정 마세요.”

[네. 밤 12시까지 회사로 나영이 보낼게요.]

“예. 제수씨 행사 잘하시고요, 우진이보고 다음부터는 비겁하게 제수씨한테 떠밀지 말고 지가 직접 전화하라고 얘기해 주세요.”

[네. 꼭 그렇게 전할게요. 감사해요.]


정완은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을 팍 구겼다.


“이놈이 형을 아주 알차게 부려먹네. 하여간 만만한 게 가족이지.”

“풋! 우진 씨 원하는 거 다 들어준다면서요?”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휴! 아무래도 내가 말실수, 아니 글실수를 아주 세게 한 것 같네.”

“PD님이 하신 얘기니까 PD님이 책임져야죠.”

“이건 정말 책임 안 지고 싶다.”

“안 돼요. 제가 그거에 반했는데.”

“···책임져야겠네.”

“풋! 가요.”


두 사람은 손을 마주잡고 도서관을 나왔다.

정완이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제수씨 말마따나 동생이 하는 프로라 걱정이네. 거기에 누가 되지나 않을까 싶어.”

“에이. 설마요.”

“내가 못하면 티가 더 크게 나겠지. 그 사람들이 잘하니까.”

“전 PD님이 아주 잘할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서든 긴장도 안 하고 말솜씨도 좋잖아요.”

“···.”

“정 안되겠으면 여기가 무대다 생각하고 그냥 노래만 계속 불러요.”


서희의 말에 정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참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말

즐거운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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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8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7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8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6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69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8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6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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