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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13,460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6.30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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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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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글자
20쪽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DUMMY

자정이 지나며 12월 5일이 되었다.

밤이 깊어지며 기온이 떨어졌고 조금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아.”


서희는 으뜸상사 앞에 위치한 가로수 밑에서 몸을 움츠린 채 곱은 손에 입김을 불며 서 있었다.

소도시의 정겨움은 어둠과 함께 모두 사라졌고, 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희는 자리를 지켰다. 지금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여기에 아예 오지 않았을 것이다.


“폰도 차갑고···. 열 내려면 게임이라도 해야 하나.”


서희는 스마트폰이 꺼질 때마다 켜고 시각을 확인하고 있었다.

분 숫자가 하나씩 늘어나며 30에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그녀는 대학교에서 배웠던 김수영의 시 <눈>의 첫 연을 생각했다.

시를 암송하며 시어 ‘눈’을 반복하던 시인의 외침을 떠올리다보니 숫자가 24에서 26으로 건너뛰었다.


‘이육사의 <절정>도 비슷한 구조에 계절은 겨울···. 어?’


반대편 도로에서 빛이 보이자 서희는 반사적으로 몸을 가렸다.

그 빛은 점점 커지다가 이윽고 전조등의 형체를 드러냈다.


“앗!”


서희의 눈에 차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왔다.

그 차는 얼마 전까지 매일 탔던 차. 바로 정완의 자가용이었다.


“저, 저기···.”


서희는 발을 앞으로 떼다 멈추었다. 전조등의 밝은 빛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이윽고 빛이 사라졌다.


“하아.”


서희는 고개를 들어 아까 그쪽을 보았다. 밝은 빛에 흐트러졌던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차문이 닫히는 쾅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주위를 울렸다.


“서희야.”

“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영상처럼 서희의 마음속에 머물렀던 남자가 롱패딩을 벗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코트 줘. 이거 입어.”

“어···.”


정완은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서희의 코트부터 받아들고 제 패딩을 입힌 후 조수석 쪽으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의 체온이 느껴지는 순간 서희의 온몸의 살갗이 와다닥 일어나며 몸 떨었던 시간이 달아나버렸다.


정완은 히터를 세게 올리고 건물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


“여기 잠깐 있어. 나 일 좀 보고 올게.”

“저, 저기. PD님.”


서희의 말에 정완이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탑차 운전하시는 거죠? 저 저기 있을게요.”

“저 차는 추울 거야. 그리고 난 지금 직원들이랑 냉동고 확인해야 해.”

“네.”

“확인 마치고 차 가지고 올게.”

“알았어요.”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고, 정완은 뒷좌석에 있던 종이가방에서 조그만 보온병을 꺼내 들고 조수석 문을 연 다음 서희가 입은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잔잔해 보이던 정완의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며 흔들리는 순간 서희의 심장이 쾅 하고 내려앉았다. 그래서 겨우 마주쳤던 눈이 질끈 감기며 조금 전 그의 모습이 또 정지영상으로 변했다.


“머리 젖었구나.”


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뭐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이게 뭐라고 목에 콱 걸렸다.

눈이라도 떴으면 좋겠는데 눈이, 아니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많이 기다렸어? 춥지?”

“아, 아니, 아니에요. 조금 전에 왔어요. 괜찮아요.”

“그래도 비 맞았는데.”

“아니요. 거의 안 맞았어요.”


목멘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힘겹게 나왔다.

정완은 보온병과 손수건을 서희의 손에 쥐여 주다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카시트에 앉으며 스타킹을 신은 허벅지 아래가 드러나 있었다. 얼굴을 보자니 민망하고 땅 쪽을 보려니 난감했다.


“물기 닦고 있어. 이건 둥굴레차인데 뜨거우니까 천천히 마시고, 답답하더라도 이러고 몸 녹여.”

“네.”

“오느라 고생했어. 고마워.”

“네?”

“잠깐만 있어. 금방 올게. 팔 조심해.”


정완은 서희의 오른팔을 안쪽으로 밀어놓고 차문을 조심스레 닫은 후 뛰어갔다.


“지금 저한테 고맙다고 하셨어요?”


서희는 백미러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연신 방망이질치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왔다고 외치려던 결심은 저 남자를 본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 뒤에도 그는 자꾸 먼저 말했고 자신은 겨우겨우 그의 말에 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할 말을 알고 먼저 막아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서희는 둥굴레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세로로 훑으며 내려가자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위생복을 입은 저녁 근무자들이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탑차 앞에 나와 있었다.

정완은 운전석에 올라타 히터를 세게 올린 후 실어놓은 물품의 수량을 확인하기 위해 탑차 냉동고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아까 서희와 이야기했던 두 아주머니가 그를 붙잡았다.


“야야, 하 주임.”

“예.”

“아까 낮에 어떤 아가씨가 하 주임 찾아왔어. 참말로 이쁜 게 테레비 나오는 여자 같데?”

“왜 그 연속극에서 엄청 악독하게 나왔던 년 있자니. 걔를 똑 닮았더라.”

“아이고. 여사님. 그 사람 그 말 되게 싫어해요.”


정완은 굳었던 얼굴을 펴고 수첩을 펼치며 말했다.


“그 사람 좀 전에 만났습니다.”

“옴마! 진짜로 이때까지 기다렸구먼. 그래도 하 주임이 이 야밤에 어떻게 보고 바로 낚아챘네?”

“수량 확인하시죠!”


정완은 거래처로부터 받은 요청서와 냉동고 안에 놓인 박스의 품목 및 개수를 대조하며 각 박스를 포장한 담당자들과 일일이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정완은 직원들을 보았다.


“이상 없이 확인 끝났습니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얼른얼른 퇴근해서 씻고 주무세요. 저는 여러분의 정성을 거래처에 안전하게 전달하겠습니다.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

“근데 하 주임아.”

“예.”

“화명수산은 어떻게 된대?”


다른 아주머니의 물음에 정완이 잠깐 멈칫하다 냉동고에서 내렸다.

며칠 전까지 화명수산에서 가공과 포장업무를 하다가 이 회사로 넘어온 아주머니들이 정완 주위에 모였다.


“인수하겠다는 데 없대?”

“우리야 여기 와서 일만 하니 뭐 아나. 사장님한테 전화하기도 뭐하고···. 멀쩡한 회사에서 직원들을 다른 데로 보내진 않을 거 아니야.”

“사장님이 우리 여기로 보내면서 자꾸 죄송하다고 하셔가지고 나도 좀 그랬는데. 전부터 사장님 맨날 힘들어했고.”

“화명수산은 이번 주까지만 하고 문 닫게 됐습니다.”


정완의 말에 웅성거리던 소리가 확 잦아들었다.


“아니 어쩌다가?”

“안성 중앙시장에 ‘대명건어물’이라고 화명수산 거래처가 있었습니다. 재작년에 거기서 오산에 매장 낸다고 해서 정 사장님이 빚 내셔서 투자하셨대요.”

“왜 빚까지 내셨대?”

“대명건어물이 화명수산 제일 거래처였고 오산 매장까지 오픈하면 매출이 두 배가 되니까요. 그런 데서 부탁하니 사장님도 무시할 수가 없었겠죠. 근데 오산 매장이 장사가 안 돼서 대명 사장님이 사채까지 끌어 썼다가 빚을 못 막아가지고 안성 매장까지 팔았고, 정 사장님은 제일 거래처 잃고 대출 이자도 갚기 힘드니 회사 내놓으신 거죠. 그제 팔렸습니다.”

“그럼 앞으로 거기 사람들 어떻게 돼?”

“여사님들처럼 됐습니다. 생물 가공이 오늘 다 끝난대요. 생선 가공은 물치리에 전호수산, 해조류 부각 종류는 요 옆에 진원상회에 넘기고 공장 시설이랑 직원들 보내서 이번 주까지 인수인계할 겁니다.”

“새로 들어오는 데가 다른 업종인가보네?”

“건물 전부 철거하고 모텔 같은 게 올라간답니다. 인수하겠다는 업체가 없었대요. 부지가 너무 커서.”


정완의 말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나왔다.


“정 사장님은 괜찮으십니다. 좋은 값에 잘 팔았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셨고, 그래도 직원 분들 전부 실업자 안 만들었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에휴.”

“나중에 정 사장님한테 밥이라도 한 끼 사드리세요. 대명건어물 사장님도 좋은 분인데 저도 씁쓸하더라고요. 거기도 망하고 싶어서 망한 것도 아닌데.”

“하 주임은 어떻게 되는 거야? 너는 거기 배송도 했잖아.”

“저는 내일까지만 나가요.”


정완은 이 일로 인해 으뜸상사의 박길호 사장에게 계약 변경을 제의받았다. 화명수산이 문을 닫음에 따라 정완의 업무량이 주당 이틀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길호는 현재 계약직 배송기사로 근무 중인 정완에게 외부영업과 배송업무를 병행하는 대신 정규직 전환을 제안했는데, 정완은 아직 거기에 대해 답하지 않은 상황이다.


아까 젊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야, 하 주임.”

“예.”

“아가씨 참말로 이쁘던데, 어때?”

“전화번호 모른다고 이까지 찾아온 것만 봐도 그렇자니. 얘가 그 아가씨한테 너 좋아하냐 물으니까 ‘네’ 하드만.”

“아가씨 말하는 것도 괜찮고 예의바르던데 지랄하지 말고 만나봐. 울 조카보다 더 이쁘니까 내 이해할게.”


정완은 아주머니들의 말을 듣고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이고. 여사님. 저 사람한테 그 얘기도 하셨어요?”

“했지! 어떡하다 보니까 나왔자니.”

“애고. 여긴 프라이버시 같은 것도 없네. 여기서도 사람들 다 있는 데서 그 얘길 다하시고.”

“프라이버시는 지랄. 너도 미실이다. 왜 너 좋다는 멀쩡한 아가씨를 이 추운 날 비도 오는데 이까지 오게 해?”

“그걸 아셨으면 이 추운 날 비도 오는데 저 멀쩡한 사람 어디 따뜻한 데서 좀 쉬게 해주시든가요.”


정완의 능청스런 말에 나이든 아주머니가 발끈했다.


“야! 우리가 이거 입고 일하다가 밖에 나올 수나 있니?”

“여사님이 저 사람한테 어디 가서 기다리라고 하시고 저한테 장소 알려주시면 되잖아요.”

“이놈이 우리가 되게 한가한 줄 아네!”


정완은 잔잔한 표정으로 고쳐먹고 나이든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여사님. 저 사람 가수예요.”

“뭐?”

“요새 CBC에서 일요일날 저녁에 하는 프로 나와요.”

“우리 그때 여서 일하는데 그걸 어케 봐?”

“가서 자녀분들한테 여우비 아냐고 물어보세요. 인기도 많고 노래도 꾀꼬리 저리가라죠.”

“옴마? 어째 그렇게 이쁘나 했더니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어어.”

“여기까지 온 것만도 고맙죠.”

“혹시 네가 좋아한다는 아가씨가 그 아가씨였어?”

“예.”


나이든 아주머니가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정완이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고 여기에 온 이유가 대번에 이해되었다.

정완은 직원들에게서 시선을 떼고 냉동고 문을 잠그며 말했다.


“저라고 전화번호 안 알려주고 싶었겠습니까?”

“···.”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퇴근하시죠. 저는 안전운전 하겠습니다.”


정완이 탑차에 오르자 직원들은 옷을 갈아입으러 옆 건물로 갔고 주차장 한쪽에 서 있던 승합차의 시동이 걸렸다.

탑차가 주차장에 멈추자 서희는 자가용의 시동을 끄고 탑차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정완이 조수석 문을 열고 서희의 무릎에 담요를 덮어주며 말했다.


“이 차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

“저 트럭 많이 타봤어요. 어렸을 때 아빠가 운전 많이 했어요.”

“그래.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갈게.”


정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 차문을 닫다 갑작스레 다른 말을 뱉었다.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졌다.


“아. 잘 왔어. 보고 싶었어. 안 그래도 예쁜 애가 안 본 사이에 더 예뻐졌구나?”

“···!”


서희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정완은 환한 얼굴로 다른 곳을 보다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휙 던졌다.


“먹어.”

“야옹~”

“우리 회사 잘 지켜줘서 고맙다고 엄마한테 전해주고, 아빠한테 엄마랑 교미만 하고 도망가지 말고 자주 좀 오라고 해. 네 엄마 요새 골골하니까.”


서희의 얼굴이 빨개지다가 고양이 소리를 듣고 시뻘게졌다. 어포를 물고 사라지는 고양이를 향해 미소 짓는 정완을 보며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했나 싶었다.

정완은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며 말했다.


“차 가져왔어?”

“아니요. PD님 지금 거래처 가실 거죠?”

“응.”

“수도권 재래시장 쪽으로 가신다고 들었어요. 저는 가다가 아무데나 내려주세요.”

“알았어. 가자.”

“근데 쟤가 나비예요?”


서희의 마지막 말이 왠지 모르게 퉁명스러웠다.

정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소를 머금으며 차를 출발했다.


“아니. 쟤는 바비야.”

“바비? 아이콘(iKON) 멤버 이름에서 땄어요?”

“어? 그게 아니라,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는 나비만 있었는데 걔가 며칠 뒤에 새끼를 낳았어. 아빠 이름은 가비라고 지었고, 새끼가 넷이라 다비, 라비, 바비, 사비.”

“네? 풋!”


너무도 단순한 이름에 서희는 결국 웃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정완은 이름을 굉장히 단순하게 붙였다. 예전 활동명 SS뿐 아니라 작곡명 HAP도 ‘하 프로듀서’의 앞글자다.


“그거 PD님이 지으셨죠?”

“응.”

“중간에 뭐가 빠졌나했더니 마비는 이름으로 좀 그러네요.”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것 같잖아. 그리고 지금 나비 또 임신 중인데, 다음 애 이름을 아비라고 하면 좀 그렇겠지?”

“풋!”

“근데 여사님들이 나비 얘기도 하셨어?”

“네.”

“아유. 이 양반들이 도대체 어디까지 얘기하신 거야.”


정완은 서희가 둥굴레차를 다 마신 것을 보고 사거리 길가에 차를 세운 후 옆에 놓았던 종이가방에서 큰 보온병을 꺼냈다.


“춥지 않아?”

“괜찮아요.”

“저녁은?”

“···.”

“먹었어도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좀 먹어.”


서희의 눈이 커졌다. 보온병 뚜껑에 새하얀 죽이 김을 뿜으며 담겼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에 갑작스레 허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탄 차 옆으로 승합차가 느리게 지나갔다. 아마 아까 직원들이 탔을 것이다.

서희는 문 닫는 커피숍에서 나왔을 때 컵라면을 먹을까 고민하다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주먹밥도 있긴 한데 차가우니까 이것부터 먹어. 간은 좀 싱거울 거야.”

“이거 PD님이 운전하다 먹으려고 준비한 거 아니에요?”

“이건 지금 나보다 너한테 더 필요하니까.”

“네. 출발하세요. 늦으면 안 돼요.”


차가 해안도로로 나오면서 덜컹거림이 잦아들었다.

서희는 보온병 뚜껑에 담긴 죽을 떠먹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운전하는 정완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느껴졌기에 정완은 그녀에게 곁눈질조차 할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 산 좋은 옷을 입고 빨간 스포츠카나 멋들어진 대형 세단을 타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어울릴 여자가 자신의 후줄근한 패딩을 입고 냉동탑차에 올라 싱거운 죽을 먹고 있다.

정완은 이 점이 씁쓸했다. 전부터 있었던 고민이 다시 그에게 물음표로 돌아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서희와 헤어지던 순간 이미 결론을 지어두었다. 그래서 물음표를 지우려 이를 악물었다.


이에 대해 서희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50년 같았던 50일간 그리워하던 사람을 만났는데, 만난 지 몇 분 만에 자신은 그의 옷을 입고 그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그의 정성으로 물들었다.

은별조차 없는 그의 새로운 세상에 자신이 들어왔다는 느낌에 문득 제 표정이 어떤지 심히 궁금했다.


정완은 한참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운전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서희야.”

“네.”

“나한테는 시간이 필요했어.”


아까에야 떠올렸던 것.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여기 오면서 뮤지션들이랑 연락 다 끊고 음악은 안 들었어. 마음은 정말 편한데 늘 하나가 걸리더라고.”

“뭐가요?”

“너.”


서희가 커진 눈으로 정완을 쳐다보았다.


“난 하루 노동 아홉 시간 반 중에 여덟 시간 이상을 이 차에서 혼자 보내. 일 안 할 때도 주로 혼자 바닷가 걷든가 책 읽고.”

“네.”

“생각이 많아졌지. 그래서 알았어.”

“뭘요?”

“난 인간관계 정리하고 인생 리셋하려고 전화도 끊고 여기 왔어. 소원대로 음악을 멀리했지. 근데 내가 아무리 리셋을 해도 나란 놈은 그대로 존재하고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다면 나한테 그런 사람이 나 자신 말고 또 있을 수 있겠지. 그걸 생각 못했어.”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요?”

“응.”


정완의 이 말은 결국 그에게 있어 서희는 삶의 방향을 바꾸더라도 남겨두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한울과 비슷한 의미 아닐까.

서희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려고 했다.


“너 나한테 할 말 많지?”

“네.”

“그 말, 지금 여기서 다하려고 하지 마.”

“네?”

“안 나오는 얘기를 억지로 하겠다고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다 해도 나한테 얘기 못하는 거 알고 있으니까.”

“···!”

“천천히 얘기하자. 시간 많으니까. 나 더 이상 도망가지 않을게.”


서희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정완은 전에도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완 역시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얘기는 서로가 나누는 게 당연한 법이다.

서희는 이 점 때문에 자신에게 늘 답답했다. 얼굴 보자마자 꼭 말하겠노라고 수십 번을 다짐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또다시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그런 자신을 향해 천천히 얘기하자고 말했다.


그래서 정완의 짧은 몇 마디는 서희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자신이 음악을 들으며 정완을 그리워할 때 그는 바닷가를 걸으며 관계와 감정을 정리하면서도 자신만은 남겨두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보자마자 옷을 씌우고 음식을 주며 정성을 다할 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천천히 얘기하자,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하며 제 불안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두 마음이 아주 같지는 않아도 비슷했던 게 아닐까.


묻고 싶은 질문들이 생겨났지만, 자신 역시 말하지 못하는데 그에게 당장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이제 시간은 많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 남자는 허튼소리를 하지 않고 자신이 뱉은 말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안다.

그 믿음이 지금 서희의 양 볼을 발갛게 만들었고 얼굴에 미소를 담게 했다.


그래서 서희는 외치고 싶었다.

그것은 도망간 게 아니라 지독한 현실에 끌려간 것뿐이라고.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났고 그만큼 더 절실해졌으니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자고.


숙였던 고개가 창밖으로 돌아갔는데 세상이 환해졌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 가로등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정완은 백미러와 전방을 번갈아 보다 서희를 바라보았다.


“앗!”

“어? 푸후.”


눈이 마주치자 서희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처음 보는 모습에 정완은 한 마디 하려다 말고 앞을 보며 화제를 바꾸었다.


“나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한울이 형님이 알았으면 나한테 전화했을 텐데, 전화 안 왔어.”

“천세은 씨한테 들었어요.”

“세은 씨를 어떻게 만났어?”

“원래는 정한울 씨 만나려고 했어요. 은평구에 스마트폰 수리점 검색해서 한울 씨 매장에 갔는데 여자가 있었어요. 한울 씨 눈에서 꿀이 떨어져서 저 여자가 세은 씨인가보다 해서 나왔을 때 쫓아갔어요.”

“그걸 기억하고 있었구나.”

“네.”

“또 친구들이 커플끼리 만나나보네. 세은 씨는 그거 부탁할 때마다 형님 매장에 직접 오더라고.”

“며칠 뒤에 한울 씨 생일이라 만난대요.”

“닷새 뒤니까 그 전에 만나려나.”


정완은 본 적 없던 미소를 올리고 있었다.

트레이닝을 마치고 운전하던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보였다.


무심한 표정도 우수에 젖은 눈도 보기 좋았지만 부드러운 미소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가 있을까.

이 남자가 지금 운전하고 있어 다행이지, 마주앉아 밥 먹는데 저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면 체하지 않을까.


서희는 그런 생각을 주워섬기며 빠져나가려는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정완의 지인의 일에 대해 자신이 먼저 알아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창밖의 부슬비가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빛을 받아 흩날리는 눈은 아름다웠지만 서희는 눈이 빨리 그쳤으면 했다.


작가의말

저는 이 파트를 이 작품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잘 읽으셨기를 바랍니다. 즐겁고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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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6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70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8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7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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