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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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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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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DUMMY

1월 12일 토요일 오후.

뮤컬트 팀원들의 전체 미팅이 끝난 후 미란과 도진은 다시 트레이닝에 들어갔고, 다른 팀원들은 옆 연습실에 정완과 마주앉았다. 이것은 생방송 진출자들만의 미팅이다.


“하트헤르는 두 번째 생방송에서 부를 곡 정했어?”

“아니요. 아직 지정곡 편곡도 다 안 돼서···.”

“그래. 여유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하고, 예린이는?”

“<총 맞은 것처럼>(백지영) 어떨까 해요. <이별공식>(R.ef) 다음 노래로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래. 좋네···. 하여튼 미션 참. 여원쌤이 왜 닝기리라고 하시는지 알겠더라고.”

“풉!”


정완이 고개를 저으며 한 말에 예린이 웃었다.


<C-POP Artist season 5>에서는 그저께 생방송 진출자들에게 6라운드 미션을 공지했다. 물론 5라운드 미션은 지난주에 공지되었다.

10개 팀 중 7개 팀을 가려내는 첫 생방송인 5라운드에서 각 팀은 자유곡 두 곡씩을 기성곡으로 불러야 한다.

생방송에 진출한 세 팀은 이미 이때 부를 노래를 모두 정하여 조금 전 미팅에서 불렀고, 여원과 정완, 트레이너 등과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


두 번째 생방송 6라운드, 즉 Top 5 결정전에서는 다른 회사 심사위원이 지정한 노래와 자유곡을 불러야 한다.

하트헤르는 수휘로부터 <오래된 노래>(스탠딩 에그)를 지정곡으로 받은 후 자기들이 먼저 편곡하여 연주해보고 함께 상의하자고 했다.

예린은 인길로부터 <이별공식>을 받았는데, 정완은 미션이 공지된 다음 날 그 노래를 편곡하여 내놓았다.


한편 여우비는 지노로부터 <벚꽃 엔딩>(버스커버스커)을 받았다.

그런데 정완은 버스커버스커의 프로듀서인 장범준은 음악적 성향이 자신과 비슷하지만 실력과 감각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고, 이 노래에는 여우비 특유의 임팩트를 줄 부분이 없기에 편곡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장르의 전문가인 우진마저도 제목을 듣고 ‘여우비 떨어뜨리고 싶으신가보네’라며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들 진짜 너무했어요.”

“그렇긴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일 너무한 분은 여원쌤이야.”

“왜요?”

“은별이 혹시 전 PD한테 들었어? 하소연 뭐 받았는지.”

“홍진영 노래라던데요. <산다는 건>.”

“네?”

“큭!”


여원은 혼성 듀엣 슬립리스에게 <아담과 이브처럼>(나훈아 & 배종옥)을, 메탈밴드인 태평성대에게는 <니가 왜 거기서 나와>(영탁)를 주었다.


“전부 트로트네요?”

“그래. 선생님이 일부러 그러신 것 같아. 그 노래들 다 명곡이고 자기들 색깔이랑 완전히 다르니까 편곡만 잘하면 예상외의 무대가 나오겠지. 그러니까 너희도 이 미션 잘해내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다. 알았지?”

“네.”


정완은 팀원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의 화제로 돌아갔다.


“여우비는 거부권 쓰기로 했어?”

“아니요. 아직 결정 못했어요.”


서희의 말에 하트헤르와 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2라운드 조 1위로 3라운드에 올라간 팀은 거부권을 받았다. 예린은 3라운드에서 사용했고 하트헤르는 거부권을 받지 못했다.

물론 지노가 정한 미션을 거부하면 그에게 미운털이 박힐 가능성도 있다. 지노에게는 시청자들이 납득할 만한 논리로 단점을 끄집어내어 점수를 깎을 능력이 있다.


“자작곡 가사 조금 전에 보냈어요.”

“봤어. 좋더라. 근데 곡이 금방 나올지 모르겠네.”


정완은 우진의 업무를 절반 이상 인수했고 문갑의 업무도 일부를 떼어내 스스로 떠맡았다.

그는 일처리 속도가 빨라 다른 프로듀서들의 퇴근시간까지 앞당겼지만, 그 때문에 작곡을 위한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 작곡이란 게 단시간 집중한다고 팍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그는 설하로부터 자신이 직접 부를 드라마 OST의 곡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까지 받았다.


이는 우진이 2년간 겪어왔던 고충과 비슷하다.

다만 우진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음악만을 생각하며 새벽까지 일했던 반면, 정완은 퇴근 후에는 음악을 철저히 멀리하고 있다.

물론 누구도 그에게 그 시간에 작곡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곡 안 만들어도 돼요. 생방송부터는 기성곡만 해도 되잖아요.”

“그래도 만들 수만 있다면야 자작곡이 좋지. 시청자들 기대도 있을 거고, 라이브 무대에서 신곡 발표하면 화제나 인지도도 크게 올라가니까···. 노는 놈보고 노래 세 개만 내놓으라고 할까?”

“풋! 우진 씨 요새 안 놀잖아요. 아리가 우리 때문에 바빠졌다고 입 댓발 나왔던데.”

“누가 노래 그렇게 잘 만들어놓으래.”


정완의 말에 서희가 또 픽 웃었다.


우진과 아리는 팬들의 성화에 못 이겨 <D&L Girl>을 녹음하여 디지털 싱글로 발매했다.

이 곡은 출시되자마자 음원 차트 3위를 찍은 후 하루 동안 한 자리 순위에 있었고, 두 사람은 CBC 케이블 TV와 라디오프로 등에 출연하며 예정에 없던 활동을 하고 있다.

순정남녀의 주말 행사는 결혼식 위주로 보통 밤 9시에 끝나는데, 오늘은 기업체 행사까지 끼어 자정 직전까지 빡빡한 일정이 예정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은 그 행사 후 곧바로 라디오도 진행해야 한다.


그런데 순정남녀의 <D&L Girl> 방송 무대를 본 팬들 사이에서는 아리보다 서희가 더 사랑스럽게 보였다는 반응이 나왔다. 정작 원판의 노래를 들어보니 복제판보다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리는 ‘서희가 나보다 랩도 잘하고 예쁘니까’라고 말했지만, 팬들은 <D&L Girl>이 순정남녀의 기존 사랑노래보다 훨씬 간질간질하여 결혼한 부부가 표현하기 어렵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았다.


어쨌든 <D&L Girl>은 음원 차트 선두권에 올랐고, 그 노래로 활동 중인 가수가 행사에서 그 노래를 안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서희의 복수는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더하여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봐야겠다.


물론 정완이 재앙코르 무대에서 <D&L Girl>을 끄집어낸 게 꼭 복수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부부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전부터 정완에게 고마워해 왔고, 이번에도 놀라고 민망하긴 했지만 마음은 그랬다.


지난 한 달간 정완은 <C-POP Artist season 5> 팀원들뿐 아니라 기성 가수인 큐걸즈와 빈조, 잊혔던 사람들을 모아 만든 GF 밴드 등, 주변 가수들을 대중들의 화제에 올리는 일에 출중한 능력을 발휘해 왔다.

순정남녀 팬들로부터 ‘형이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번 복수 역시 순정남녀라는 팀을 <C-POP Artist> 시청자들의 기억에 되살려내는 계기가 되었다.


<D&L Girl>이 아리에게 민망한 노래이긴 하나 팬들은 이미 그녀의 그런 성격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처음으로 선보인 랩이 나쁘지 않아 순정남녀의 음악에 쓰일 수 있겠다는 평가까지 얻었으니 오랫동안 활동하고 싶어 하는 부부에게는 아주 긍정적이었다.

정완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기로 결심하면서 우진에게 프로듀서 그만하고 순정남녀 활동과 작곡에 집중하라고 당부했는데, 자신이 직접 순정남녀의 생명력을 늘려놓음으로써 그 여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어제 정완과 서희, 우진과 아리 넷이 휴게실에 마주앉았을 때 정완은 아리에게 뜬금없이 ‘제수씨가 만든 갈비찜이 그렇게 맛있다면서요?’라고 말했다.

아리는 활동 마치는 대로 집에 초대하겠다고 했다.


“예린이는 <총 맞은 것처럼> 준비해. 편곡은 하겠지만 원곡이랑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하트헤르는 <오래된 노래> 편곡 다하면 대충 녹음하고 편곡 힘들면 얘기해. <벚꽃 엔딩>은 목요일쯤에 들을 수 있게 편곡해 놓을게. 들어보고 거부권 쓸지 정해도 돼.”

“네.”

“지금은 첫 생방송 준비가 더 중요하니까 거기 집중하자. 저녁 맛있게들 먹고, 이따 트레이닝 잘 받고 편히 쉬어.”


정완이 말을 마치자 팀원들이 그에게 인사한 후 부리나케 연습실을 나갔고, 정완은 구석에 놓였던 자신의 기타를 멨다.

오늘 그의 업무는 모두 끝났고 이제 GF 밴드의 멤버로 연습하러 가야 한다.


서희는 정완의 팔을 잡고 연습실을 나섰다.


“지금 가야죠?”

“20분쯤 여유 있어.”

“그래도 급하게 가는 것보다 천천히 가는 게 낫죠. 선배님들보다 일찍 가는 게 좋고. 저녁은 뭐 먹어요?”

“글쎄? 은호가 알아서 정하겠지.”

“혹시 오늘도 밤새워요?”

“아마 그럴 거야. 은호가 곡 또 만들었으니까···. 다들 술 취하면 악기를 잡더라고.”


정완의 말에 서희의 눈가에 아쉬움이 그려졌다.


새해가 되자마자 여원은 ‘뮤아트’라는 인디 레이블을 설립했고 GF 밴드는 이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다.

이들은 2월부터 여원이 주선한 클럽의 공연에 나서는 한편, 틈틈이 앨범을 준비하여 출시하기로 했다.

홍태와 봉길은 두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셈이지만, 수입은 전보다 많아지고 새벽에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지난주 토요일 첫 연습 때 멤버들은 연습실에서 밤을 보냈다.

연습 후 멤버들이 술을 들이붓고 연주하다 널브러지는 바람에 정완은 소향에게 욕을 먹었고, 다음 날 정완을 제외한 멤버들은 각자의 짝에게 한소리씩 들었다.


“술 너무 많이 먹지 마요.”

“조금만 마실게. 강요하는 사람 없으니까 걱정 마.”

“지난주에 미란이 왕창 열받았어요. PD님은 저한테 전화했는데 은호는 자기한테 전화 안 했다고.”

“그놈 소주 끼고 연주하다 감동이었다고 혼자 마시다 쓰러졌어. 오늘도 그러면 내가 전화해야지 뭐. ···아!”


주차장에 다다른 정완은 제 차에 오르려다 뭔가를 떠올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미란이보고 이따 10시에 CBC 예능프로 보라고 해. 거기 중간에 <마지막 꿈, 첫 꿈> 나온대.”

“와! 잘됐네요.”

“제수씨한테 부탁해놨어. <순밤>에도 나올 거야.”

“알았어요. 얼른 가요. 조심하고.”

“전화할게.”


서희는 정완의 차가 사라지고도 조금 더 지나서야 몸을 돌렸다.

정완이 없는 시간을 아쉬워하려던 그녀의 눈이 문득 빛났다. 오랜만에 취미를 즐기고 싶어졌다.


“나 이제 스물여덟, 지금도 내 취미는 그리워하기.”


은별과 팀원들이 기다릴 식당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서희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취미를 처음 깨달았을 때처럼 기약 없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리라.



***



뮤아트 레이블은 여원이 독자적으로 설립하였으므로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사나 투자자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그녀는 언젠가 꼭 하려던 일을 GF 밴드를 계기삼아 벌인 것이다.


여원은 각종 행사나 카페, 클럽을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공연해 왔는데, 이것은 병안의 채무상환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여원 자신이 그것을 좋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마지막 꿈은 접근성 좋은 장소에 공연장과 연습실을 세워 상설 무대를 운영하는 일이었다.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콘서트뿐 아니라 인디밴드를 위한 축제, 아마추어 뮤지컬 동아리의 창작공연 등 무대가 필요한 일은 많다. 한편으로 뮤컬트 엔터테인먼트가 CBC 방송국과의 관계를 지금처럼 우호적으로 유지하거나 여원이 이 회사에 평생 몸담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여원은 <C-POP Artist> 이후의 상황을 대비함과 동시에 자신의 꿈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일을 꼭 추진하겠노라고 생각해 왔다.


여원은 공연장 이름으로 뮤아트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인디 레이블의 이름 역시 그것으로 정했다. 그 공연장에서 정기 공연을 할 수 있을만한 팀을 모으는 것으로 그녀의 작은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미란과 도진에게도 뮤아트 레이블과의 계약을 제의했는데, 미란은 말도 끝나기 전에 하겠다고 답했다.


“도진이는요?”

“수휘가 보스턴 고사리랑 계약하겠대.”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아무튼 미란이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여원이 누나가 그 인간보다 훨씬 낫다.”

“푸후후. 형 이제 수휘 형님이랑 베스트프렌드 아닙니까?”

“그건 그거고 누나가 낫다.”


홍태의 딱딱한 말에 정완이 특유의 웃음을 흘리다 말했다.


“홍태 형 말이 맞아. 선생님 인맥으로 카페 공연만 꽂아도 수입은 어느 정도 나올 테니까.”

“근데 공연장이요, 아마추어 뮤지컬 같은 건 돈이 안 되지 않아요?”

“그런 걸 수익 생각하고 하는 건 아니겠지. 돈이야 저녁이나 주말 시간대에 가수 공연으로 뽑으면 되니까.”

“그렇겠네요. 근데 담여원 선생님 돈 많아요?”

“씨바사장만 사고 안 쳤음 공연장 10개는 세웠겠지.”

“아, 큭!”


연습실. 정완은 홍태와 봉길, 은호에게 여원의 계획을 설명했다.

봉길의 뚱한 말에 은호가 무릎을 탁 쳤고 홍태가 말했다.


“자선공연도 많이 하겠네.”

“예. 그 용도도 크죠. 뮤컬트 엔터가 아무리 CBC랑 친해도 순정남녀나 든솔, 현수 정도 아니면 거기 공개홀에서 공연 못해요.”

“아마추어도 부담 없이 공연하고, 관객들은 저렴하게 음악을 즐기는 장소로 만들겠다는 건가?”

“그럼 나는 거기 입구에서 커피나 팔아야겠다. 잘하면 대박이겠는데?”

“여봉길 넌 아무리 봐도 그냥 바보다.”


홍태의 마무리에 다른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GF 밴드의 연습은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저녁이며, 특히 토요일에는 저녁을 함께 먹고 연습한 후 회식까지 이어진다.

여원은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해도 된다고 했지만, 정완을 제외한 멤버들이 모두 시내에 거주하기에 봉길은 대학가 근처에 지하 연습실을 대여했다.


밴드 멤버들은 악기를 잡으면 즉흥연주부터 시작한다. 봉길의 리듬에 맞추어 홍태, 정완, 은호 순으로 제 악기를 얹은 후 십여 분 동안 자유롭게 연주한다.

그 후에는 각 멤버가 선정해온 노래를 연주해본다. 노래를 선정한 사람이 다른 멤버들에게 자신이 뽑아온 곡의 악보를 나누어주고, 봉길의 주도 하에 연주하고 합을 맞추며 멤버들끼리 의견을 교환해가며 편곡을 수정한다.


연주 연습은 대부분 앰프와 이펙터를 모두 끈 채 이루어진다. 매 연주마다 공연하듯이 앰프를 켜면 귀도 아프거니와 각자의 실력이나 악기의 조화 등을 알아보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효과가 들어간 연주는 편곡이 어느 정도 완성된 후부터 시작한다.


정완과 은호는 지난주에 작곡한 노래를 내놓았고, 세 곡 중 둘은 벌써 편곡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은호가 오늘 또 곡을 가져왔다.


“넌 무슨 노래를 일주일에 하나씩 만들어? 공대 공부 안 힘드냐?”

“활동은 안 해도 작곡은 꾸준히 했죠. 전에 만들어놓은 거 조금 바꾼 겁니다. 그리고 지금 방학이잖아요.”

“미란이 부를 노래도 만들지.”

“여러 개 있어요.”


봉길의 말에 은호가 생긋 웃자 홍태가 말했다.


“하더라도 공부엔 지장 안 가게 해.”

“예, 형.”

“꼰대 소리라고 대충 듣지 마라. 얘랑 나 힘들었다.”

“그래. 그건 형 말이 맞아.”


홍태와 봉길은 음악을 그만둔 후 몸으로 생계를 연명해왔다. 그래서 두 사람은 대학 졸업반에 들어가는 은호가 걱정되었다. 출중한 재능에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또 음악에 깊이 빠져 공부를 등한시하다 자신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은호 역시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좌절한 후 늦은 재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기에 형들의 그 마음을 알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조언은 잔소리일 뿐이다.


한동안 연주하다 쉬는 시간.

세 사람이 대화를 마치자 정완은 스마트폰을 얼굴에 대고 멜로디를 흥얼거리다 말했다.


“이은호, 나 좀 도와줘라.”

“뭘요?”

“내 연주에 멜로디 좀 깔아봐.”


정완이 처음 듣는 곡조를 연주하자 은호가 잠시 듣다가 피아노 배경음을 깔았다.

발라드 곡조였기에 봉길은 템포에 맞추어 하이햇만 툭툭 밟았고, 홍태는 베이스기타로 화음을 맞추었다.


간단한 합주가 끝난 후 정완이 홍태와 봉길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요.”

“우리 노래는 아닌가보네? 좋긴 한데 네 발라드는 너무 짠해.”

“홍설하 배우님이 저한테 곡 부탁했습니다. 드라마 OST 직접 부르신대요.”

“아. 너 홍설하랑 원래 아는 사이랬지? 친한 형님 전부인이랬나?”

“녹음한 거 틀어봐.”


홍태의 말에 정완은 조금 전 합주를 재생했다.

재생이 끝나자 홍태가 봉길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거 좀 잡아놓을까?”

“그러죠 뭐.”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어요. 이건 제 일이니까 제가···.”


정완이 고개를 저으며 말렸지만 홍태는 그럴 것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뮤컬트는 친척이라고 보자.”

“예. 해봐요. 노래 괜찮은데요?”

“너무 좋음 우리 걸로 하면 되죠.”

“형, 그건 좀.”


이렇게 하여 정완이 만든 설하의 노래가 GF 밴드에 의해 편곡되었고, 특히 은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이 발라드 곡에 여러 악기를 넣었다.

홍태는 정완으로부터 곡의 배경 이야기를 들은 후 대략적인 가사를 붙여 가이드 녹음까지 해주었다.


곡만 있으면 편곡은 어렵지 않은 실력자들은 이 모든 과정을 한 시간 만에 끝냈다.

정완은 완성된 가이드 곡을 듣고 입을 떡 벌렸다.


“저 혼자 했으면 이렇게 빨리 못합니다.”

“형이랑 은호는 홍설하한테 밥 한 번 세게 얻어먹어야겠는데요?”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배우님한테 얘기할게요.”

“바쁜 사람한테 밥은 됐고, 뮤지컬 티켓이나 주면 좋겠다. 윤희 씨 뮤지컬 보고 싶대. 한 번도 못 봤다고.”


홍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연인 이야기를 살짝 꺼냈다.

봉길은 문득 시계를 보았다. 자정이 지났다.


“다 됐네. 나가자.”

“어디요?”

“형이랑 나랑 마지막 알바비 받았어. 치맥 먹자.”

“와아! 소맥 마셔도 되죠?”

“미란이한테 연락은 하고 마셔.”

“형은 형수님한테 전화 안 해요?”

“현민이 깨니까 하지 말래.”

“나 같아도 귀찮지.”


홍태와 은호는 자기 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완은 서희에게 전화하려다 멈추고 통화할 수 있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그의 전화에 곧바로 ‘우리 서희’가 떴다.


“응. 서희야.”

[저예요. 그냥 전화해도 되는데.]

“너 지금 순정남녀 라디오 듣고 있을 것 같아서.”

[괜찮아요. 미란이 전화 와서 연습 끝난 줄 알았어요. 얘 노래 조금 전에 나왔어요. 아까 예능프로에도 나왔고요.]

“그랬겠지.”

[시청자 게시판이랑 라디오 메신저에서도 반응 좋아요. 내일 음원순위도 확인할게요.]

“그건 미란이보고 하라고 하고 넌 나랑 놀아.”

[알았어요. 근데 연습이 좀 늦게 끝났네요?]

“조금 오래 했어. 어쩌다보니까 홍 배우님 노래도 작업했거든.”

[그걸 거기서 했어요?]

“응. 형들이 곡 듣더니 해보자고 해서.”

[잘됐네요.]

“이제 한잔하려고. 형들이 알바비 받았다고 치킨 쏜대.”

[헐. 맛있겠다.]


전화 저편에서 서희가 웃자 정완의 얼굴에도 미소가 붙었는데, 서희의 ‘헐’을 듣고 정완의 눈이 빛났다.


“지금 숙소지? 누구랑 있어?”

[은별이랑 미란이요.]

“내가 치킨 시켜줄 테니까 거기서 같이 먹을래?”

[어? 네!]

“전화 끊고 주문할게. 그리고 나, 술 적당히 먹을 테니까 걱정 마.”

[네. 근데 이따 또 연습실에서 자요?]

“아마 그러겠지? 이 사람들은 취하면 또 악기 잡고 노니까.”

[거기 진짜 안 불편해요? 추울 텐데.]

“바닥 따뜻해서 괜찮아.”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아무 때고 전화해요. 제가 갈게요.]

“너 맥주 안 마실 거야?”

[···.]

“내 걱정 말고 맛있게 먹고 놀아. 애들이랑 얘기 많이 하고.”


전화를 끊은 정완은 스마트폰으로 치킨을 주문하며 빙긋 웃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같은 음식을 먹고 즐거워할 수 있는 현실이 문득 좋았다.



***



“뭐?”

“새해 되자마자 바뀌었나 봐요.”

“어···.”

“처음엔 아팠는데 하룻밤 지나고 나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고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데 뭣 때문에 그래왔나 싶기도 하고.”


은별은 서희의 놀란 얼굴을 외면하며 식은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지금까지 혼전순결을 고수해 왔는데, 새해 첫날 자신 스스로 그 신념을 버리고 민재와 관계를 가졌다고 서희에게 이야기했다. 첫 관계 후 통증이 있어 다음 날 오지 못했던 것이다.

은별은 그 신념을 가진 계기가 딱히 없었던 것처럼, 신념을 접은 계기 역시 딱히 없다고 말했다.


“전에 이 문제 때문에 싸운 적은 있는데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민재 씨 잡으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구나.”

“해 바뀌니까 그냥 이게 뭐냐 싶더라고요. 그 사람이 원하는데 연인이 돼가지고 못할 일도 아니고.”

“너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근데 언니, 저 이상하게 보는 건 아니죠?”

“어?”

“언니는 제가 그런 신념 가졌다고 대단하다고 했잖아요.”

“신념이야 달라질 수도 있지. 이상할 거 없어.”


서희는 편안한 얼굴로 대답하며 은별을 격려하였지만, 그 말을 들은 후 이따금 이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고민할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생각났다.


“요새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생방송 때문에 그래?”

“···.”

“나한테 얘기하긴 어려운 건가보구나.”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완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해도 될 얘기였으면 진작 했을 것이다.


“행여나 내가 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얘기하고 싶은데 내가 어떻게 나올까, 그런 거면 그냥 얘기해줘.”

“네. 있으면 아주 혼쭐을 낼 텐데 안타깝게도 없네요.”

“푸후후.”


자정이 지난 늦은 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하루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있었다.


이렇게 있을 때면 깊은 스킨십을 할만도 하겠지만, 정완은 이 순간이 제일 조심스럽다고 했다.

서희는 그런 그에게서 편안함을 느끼며 푹 쉬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남자 같았으면 했어도 백 번을 했을 타이밍에 서른씩이나 먹은 남자가 첫사랑과 연애하는 고등학생처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특히 은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 더 그렇게 됐다.

다만 지금 곧바로 물어보긴 뭐한 생각에 그녀는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도 카페 손님이 <돌아선 길 위에서> 듣고 싶다던데. 노래가 담백해서 자꾸 생각난대요.”

“단골손님인가 보네.”

“저희 노래할 때마다 오는 커플이 있어요. 그 노래 음원 낼 생각 없어요?”

“안 그래도 은호가 밴드 앨범에 그 노래 넣자더라.”

“어떡할 생각이에요?”

“넣어야지 뭐. PD가 말하는데 기타리스트 쪼가리가 뭐라고 하겠어.”

“풋! 그럼 다음에 카페 가서 물어보면 얘기해요?”

“응.”


정완은 작곡가로 오래 살고 싶으면 프로듀싱을 꼭 해봐야 한다며 은호에게 GF 밴드의 프로듀서를 맡겼다.

물론 서희는 그가 그것까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대화가 한참 끊어졌다.

서희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저랑, 왜 안 해요?”


서희는 말을 꺼내놓고 정완이 ‘뭘?’ 혹은 ‘너랑 왜 해야 하는데?’라고 되묻지 않을까하여 조마조마해졌다.

그런데 정완은 서희의 이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말 못하는 것이 뭔지 짐작했다. 그래서 그는 되묻지 않고 답을 내놓았다.


“솔직히 하고 싶단 생각은 많이 해. 난 지금도 하고 싶다, 그 생각 중이었으니까.”

“네?”

“무슨 거창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하고 난 뒤에 어떨지 몰라서 그래.”

“하고 난 뒤요?”

“내가 나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산책이고 데이트고 다 귀찮고 잠이나 자자고 조르고, 네가 힘들어서 오늘은 못하겠다고 하면 내가 막 삐치고 그럴까봐.”

“그것도 제가 실망할까봐 그런 거예요?”

“그렇겠지. 난 네가 실망 안 하는 게 제일 중요해. 그래서 아직은 이게 우리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고 생각해. 내가 마음가짐을 잘 유지하면 될 일이니까.”

“그럼 그건 언제쯤 우리 문제가 될까요?”

“으음. 한 1분쯤 뒤에? ···아얏!”

“그 뒤가 어떻든 사리 나올 정도로 참을 필욘 없어요.”


서희는 정완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픽 웃었다. 정완다운 대답이었고 자신의 고민과 많이 비슷했다.

문득 ‘그 인간은 시도 때도 없이 내가 예쁘대’라며 툴툴거리던 아리가 떠오른 한편, 이 남자가 이렇게 말해놨으니 관계를 갖고 난 후에도 시도 때도 없이 하자고는 안하겠네, 싶은 생각도 들었다.


대화가 또 끊어졌다.

정완은 서희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레 말했다.


“서희야.”

“네.”

“사랑해.”

“···!”


서희가 눈을 크게 떴다가 질끈 감고 정완의 품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마주잡은 두 손이 깍지 끼워졌다.


“천천히 깊어지자고 했어도 이 마음은 빨리 말하고 싶었는데.”

“···.”

“꼭 해야지 해놓고 안 나와서 답답했어. 민망한 게 뭐라고···. 전에 네가 나한테 이랬나.”

“이제 제 마음 좀 알겠어요?”


정완은 서희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음은 오래됐는데 이제야 말하네. 너무 늦어 미안해.”

“아뇨. 저도 아직 말 못했잖아요.”

“그렇지.”


정완은 한참 뭔가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우리 첫날에 나, 나타샤 말고 다른 꿈도 꿨어.”

“어떤 꿈이요?”

“꿈에서 네가 나한테 뽀뽀하더니 사랑한다고 말하더라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했어.”


서희의 눈이 커졌다.

곤히 잠든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나왔던 말을 설마 들었단 말인가!


“그래서 계속 마음에 걸렸어. 내가 너보다 먼저 말하겠다고 해놓고 이 중요한 말을 왜 못하나 해서. 그렇다고 대충 하고 싶진 않았어.”

“···.”

“어쨌든 다행이다. 내가 먼저 얘기해서.”

“네. 저도 조만간 얘기할 거니까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두세요. 반응 이상하면 혼낼 거예요.”

“응.”

“근데 PD님은 어떨 땐 심심한 것 같은데 어떨 땐 되게 귀여워요.”

“언제 귀여운데? ···아야.”

“풋! 지금요.”


서희는 정완의 어깨를 가볍게 깨문 후 이불로 제 얼굴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아마 정완은 첫날의 사랑한다는 말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정말로 꿈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주절주절 말하지 않을 테니까.


작가의말

죄송합니다만 휴재하겠습니다.

1년 중 가장 정신없는 시기에 돌입합니다. ㅠ

12월 21일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때까지 몸조심 코로나조심 하시길 바라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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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8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8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8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7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70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8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7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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