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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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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64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7.1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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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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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34쪽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DUMMY

서희는 뮤컬트 엔터테인먼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도 한참 후에야 내렸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사옥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다.


[난 ‘안녕히 주무세요’는 좀 그래. 내가 너무 늙은 것 같아서.]

“네? 네.”

[연습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쉬어가면서 해.]

“알았어요. 공연 끝나고 전화할게요.”

[응. 조심하고.]

“네. 잘 자요.”


다시 만난 후 정완과의 첫 통화는 아주 어색했다.

서희가 눈을 뜬 후 지금까지 메시지는 여러 번 주고받았고 방금 끊은 통화는 두 번째였다. 그래도 두 번째가 조금 덜 어색했다고 생각했다.


“풋. 귀여우셔. 어? 아니, 귀여워.”


서희 역시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말하면서 전에 몰랐던 이상함을 느꼈다.

나이 차이가 두 살에 불과한데 너무 극존칭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간 두 사람의 관계가 동등하다고 볼 수 없었던 데다, 서희는 정완에 대해 좋아하는 마음뿐 아니라 존경심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 만났던 한 살 연하 남자친구가 이따금 ‘너’라고 부르다가 의견이 충돌하자 자신을 향해 욕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후 그는 실언이었다며 여러 번 사과했지만, 그 한 번의 일로 인해 좋아하던 사람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질 수도 있음을 서희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도 너무 편한 말투로 정완을 대하지는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존경심을 없애고 싶지 않아서였다.


‘상대에 대한 말에는 내 마음이 드러나게 돼 있어. 그래서 내가 듣기 싫은 말은 나도 하면 안 돼. 말투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겠지만, 내가 먼저 그 사람한테 예의를 갖춰야 다른 사람들도 그 사람한테 예의 있게 대할 테니까.’


메신저에 나타난 정완의 프로필에는 자신이 보낸 캘리그라피 편지와 함께 ‘현명한 사람과 함께하여 좋다.’는 문장이 있었고, 새벽에 자신에게 보냈던 메시지에도 ‘현명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서희는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자신이 정완에 대한 존경심을 거두고 싶지 않은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씌워진 현명함이라는 콩깍지 역시 벗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현명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싶었다.


“언니!”

“응. ···어?”


서희가 휴게실에 들어오자 은별이 달려와 그녀를 얼싸안았다.


“아리 언니한테 들었어요. PD님 찾았다면서요.”

“응.”

“고마워요.”

“어? 뭐가?”

“언니라서요. 다른 여자가 아니라 언니라서.”

“어···.”

“앉아요. 커피 제가 할게요.”


은별은 서희를 소파에 앉히고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이제 얘기할 수 있겠네요.”

“뭘?”

“우리 트레이닝 때 PD님이 웃는 이유가 딱 두 가지뿐이더라고요.”

“뭔데?”

“언니가 웃었든가, 언니가 웃겼든가.”


서희의 눈이 커졌다.


“난 정말로 그분한테 은혜 다 갚았어요. 그죠?”

“아.”

“전여친 직감이라 언니한테 말 못했어요. 말해봤자 언니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

“미안해하진 않을게요.”


은별은 트레이닝 때도 서희를 정완 옆에 밀어놓곤 했고, 퇴근할 때 제 집까지 거리가 더 먼데도 자신이 먼저 내렸으며, 자신은 정완에게 받은 은혜를 서희를 줌으로써 땡 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에 정완을 찾아내라고 서희를 가장 많이 부추겼던 사람 역시 은별이었다.


남들 마음은 잘 알면서 상대 마음은 모른다던 세은의 말이 생각났다.

결국 정완은 전부터 서희에게 마음이 있었고 은별은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세은의 말대로라면 은별의 마음에서 정완은 남이라는 뜻일까.


은별은 모든 감정을 정리했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지만, 서희는 한때 깊이 사랑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둔 모습을 보는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하니 미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은별에게 커피를 받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아니요. 제가 고맙죠. PD님이 진짜 좋은 여자 만나길 바랐으니까요.”

“너는 잘 지냈어?”

“네. 어제 민재 씨랑 점심 먹었어요. 그 사람은 매일 출근이라 우리보다 더 바빠요.”

“그렇구나.”


그걸 물은 건 아니었지만 은별이 자신의 걱정을 덜어주려고 애쓰는 게 보였기에 서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은별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 말했다.


“근데 언니 지금 되게 좋아 보여요.”

“어?”

“언니 만난 뒤로 지금 같은 얼굴은 처음이에요.”

“와아. 진짜 그러네?”


출입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리가 환한 미소로 서희의 옆에 앉았다.


“야밤에 속초에서 서울까지 차로 온 게 다라더니 뭐야? 강서희 이런 얼굴 처음인데?”

“어···.”

“저는 숙소에 있을게요. 언니 솔로 빼고 레퍼토리 다 정했으니까, 아리 언니랑 천천히 얘기하고 와요.”


아리의 말에 서희가 우물쭈물했고, 은별은 새로 뽑은 커피를 아리에게 쥐여 주고 나갔다.


“며칠 전까지 죽을상이던 애가 안면 싹 바꿔가지고 나타날 줄.”

“내가 그랬어?”

“그래! 하여튼 잘됐어. 은별이도 그렇고, 누가 한 팀 아니랄까봐 썸도 같이 타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맞거든? 아무 신호도 없었는데 강서희가 이렇게 행복해졌다는 게 말이 돼?”

“아, 아니. 천천히 얘기하자고, 시간 많다고 그랬으니까 아직···.”

“와아. 얘 진짜 뭐야?”


서희가 발개진 얼굴로 한 마디 할 때마다 웃자 아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 이래가지고 이따 공연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어?”

“너희 레퍼토리 죄다 슬픈 노래잖아.”

“어어.”

“너 지난주에 연인들 잔뜩 있는 데서 <화장을 고치고>(왁스)랑 <마지막 사랑>(에코) 불러서 테이블 엎어놨다며?”

“···.”

“큰일 났네. 행복하게 밤새워놓고 <망한 하루>를 어떻게 부른대?”

“왁스나 에코 노래 중에 좋은 거 많잖아.”

“아아. 너 오늘 <오빠>(왁스)나 <행복한 나를>(에코) 부르려고?”

“<오빠>는 좀 그렇고 <머니>(왁스)가 나을 것 같은데.”

“그래! 그러니까 <행복한 나를>은 꼭 부르겠다는 거네. 어?”


서희가 아리를 곁눈질하며 고개를 끄덕일 듯 말 듯했다.

아리는 서희의 표정이 당최 적응되지 않았다.


“아유! 애가 아주 좋아 죽는구나, 좋아 죽어.”

“···.”

“와아. 아주버님은 그 짧은 시간에 운전하시면서 대체 뭘 어떻게 하신 거야.”


아주버님이라는 단어에 서희가 또 웃자 아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우진이 피곤한 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그거 내가 알려줄까?”

“어? 왔어?”

“저 커피 괜찮습니다. 조금 전에 약 먹어서요.”

“네.”


서희는 커피를 내리러 가려다 말고 우진의 반대편에 앉았다.

우진이 아리에게 말했다.


“형이 방금 전화했어.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난 왜?”

“부탁 잘 들어줬다고.”

“에이, 뭘.”

“다음 주에 같이 보자더라. 너 뭐 좋아하냐고 나한테 묻더라고.”

“아, 그래? 그럼 이참에 아주버님한테 엄청 비싼 거 얻어먹어야겠다.”

“야!”


서희가 도끼눈을 치켜뜨고 아리를 향해 소리쳤다.

아리는 거기 시선도 두지 않고 우진의 손을 잡았다.


“아. 성량 커진 거 봐.”

“트레이닝 잘 받았구나.”

“근데 아주버님이 뭐라셨어?”

“꿈인 것 같대. 정신이 나갔다나?”

“···!”


우진의 말에 서희는 하마터면 제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속초 갈 때 전부 연락 끊으면서도 서희 씨는 끝까지 고민했다고 하더라.”

“전부터 마음에 있으셨나보네. 근데 이해는 가.”

“음악 없는 데서 쉬면서 마음 정리하고 싶었겠지. 근데 이젠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우진의 말에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형도 마음 많이 추스른 것 같고, 이제 잠수 말고 딴 거 탔으니 됐지.”

“네? 그런 거 아니에요.”


서희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얼버무렸지만 우진은 기어이 한 마디 더 했다.


“아닌 게 아니에요. 형이 나보고 부럽다더라고요.”

“왜?”

“넌 마음만 먹으면 서희 씨 아무 때나 볼 수 있지 않느냐고.”

“···!”


서희가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리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다 우진에게 말했다.


“와아. 아주버님이 너한테 그런 얘기도 해?”

“어.”

“이 사람들 아무래도 전생에 형제 맞나봐. 똑같네, 똑같아.”

“내가 뭐.”

“네가 뭐? 내가 여기서 얘기할까? 다 말해?”


아리의 말에 우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와아. 이게 당사자일 때는 몰랐는데 제삼자 입장이 돼보니까 약간 짜증나네.”

“그래도 난 좋은데. 다 잘됐잖아.”

“나도 좋거든? 근데 아주버님은 그런 캐릭터 아닌 줄 알았어. 미투리 밴드 때 영상 보니까 기타로 세상을 때려 부술 것 같이 포스가 있던데, 그런 분이 강서희 만나더니 순둥순둥에 달콤달콤.”

“로커들이 세다는 건 편견이라니까. 후후.”


아리는 화제를 바꾸었다.


“근데 너 지금 괜찮아? 피곤한 것 같아.”

“약 먹었더니 조금 졸려서 쉬려고. 형이 말한 대로 현수한테 해놨거든.”

“멜로디 살짝 바꿔서 다섯 번씩 부르라고?”

“다섯 번씩 했는데 현수가 재미있다고 더해보겠대. 그놈 지금 자기 노래 찾아간다고 되게 좋아해.”

“아주버님은 프로듀서랑 보컬트레이너를 다 하셨으니까 그런 거까지 생각하셨구나.”


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서희가 말했다.


“그때 우진 씨랑 전화 끊고 PD님이 그랬어요. 우진 씨가 그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아무래도 현수 인생이 걸려있으니 그렇게 되네요. 그렇게 시켜놓고 들어보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 같고···. 형이 장담까지 했으니 뭐가 나와도 나오겠죠.”

“PD님은 그럴 때일수록 더 과감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봐요. 우진 씨보고 씨팝쓰리 때는 자기 여자 인생 걸고 과감하게 쭉쭉 가더니, 결혼하고 나니까 천재답지 않게 너무 신중해졌다고 그랬어요.”

“어? 그러네. 아아. 그러셨구나?”


아리가 눈을 묘하게 빛내며 말했다.

말끝이 올라가는 순간 주위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러니까 아주버님 말씀은, 얘는 내 인생 걸려있을 땐 과감하고, 현수 인생 걸려있으면 신중하다 이거네?”

“어?”


서희는 지금 제가 잘못 말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 그건 당연한 거잖아. 네가 나고 내가 넌데.”

“넌 네가 나이기 전에도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오글거리는 말로 때우기엔 아주버님 말씀이 너무 맞는 말 같지 않아?”

“어어. 저는 공연 준비하러 갈게요. 아리 이따 봐.”


서희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아리 부부를 두고 슬금슬금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문득 부부의 결혼식 날 은별이 말했던 ‘흥정은 말리고 싸움은 붙이라는데 결혼 깨는 게 대순가요 뭐.’가 생각났다.

격언과 반대로 가는 세상이 이런 거지 싶었다.


서희는 숙소로 도망치는 와중에도 배시시한 미소를 눈가에 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동생이 부럽다는 남자가 또 생각났다.


‘잘 자고 있죠? 일어나면 메시지 꼭 보내주세요. 이따 통화해요.’


또 생각난 게 아니라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



12월 8일 토요일.

서희는 눈을 뜨자마자 환한 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미소 지었다.

요새는 아침에 눈 뜰 때도 정신이 맑고 개운하여 좋았다.


[일어나면 전화 줘. 안 그럼 1시에 깨울 거야.]

“풋!”


서희는 정완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더 환히 웃었다.

이런 메시지가 없었더라도 전화할 텐데, 이 남자는 제가 일어날 때쯤이면 꼭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예전에 은별은 정완에 대해 ‘연락이 안 될 것 같으면 뭣 때문에 안 될 거라고 다 말하고, 하여튼 저 불안하게 안 하려고 되게 애썼어요.’라고 했다.

거기다 정완은 그제 서희에게 실망할 것 같은 행동은 안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그럴 것 같으면 실망하기 전에 꾸짖어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은별이랑 연결은 그만해야겠어. 그리고 이제 나한테 조금 더 편해져도 되는데.”


서희는 심호흡한 후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다솜아지?]

“네? 어, 아니, 어, 아니가 아니고···.”


정완이 서희의 전화 말투를 흉내 내며 애칭을 부르자 서희가 당황하여 얼굴이 발개졌다. 그에게는 제 잠을 깨게 만드는 기술 같은 게 있었다.

한편 그는 ‘아지’에 접미사뿐 아니라 ‘어린 나무줄기[兒枝]’라는 뜻도 중의적으로 포함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즉, ‘다솜아지’에는 ‘아직은 어린 애틋한 사랑’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점점 더 자라나리라는 의지까지 담겨 있었다.


[이거 좀 그래?]

“아니에요.”

[잘 잤어?]

“네.”

[내 메시지 때문에 잠 깬 건 아니고?]

“아니요. 저 정말 잘 잤어요.”

[다행이다. 오늘은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

“네. PD님도 내일 밤까지는 쉰댔죠?”

[응. 쉬려고 나와 봤더니 개울이 좋네.]

“개울이요?”


아름다운 해안과 해수호가 펼쳐진 속초에도 개울이야 있을 것이다.

서희는 문득 그 개울가를 그제처럼 그와 함께 걷고 싶어졌다. 지금 출발하면 서너 시간쯤 후에 도착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쯤이면 정완은 자야 할 시간이다. 쉬는 날이라고 잠을 안 자다가 생활리듬이 깨져 졸음운전이라도 하면 큰일 난다.

그래서 서희는 아쉬운 마음에도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산책 조금만 더하고 들어가서 잘 준비 다하고 침대에 누워서 전화해요.”

[꼭 그래야 해?]

“네?”

[네 허락도 안 받고 이러는 건 아닌 거 아는데, 하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이렇게 돼버리더라.]

“뭐가요?”

[여기 홍제천이야.]

“네에?”


홍제천은 그제 오후에 두 사람이 함께 거닐었던 서희의 집 근처 개울이다.

서희의 시선이 창밖으로 날아갔다. 멀리 보이는 주차장에 정완의 탑차 앞부분이 삐죽하니 보였다.

톤 높은 소리가 저도 모르게 쏘아졌다.


“미쳤어요?”

[···.]

“오늘은 여주랑 안성, 평택이라면서요.”

[그러게. 나 미쳤나봐.]

“네?”

[난 일 끝나고 내비에다 속초를 찍었거든. 근데 왜 여길 걷고 있는지 모르겠네.]

“···.”

[혹시 나올 수 있어?]

“하아.”

[약속도 안 하고 갑자기 이래서 불편할 건 알아. 그러니까 나 혼내줘. 일단 맛있는 것부터 먹고 힘내서. 어때?]


정완의 말에 서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조금 있으면 집에서 자야 할 사람이 여기엔 웬일이란 말인가.


만나고픈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서희는 오히려 그렇기에 정완에게 이런 행동을 바라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마음이라면 당장 오늘이 아니어도 좋고, 그가 있는 곳이라면 속초가 아니라 제주도라도 상관없다.


다시 만난 후 이 남자는 자신을 향한 마음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동들만 했고, 자신의 말이나 행동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제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먼저 하곤 했다.

메시지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면 메시지가 오고, 속초 가서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니 그가 서울로 와서 자신을 기다리는 지금도 그랬다.


여러 생각이 후다닥 지나가던 도중에 문득 서희의 눈이 빛났다.


“알았어요. 밥은 제가 살 테니까, PD님은 그거 얻어먹고 더 미안한 마음으로 저한테 아주 세게 혼나세요. 오늘은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하는 거예요.”

[그럴게. 천천히 나와.]

“저 진짜 천천히 나가요. 저녁때 나가도 돼요?”

[그래. 기다릴게.]


서희는 전화를 끊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통화하면서 정완을 혼낼 방법을 정해두었다.

그가 예전에 이 집의 현관 앞에서 했던 말이 떠올라 있었다.


‘제일 하고 싶은 건, 한 일주일쯤 조용하고 깨끗하고 햇빛 잘 들어오는 방에서 아무 걱정 없이 쉬는 거야. 끼니때 되면 어디서 밥이 뚝 떨어지고, 책을 읽든 잠을 자든 누가 뭐라고 안 하는 데서.’

‘엄마한테 어리광도 부리고, 생떼부리다 아빠한테 엉덩이도 맞아보고, 두 분 사이에 끼어서 하룻밤만 잤으면 소원이 없겠다.’


“여기서 혼나세요. 부모님은 없지만 나한테 어리광 부리고 엉덩이 몇 대 맞아요. 그러다 내가 해준 밥 먹고 책 읽다 자요. 하루라도 그렇게 푹 쉬어요.”


어쨌든 서희는 정완의 여러 행동에서 두 가지만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 ‘죽집’이라고 했던 그의 집중력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 또 하나는 그가 자신과의 관계를 동등하게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돼요. 저는 PD님이랑 동등한 입장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도 빛의 속도로 튀어나갈 거거든요? ···근데 뭐 입지? ···아 진짜!”


마음은 빛의 속도인데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이 남자는 빛이고 튀어나가려는 의지도 빛인데 몸은 굼벵이.

서희는 엉뚱한 생각을 주워섬기며 샤워를 재빨리 마치고 나왔다.


샤워하면서 생각해둔 옷이 몇 개 있어 입어보려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서희의 눈이 커졌다.


[우진이가 쓰러져서 병원에 있대. 같이 가자. 빨리 나와 줘.]


그녀는 알았다고 답장을 보낸 후 부리나케 외출복을 입으며 화장대에 앉았다.





뮤컬트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할 때마다 반드시 지나는 길에 위치한 종합병원.

서희는 여기에 자신이 올 줄은 몰랐다고 말하며 차를 꺾었다.


응급실로 뛰어 들어간 정완은 좌우를 휙휙 둘러보다 한곳을 보고 굳어버렸다.

아리가 누군가와 통화하다 정완을 알아보고 몸을 일으켜 그에게 인사했다.


우진은 해쓱한 얼굴에 마스크를 덮어쓰고 수액을 맞으며 자고 있었다.

정완은 원주의 병원에서 수액을 맞던 제 모습을 그때 저를 찾던 사람에게서 보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가 통화를 마치자 서희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너 괜찮아?”

“···.”

“앉으세요.”


정완은 자신에게 자리를 내주려는 아리를 앉히며 말했다.


“제수씨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에요.”

“얘 많이 안 좋습니까?”

“하아아.”


아리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우진은 이번 주 들어 약을 자주 먹었다. 그제까지는 종합감기약을 먹다가 어제는 해열제와 두통약까지 먹었고, 평소와 달리 10시도 안 된 시각에 퇴근하여 씻지도 못하고 잠들어서 아리가 그의 손발을 닦아주었다.


“오늘은 저희 스케줄이 1시부터 있었어요. 그래서 아침에 깨우려는데 얘 몸이 불덩이가 돼 있더라고요. 바로 119 불러서 왔어요.”

“후우.”

“A형 독감이래요. 수액 다 맞고 집에서 사흘간 격리하고 약 먹으면서 쉬어야 한다고.”

“제수씨가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자가격리면 제수씨도 불편하고 챙겨야 할 것도 많을 텐데요.”

“그런 건 괜찮아요. 근데 제가 와이프가 돼가지고 얘 예방접종 하나 못 해서 이렇게 만들었네요. 저 혼자 주사 맞아놓고 나중에 같이 병원 가자고 해놓고서 스케줄이니 멘토링이니···.”

“이 녀석도 간다고 하다가 못 갔겠죠.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이 많았을 테니까요.”

“하아.”

“제수씨.”


정완이 아리를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이자 아리뿐 아니라 서희도 놀랐다.


“고맙습니다.”

“네?”

“저한테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아니에요.”

“좋은 일은 괜찮은데, 혹시 다음에도 안 좋은 일 있으면 저한테 꼭 연락 주세요.”

“네.”

“그리고 이건 이놈이 바보짓을 한 거지 제수씨 잘못 아닙니다. 자책하지 마세요.”

“네, 아주버님. 감사해요.”

“으으. ···어?”


우진이 눈을 뜨자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정완은 자신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키려는 우진의 어깨를 눌렀다.


“형?”

“그래. 나 왔어.”

“형 지금 속초에 있을 시간이잖아.”

“나중에 서희한테 고맙다고 해.”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다 아리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왜?”

“이따 우리 스케줄···.”

“못한다고 얘기했어.”

“라디오는?”

“내가 다 처리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참에 쉬어.”

“1시 건이야 한미연사가 갔다 쳐도, 그 뒤로는 걔들도 스케줄 전부 풀이잖아.”

“신경 쓰지 마, 제발. 하아.”


아리는 뭐라고 쏘아붙일 힘도 없어 그의 무릎을 잡고 넋두리하듯 한숨을 쉬었다.

정완이 우진에게 말했다.


“괜찮냐?”

“어···.”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겠어?”

“어? 응.”


정완은 우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에게 말했다.


“제수씨, 제가 이 녀석이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는데, 죄송하지만 5분 정도만 자리 좀.”

“네.”

“서희가 제수씨한테 음료수라도 먹이고.”

“알았어요.”


아리와 서희가 나가자 정완은 우진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우진이 말했다.


“그러다 옮아.”

“웃기지 마. 난 접종 맞았으니까···. 뜨겁네.”

“어.”


정완은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우진을 한참 내려다보다 말했다.


“우리 이게 첫 만남인 건 아냐?”

“응.”

“다음 주에 밥 먹쟀더니 죽 먹게 생겼네.”

“미안해.”

“이게 나한테 미안해할 일이야? 넌 제수씨랑 네 몸한테나 미안하다고 해.”

“···.”

“잠깐만.”


정완은 씁쓸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꺼내 서희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말했다.


“우진아.”

“어.”

“환자한테 이런 소리하는 건 아니다만, 제수씨 말 잘 들어.”

“어.”

“일 열심히 하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냐. 근데, 막말로 전현수 이번 앨범 쫄딱 망했다 쳐. 그럼 걔가 죽냐? 뮤컬트 엔터가 앨범 하나 때문에 휘청거릴 회사야?”

“···.”

“이러다 네가 죽을 수도 있단 말이다. 너 정도면 그렇게 죽을 것처럼 안 해도 돼. 우선순위 좀 생각해라. 이게 뭐야.”

“후우. 알았어.”

“그리고, 지난번 네 편지 내용 아직 유효하냐?”

“어?”

“한성혁 선배 자리 아직 비어 있냐고.”


난데없는 정완의 말에 우진이 커진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또 제지당했다.

정완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서희가 아리와 함께 들어오다 이 말을 듣고 멈추었다.


“형···.”

“아까 서희 만나려고 기다리다 제수씨한테 연락 받았는데 정말 고마웠어. 동생이 아프다는데 고맙단 생각부터 하고, 나도 좀 그렇지?”

“형 음악 하는 거 싫어하잖아.”

“그래. 솔직히 싫어. 그러니까 서희도 나한테 그 얘긴 안 했고 너나 제수씨도 말 못했겠지. 근데 음악은 변한 게 없더라.”

“어?”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은 잘못이 없었어. 음악을 대하는 내 생각이 잘못됐던 거지.”


서희가 정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정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고 2때 도내 콩쿠르 앞두고 아빠한테 엄마가 왜 식당일을 하게 되셨는지 들었어. 콩쿠르에서 쇼팽 <겨울바람> 연주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어서 당일날 <에튀드 Op 10-3>로 곡 바꿔 쳐버렸는데 우승이라데? 아빠랑 싸우고 다음 날부터 피아노 때려치우고 일렉기타 쳤어. 세상이 지랄같이 보였으니까.”

“···.”

“근데 아빠는 내가 기타 잘 친다고 좋아하셨어. 어차피 피아니스트 해봐야 외국물 먹은 애들한테 밀릴 게 뻔하고 그만큼 지원도 못해주는데, 그럴 거면 아예 밴드 쪽으로 나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난 그게 아니었거든. 여섯 살짜리 애가 피아니스트가 뭔지 어떻게 알아. 근데 엄마는 겨우 아들놈 장난감 때문에 돌아가셨잖아.”

“후우.”

“그래서 이 빌어먹을 음악 내가 한 번 이겨보겠다고, 록으로 세상을 찢어버리겠다고 생각했지.”

“형은 찢었잖아. 다른 밴드에서 제대로 했으면 더 그랬을 거고.”

“미투리 밴드 하면서 여기 치이고 저기 밟히다 아빠 보내고 나니까 다 의미 없더라. 밴드 그만두고 학원 망하고 나니까 목표도 없고 힘도 없어 그만뒀지. 근데 여우비 프로듀싱하고 속초 가보니까 자꾸 욕심이 나더라고.”

“음악 욕심?”

“아니. 사람 욕심.”

“아.”


아리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조금 전 정완은 서희에게 ‘순정남녀 스케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너만 괜찮으면 제수씨한테 물어봐.’라고 메시지를 보냈고 서희는 좋다고 답장한 후 아리에게 바로 말했다.

따라서 그가 욕심난다는 사람은 이 자리의 셋이었고, 정완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음악을 하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밴드 때부터 사람 욕심은 있었어. 실력 있다 싶은 사람은 무조건 번호부터 땄으니까. 그래서 나한테 번호 안 따인 사람들이 나 엄청 씹고 다녔지.”

“자기들이 잘하면 되잖아.”

“아니더라. 실력이 좋으면 박수는 받겠지만 듣는 사람 감동시키는 건 다르니까.”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건 쓸데없는 짓, 아니 잘못된 짓이었지. 근데 속초 가서 놓는 걸 배웠더니 편하더라고.”

“놓는 거?”

“응. 음악은 늘 똑같았어. 기쁘고 슬프고 웃음 짓고 아프고, 변한 건 늘 나뿐이었어. 음악은 내가 하겠다고 하면 받아줬고 싫다고 하면 가만히 있었지. 팽개치거나 버리지 말고 편안히 놓아두면 되는 거였어.”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은 그 진리를 일깨워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달 새벽에 통인시장에서 건어물 나르다가 민홍태 선배랑 여봉길 선배 봤어. 거기서 일하시더라. 여봉길 선배는 남소향 선배랑 결혼해서 아들까지 낳았더만.”

“그분들이 통인시장에서 일한다고?”

“내 거래처 근처 가게에서 일하셔. 선배들이 나보고 같이 밴드나 하재. 직장일이랑 육아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다고, 음악이 뭣 같아도 일주일에 두 시간만 아무거나 치면 스트레스 풀리지 않겠냐고.”

“형까지 넷이?”

“응. 근데 어어,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정완은 정신을 차리고 아리에게 말했다.


“제수씨. 순정남녀 스케줄 우리가 해도 됩니까?”

“아주버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제 생각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것밖엔 없을 것 같아요. 토요일이니까 다른 아티스트들도 다 바쁠 거 아닙니까.”


아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이 말을 이었다.


“일이 어찌됐든 계약은 중요합니다. 대타 못 구하면 행사 펑크 나는데, 위약금도 위약금이지만 순정남녀 이미지 타격도 있을 거예요. 부득이한 이유라도 씹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있으니까요.”

“그렇죠. 오늘은 전부 결혼식인데, 결혼식 행사의뢰는 팬카페에서 받거든요.”

“그렇다면 더 그렇겠네요. 의뢰인들 입장에선 평생에 하루밖에 없는 날을 망치는 꼴이니까요.”

“네.”

“최측근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가서 양해를 구하고 사과하고 한 곡이라도 더 부르면 의뢰인들도 뭐라고 못할 거고 우리도 할 말이 생길 겁니다.”

“그럼 형 얼굴이 공개되는데···.”

“동생 대신 일하는데 그딴 거.”


정완은 우진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고 아리를 보았다.


“제수씨가 번거롭겠지만 오늘 행사 의뢰인들한테 메시지라도 녹음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회사랑 씨팝 제작진한테 전화부터 할게요.”

“저는 서희랑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제수씨 전화 부탁드려요. 넌 아무 걱정 말고 쉬고.”

“응.”


정완은 우진의 어깨를 두드려준 후 서희를 데리고 응급실을 나와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어디 갈 데 있어요?”

“아니. 당장 조용히 얘기할 데가 차밖에 없을 것 같아서.”

“네.”

“나 회사 그만둘게.”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이야기로 예상했던 일이었다.


“난 다른 회사 물건도 배송했는데 거기가 어제 문을 닫았어. 우리 회사 배송은 주당 이틀뿐이라 난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거든.”

“그래도 내일 밤에는 일해야 하지 않아요?”

“아니. 제수씨한테 전화 받고 사장님이랑 바로 통화했어. 동생이 아파서 내일 일 못하고 회사도 그만둬야 할 상황이 됐다고. 한울이 형님한테도 문자 보냈어···. 차는 밤에 갖다놓겠다고 했고.”

“그래요.”

“너한테 먼저 얘기하고 회사에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시간이 촉박하단 생각에 그랬어.”

“아니에요.”

“다음부터는 꼭 먼저 얘기할게.”

“괜찮아요. 잘했어요.”


서희는 무심코 답하다가 뒤늦게 놀랐다.

정완은 지금 자신을 ‘자기 일에 대해 가장 먼저 상의해야 할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했고 자신 역시 거기에 자연스럽게 답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조용한 곳에서 하려는 말이 무엇일지 궁금했고 미치도록 듣고 싶었다.


정완이 뒷자리에 타자 서희가 그의 옆에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정완이 그녀의 팔을 잡았고 서희는 그 손에 제 손을 마주잡았다.


“할 얘기 있어.”

“네.”

“이 말 못하면 오늘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일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정완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만큼 서희의 가슴이 떨려오고 있었다.


“서희야.”

“네.”

“내 마음, 느껴져?”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시작하자. ‘우리’로.”

“···!”


눈이 떨렸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혹시나 하며 조심스레 예상해보았고 며칠을 보내며 더 선명해졌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에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만나자’나 ‘사귀자’보다 지극히 정완다운 표현이 참 좋았다.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절대 안 된다.


“여우비 때도 그랬지만 혼자 있을 때 더 그렇게 됐어. 그 시간이 없었으면, 그리고 네가 오지 않았으면 난 아마 말 못했을 거야.”

“네.”

“네가 좋았어.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이 더···. 그리고 앞으로 더 좋을 거야.”

“아···.”

“오늘 얘기하려고 했는데, 근데 이게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중에 더 좋은 데서 더 잘 얘기할게.”

“잠깐. 저 잠깐만요.”


서희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에 벼락이 떨어진 순간부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눈을 마주치고 얘기해야 한다. 그래도 이 남자가 먼저 말해주었으니 이야기할 수 있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기. PD님.”

“응.”

“저 여기 지금 좋아요. 더 잘 하실 거 없어요.”

“어어.”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아···.”


가슴이 따듯해졌다.

자신이 고맙다고 말할 때 이 여자가 이랬구나, 하는 마음에 정완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서희가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PD님 여자친구 할게요.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어요, 우리.”

“고마워.”

“저 PD님한테 하고 싶은 말 못해서 많이 힘들었어요. 먼저 얘기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속초에서 네가 먼저 얘기해주었잖아. 거기 있던 것만으로.”

“네.”

“그 동안 미안했어.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아니요! 아니니까 그 말은 하지 마요.”


서희가 정완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제가 죄송하다고 할 때 PD님도 아팠잖아요.”

“응.”

“그러니까 우리 이제 그 말은 하지 말아요.”

“그래. 근데 네가 고맙다고 하니까 떨리네.”

“저도 그 말 들을 때 그랬어요.”

“고맙단 말 많이 듣고 싶어. 노력할게.”

“네. 노력해주세요. 저도 많이 노력할게요.”


이때 서희의 스마트폰이 울리며 ‘회사랑 방송국에 얘기했어. 나영이 부를게.’라는 아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완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메시지를 확인하는 서희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제 이런 얘기해도 될까?”

“무슨 얘기요?”

“내 여자친구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하마터면 뽀뽀할 뻔했어.”

“···!”


서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기껏 넘겨놓았던 단발머리가 후두둑 떨어졌다.


“동생은 독감 걸려가지고 누워 있는데 형이란 놈이 아유. 미쳤네.”

“지금 밖에 사람 많아요.”

“그러니까.”

“들어가요. 제가 얘기할 테니까 PD님은 표정 관리해요. 저야 친구 남편 아프다고 우거지상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 그냥 우진이한테 허락을 받을게. 그 녀석은 제수씨 있으니까 금방 나을 거고, 나야 어차피 결혼식 가는데 웃으면서 가는 게 낫지.”

“그래요. 솔직히 저도 지금 제 남자친구 얼굴 빨개가지고 귀여워서 깨물고 싶어요. 근데 참을게요.”

“응. 가자.”


정완이 차에서 내리자 서희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여기서 이래도 돼? 사람들은 아직 네가 여기 회사인 거 모르는데.”

“아리 친구인 건 다 아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PD님이 저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야 그런데.”

“누가 우리 이러고 있는 사진 박아서 인터넷에 대문짝만하게 뿌렸으면 좋겠네.”

“푸후. 그럼 네 인기 떨어질 텐데.”

“저 인기 없어요.”

“많잖아.”

“없어요. 있는 것도 싫고 있어도 다 없앨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가수를 해.”

“그건 같이 천천히 생각해요.”


서희의 말에 정완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다시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솔직히 전 PD님도 인기 없었으면 좋겠어요.”

“난 그런 거 없어.”

“없다고요? 전 얼굴도 모르는 동물병원 간호사 분한테 질투하기 싫은데?”

“어? 아니 그게, 아유. 정미순 여사님 정말···.”


정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말했다.


“나 그거 거절했는데.”

“네.”

“왜 거절했는지도 알아?”

“네? 아니요.”


서희의 눈이 빛났다. 그때 그게 정말 궁금했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서 안 된다고 했어. 하루 종일 그 여자만 생각나는데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겠냐고.”

“여자 누구요?”

“어? 뭐라니, 이 미실이가.”


정완에게서 문득 나이든 아주머니의 센 억양이 느껴졌다.


“누구긴 누구겠니. 너지. 강서희 너!”

“···.”

“아우! 이 아가씨 진짜 미실이었네. 확실히 알았음 그만 물어. 민망하자니.”

“풋! 네.”


서희는 얼굴이 빨개지다 말고 나이든 아주머니의 말투를 따라하는 정완을 보며 웃었다.


“근데 잠도 못 자고 행사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괜찮아. 너는?”

“저도 좋아요. 우리 잘할 수 있겠죠?”

“난 계산 안 서는 무대는 안 올라가.”

“네.”


정완의 단호한 말은 늘 믿음직스러웠지만, 음악에 대한 얘기일 때는 더 그랬다.


“잘할 수 있으니까 가자는 거야. 우리 무대니까.”

“제가 꼭 있어야 되는 무대죠?”

“응.”

“네. 좋아요.”


정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희가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저 여기선 리더 안 해도 되죠?”

“응. 이 팀은 내가 리더 할게. 대신 넌 메인보컬이랑 내 인생의 리더 해줘.”

“알았어요. 잘할게요.”


이런 말은 무슨 사전 같은 데서 골라오나. 어쩌면 이 남자가 나보다 더 시인 같아···.

서희는 정완과 눈을 마주치고 배시시 웃다가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작가의말

핵심이 많이 나온 연재분이네요.

독자분들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장면 쓰기가 이젠 정말 힘드네요. ㅠ

즐거운 일요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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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Epilogue. 이제야 불러본다 +4 21.09.08 68 5 33쪽
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8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8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6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7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39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4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70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9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9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7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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