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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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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56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8.1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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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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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22쪽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DUMMY

밤 10시.

정완과 서희가 커피를 들고 작업실에 마주앉았다.


“미란이는 후배랑 잘 만났어요?”

“응. 이은호 그놈이 아주 작심을 했더라고. 미란이 보자마자 노래부터 들려줬는데, 그건 정말 미란이 아니면 못 부르겠던데.”

“와아. 잘됐네요.”

“아무래도 걔 송년특집 노래 바꿔야겠어.”

“그 정도예요?”

“들어봐.”


은호는 미란이 나왔던 방송분을 여러 번 보며 그녀의 보컬 특성을 세세하게 분석하여 그녀에게 맞을 만한 곡을 만들었고, 예전에 만든 자작곡을 고쳐놓기도 했다.

미란은 은호가 최근에 만든 곡에 자신이 써놓았던 가사 중 하나를 글자 수만 맞춰놓고 노래했는데, 은호뿐 아니라 정완마저도 이 노래를 듣고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서희 역시 노래를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와아. 대박이네요.”

“이놈이 만든 노래가 이렇게 들린 건 나도 처음이었어. 노래 바꿔야겠다는 이유 알겠지?”

“노래가 되게 리드미컬하고 듣는데 미소가 나요. 애가 생글생글 즐거워하는 게 다 들리네요?”

“이게 만난 지 30분 만에 나온 거야.”

“우리 노래보다 더 빨랐네요. 다른 노랜 없어요?”


서희의 말에 정완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나 이거 듣고 쫓겨났어.”

“네?”

“자기들끼리 맞출 테니까 나보고 빨리 가서 너랑 놀래. PD는 이런 자리에 있어봤자 시어머니 노릇밖에 더 하겠냐고.”

“와아. 그 후배 너무하네.”

“그놈이라고 해도 돼. 너보다 어리니까···. 완성되면 보내줄 테니까 듣고 고칠 거나 얘기해주란다. 지들이 누구 때문에 만났는데.”

“그러니까요. 미란이는 뭐래요?”

“그놈이 그 말할 때 내 눈을 슬금슬금 피하던데.”

“헐!”

“그래서 알았다 그러고 그냥 나왔어.”

“진짜 소개팅이었네요. 나중에 미란이 보면 쥐어박아야겠네.”


물론 이 말은 서희의 본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란이 좋은 노래, 그리고 어쩌면 좋은 상대를 찾은 점에 기분이 좋았다.


“분위기 좋았나 봐요?”

“미란이가 은호 보자마자 인사하면서 웃으니까 그놈 얼굴 빨개져가지고 실물이 훨씬 귀엽다고 그러더라고. 푸후후.”

“광대 주름이 폭발했나보네. 미란이는 어땠어요?”

“좋게 본 것 같았어. 너희끼리 있을 땐 어떤지 몰라도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많이 웃었어. 키보드 놓고 나란히 앉았는데 잘 어울리더라고.”

“걔 저희랑 있을 때도 많이 안 웃어요. 그러니까 쫓아냈네. 당장 크리스마슨데 요거 며칠 안 들어오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푸후후.”

“손 올려 봐요.”


정완이 테이블 위에 제 손을 올려놓자 서희는 그의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화제를 바꾸었다.


“홍설하 씨랑은 언제 만나기로 했어요?”

“10시 반에 요 아래 카페에서 보기로 했어.”

“너무 이른데.”

“배우님 오후에 녹화 있어서 그 뒤엔 어렵나봐. 시내에서 뵙자고 했는데 아침에 뮤지컬부 사람들 만날 일이 있다고 하셔서.”

“그럼 그냥 회사에서 봐도 되지 않아요?”

“배우님이 장소 정해주셨어. 아무래도 여기서 하기 쉽지 않은 얘기라 그랬겠지.”

“내 남친 피곤하겠다.”

“아니. 난 그게 더 좋아. 너랑 점심 먹고 싶으니까.”

“네? 저 내일은 오후까지 자려고 했는데요?”

“어?”

“풋! 농담이었어요. 점심 먹어요.”


서희가 이런 농담을 하는 건 정완이 살짝 당황하는 모습이 귀여워서였다.


“고마워.”

“아니에요.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같은 회사에 있으면서 밥도 자주 같이 못 먹고 미···.”


서희의 검지가 재빠르게 정완의 입술에 닿았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요.”

“미치겠다고.”

“그거 아닌 거 알거든요?”


정완은 픽 웃다가 커피를 마시고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배우님한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야죠. 유언에 없는 말 붙이면 안 되잖아요.”

“내가 제정신으로 말할 수 있을까?”

“제가 같이 갈까요?”


정완은 고개를 저었고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하는 뮤지컬 배우로 입지를 다지다 최근 케이블 TV 드라마에 출연하여 시청자들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리는 설하에게 정완이 당부했던 대로 전했지만, 설하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일정이 빡빡한데다 최근에 교제하는 사람이 생겼기에 연락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정완이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하가 그에게 연락했고, 정완은 한결에게 사실을 전하고 자신이 설하를 만나기로 했다.


설하는 재작년에 옮긴 소속사와의 계약이 최근 만료되어 새 소속사를 찾고 있으며, 뮤컬트 엔터테인먼트로 돌아오는 것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정완을 만나기 전에 뮤지컬 부서의 요인들을 만날 예정이다.


“그냥 사실만 말씀드리면 될 일을, 이게 뭐라고.”

“홍설하 씨가 다른 남자 만나고 있으니까 형님들 만나는 게 부담스러우셔서 그런 거죠?”

“그렇겠지.”

“그것만 아니었어도 PD님이 그 무거운 일을 할 필요는 없는데.”

“어차피 말 꺼낸 사람이 나니까···. 형님들이 나보고 잘 얘기하라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


서희가 정완의 손을 제 두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래요. PD님이 책임져요.”

“응.”

“이왕이면 힘내서 책임지세요. 이제 와서 피할 수도 없고, 언제든 누가 됐든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렇지.”

“정면으로 마주하면 편하게 지나갈 거예요. 저한테 하듯이 진심으로 이야기하면 잘 알아주실 거예요.”

“그래. 그럴게. 고마워.”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 따듯함이 지나갔다.


“서희야.”

“네.”

“오늘 나랑 같이 있어줄래?”

“아니요.”


서희는 정완의 조심스런 말에 곧바로 고개를 젓고 말했다.


“같이 있어주는 건 안 해요. 같이 있자고 해야지.”

“어, 그래. 같이 있자.”

“그래요.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하나씩 배우면 되죠. 저도 PD님한테 많이 배우면서 살잖아요.”


두 사람은 손을 놓고 창밖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제가 PD님 방으로 갈게요.”

“불편하지 않을까? 내 방엔 아무것도 없는데.”

“필요한 건 숙소에서 가져오면 되죠. 그래도 거기 너무 단출해요. 같이 샀던 물건 말고는 책밖에 없고.”

“나야 숙소를 자주 옮겼으니까···. 하나씩 채워가야지. 네가 골라줘.”

“그래요. 그리고 혹시 내일 일찍 일어나면 회사에서 호텔 조식 먹어요.”


서희는 며칠 전 대형마트에서 정완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주었고, 자신이 틈틈이 쓴 캘리그라피를 조그만 액자에 넣어 그의 책상에 올려놓았다.

책상에는 정완이 쓰던 구형 스마트폰이 수리되어 놓였는데, 화면을 열어보니 자신의 얼굴사진이 슬라이드로 나타나서 놀라기도 했다.


정완의 방에 있는 침대는 자신의 원룸의 것보다 더 컸다. 지금은 침대가 큰 게 아쉬운 때였다.

그런 생각을 주워섬기던 서희의 눈가에 문득 장난기가 어렸다.


“근데 PD님은 저랑 그렇게 자고 싶으세요?”

“어?”

“저번에도 아침에 밥도 안 먹고 제 품안에서 계속 자겠다고 어리광만 부리고, 뒷모습이 소담스럽다고 설거지도 못하게 했죠.”

“푸후후.”

“쉬는 날 되니까 또 자자고 하네요? 일주일 내내 저랑 자는 날만 기다렸어요?”


정완은 서희의 이 말을 단둘이 있을 때는 어떤 이야기이든 솔직하게 나누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서희는 자신의 생각을 정완을 떠보듯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쨌든 정완은 빙긋 웃으며 진심을 말했다.


“응. 좋았어. 그래서 또 좋고 싶어서.”

“네.”

“너도 제수씨랑 놀더니 영향을 받은 건가? 근데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선 그런 말하지 마. 민망하니까.”

“못하죠. 지금도 좀 창피한데 우리끼리니까 하는 거지.”

“그래. 민망하긴 해도, 말 그대로 우리가 같이 잤고 지금도 자고 싶은 건 맞으니까.”

“그렇죠.”


서희는 처음으로 함께 밤을 보낸 후 잠에서 깨어나던 순간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정완은 그녀의 품안에 있었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 귀여워 쓰다듬다가 그 머리를 꼭 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는데, 그때 정완은 잠 덜 깬 목소리로 ‘안아줘서 고마워. 좋다.’라고 속삭였다. 그때 그의 입술이 하필이면 가슴에 붙어 있었고, 옷을 타고 들어온 입술의 움직임이 번개처럼 온몸을 쓸고 지나갔다.

그 야릇한 느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라 서희의 온몸을 벌겋게 만들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특별함도 일상이 되고 익숙해질 것이다. 어쩌면 피곤하여 귀찮아지거나 말다툼한 직후엔 싫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형용하기 힘든 느낌을 조금씩 천천히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해보았지만, 그것보다는 더 깊이 느끼고 싶은 마음이 훨씬 컸다.


정완은 서희가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진다고, 그래서 잃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침대에서 서로를 껴안고 있을 때 정완은 서로가 완전히 무방비 상태임을 알면서도 서희에게 더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그는 서희가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쯤 먼저 말할 것이다. 더는 못 참겠다고.


“고마워.”

“왜요?”

“이 공간이 참 좋다. 너랑 있으니까.”

“저도 고마워요.”


정완의 작업실은 치열한 업무의 공간이지만 이 시간에는 아늑한 둘만의 공간이 된다. 변두리의 산자락과 개울가가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전망이 고즈넉해 보여 좋았다.

커피를 모두 마신 후에도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과 창밖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다음 날 아침 10시 30분.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 멀지 않은 개울가에 자리한 커피숍의 창가 자리에 정완이 앉았고, 이윽고 깔끔한 정장차림의 30대 후반 여자가 들어왔다.

정완은 그녀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홍설하 배우님. 안녕하셨어요.”

“그래요, 정완 씨. 오랜만이에요.”


설하는 짐짓 미소까지 띠며 정완과 마주앉았다.

정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희 회사에서 일은 잘 보셨습니까?”

“이제 나한테도 우리 회사예요. 내일 계약하기로 했어요.”

“잘됐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앞으로 정완 씨도 자주 보겠네요. 피아니스트 출신이라 그런지 정완 씨가 편곡한 넘버 정말 좋더라고요.”

“부족한 게 많은데 뮤지컬부에서 많이 도와주십니다.”

“서희 씨랑 결혼식장에서 노래하는 영상 봤어요. 정완 씨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늦었지만 잘 됐어요.”

“배우님도 드라마에서 아주 멋지십니다.”

“그러고 보니까 나하고 정완 씨가 공통점이 있었네요. 늦게야 일이 풀린 거.”

“예.”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 설하가 재빨리 한 모금 마신 후 본론을 꺼냈다.


“아리 씨가 서희 씨 문제로 작은 도련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나한테 연락이 와서 좀 당황했어요. 근데 그 뒤로 서희 씨가 정완 씨 찾아냈다고 해서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때 정완 씨가 그랬다고 했죠? 내가 그 사람이랑 연락해야 한다고.”

“···.”

“이혼한 뒤로 그 사람이랑 한 번도 연락 안 했어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어도 나중에 한 번은 연락하겠지, 그냥 그러고 살았어요. 내가 먼저 해도 되는데 이상하게 못하겠더라고요.”


설하는 정완이 전했던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사람과 어떻게 연락하라고 전한단 말인가.


“난 그 사람한테 크게 배신당했어요. 처음 조연 들어가서 힘든데 갑자기 이혼하자고 해서···. 하아. 그 전까지 잘해주기만 하던 남자가 한순간에 돌변하니까 저렇게 무섭구나 했어요. 한동안 사람 만나는 것도 꺼려졌어요.”

“배우님. 이거 읽어주십시오.”

“네?”


정완은 설하의 옆에 서서 두 손으로 쪽지를 내밀었다.

설하가 쪽지에 눈길을 던지자 정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설하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故 정한수, 歿 2016. 4. 16, 경기 용인시 처인구 ○○추모공원···.’


정완은 쪽지에 한수를 모셔놓은 납골당의 주소와 사망 일자만 적었다.

할 말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글로 쓰는 게 낫고, 이 내용만으로 모든 오해가 풀릴 것이라는 서희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배우님. 죄송합니다.”

“···.”

“한수 형님께서는 배우님이 먼저 물어보시기 전에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이제야···. 죄송합니다.”


쪽지를 쥔 주먹이 이마에 닿은 채 부들부들 떨렸다.

정완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 제수씨한테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저는 형님과 배우님 두 분께 모두 잘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우님이 이 일을 평생 모른 채로 사시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아.”

“죄송합니다.”


설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떨다 정완에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죄송합니다. 배우님.”

“일어나요. 내 잘못이에요. 정완 씨가 아니라.”


설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정완을 잡아 일으키더니 뒤쪽 창가를 가리켰다.


“화장실 갔다 올게요. 저쪽 바깥 테이블로 자리 옮겨주세요.”

“예.”


설하는 얼굴을 가리며 황급히 화장실로 뛰어갔고, 한참이 지나서야 개울이 보이는 야외에 나와 정완과 나란히 섰다.

화장이 모두 지워졌고 눈가가 퉁퉁 부었지만 정완은 그녀를 보지 못했다.


“악몽을 꿨어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정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꿈에서 난 예쁜 아기의 엄마였어요. 맑은 날 바닷가에서 경치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아기가 바닷물에 둥둥 떠내려가더라고요. 얘야. 어디 가니. 이리 와···. 그렇게 외치는데 아기가 울면서 허공에 두 손을 휘젓다 점점 시커메지면서 멀어졌고, 나는 더 크게 소리쳤지만 아기는 결국 사라졌죠.”

“···.”

“꿈에서 깼는데, 꿈인 걸 알았는데도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어요.”


설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말을 이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은 후 2주기였죠. 난 안산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어요. 큰일을 당했던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지요.”


정완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전 그게 그 아이들을 본 건 줄만 알았는데, 하아. 그 사람이 그날 떠났다고요.”

“그렇습니다.”

“어디가 아팠나요?”

“췌장암이었습니다. 배우님께 이혼 얘기를 꺼내기 며칠 전에 아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형님들은 배우님과 얘기가 끝난 뒤에 알았고요.”


설하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가가 또 뜨거워졌다.


새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일 것이다.

며칠째 배가 아프다고 말하는 한수에게 ‘그렇게 아프다고만 하지 말고 병원이라도 좀 가든가!’라고 쏘아붙인 후부터 그는 슬픈 눈으로 말없이 창밖을 보는 일이 잦아졌고, 얼마 후 이혼하자고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동생들이 있었지만, 창밖을 보던 순간 그는 바다에 떠내려가며 손을 휘젓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아기처럼 무섭고 외로웠을 것이다.


숙려 기간이 끝나던 날 한수는 화려한 옷차림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법원에 출석하여 설하를 실망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병색을 감추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연기를 못한다는 이유로 연극판에 들어온 지 5년 만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던 남자가 중견배우인 아내를 연기로 속이다니. 그 연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고민하고 준비하고 버려야 했을까.


설하는 아름드리나무에 기대어 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정완 씨 말 들으니까 그 사람이 더 밉네요.”

“형님은 배우님이 당신 때문에 아픈 것보다는 당신을 미워하는 게 낫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세상 뜨면 기억도 못할 텐데 미움 받는 게 대수냐고.”

“하아.”

“하지만 저는 배우님께서 형님을 미워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형님이 그러셨던 이유를 배우님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설하는 한동안 말없이 개울을 바라보다 정완이 모르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람은 아직 세상이 내 진가를 모르는 것뿐이라고, 다른 건 자기가 다할 테니까 나한테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연기만 하라고 했죠. 그게 프러포즈였어요.”

“예.”

“결혼하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연기만 했어요. 옷이든 밥이든 제자리에 늘 있었고 화장품이랑 생리대도 내가 사본 적이 없어요. 난 그저 그 사람한테 고맙다, 성공할 테니 조금만 견디자, 그러면서 안아준 것 말고 한 게 없어요. 아무것도.”


정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하가 늘 고마워했던 마음이 한수에게는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 사람이 이혼하자고 할 때 내가 한참 얘기하니까 다 듣더니 그러더라고요. 자기가 이렇게 약한 놈일 줄 몰랐다고, 이젠 정말 힘들다고. 그 딱 두 마디에 힘이 쭉 빠졌어요.”

“후우.”

“그 사람은 그때도 진심이었네요. 몸이 약해졌고 힘들었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못했겠죠.”

“그, 그렇습니다.”

“프러포즈 그게 뭐라고, 그거 하나 지킨다고 중요한 얘기를···. 하아.”


설하는 독백처럼 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느 날 집에 왔더니 아침에 벗어놓은 잠옷이 그대로 있고, 며칠 전에 먹었던 그릇에서 냄새가 나고···. 이제 정말 혼자구나 해서 한참을 울었어요. 집안일 할 때마다, 마트 갈 때마다 그 사람이 계속 생각나서 한동안 정말 힘들었죠. 그래서 회사 옮겼어요. 이 동네에 오고 싶지 않아서.”


정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뒤로 난 죽을 각오로 연기했어요. 그때 내가 알았으면 지금 여기까지 못 왔겠죠.”

“그랬을 겁니다.”


설하는 물 고인 정완의 눈을 보다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돌렸다.


“앞뒤도 모르는 사람 같으니라고. 그렇게 가버리면 내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았나.”

“제가 형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거기까지는 생각 못하셨을 겁니다.”

“···.”

“길어야 넉 달이라 했습니다. 간이랑 심장에도 전이되어서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했지요. 더 살 방법도 희망도 없고, 몸은 나날이 나빠져 오는데 앞뒤 잴 시간 같은 건 없었을 겁니다.”


한참을 침묵했다.

정완이 말했다.


“만나는 분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형님을 위해서라도 그분과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뮤지컬이든 드라마든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요. 두 형님이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남긴 말은 없나요?”


정완은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혹시 형님께 가보실 생각이 있으신지요.”

“가야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해주려면.”

“그럼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보이는 날 가보셨으면 합니다.”

“왜요?”

“그런 날 제가 형님을 찾아뵈었는데 그때 그러셨어요. 설하 누나가 저런 하늘을 참 좋아하는데, 김밥 싸는 게 뭐 어렵다고 소풍 한 번 못 갔다고.”

“···.”

“돌아가시기 닷새 전이었습니다. 제가 본 형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죠.”

“하아.”


설하가 한숨을 쉬었다.

한참 후에 정완이 말했다.


“형님 옆에 하늘색 봉투가 있습니다. 다른 형님들이나 저한테는 열지 말라고만 하셨어요. 혹시 배우님이 오실지 몰라 준비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알겠어요.”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습니다. 나중에라도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정완 씨.”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길 바란다고요?”


정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하는 다시 개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한데 그건 당분간 어렵겠어요. 그 사람이 더 미워졌어요. 날 위한 마음으로 그런 건 알겠지만 정말 나빴어요. 난 그 사람이 자기 생각을 하나도 안 하는 걸 바라지는 않았어요.”

“예.”

“다만, 나중에는 웃으면서 미워하도록 노력해 볼게요. 날 배신하고 떠난 게 아니란 건 알았으니까요.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미워하지 않을 날이 오겠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정완 씨, 혹시 서희 씨랑 결혼할 생각 있어요?”

“그렇습니다.”

“정완 씨가 그 사람 존경하는 거 알아요. 근데 하나는 그 사람이랑 다르게 하세요. 서희 씨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마세요.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다 얘기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설하는 몸을 돌려 정완을 바라보았다.

퉁퉁 부은 얼굴에 조그맣게나마 미소가 어렸다.


“큰 도련님한테 조만간 연락하겠다고 전해주세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오해 풀어줘서 고마워요. 회사에서 봐요.”

“예, 배우님.”


설하는 다시 몸을 돌려 개울 쪽을 바라보았다.


“여긴 쉬는 날에 그 사람이랑 산책하다 커피 마시러 들어오던 곳이에요.”

“예.”

“먼저 가요. 난 여기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정완은 설하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설하의 뺨에서 복잡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정완은 정오가 막 지나서야 제 방으로 돌아왔다.

서희가 그를 침대에 앉히며 손을 잡았다. 다시 만난 후로 자신을 보며 미소 짓지 않은 얼굴은 처음이었다.


“고생했어요.”

“아니. 고생은···. 고마워.”


서희는 그의 슬픈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느껴져요. 홍설하 씨랑 PD님 두 분 다 마음 많이 아팠다는 거.”

“응.”

“그분은 뭐라고 하셨어요?”

“형님한테 배신당하셨다고 생각해서 많이 미웠나봐. 오해 풀었다고, 조만간 한결이 형님한테 연락하겠다고 하셨어.”

“잘됐네요. 정말 잘했어요.”

“웃으면서 미워하도록 노력하겠다고,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미워하지 않을 날이 올 거라고···. 너한테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다 말하라고 하셨어.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다 말하라고.”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저도 그 말씀 명심하고 꼭 그렇게 할게요.”

“후우.”


정완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서희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서희야.”

“네.”

“덕분에 배우님한테 잘 말씀드렸어. 고마워.”

“저도 고마워요. PD님을 이렇게 안아줄 수 있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서희는 이렇게 말하다 정완이 없을 때에야 알았던 그의 아픔을 떠올렸다.

이제 그 아픔을 잊도록 하는 게 제 몫이 되었다는 점에 이 남자에게 또 한 번 고마워졌다.


서희는 그 고마움이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정완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작가의말

공지에 올렸듯이 이 연재분까지 올리고 휴재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돌아올 때까지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열심히 글 쓰고 올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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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욱일302
    작성일
    20.08.18 16:43
    No. 1

    몸 마음 모두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랍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8.28 02:19
    No. 2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고 돌아오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or***
    작성일
    20.08.25 01:54
    No. 3

    글쓰는게 즐거움이 아닌 스트레스가 되어버리면 작가님과 독자 모두에게 아쉬움이 남을거라 생각됩니다. 잘 생각 하셨어요. 부디 완충하시고 돌아오시길 바라요. 다시 뵐 때까지 맘편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8.28 02:20
    No. 4

    oroi9님 말씀대로입니다. 스트레스 받기 전에 잠시 쉬기로 했죠.
    어쨌든 모자란 부분 채워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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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Final. 두 사람의 마지막 경연 21.09.06 67 5 37쪽
52 Round 8.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21.09.01 68 5 26쪽
51 Welcome. 하루를 마무리할 때 21.08.28 60 5 19쪽
50 Change. 모두의 힘으로 21.08.27 65 5 20쪽
49 Round 6. 아쉬움과 미련이 없도록 21.08.23 74 5 28쪽
48 Ago.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21.08.18 84 6 29쪽
47 Confidence. 생각할 시간 일주일 21.01.04 93 5 27쪽
46 Round 5. 어느 배우와의 이별 +2 21.01.01 89 6 28쪽
45 Relation. 꿈이 아니라는 걸 +2 20.12.04 116 6 26쪽
44 Self. 돌아선 길 위에서 +2 20.11.20 127 6 30쪽
43 Encore. 복수의 시간 +2 20.11.13 117 6 26쪽
42 Special 2. 바보가 된 천재들 +2 20.11.09 118 7 28쪽
41 Special 1. 희망을 노래하는 겨울 +2 20.11.02 135 6 28쪽
40 Preparing. 서로를 만나는 이유 +2 20.10.26 133 6 26쪽
» Blind. 오해를 풀고 남은 자리에 +4 20.08.18 160 8 22쪽
38 Composer. 눈은 이미 맞았고 +2 20.08.13 148 7 21쪽
37 Radio. 진심으로 대하기에 더 빛나는 이들 +2 20.08.11 137 8 26쪽
36 Cooperation. 침묵의 이 순간 +2 20.08.04 153 8 26쪽
35 Innocence. 꿈이라고만 여겼던 것 +2 20.07.30 169 7 23쪽
34 Producing. 입 헤벌리고 표정 관리 못하지만 +2 20.07.28 165 9 26쪽
33 Affableness. 오래 전 우리 +2 20.07.21 176 7 38쪽
32 Along. 대타로 때려낸 홈런 +4 20.07.16 172 9 30쪽
31 Beginning. 음악은 변하지 않았다 +6 20.07.12 158 8 34쪽
30 Some. 애써 외면했던 진심 +4 20.07.07 168 10 22쪽
29 Opening. 속 깊은 이야기들 +4 20.07.05 167 9 28쪽
28 Yearning. 두 사람의 두 마음 +6 20.06.30 176 9 20쪽
27 Quest. 그녀의 마지막 미션 +2 20.06.25 157 10 29쪽
26 Showdown. 또 다른 사랑이 다가오다 20.06.18 165 8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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