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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79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9.26 14:26
조회
89
추천
3
글자
11쪽

어설픈 입발림

DUMMY

불타고 있다.

새까만 연기가 하늘을 가렸다.

폐속으로 들어온 잿더미가


“쿨럭···! 쿨럭···!”


기침을 유발한다. 빠져나가지 않고 페에 달라붙는다. 숨을 쉬기 힘든 것이 아니다. 쉬어지지 않는다. 질식사를 처음 겪는 것은 아니지만 뜨거운 열기에 폐와 살갗이 익어가는 고통은 가만히 버틸 수가 없다.

나는 죽었다. 그리고 깨어났다. 그곳에는 햇빛을 비추는 아름다운 호수와 바람에 살랑이는 화사한 꽃잎들이 어우러진 안식처가 있어야 했을 터였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세상의 천장을 찌르며 나무를 휘감아 태우는 불길만이 남아있다.

눈이 맵다. 가늘게 뜨는 것만으로도 눈물의 장막이 시야를 흐트린다.

익어가는 몸을 살려보고자 일어났다.


-끼이익!


새까맣게 타들어간 나무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뜨거웠던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

당혹감을 잠재우지 못한 나는 소리의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어···?”


-우지직!


불기둥이 덮쳐왔다.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쓰러지는 나무에 깔렸다.

얼굴이 녹아내리고, 증발한 머리카락이 뇌를 익혔다.

짧은 순간.

세 개의 꽃잎 중 하나가 아른거리다 타올랐다.


...


“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쓰러진 나무의 밑에서 버둥거리며 깨어난다. 소리치는 목이 찢어지기도 전에 타들어간다.

강하게 혀를 깨었다. 이빨이 혓바닥을 잘게 씹었다. 피의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낄 새도 없이 손에 잡힌 대거를 꽂아넣었다.

가호를 사용했다. 사용하고 사용하고 사용했다.

푸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폭발은 호수의 건너편까지 달려나가 영혼을 대가로 고통을 없애주었다.


...


눈을 떴다.

수북이 쌓인 얼음조각들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내장이 없어지고, 팔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은 없었다. 세 번째까지 빠르게 사용했기에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죽었다.

그러나 연달은 죽음의 충격은 누적되어있었다.

얼굴을 만졌다.

녹아내리지 않고, 타들어가지도 않았다. 뇌가 익지도 않았다. 나의 머리에는 사고력이 남아있었다.

몸은 되살아나도 타들어간 옷은 복구되지 않았다.

푸른 불꽃은 신기하게도 무기들을 놔두었다.

새까맣게 타버리고 잘게 조각난, 까만 눈밭에 나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눈가에 뜨거운 것이 잔뜩 차올랐다.


“뭐야 이게···”


얼음조각에 목을 찔리고, 내장을 잃어버리고, 팔이 떨어져나가고. 그렇게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가 죽었다.

내가 매번 깨어나는 이 호수는 그렇게 죽어간 나에게 사사로운 위로였다. 마지막으로 남아 나의 등을 토닥여주는, 내게 돌아오기를 허락한 유일한 장소였다.

고향에서마저 내팽개쳐진 나에게 아름다운 풍경을 펼쳐 보여주며, 이곳에서 만났던 아루아를 구해내겠다고 다짐토록 해주었다.

···이제는 누구도 나의 등을 토닥여주지 않는다. 자그마한 위안조차 받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지만, 어머니에게 따스한 보살핌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힘들 때마다 그 존재를 떠올릴 것이다.

어리고 어설픈 자신을 용서하고 보듬어주었던 손길을 그리워할 것이다.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시답잖은 감정에 잠기는 건 그만하기로 정해뒀으니까.

그럼에도 자랑스런 아들이 되주지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없었다. 잘못을 알고, 실수를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사람다운 아들이 되어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부정하지 않는 아들이, 되고 싶었다.

아루아를 구해내자. 그것이 내가 짊어진 가장 커다란 책임이다.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대거를 쥐었다. 손에 감기는듯한 손잡이.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안심되기까지 했다.

다행히 대거를 넣는 집들은 불에 타지 않았다. 나의 등뒤에 묻혀있었으니까.

하지만 할버드와 창을 매도록 만든 가죽끈들은 모두 끊어져버렸다.

주위를 둘러봤다.

대체할 무언가는 남아있지 않았다.

녹슨 검도 집은 멀쩡했으나, 고정하는 끈이 없었다.

검 세 자루와 창 두 자루를 들고가기엔 손이 부족했다.

고심 끝에 녹슨 검과 할버드만 들고가기로 정했다.

녹슨 검은 저번보다 가벼웠다. 죽을 때마다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건지는 의문으로 남겨놓기로 했다.

이 세상에는 내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신음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이 많으니까.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어째서 불이 났는지가 아닌, 누가 불을 질렀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답은 금방 나왔다.


-푹!


“어···?”


복부 한 가운데가 뜨거웠다. 손으로 만졌다. 피는 묻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손끝이 불타 사라졌다.

턱을 내려서 눈으로 확인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붉은 화살촉이 나의 배를 꿰뚫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적인 은빛을 지닌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있었다.


“네가 재의 귀인이구나.”

“사, 레이스···!”


-푹!

-푹!


서너 개의 화살이 연달아 관통했다.


“우리의 야망을 위해서 희생해줘야겠어.”


그녀는 사레이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무척 닮아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에 짓는 광기가 서린 웃음.

남매인가.

의식이 끊겼다.

몸이 앞으로 떨어졌다.

잿더미가 낮게 날아올라 눈처럼 내렸다.

마지막 꽃잎마저 나를 떠나갔다.


...


마지막 꽃잎이 나의 진실된 목숨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추측은 틀렸다. 마지막 꽃잎마저도 나의 생명을 대체하는 소모품이었다.

깨달은 것은 손에 쥔 검과 할버드의 손잡이가 느껴진 순간이었다.

눈을 떴다.

몸을 뒤덮은 재를 파헤치며 일어섰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푸확!


압축되어있던 격렬한 화염이 팔에 화상을 입혔다. 새빨개진 팔이 부들부들 떨리며 검을 떨어뜨리려했다.

할버드를 놓고 남은 한 손으로 녹슨 검을 쥐었다. 불친절한 손잡이는 열기를 식히지 않고 손바닥에 얕은 화상을 입혔다.

여자의 손을 바라봤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활과 화살이 쥐여져있었다.

마법의 일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가 이 숲을 태운 주범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겠다.


“후우···”


자신을 진정시키고 다음 화살이 날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랫동안 정적이 유지되었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불길했다.

여자를 주시하며 대거를 쥐었다.

등 뒤의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푸확!


“윽···!”


화살이었던 화염이 폭발하며 얼굴을 데웠다.

따갑지만 참을만했다.

폭발의 반동을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대거를 떨구었다.


“어떻게···?”


여자의 표정에 약간의 동요가 피어올랐다.

어떻게냐고 묻는다면 약간의 감과 예측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한다. 그렇다면 저 활과 화살이 마법인 이상 마력을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저 여자의 손해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화살은 날아왔다.


‘그렇다면···’


한 명이 아니다.

고개를 빠르게 돌려 뒤를 돌아봤다.

두 명.

그리고 돌리는 와중에도 측면에서 세 명.

억측일지도 모르겠으나, 반대편에도 비슷한 숫자가 있겠지.

포위당했다.

불결치는 활을 손에 쥔 마도사들이 사방에서 걸어나왔다.

수세에 몰렸다.

실수했다. 일어나자마자 저 여자와 승부를 봐야만 했다.

저 화살들이 발사되면 죽는다.

막는다고 해도 폭발하며 화상을 입는다.

수십 개의 화살로부터 입은 화상은 나를 뼛속까지 구워낼 거다. 애초에 전부 막지를 못한다.

까득. 어금니를 씹었다.

턱을 울리는 고통이 나를 침착하게 만들었다. 침착해진다고 해서 수세에 몰렸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저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것도.

전부 바뀌지 않는다.

이 상황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비틀지 못한다.

희망이 있다면, 저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것.

저들이 요구하기 전.

무언가 말해야만 한다.

무기를 내렸다.

검을 땅바닥에 깊숙이 꽂아 고정시켰다.


‘재의 귀인이라···’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핵심단어임은 틀림없다.

저들의 오해인지 진실인지 모르는 호명은 나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은발의 여성을 바라보고 목에 힘을 주었다.


“재의 귀인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래, 천년의 꽃은 어딨니?”

“모릅니다.”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천년의 꽃. 그것이 저들의 목적이겠지.

그 꽃으로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으나, 알고 있다며 부리는 허세는 금방 들통난다.

여자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태연하게 있다는 것은 당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 이대로 저를 죽이시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죽으면 끝이거든요.”


곁눈질로 활시위를 놓으려던 마도사를 살펴보았다.

늦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그 꽃과 연관되어 있는 건 맞습니다. 저는 그 꽃을 보았고, 손에 넣었죠. 다만···”


말을 길게 흐렸다. 상대가 먼저 물어오기를 기다렸다.


“다만?”

“다만, 저는 그 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말했다시피요.”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한 이유는?”

“짐작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지?”

“흑기사.”


싸늘함이 흘러갔다. 그 싸늘함은 화염을 식히고, 형태를 일그러뜨렸다.

여자의 손에서 활이 사라졌다.


“너는 누구야?”

“천년의 꽃을 사랑한 기사, 그가 마지막으로 지켜낸 한 사람입죠.”


애매한 말투, 소량의 허세를 첨가했다.

저들이 나의 필요를 느끼게 하면서, 내가 저들에게 적대심이 없다고 판단토록 만들어야한다.

그리고 이 말이 그 조건들을 충족시켜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저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언제 어디로 돌아오는지 알고 있죠. 제 안전을 보장해주신다면, 협력해드리겠습니다.”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검지로 턱을 궤며 유심히 고민했다.


“실리아님, 저 자의 말을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저런 남자가 천년의 꽃의 행방을 알 리도 없고, 단테와 친분이 있을 리도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는 저 녀석이 되살아나는 과정을 봤어. 무관계하진 않아. 그리고 저 녀석의 허세도 오래 가지는 않을 테지. 거짓이라면 죽이면 그만이야. 단테와 연도 없는 나약한 놈이 저항해봤자지. 손해는 없어.”


그렇다. 저들이 손해를 보는 것은 최소한의 인원과 최소한의 시간뿐이다. 그 외에는 없다. 심지어 나 하나에게 그리 많은 감시를 붙일 필요도 없다.

끽해봐야 최소한의 손해. 그러나 나의 말이 맞고, 저들이 모종의 수단으로 목적을 달성할 경우 막대한 이득을 챙기겠지.

결코 나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이야기이다.


“이번에는 놀아나줄께 평민. 이번에는, 말이야. 지껄여보렴”


코로 숨을 천천히 내쉬며 단테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들을 되짚었다.

불안감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족의 덧없는 영웅을 믿어보기로 했다. 오랜 시간을 홀로 버티며 싸워온 단테를. 나에게 검을 쥐여준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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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보이지 않는 한 가지 +1 20.09.21 95 5 11쪽
31 가호 +1 20.09.20 100 3 13쪽
30 외면했던 과거 20.09.18 129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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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채점 +1 20.09.16 90 4 12쪽
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100 4 12쪽
24 목적 20.09.12 110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8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3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7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5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5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6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9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1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4 만남 20.08.05 496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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