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72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19 01:24
조회
215
추천
7
글자
10쪽

결심의 뒤에 오는 것

DUMMY

눈을 떴다.


잠에서 깨더라도 저절로 뜨여지지 않는 눈꺼풀 때문에 매번 일어날 때마다 눈을 뜬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 귀찮음이 메말라버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할 여유가 나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눈을 떴다. 그것을 인식함과 동시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무거웠다. 풀리지 않은 피로가 전신을 억누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쉬자는 나태함을 무시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을 바라봤다. 안개가 사방을 가린 새벽이었다. 방안에는 누구도 없었다. 1인실의 작은 책상 위에는 짧은 문구가 적힌 종이 한 장과 짤랑이는 금속들이 들어찬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서 슥 훑어보고 말았다. 그곳에는 지켜주지 못한다며 자책하던 영웅의 사과가 담겨있었다.



「미안하다.」


그는 잘못하지 않았다. 마차를 같이 탔던 모험가들이 내장사냥꾼에게 죽어나갈 때도, 독에 중독된 내가 사흘 동안 잠들어있을 때도, 기이하게 생긴 생명체에게 팔을 물어뜯길 때도. 단테는 사람을 구하고 있었을 테니까.


평범한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다. 예전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의하면, 나는 아직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현실을 받아들였고, 과거를 과거에 두고, 고개를 숙인 채로 지금만을 바라보았다.



“···가자.”


검과 대거를 허리에 차고, 주머니를 챙겼다.



...



날카로운 검날의 한기가 손끝을 타고 흘러들었다.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어지러운 감정들이 잠잠해졌다.


이 검으로 누군가를 베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검으로 누군가를 지킨다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자신감이 차올랐다.


사람을 죽인다는 행위를 나 스스로가 용서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러나 악착같이 살겠다는 의지는

진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칼집을 허리에 찼다. 대거는 그 반대편에 자연스레 자리잡고 있었다.


재빠르게 뽑을 수 있는 위치.


먼저 공격한다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기에, 오로지 뽑아서 막는 상황만을 고려한 위치.


그곳에 두 자루의 검은 놓여있었다.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가슴과 배의 가운데를 양껏 채웠다.


이른 새벽일지라도 마차는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부지런하거나, 한가로움을 좋아하는 상인들의 것이었다.


알텐하르크에서 사르티아까지의 거리는 마차를 타고 약 반나절. 때문에 식량을 구할 필요도 없이 지나가는 마차를 붙잡고 돈을 내기만 하면 되었다.


단테가 놓고 간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새것이 아닌 헌것. 혹여나 의심을 받을까 걱정하는 그의 세심한 면모가 엿보였다.


이윽고 마차는 검문소에 멈춰 섰다. 창과 가벼운 갑옷을 걸친 검문관들이 마차의 내부로 올라탔고, 나는 자리를 비켰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유난히 나를 훑어보는 드워프가 존재했다. 코와 귀가 뭉특하고, 키가 작은 걸로 보아 전형적인 드워프였다. 요새는 키가 큰 드워프들도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그는 해당하지 않았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는 것도, 흘러내리려는 땀을 닦는 것도, 하지 않았다.


괜한 의심을 사는 순간 끝이었다.


알텐하르크는 모험가를 제외한 일반인의 무기소유를 금지하고 있으니까.



“어이, 케이트.”

“뭔데? 록.”

“이 사람, 검을 들고 있는데? 신분검사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케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드워프가 식량으로 들어찬 상자의 뚜껑을 닫으며 고개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어떠한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자연스럽게.

서있었다.



“모험가겠지. 이봐, 록. 여기를 지나다니는 모험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신참이어서 잘 모르나본데, 그런 걸 하나하나 다 짚고 넘어가다가는 금방 짤릴 거야.”

“그래도···”

“퇴근하기 싫어?”


록이라는 드워프는 입을 다물었다.

섣불리 안도하지 않고, 드워프들이 검문을 끝내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올라탔다.


새벽부터 고비를 넘긴데다가 수십 번이고 쓰러졌다 일어나며 쌓인 피로가 남아있는 탓에, 곧바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마차의 흔들림 때문에 깊은 잠은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눈을 감으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바라보는 시간이 줄어들자, 나의 머릿속을 포화시키는 걱정과 원망과 억울함을 느끼는 시간도 줄었다.


조식도 해결하지 않고 마차에 올라탄 대가가 배를 울렸다. 하지만 여유롭게 끼니를 해결할 시간도, 돈도, 장소도 없었다.


배가 울리면 얕은 잠에서 깨어나고, 줄어들지 않은 피로가 수마를 불러오고, 흔들리는 마차가 깊은 잠을 방해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지난 2주간 나의 몸 상태는 심각하게 악화되어 있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마부의 안내가 들려왔다.


마차가 검문소의 앞에 멈춰 섰다. 로브의 후드를 점검하고, 되도록 깊숙이 눌러썼다.

이곳만 통과하면.


지금의 나에게 생각이 있다면, 그것뿐이었다.


검문관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마차에 올라타고, 상자를 열어보고, 마부의 상인증을 확인했다.


이윽고 내려왔다.


나에게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후드를 벗어주시겠습니까?”


당장의 침묵은 1초라도 허용해선 안 됐다. 나는 곧바로 후드를 벗었고, 양해를 구한 검문관과 마주보았다.


나는 무엇 하나 잘못하지 않았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선량한 시민이다. 초조해할 필요도, 침을 삼킬 필요도, 땀을 흘릴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나의 불행을 끝낼 마지막 관문의 앞이라는 생각과, 나의 안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검문관은 혈관이 줄어드는 듯한 한기를 온몸에 퍼뜨렸다.



“모험가이십니까?”


그것은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말 한 마디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미간에 강렬한 타격을 선사했다.


머리가 멍해지고, 고민하는 찰나의 시간을 앗아갔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내가 입을 열었음에도 고개를 돌리는 그의 행동은 대답을 들을 생각 따윈 없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불길하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


직감했음에도 쉽사리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레스! 오늘 들어온 ‘그거’ 건네줘!”


그거. 그거. 그거, 라니. 그게 뭔데.


그거. 대체 무슨 뜻이야.


뭐냐고.


그림 같은 것이 그려진 종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남자의 손에 들려있다.


그림이다. 확실히 그림이다. 검은색으로 그려진 그림.


그 밑에는 숫자와, 골드를 나타내는 단위가 쓰여 있다.


가까이 온다. 보인다. 햇볕이 그 내용물을 나에게 보여준다.


숨을 들이켰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길가의 옷가게에 전시된 거울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 이상은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있다.


세르나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족의 수도에서 3년간 생활한 나였다. 수도에 옷가게가 있는 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그 옷가게에서 옷을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하나의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어째서.


나의 얼굴에.


현상금이 걸려있는가.



‘어째서···?’


10골드.


금으로 이루어진 작은 동전 10개.


태어나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기 살기로 쌓아올린 무고함은.


고작 10개의 동전에 무너져 내렸다.



“사람을 넷이나 죽여놓고 무사히 통과할 거라 생각했나? 토가 나올 지경이군!”


검문관들이 달려온다. 창을 겨누고, 밧줄을 꺼낸다.


“아, 아니야··· 나는···!”


숨을 내쉴 수가 없다.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쓰레기 새끼. 감옥에서 평생 후회해라.”

“나는, 억울해··· 내 말좀···!”


퍽.



그런 소리가 났다.


뒤로 쓰러지고, 하늘이 보였다.


코가 부러진 것 같다.


이빨이 부러진 것 같다.



콱.



연달아 그런 소리가 났다.


모두 얼굴에서 울린 소리였다.


흙이 묻은 발로 짓밟히고, 짓이겨졌다.


흙이 입속으로 들어온다.


작은 알갱이들이 입술과 이빨을 까드득까드득 긁어내린다.


잇몸에 축축한 흙이 끼어든다.


콧속으로도 들어온다.


숨을 쉬지 않아도 기침이 나온다.


기침을 하면 흙이 들어온다.


흙이 들어오면 기침을 한다.

손으로 발버둥 친다.


입을 가리고, 코를 가린다.


이번에는 목을 짓눌린다.


숨이 막힌다.


발목을 붙잡는다.


주먹이 날아온다.


고개가 꺾인다.


맞는다.


맞는다.


맞는다.


생각한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


툭.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


그것은 귀를 타고 들어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뼈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감정에서 우러나온 소리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생각에서 만들어진 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리로 표현하자면, 그래.



이성이 사라지는 소리.


희망이 끊어지는 소리.


나라고 여기며 살아온 내가 처참하게 죽어버린 소리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 어설픈 입발림 20.09.26 89 3 11쪽
32 보이지 않는 한 가지 +1 20.09.21 95 5 11쪽
31 가호 +1 20.09.20 100 3 13쪽
30 외면했던 과거 20.09.18 129 3 12쪽
29 각성의 탑 +1 20.09.18 101 5 12쪽
28 채점 +1 20.09.16 90 4 12쪽
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10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5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5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6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9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