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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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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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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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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9.01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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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2쪽

이기심

DUMMY

콜로세움.

그것은 어느 불법적인 투기장의 이름이다. 본래는 페쿠스족(수인 獸人)이 만든 세계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 가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경한 자들이 멋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긍지 높은 투사들이 보기에는 위가 꼬일 광경임이 틀림없겠으나, 그들은 무의미한 살육을 저지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의미한 살육이 가져다주는 광란의 쾌감을 알지 못한다.


무고함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개미에게 무기를 쥐여주고, 다른 개미를 죽이도록 만드는 희열.


자신이 저들보다 위에 앉아있다는 우월감.


인간성이 망가진 인간을 바라보며 인간은 어떻게 죽고,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대한 탐구정신.


신념을 가진 자들과 목적을 가진 자들이 한데 모이는 곳.


하지만 그들이 가진 신념은 고장나있고, 그들이 가진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신념을 이룰수록, 목적을 가질수록.


그들의 뇌는 열광의 하모니에 녹아내리고, 정상적으로 살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것이 불법 투기장의 무서운 점이다.


무고한 투사들에게는 그나마의 희망이 존재한다. 이기면 산다, 라는 간단명료한 희망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설령 죽더라도 눈을 감을 수 있고, 편안해질 수 있다.


육체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작 죽는 것은 그 죽음을 낄낄대고 바라보는 관객들이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죽지 않고 죽어있는 미치광이가 되어버리니까.


하나의 지성체로서 완전히 죽어버린다고 할 수 있다.


후드를 깊게 내리고 객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객석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말고는 없었다.



'이런, 붕대가 흘러내리는군. 바꿀 때가 됐어.'


그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 흘러내린 붕대가 드러낸 피부를 모두 가렸다.


이어서 말하자면, 그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두 가지의 노하우가 존재했다.


첫째, 돈을 걸지 않는다.


둘째, 생각하지 않는다.


딱 두 가지. 그 외에는 없었다.



"어이, 저 녀석, 마구잡이로 집어드는데?"

"저래서는 무거워서 뛰지도 못할 텐데."

"양손에 창든 것 좀 봐!"


비웃음의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는 노하우를 떠올렸다.


돈을 걸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둘중 어느 것이든 어겨버리면 경기의 승패에 연연하게 되고, 연연하는 순간 잔인한 살육전에 미치게 된다.


그것을 알고 있다.


미치지 않는 방법을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미치기로 했다.



"저 남자에게 걸겠어."


...



어두웠다.


시각적인 감상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어두웠다.


손이 어두웠다.


이 세상에서 색이라는 존재가 사라졌다.


이 세상, 이라는 건 착각이겠지.


나만 그럴 것이다.


색이 사라졌다.


그래서 어둡다.


쇠창살들이 보였다.


발치에 놓인 접시에는 동그랗고 푸석푸석하고 자그마한 것들이 들어차있다.


먹는 건가.


그 옆에 놓은 컵에는 물이 들어있는 거겠지.


손안의 팬던트를 목에 걸었다.


열어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목에 걸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단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팬던트에 묻은 선혈로 목을 더럽혔다.


이제는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살인자라 불려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이지 못하게 되었다.


검을 찼다.


대거를 챙겼다.


도끼를 달았다.


왼손으로 창을 쥐었다.


오른손으로 도끼창을 쥐었다.


도끼창을 휘둘렀다.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도끼창을 놓고 창을 찔렀다.


빈손이 된 오른손으로 도끼를 들었다.


빗나간 창을 놓고 도끼를 던졌다.


도끼는 남자의 다리에 적중했고, 중심을 무너뜨렸다.


넘어지며 찌르는 창을 검으로 쳐냈다.


크게 휘둘렀다.


남자는 팔을 들어 막았다.


뼈에 가로막히는 감각.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거를 뽑아서 덤벼들었다.


거기서부터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차갑게 식어가는 '누군가였던 것'과 그 목에 걸린 팬던트만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갈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공들여서 폈다.


그리고 그의 팬던트를 빼앗았다.


속죄하기 위해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서.


죽은 자의 유품을 강탈했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을 텐데.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누군가의 아빠였을 텐데.


이제 손은 떠는 힘마저 잃어버렸다.



'하지만 나도 어머니의 아들이란 말이야···'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되돌리지 못할 과거가 돌려보냈다.



'그때,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시답잖은 감정에 사로잡혀 주먹을 날렸다.


그 말로에 있었던 것은 살인자가 되어버린 나 자신이었다.


내가 싫어서, 내가 나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내가 있었다.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죽여야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남아봤자 의미가 있을까···?'


해야할 일이 있다.


어머니를 보살피고.


아루아를 구한다.


이토록 명확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토록 필사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경험이 부족했었나보다.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미숙했었나보다.



'나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릎을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쇠창살을 두들겼다.


누군가가 사료통을 내던졌다.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했다.


누군가가 통곡했다.


누군가가 폭소했다.


누군가가.


누군가가.


누군가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좀 침착한 것 같구만."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서로 죽여야만 하는 사이이다.


무언가를 쌓아봤자 득이 되는 건 없다.


쌓을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살인에 대한 죄책감 뿐이다.


나는 더이상 쌓아선 안 됐다.


어머니를 보살피지 못했다.


아루아를 구해주지 못했다.


이곳의 모두를 죽인다고 해서 나갈 수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발을 내딛은 세상은 내게 의미를 잃은 세상이다.


차라리 이곳의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편이 낫다.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아직 이룰 수 있는 무언가가 남아있을 테니까.



"무시하는 건지, 정신이 나간 건지는 모르겠다만. 내 주위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영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시끄럽다.


나에게는 조용히 자책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를 죽일 여유가 필요하다.


마음을 버릴 자유가 필요하다.


귀를 막았다.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그의 목소리는 손틈으로 새어들었다.



"내게 계획이 하나 있네."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의 말을 엿들었는지 대신 반응했다.



"계획이요? 그게 뭡니까? 들어나봅시다."

"내가 열쇠를 훔쳤네. 이거면 쇠창살을 열 수 있어."


또 다른 누군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게 정말입니까? 헛것을 보는 건 아니시죠?"

"소매치기의 말을 누가 믿기야 하겠냐만은, 이건 상당히 슬프군."


껄껄 웃으며 남자는 짤랑이는 무언가를 꺼냈다.



쉬이이잇.



남자는 윗니와 아랫니의 사이를 빠져나오는 바람소리를 냈다.


이어서 한 여성도 속닥속닥 대화에 끼어들었다.



"열쇠가 있으면 뭐하나요? 무기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이번에는 청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거기서부터 대화는 제멋대로 흘러갔다.



"그거라면 제게 맡겨주세요. 방금 바퀴벌레를 잡았거든요."

"그걸로 뭐하려고?"

"마법에 조금 조예가 있어서 말이죠. 사역마, 라고. 들어들보셨나?"

"뭐가 됐건, 가능성은 충분하군."

"이렇게 함세. 청년이 바퀴벌레를 보내서 정찰을 하고, 정보를 충분히 얻은 다음. 오늘 내로 때를 봐서 탈출합세."


쿡.



옆구리를 찔렸다.


열쇠를 훔친 남자였다.


붕대에 둘둘 감긴 얼굴. 그 속에서 빛나는 에메랄드 빛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자네는 어떡할겐가?"


어느 샌가 나는 고개를 들고,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었다.



"부디, 동행시켜주십쇼."

"그럼 결정이군. 자네는 뭘 할 줄 알지?"


돌연히 질문이 날아들었다.


거짓말을 지어낼 틈도 없었다.


툭하고 거짓말을 내뱉을 수 있을 정도로 교활한 삶을 살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굳이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가 있을까.


이들은 내게 동참여부를 물어보고나서야 그 질문을 던졌다.


나의 억측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들은 무얼 할 수 있는지는 신경쓰지 않고 함께 탈출하기를 원하는게 아닐까.


오랜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맛 좋은 커피를 내릴 줄 압니다."

"그거 좋군. 끝나면 다같이 한 잔 합시다."


...



정찰을 마친 바퀴벌레가 청년의 손바닥 위로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매치기 씨. 지금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가 어떻게 잡혀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했고, 서로에게 별명을 붙여서 부르기로 했다.


우선 열쇠를 준비한 남자가 소매치기.


바퀴벌레를 조종한 청년은 마법사.


유일한 여성을 홍일점.


대화와 계획은 이 셋이 주도했다.


우리는 그들을 리더로 인정했고, 3개의 팀을 꾸렸다.


나는 마약상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폭행범이라 불렸고,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소매치기가 자신의 팀에 영입시켰다.



『자네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아. 단기간에 수라장을 해쳐나온듯하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음에 들어. 마약상을 때린 것도 그렇고.』


이상한 말이었지만, 소매치기니까 그런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가장 별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모두가 손가락을 모아 소매치기를 지목할 것이다.


그도 그럴게, 온몸을 너덜너덜한 붕대로 감싸고 있으니까.

게다가 가끔씩 던지는 조크도 끔찍하게 재미없다.


작'전'을 세운 뒤에는 작'후'도 세워야 한다. 였던가.


혼자서는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모두가 듣자마자 입을 닫아버려서 싸늘함이 흐르고는 했다.


이에 대해서는 각설하기로 하고, 우리는 마법사에게 내부의 구조와 조직원들의 인원수 등을 전달받고 작전을 이어서 세웠다.


우선 이곳은 창고를 개조한 감옥이었다. 건너편에는 식당이 있고, 식당과 감옥을 잇는 복도의 중앙에는 계단이 있다.


사람들이 이곳에 갇히기 전 가지고 있었던 물건들은 윗층에 있지만 그곳에는 경비가 있다고 한다.


포기하고 탈출하는 편이 수월하겠으나, 다반수가 반대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


나는 반대했지만, 결국 찬성측의 의견이 수렴되었다.


다수의 의견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좀도둑이라고 불리는 사내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달라면서 나섰지만 즉시 기각되었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기에 소수보다 사람이 많은 다수의 의견은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


나는 그렇게 설명했고, 좀도둑은 받아들여주었다.


이후에는 또 다시 의견이 갈렸고, 하는 수 없이 의견에 따라 팀원을 조정했다.


나는 의외로 소매치기와 의견이 잘 맞는 것 같아서, 팀을 이동하지 않고 머물렀다.


결과적으로 소매치기의 팀에는 목숨만 부지하면 되는 자.


마법사의 팀에는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싶은 자.


홍일점의 팀에는 소중한 물건을 되찾으려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자기 역할들은 모두 숙지했나?"


소매치기는 한 명씩 눈을 마주쳐가며 각오를 살폈다.


사람들은 그의 눈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와 눈을 마주치고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사람까지 확인을 마친 다음.


소매치기는 열쇠를 꺼내들었다.


조심스럽게 손목을 창살 밖으로 내밀고, 열쇠구멍에 꽂아넣고.


돌렸다.



철컹.



둔탁한 해제음이 들리며 자물쇠가 떨어졌다.



"탈옥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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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100 4 12쪽
24 목적 20.09.12 110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8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3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7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 이기심 20.09.01 131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5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5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6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9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1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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