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66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22 04:19
조회
174
추천
7
글자
11쪽

선택지

DUMMY

"허억···! 허억···!"


아슬아슬했다.


숨이 막혀서 정신을 잃기 1초 전이었다고 말해도 전혀 문제되질 않았다.


그래도 검은 무사히 챙겼다.


호수에서 네 발로 기어나오면서 질질 끌고 나왔다.

꽃들의 위로 널브러져서 부족했던 공기를 폐속으로 쑤셔넣은 다음에야 두 손으로 들어볼 염두가 났다.


첫 감상을 말하자면, 무겁다.


두 손을 모두 쓰지 않고서는 들고 있지 못할 무게. 두 손을 모두 쓰더라도 오랫동안은 들지 못할 무게.


대검이라고 불릴 크기도 아니면서 대검보다 무겁다. 날의 길이가 긴 것도 아니고, 손잡이가 큰 것도 아니다.


길이는 내 팔의 길이와 똑같다고 착각할 정도. 손잡이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는 두께다.


검의 날을 이룬 금속이 심각하게 녹슬어있다는 것과 무게만을 제외하면 모두 완벽하다.


어쩌면 이 검은 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검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될 정도로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벨 수는 있을까···?'


나는 나의 자신감을 걱정하기보다 검날을 뒤덮은 녹에 대해 걱정했다.

검의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무언가를 베어내지는 못할 것 같다. 전체에 끼어든 녹이 금속의 광택을 모두 가려버렸다. 심지어는 날도 무뎌져있고, 중간중간에는 이가 빠져버렸다.

이건 벤다기보다는 후려친다는 생각으로 휘둘러야겠다.


휘두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없는 것보다야 훨 낫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무게. 그리고 벨 수 없는 날.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남은 문제는.



"검집."


검집이 없다. 이 무거운 검을 언제까지고 손에 들고 다닌다면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거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어딘가에 걸고 다닐 수 있는 검집이 필요하다.


없으면 만들라는 말이 있다. 손재주가 썩 좋지는 않지만, 검집의 기능만 해주면 되는 조잡한 모조품이라면 만들 수 있겠지.


주변을 탐색해봤다. 그러다가 단단해보이는 넝쿨을 발견했다. 그것은 어느 나무를 타고 자라나고 있었다. 잡아당겼을 때 제법 단단해서 이거다 싶었다.


대거로 잘라내고, 검에 느슨하게 휘감았다.


그렇게 완성된 검집을 허리에 찼다. 역시나 무겁다. 하지만 손에 계속 들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유사시를 대비해 검을 뽑아보았다. 문제없이 부드럽게 뽑혔다.


내가 직접 만든 것치고는 잘 만들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식사만 해결하면 어떻게든 된다.


내가 여태까지 굶어죽지 않고서 살아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먹지 않고서도 움직일 수 있고, 마시지 않고서도 말을 할 수 있었던 것.

그건 꿈에서 나온 흉측한 갑주의 힘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그가 빌려준 힘이 바닥났다는 것도, 배가 꼬르륵 거림과 동시에 눈치챘다.


이 허기는 나무열매나 나물로는 채워지지 않을 허기였다. 마차에서 내장사냥꾼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마수에게 습격을 받은 뒤로는 먹은 날보다 먹지 않은 날이 더 많았으니까.


이제까지 버틴 것도 용하다.



'고기나 빵은 없을까.'


아루아가 만들어주었던 식사가 그립다. 잘 구워진 토끼 고기가 들어간 샐러드의 맛이 입가를 맴돌았다.


생각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루아는 앞을 보지 못한다고 했었다. 그럼 그녀는 무슨 수로 토끼를 사냥했을까.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우선 활은 아닐 거다. 그리고 엘프 특유의 민첩한 신체를 사용하면 대거로도 사냥할 수 있겠으나, 역시 무리다.


그렇다면 남은 건, 바로 덫이다.


아루아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괴로움을 짊어지고, 주위를 탐색했다. 예상대로 덫이 놓여있었다.

처음에 발견한 덫은 허탕이었지만, 두 번째로 발견한 덫은 사냥감을 보란듯이 전시해놓았다.


목을 조인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죽은 토끼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의 뇌는 아마도 토끼를 본 순간 먹을 거라고 인식해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곧바로 불을 피웠다. 마른 나뭇가지들을 가능한한 가공해서 마찰시키는 방식. 마법을 쓸 줄 모르고, 천부적인 재능은 별로 없는 범인에게는 익숙한 생활기술이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불길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추가로 끼얹고, 토끼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털이 있고 가죽이 붙어있는 사냥감을 직접 손질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빼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잡하긴 하지만 손질에 성공했고, 토끼를 구웠다.


그리고 토끼를 먹었다.


허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적당하다, 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이거면 충분하다. 걸을 수 있고, 검을 들 수 있다. 쓰러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는다.


준비는 끝났다.


남아있는 불안감은 양쪽 볼을 찰싹 때리며 날려버렸다.



"좋아··· 해보자."


...



길드라는 곳이 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요점만 짚어서 말하자면, 모험가들에게 일거리를 주는 곳. 그밖에도 여러 기능들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모험가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다만 그 일거리가 두 종류로 나뉜다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 중 대부분의 모험가에 해당하는 자들이 자세히 알고 있다.


하나는 의뢰. 무언가를 구해오거나, 누군가를 지키거나 하는 포괄적인 업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현상금.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처리하는. 오로지 그것만을 취급하는 고수익 고위험의 업무이다.


보통은 새내기 모험가라면 위험도가 낮은 의뢰를 완수하며 실력을 쌓아올리기 마련이다.


보통은 말이다.


그렇다.


보통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보통이 아닌 새내기 모험가가 서있다.


머릿수는 둘. 종족은 둘다 인간이다.


겉보기에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새내기란 꼬리표를 떼지 못한 모험가 둘은, 어째선지 현상금 게시판 앞에 서있었다.



"저, 저기, 형. 역시 관두는 편이···"

"스루, 빚을 제시간에 다 갚기 위해서는 이것말곤 없어."

"하지만···"

"너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형이라고 불리는 청년은 게시판을 훑어보던 도중 한 장의 종이를 떼었다. 그리고 설명란을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모험가 셋에 마부 하나를 살해. 사르티아 전초기지의 남쪽 대문에서 검문관들이 체포. 사형판결이 내려졌으나, 모종의 수단으로 도주."


그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거다."

"위, 위험하진 않을까?"

"모험가 셋을 살해했다고는 하지만, 검문관들에게 붙잡힐 정도니까 강하지는 않아. 음식에 독을 타거나, 잠을 잘 때를 노린 찌질이겠지. 범행동기는 모르지만, 뭐, 됐어. 이 녀석은 딱 좋은 10골드야."


그의 동생은 체념한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어딨는지는 알아···?"

"남쪽 대문이면 알텐하르크에서 왔을 테고, 거기서 사르티아로 진입을 시도한 거잖아? 그러다가 걸렸고. 그렇다면 녀석은 이곳에 무슨 용무가 있는 거겠지. 반드시 돌아올 거야."


...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면 또다시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밀려온다. 선택하기를 포기하더라도, 그것 또한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선택한 것과 같다.


도망치는 것도, 멈춰서는 것도. 그런 선택지를 선택한 것이다.


도망치는 것도, 멈춰서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늘 진리일 수만은 없다.


모든 선택지는 크고 작은 후회를 떠안고 있으며, 때문에 사람은 덜 후회할 것이라 생각하는 선택지를 고른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지는 없다.

물론,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리지 못하는. 만일 그때 그랬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는 것밖에 못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무능력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갈림길의 앞에서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아루아를 구할 것이냐. 아니면 어머니를 보살필 것이냐.


물론 둘 다 고를 것이다. 하지만 둘 다 동시에 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 쪽을 선택해서 나아가 결과를 얻으면, 나아갔던 길을 되돌아와서 고르지 않았던 길로 가야한다.

나아가는 만큼 되돌아올 때의 시간은 오래 걸리고,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까지의 거리를 나는 알지 못한다.


머리를 쥐어짰다. 고민하고, 검토하고, 신음했다.


그러다가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머니를 보살핀다.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든 가정부를 고용한 다음, 아루아를 구하러 간다.


꿈만 같은 이야기이지만, 내가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을 때에 범죄조직을 부수러간 흑기사 단테가 아루아를 구해준다는 가능성도 존재한다.


반대로도, 마음씨 착한 마을사람들이 아프신 어머니를 간병해주고 있을 거라는 가능성도 있겠지만.



'누가 살인자의 어머니를 보살필까···.'


머릿속에 갇혀있는 억울함이 몸을 돌리고, 등을 떠밀었다.


떠밀리기를 거부하지 않고, 제시된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숲을 빠져나왔다.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흙길 옆으로 다가갔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손을 흔들어서 멈춰세웠다.



"누구십니까?"


마부가 말했다.

나는 준비된 거짓말을 풀어놓았다.



"모험가입니다. 저쪽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마침내 빠져나왔습니다. 돈은, 지금은 없습니다만, 성함과 소속을 말씀해주시면 잊지 않고 지불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는 다소 달랐다.



"아아, 그러시다면 무료로 태워다 드리지요. 안 그래도 어제 살인자가 풀려났다는 소문이 들려와서 호위를 고용할 생각이었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길을 간다는 건 이런 소리였구나.


의심을 사지 않은 이유는 사르티아에서 숲까지의 거리가 하루만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기 때문인가.


어찌됐건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 일이 잘 풀린 건 아니다. 이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안심하기엔 이르다.


생각할 수 있을 때. 생각나는 모든 것을 생각하자.


지금 이 마차가 오른 길은 세르나리아와 알텐하르크의 제 2무역로. 이 길을 따라 알텐하르크까지 가는 건 문제없다. 검문소를 통과하기 전에 내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알텐하르크는 무역이 중심을 이룬 도시이기 때문에 농가가 없다.


즉, 검문소를 통과하고 벽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식량을 보충할 방법이 없다.


고향까지의 거리는 약 이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무식하게 걸어간다는 건 자살행위다.

심지어 지나다니는 마차들도 많은 탓에 눈에 띄기 쉽상.

현상금 게시판을 본 모험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그야말로 끝장이다.


하지만.


그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3 어설픈 입발림 20.09.26 89 3 11쪽
32 보이지 않는 한 가지 +1 20.09.21 95 5 11쪽
31 가호 +1 20.09.20 99 3 13쪽
30 외면했던 과거 20.09.18 129 3 12쪽
29 각성의 탑 +1 20.09.18 101 5 12쪽
28 채점 +1 20.09.16 90 4 12쪽
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10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4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 선택지 +1 20.08.22 174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4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