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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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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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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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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9.20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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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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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가호

DUMMY

검을 들었다.


녹슬고 무뎌져서 보잘것없어진 검이었다.


그것으로 무언가를 베어내기는 고사하고 때려서 부수기라도 한다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자세를 잡았다.


무뤂을 굽히고, 상반신을 비틀어서 베어내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태어나서 수십억, 수백억 번을 연습했던, 일격이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굳게 믿었다. 자신의 검을 두텁게 신뢰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은 그야 진흙투성이에 상처로 얼룩져 더럽고 지저분했지만.


적어도 숨결을 끊어내는 마지막만큼은 작은 꽃 하나라도 피워내보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영웅의 결의에 보답한다고 알려진 명검 아이크 테르시는 끝까지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도 상관없다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지켜낸다면.


그 한 사람의 영웅이라도 될 수 있다면.


누가 뭐라할지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남자는 최후의 일섬을 휘둘렀다.


녹슨 검이 허공을 나아갔다.


영웅을 동경했던 소년의 일격은.


목숨과 맞바꾼 단 한 번의 횡베기는.


용을 살해했다.



...



곧잘 있는 이야기이다.


마을로 쳐들어온 고블린을 쫓아낸 어린아이들이 자신감을 얻어 모험가 놀이를 시작하는 것도.


어린 모험가들이 고블린들에게 붙잡혀 삶을 마감하는 것도.


살아돌아온 아이가 뼈아픈 과거였다며 잊어버리는 것도.


모험이 있고, 마법이 있고, 마수와 마물이 있는 이 세계에서는 흔하고 흔한 이야기이다.


그런 흔하고 흔한 이야기에서는 애매한 친구 두 명을 살리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이야기도 섞여있기는 하다.


하지만 자신은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다고.


리시스는 생각했다.


괴로워했다.


매일 밤을 신음하고 스스로의 추악함에 몸부림쳤다.


그럴 때마다 미치도록 떠올렸다.


이것은 곧잘 있는 이야기라고.


자신은 곧잘 있는 이야기의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라고.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흔하고 흔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것은 곧잘 있는 이야기이니 특별한 일은 아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니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한 일을 겪지 않은 자신은 잘못되었을 리 없는 평범한 인간이다.


그렇다, 평범하다.


평범한 인간이 평범한 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이다.


평범하게 후회하고 평범하게 반성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야기가 되었을 뿐이다.


일주일이 넘는 긴 시간을 이불속에서 보낸 리시스는 그제서야 겨우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괴로워···'


괴로운 회상이었다.


저미는 가슴을 움켜쥐며 눈을 떴다.


여덟 개의 창문, 그리고 그곳에서 들어오는 햇살들의 한가운데에서 뒷짐을 지고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소녀가 보였다.


기척을 깨달은 소녀는 빙글 돌아 자수정의 색을 지닌 눈동자로 일어서는 리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푸른 불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지만 파란 머리칼의 색채 덕분인지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리시스는 그녀의 이름을 문제없이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소감은 어때?"


하레니아의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정적은 흐르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들을 그저 입으로 옮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리시스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한 치의 거짓도 지어내지 않고 솔직하게 내뱉었다.



"아파.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과거가 섞여있었어."

"아플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그건 조금 예상밖인 걸."


예상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듯 하레니아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것은 전생의 네가 가진 기억일수도 있고, 너의 인연이 끌어온 영웅의 기억일지도 몰라.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이건 순전히 내 호기심이기는 한데.


"그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겠니?"


하레니아의 다소곳한 부탁에 리시스는 떠올렸다. 부서지고 깨지고 찌그러지고 녹아내린 흉측한 몰골의 갑주를. 자신에게 꽃잎을 쥐여준 사내를.



"검을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어. 한평생 검만 휘둘렀지. 뛰어난 재능도 막대한 부도 드높은 권력도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어느 하나 지켜내지 못했다.


기구한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게 그의 삶을 이렇게 치부할 자격은 없지만.


애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예 무의미한 인생은 아니었을 거다.



"용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은, 그렇게 많지 않잖아?"

"흐응?"


하레니아는 흥미로움에 코를 울렸다. 탑에서 살아가며 수많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그녀조차도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아주 약간에 해당하는 일부였지만, 그마저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너를 '도서관'에 데려가고 싶은 걸."

"그게 어디야?"

"그런게 있어. 이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적어내려가는 신의 역사서지. 너의 이야기도 그곳에 적히고 있을 거야."


리시스로서는 규모를 가늠하지 못할 장소였지만, 이런 자신의 이야기마저 적혀내려가고 있다는 건 확실히 대단했다.

분명 터무니없는 곳이겠지.


신이란 본래 그런 존재니까, 그들이 창조해낸 건축물들은 그에 걸맞게 터무니없을 것이다.



짝.



하레니아의 손뼉이 경쾌한 소리를 만들었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 가호를 내려줄게."


리시스는 잇따른 그녀의 지시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었다.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하고 의문을 제기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는 편이 더 멋지니까!"였다.


변덕적인 그녀의 성격에 차츰 적응해가는 리시스였다. 그리고, 기사다운 포즈를 취하는 걸 살짝 동경하고 있기도 했다.



"눈을 감고, 떠오르는 문장을 읊어봐."


떠오르는 문장.


그것은 입으로 담기에는 부끄러운 말이었다.


자신은 기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다. 기사를 흉내내고 있는 한낮 평민에다가 나약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닭살이 돋아날 것 같았다.



"빨리!"


신경질 섞인 재촉에 결국 입을 열었다.



"하레니아를 위하여."

"응, 잘했어."


그녀에게 건넨 손등 위로 보드럽고 매끈한 촉감이 와닿았다. 뜨겁다와 따듯하다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온기는 제법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잠깐이기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입술을 가리고 수줍어하는 하레니아가 보였다.



"바람피면 안 된다?"

"그건, 다른 탑에 오르지 말라는 소리야?"

"당연하지. 오르고 싶다면 나에게 허락을 받아. 네가 다른 탑에서 죽으면 나에게도 부담이 오니까."


그녀에게 가는 부담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대화의 흐름에 묻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다만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것쯤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게 당연했다.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의 가호는 어떤 거야?"

"바람과 물, 냉기 그리고 화염. 네 가지가 어우러진 각성, 영웅과의 결합, 끈질긴 생명력과··· 음, 이것저것? 일단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지니게 되었을 거야."

"거저먹기에는 엄청 미안한데···"

"그래서 그 단테 망나니 기사가 개새끼라는 거야. 나 같은 극상위 영령의 탑에 너를 꽂아넣은 거니까."


하지만, 이라며 하레니아는 말을 이었다.



"너 같은 범인(凡人)이 이 탑에 들어와서 시련을 받아봤자 개죽음일 테니까. 1층도 통과못하고 죽어버렸을껄?"


담담하게 현실이라는 폭력을 행사하는 하레니아에게 리시스는 반기를 들지 않았다. 지당하게 맞는 말을 하고 있다고 체념했고, 지금껏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표현해왔으니 딱히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였을 자신의 죽음이 개죽음으로 표현되는 것은 살짝 아팠다.



"그러니까 잘 알아둬. 내가 너에게 부여한 가호는 걸맞지 않아. 분에 넘치는 가호야. 결코 남발해서는 안 돼."


과연. 대가도 없이 막대한 힘을 손에 쥐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기대를 품음과 동시에, 각오도 하고 있었다.


리시스는 그런 성격이었다. 좋은 일이 생겨나면 뒤에 일어날 나쁜 일을 예상하는. 지극히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채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내가 짊어지는 리스크가 뭐지?"


리시스가 설명을 요구하자 하레니아는 허공에 앉았다. 그곳에 보이지 않는 의자라도 있는 걸까. 그녀의 자세가 무척이나 편안해보였다.


영령에게는 바닥과 공중의 개념이 없는듯했다.


그녀는 왼다리를 오른다리에 꼬고, 가느다란 검지를 세우며 입술을 움직였다.



"첫 번째는 보이지 않는 한 가지가 얼어붙을 거야."


두 번째. 중지를 피며 담담함에 진지함을 덧붙였다.



"너의 자신의 일부가 산산히 조각날 거야."


마지막으로 세 번째. 약지를 펴고 잠깐을 망설였다. 어떻게 말을 해야 그가 세 번째까지 가지 않을지 필사적으로 궁리했다.


그러나 이대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하레니아는 그의 과거를 들여다보았고, 그가 지금 구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에게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해도 닿지 않으리라.


하레니아는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세 번째. 세 번째가 마지막이야. 너의 영혼에는 재생할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지고, 육신은 죽어 없어질 거야."


명심할게. 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언젠가 다시 찾아올게. 먹고 싶은 거라던가, 있어?"


리시스는 요리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인간족이 만들어낸 요리의 대부분은 재료만 있다면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상의 게으름에 파묻힌 실력은 녹슬어가고 있었지만 녹슨 검일지라도 무언가를 때려부수는 건 가능했다. 리시스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으음···"


하레니아는 신음하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은하수의 모조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취향은 수백 년간 변치 않고 있었다.



"나는 영령이니까 먹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고르라면 꿀을 잔뜩 올린 펜케이크가 좋겠어."

"노력해볼게."

"응, 노력해줘."


하레니아는 웃으며 손 흔들었다.


대화는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영령은 어디까지나 혼(魂)에 불과하다.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기에는 다소 힘이 든다. 말을 꺼내는 것도, 맞닿는 것도. 기사의 손등에 키스하는 것도.


상당한 체력을 소비한다.

그러니 그를 돌려보낼 여유가 남아있는 지금 대화를 끝마쳐야만 했다.


손을 뻗고,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고 그를 대뜸 전송시켰다.


갑자기 모르는 풍경이 펼쳐졌을 테니 제법 놀랐겠지.


하레니아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홀로 남은 탑의 최상층에는 여운에 잠길새도 없이 적막이 내려앉았다.


쓸쓸하다고는 생각해도, 별 수 없었다. 그래서 익숙해진지 오래다.



"묘지기는 잘 있으려나~?"


오랜 벗과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작게 노래했다.



...



푸른빛이 시야를 감쌌다.


눈부시다고 느꼈을 때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펼쳐진 풍경은 낯설기 그지없었고, 하레니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보였다.


하늘색. 하늘이니까 하늘색인 건 당연하다.


고개를 내려서 두리번거렸다.



"없어···?"


하레니아의 탑이 없었다.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전제가 틀렸다.


탑은 건축물이다. 건축물이 움직인다는 건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탑 중에서 움직이는 탑은 없었다.


게다가 움직인다고 해서 이렇게 빠르게 사라진다니, 말이 안 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탑 중에서 그런 건 없었다.


이상했다.


고개를 뒤흔들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다.


돌아가야 한다.


단테의 말을 떠올렸다.



『밀수 루트를 이용한다면 열흘은 걸리겠지. 다만, 그들이 밀수 루트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면.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다.』


'하지만···'


몸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피로가 쏟아졌다.


눈꺼풀이 감기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걸맞지 않은 가호를 짊어진 부담이 제법 컸다.


이대로 쓰러질 바에는 근처의 마을에서 쉬는 편이 좋겠지.


주위를 둘러봤다.


언덕 아래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성벽도 없고 문지기도 없다.


마물의 위협에 노출되어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나, 마물의 위협이 주변에 없기에 마을이 생겨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저 마을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를 앞서 고민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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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어설픈 입발림 20.09.26 89 3 11쪽
32 보이지 않는 한 가지 +1 20.09.21 95 5 11쪽
» 가호 +1 20.09.20 100 3 13쪽
30 외면했던 과거 20.09.18 129 3 12쪽
29 각성의 탑 +1 20.09.18 101 5 12쪽
28 채점 +1 20.09.16 90 4 12쪽
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10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5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5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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