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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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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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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9.14 05:45
조회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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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12쪽

깨져버린 기대

DUMMY

6골드 97실버 4쿠퍼.


필요한 무기들을 사고, 특수상업지구로 이동하여 여관을 잡고 남은 돈이었다.


골드라는 단위를 새삼 실감하며 번지르르한 무기들에 검은 물감을 칠했다.


여관은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서 검을 휘두를 공터가 딸린 장소를 선정했다.


태양이 내일을 향해 먼 여행을 떠나갈 때마다 손가락마디가 찢어지는 것조차 잊고서 단련에 매진했다.


검에서 창으로, 창에서 대거로, 대거에서 도끼로.


검을 휘두르고 창을 찌르고 대거를 던지고 도끼를 찍었다.


진작 이런 열정으로 살아왔더라면.


미리 이런 집념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런 식으로 후회를 곱씹을 수 있는 것은 피땀을 떨어뜨리는 손에 붕대를 감을 때뿐이었다.


나에게는 결국 재능도 없었고, 행운도 없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이 노력밖에 없었고 노력밖에 하지 않았으니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결과물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은 나에게는 어떠한 결과물도 나오지 않는게 당연했다.



'어느 쪽이건 맞는 말이지만···'


킥킥 하고 웃음이 뛰쳐나왔다.


잭을 따라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를 단편적인 정보로 사고하여 판별하는 것은 난해했다.


우선 정보가 없고, 없는 정보를 메꿔줄 인맥도 없다.


단테가 있었다면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잭은 적이 아닐수도 있겠으나, 일단 아군은 절대로 아니다.


적이라고 선을 그어놓는 편이 좋겠지.


내가 백이라고 한다면 흑에 가까운 회색이다.



'그래봤자 내가 지겠지···'


그렇기에 한 번이라도 많은 검을 휘둘러야만 한다.


하나라도 많은 변수를 떠올려야 한다.


그러니까.



'아직, 잠들 수는···'


구부러지는 무릎을 지탱하고자 검으로 땅을 짚었다.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는지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새벽의 한기를 머금은 자갈들이 팔꿈치를 찌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깊게 쓰러졌다.



...



다시 눈을 뜬 것은 떠올랐던 해가 저물어갈 즈음이었다.



'얼마나 잔 거지···?'


알기가 두려워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주먹을 쥐었다.


이틀동안 학대받은 손가락들은 굳은 살도 만들지 못하고 찢어져 있었다.

말라붙어가는 붕대의 촉감과 벌어진 살결을 파고드는 손톱의 아찔함이 말을 꺼낼 용기를 쥐여주었다.



"얼마나 잠들어있었습니까?"


고개를 돌려 말을 건 그곳에는 한 소녀가 서있었다.


쫑긋한 귀, 복슬복슬한 꼬리. 하지만 얼굴을 비롯한 피부에 털은 보이지 않는 소녀.


서로의 이름을 소개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상식이었지만, 카트랑이 말해주기를 '하쿠스'라는 혼혈이라고 한다.


하프와 페쿠스가 합쳐져서 생겨난 말이라는 모양이다.



"으음, 하루는 안 지났을 걸요?"


카트랑은 여우의 것처럼 생긴 꼬리를 빙빙 돌리며 답해주었다.


안도의 한숨.


그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옮겨주셨습니까?"


으음 하고 신음하며 카트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무칙칙한 갑옷을 입은 기사님이었어요. 매너도 좋으시고, 돈도 많으시고, 뭐랄까, 댄디하다는 느낌? 안쪽에는 분명 꽃미남이 들어있을 거에요!"


두 손을 꼬옥 모아서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의 시나리오를 무덤까지 생각하는 카트랑이었지만, 그녀의 중얼거림에 기울여줄 나의 귀는 먹먹하게 막혀있었다.


거무칙칙한 갑옷.


그것이 가리키는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자, 나의 몸이 벌떡이라는 표현조차 아깝지 않을 속도로 기상하여 카트랑을 붙들고 있었다.



"단테가, 단테가 뭐라고 했지? 어디로 갔어? 언제였던 거야? 이곳에 왜 왔어? 조직을 부순 거야? 아루아는?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는? 경매장은 어떻게 됐어?"

"으, 으아아아! 로스리 씨! 진정하세요!"


엉겨붙어오는 나의 뺨을 거칠게 밀쳐내며 카트랑은 거리를 벌렸다.


옷에 뭍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고 옷차림을 정돈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머릿속의 혼란을 자중시켰다.


고개를 저어서 사사로운 감정들을 떨쳐냈다.


심호흡을 반복하여 진정한 다음, 깜짝 놀랐을 그녀에게 사과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평정심을 잃어버릴 줄은 나도 모르는 일이었어서 나까지도 깜짝 놀랐지만.


이번에는 나답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나답다는게 뭔지는 잘 몰라도, 타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짓만은 극구 사양하며 살아온 나의 인생에 걸맞지 않은 언행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하는데.



"미안··· 나는 아무래도 구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아···"

"괜찮아요, 알면 됐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카트랑은 잠시 망설이는듯했다. 그녀의 귀와 꼬리가 힘을 잃고 추욱 떨어졌다.



"미안하다, 고 전해달래요."

"뭐···?"

"그, 저어, 그게 그러니까아···!"


울먹이는 카트랑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나의 얼굴이 심각하게 일그러졌음을 깨닫고는 얼굴을 가리고 어루만졌다.



"미안해··· 너한테 화가 난게 아니야···"


나에게 웃어주는 사람을 본지가 오래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법을 까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눈과 눈을 마주보고, 서로를 존중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 속을 살아가는 사람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예전의 나는 어떤 식으로 대화했더라.


떠오르지 않아서 나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꼬마 아가씨. 미워해도 괜찮습니다. 그래도, 울지는 말아주세요···"


잠시나마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주었던 인연을 나는 내 입으로 끊어버렸다.


어리석은 자신을 한탄하는 사치라곤 용납되지 않았다.



끼익.



낡은 문고리가 소리를 내었다.


혼자만이 남은 방안에서, 숨을 내쉬었다.



"후우···"


한 번의 심호흡.


오직 그것만으로 격류하던 어지러움이 해소되었다.


떠나가지 않은 감정들은 고개를 돌리면 보이지 않을 크기였기에, 단테의 말을 곱씹으며 그 의미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인가···'


잠잠했던 무언가가 범람했다.


솟구쳐서 거칠게 폭발했다.



쿵.



벽이 울렸다.


주먹이 아파왔다.


얼얼하다, 로는 부족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쿵.


쿵.


쿵.



머리를 박았다.


격하게 요동치는 숨결을 끝까지 내뱉으며 머리를 식혔다.



"지켜준다면서···!"


나는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는 심정을 깨달았다.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멋진 영웅이 끌어올려주기를 바랐다.


나는 가장 먼저 죽여둬야만 했던 감정을 도외시하고 있었다.



'아아, 괜찮아, 그래···'


그에게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세상에 도움도 안 되는 나 하나쯤이야 별 대수도 아니다.


더한 대의가 있다면 내버려두고 잊어버리는 편이 합리적이다.


나 같은 놈 하나를 구할 시간에, 두 명의 인간을 구해낸다면.


나는 납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정도면 충분하다.


애초부터 영웅이라 불리는 자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나에게 신경쓰는 것은 크나큰 낭비다.


이제 됐다.



'이젠 됐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니 적어도.


아루아를 구하겠다는 염원 하나만은 이루어보려고 한다.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손으로.



'아루아만이라도···!'


지금껏 순응하며 살아온 인생이다.


세상에 해를 끼쳤던 적은 단언코 없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작은 반항을 부린다고 해도.


나 하나가 사라지기를 마음먹는다고 해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가리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지켜낼 수 있었던 그녀가.


하루라도 행복하게 살아준다면.


더없이 기쁘겠지.



"하하···"


나지막이 웃으며 검을 들었다.



...



도저히 그냥은 갈 수 없어서 빈 방에 남은 돈들을 전부 놔두었다.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후회할 날이 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와 지도를 따라 걸어가며 차마 버리지 못한 4쿠퍼로 4쿠퍼짜리 샌드위치를 샀다.


페쿠스 특유의 순한 입맛에 맞추어진 음식이었기에 싱겁다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배만 채우면 그만인 나는 불만없이 먹어치웠다.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서 거리를 거닐면 사람들의 시선이 딸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주목을 받아선 안 되는 입장인 나는 서둘러서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잭이 표시해준 대저택의 주위에는 숨을만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고위 귀족이나 대상인들이 사는 동네였기에, 걸어서 들어갔다가는 금새 발각될게 뻔했다.


선택한 진입로는 결국 하수도였다.


가져온 양초에 불을 지피고, 자그마한 불빛에 의지하며 하수도를 걸어갔다.


코를 찌르는 역한 악취. 거기에 불빛이 추가되자, 물을 타고 떠내려가는 오물의 덩어리까지 엿보였다.



'···목소리다.'


잭의 꺼림칙한 친절함은 지도 위로 덧그린 하수도의 구조도에 드러나 있었다.


그의 그림실력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이 '경매장'의 하수도이다.


촛불을 꺼뜨리고 고개를 내밀어 사람의 수를 확인했다.


세 명.


성가시다.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잠시 대화를 엿들었다.



"이번에 들어온 그 엘프년, 얼마에 팔리려나?"

"팔려는 것 같지는 않던뎁쇼?"

"아, 섹스하고 싶다."

"큰 소리로 말하지마 미친놈아!"

"어차피 우리밖에 없잖아요."


나의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몸을 숙이고, 대거를 꺼내들며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제대로 숨어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들의 시선이 나에게 옮겨붙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심혈을 기울인 정조준.


단숨의 집중력은 적의 미간과 나의 손끝에 끌어당기는 실을 자아냈다.


실이 끌어당기듯, 실에 끌려들어가듯.


대거가 수중을 떠나갔다.



털썩.



정확하게 미간을 꿰뚫린 남자가 트럼프 카드들을 떨어뜨리며 자빠져 쓰러졌다.


오른손에서 대거가 떠나가자마자 나의 왼손은 물 흐르듯 창자루를 붙잡았다.


가장 먼 사람을 처리한 다음은 그 다음으로 먼 사람을 처리해야 했다.


내가 대거로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을 수 있는 거리보다 가깝다는 것은 창으로 목을 찔러죽일 수 있는 거리임을 나타냈다.


빠르게 달려들어 준비해둔 창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내질렀다.



서걱.



살을 가르는 아찔한 감각.


하지만 몇 번이고 되새기며 익숙해져버렸다.



"커, 커헉···!"


목을 찔린 사내는 창날을 붙잡은 채로 피를 토하다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이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내가 처리한 것은 나에게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두 명.


남은 하나는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다.


입을 막아서 소리를 억눌렀다.


남자의 비명이 손가락을 타고 울려퍼졌다.


그래봤자 가로막힌 목소리다.


듣고 있는 건 나 하나뿐이다.


창을 찌름과 동시에 뽑아두었던 대거로 목을 찔렀다.



서걱.



손의 붕대가 피에 젖으면 무기를 잡기 힘들어진다.


대거를 꽂아주며 손을 떼었다.


목을 찔렸으니 더는 소리치지 못하겠지.



털썩.



마지막 한 명까지 숨을 거두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무기들을 회수했다.


창을 뽑고, 피를 닦아냈다.


대거를 거두고, 엉겨붙은 뇌수를 털어냈다.


시체들을 뒤적이자 열쇠 하나가 나왔다.


계단을 가로막은 철창을 열어놓고, 붕대에 휘감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건 없었다.


죽였다는 감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을 유발하진 못했다.



'···나쁘지, 않아···'


하수도를 따라 흘러가는 오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을 고민하고 시체들을 떠내려보냈다.


켜져있던 램프의 불을 끄고,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금방 갈게, 아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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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독백 +2 20.09.10 128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7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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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연전(連戰) 20.08.28 15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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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6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9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1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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