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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68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28 01:59
조회
154
추천
5
글자
11쪽

연전(連戰)

DUMMY

“눈 감아.”


남자의 눈꺼풀이 감긴다.


약간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는 거다.


칼날을 들이댄 채로 몸을 일으켰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금씩 비켜나다가 검을 빼앗았다.


내던진 검을 회수하고, 거기서부터는 소리를 감추지 않고 달렸다.


바지가 진흙투성이가 되어가는 것도 잊고서 무작정 달려나갔다.



“이야아아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달려와서 몸을 던진다.


피할 겨를이 없다.


부딪히고, 뒤얽히고, 쓰러진다.


혼자서만 왔을 거라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그를 나 혼자만의 힘으로 제압하는 순간부터 협력자가 있을 거라고 가정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도망친 거지만 결국에는 맞닥뜨렸다.



철푸덕.



그런 소리가 났지만 무슨 소리인지 구별할 여유는 남아있지 않았다.


쓰러지자마자 주먹이 날아들었고, 주먹을 날렸다.


시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먼저 얻어맞은 탓에 상대의 얼굴이 어딨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한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주먹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기도 하고 옷에 스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대로 한 방 먹였을 때부터는 모두 적중시켰다.


때리고 맞는다.


맞고 때린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주먹질의 순환에 갇혔다.


아드레날린, 이라고 했던가.


인간이 죽을 위험에 처하면 뇌에서 그런 물질을 분비한다고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던 의사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그게 분비되고 있는 것 같다.


심장이 울린다.


뇌가 떨린다.


숨이 거칠고, 힘이 솟아난다.


그래봤자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밑에 깔려서 얼굴만 집요하게 얻어맞는다는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무식하게 주먹만 날리고 있다가는 내가 먼저 쓰러진다.


얻어맞아 돌아간 시야의 구석에서 대거의 손잡이가 보였다.


나의 것은 아니었다.


맹렬한 공세를 퍼붓는 상대의 것이었다.


왜 저걸로 공격하지 않은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한 손으로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허공에 날리는 것보다 안면을 타격하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상대가 피해버린다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시간은 충분했고, 주의도 끌었다.


본래의 목적은 완수했다.



스릉.



대거를 빼앗았다.


빼앗고, 일부로 허공에 휘둘렀다.



“우왓?!”


위에 올라탄 남자가 뒤로 자빠졌다.


놓치지 않고 다리에 대거를 꽂았다.



푹.



예리한 대거는 옷을 찢고, 살을 가르고, 뼈를 찔렀다.


그 모든 감각이 칼날을 따라 손잡이를 타고 전해졌다.



“끄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빗소리를 뚫고 퍼져갔다.


피가, 흘러나온다.


손이 떨린다.


피다.


인간의 피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


손에 묻어있다.


뜨겁다.


요동친다.


무엇이?

잘 모르겠다.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다.


뭐야, 이거.



찌걱.



대거를 뽑았다.


피가 솟구친다.



“아아아악!”


나는 이때 깨달았다.


여태까지 나의 삶에 존재했던 모든 죄책감과 죄악감은 거짓과 착각으로 이루어진 자만에 불과했다는 것을.


옷을 찢는 감각은 거의 없었다.


살을 가를 때.


살을 가르고 나아간 칼날이 뼈를 찌를 때.


나의 겉모습을 이룬 살갗이 떨어져나가듯 전율했다.



“미안···!”


이런 말로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런데도 다른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미안미안미안미안미안미안······!”


일어나 달렸다. 달리면서도 미안을 되풀이했다.


어디로 달리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다리로 달리고 있으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뒤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쫓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붙잡히게 되면 망가질 것 같았다.


어디가 망가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망가진다는 건 확실하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어떤 것도 살펴볼 수 없었다.


발밑을 살피지 못했고, 그래서 넘어졌다.


그곳은 경사가 져있었다.


넘어진 몸은 한바탕 진흙탕을 구른 다음에야 멈춰섰다.


이름조차 듣지 못한 청년의 대거가 보였다.


거센 비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피는 씻겨 내려간 뒤였다.


나를 덮친 남자가 나를 찌르지 않은 이유는 뭘까.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다는 상냥함에서 비롯된 걸지도 모른다.


사람을 찔렀을 때에 삼켜드는 죄책감이 무서웠던 건지도 모른다.


등골을 찍어누르는 죄악감이 버거웠던 건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나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나에게 있어서 모른다는 것은 합리화를 시키기엔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되었다.



“후우···”


모든 합리화를 끝내고 냉정해진 나 자신이 보였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나간 일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오로지 이 한 마디만으로 나는 죄책감을 덜어내었다.


눈앞에서 사람 셋이 내장을 파먹히는 걸 봤는데 이 까짓게 뭐 대수냐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어쩌면 이게 나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모른다.


이거고 저거고 다 모른다.


나조차도 나에 대해서 모른다.


그리고 방금 언급했듯이, 모른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합리화를 시키기 더없이 좋은 구실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도 합리화 시켰다.



‘이런 걸 고민하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몸을 털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야 그렇겠지.


마차로 반나절이나 걸리는 거리를 두 다리로 걸어왔다. 그리고 두 명의 성인 남성과 치고 박고 싸우기까지 했다.


일반인치고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


신체를 혹독하게 학대해버렸다.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건 당연하다.


거기에 빼앗은 무기 두 자루도 추가되었다.


무겁다.


몹시 무겁다.


그래도 쥐어짰다.


포기하고 스러지려는 나를 채찍질하고 쥐어짜고 호통쳤다.


아직 이르다.


아직, 아직이다.


걸어라. 서둘러라.


이 비가 그치기 전에.


저 안으로 들어가라.


검문소가 보였다.


그곳에는 두 명의 검문관이 잡담을 나누다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 어이! 거기! 후드를 벗어라!"


'···벗어봤자 바뀌는 건 없잖아.'


순순히 따라줬다가 호된 꼴을 당했으니, 지시대로 움직여줄 리가 없다.


대거 두 자루를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지는 않았다.


이 숨을 내뱉기 전에 두 명을 처리해야만 한다.



"치, 침입자다!"


한 남자가 검문소의 안으로 소리쳤다.


검문관은 문 하나당 4명.


탈출한 사형수를 잡기 위해 경비를 강화했다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4개.


한 명당 하나씩.


흉측한 갑주가 준 검을 제외하고 3개를 버리자. 그렇지 않고선 지나갈 수 없다.


버거운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었다.



찰박.



진흙물이 튀기는 소리.


기세를 이어서 달렸다.


창을 든 검문관들이 태세를 갖추기 전에 무너뜨려야만 한다.


총 4명. 거리는 각각 다르다.


우선 앞에 있는 두 명부터.


어떻게 할지는 전부 생각해두었다.


이제 그 생각이 들어맞았는지 검토할 시간이다.


나란히 달려오는 두 명.


둘 중 하나의 얼굴을 향해 대거를 던진다.


정확하게.



"큭?!"


예상대로 남자는 창을 놓고 팔을 들어올려 대거를 막았다.


초짜가 던진 대거의 최후는 불보듯 뻔했다.


무엇하나 가르지 못하고 손잡이로 남자의 팔을 타격한 다음 처참하게 떨어졌다.


그걸로 잠깐의 틈이 생겨났다.


다른 대거 하나를 남은 한 명에게 던졌다.


그 역시 창을 내려놓고 팔을 들어올려서 대거를 막았다.


두 사람에게는 피한다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전력을 다해 던진 대거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다.


그리고 무시한다는 선택지는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가로막고 있다.


뒤에서 달려오는 동료에 대한 믿음도 한몫했겠지.


좋다.


순조롭게 풀리고 있다.


이제 남은 둘.


검문관들이 창을 들기 전에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별로 없다.



"후우···"


숨을 내쉬며 검 하나를 뽑아들었다.


남은 검은 두 자루.


이번 건 크고 무겁다.


하지만 던진다는 예정은 변하지 않는다.



"으랴아!"


기합과 함께 있는 힘껏 검을 던졌다.


노리는 건 무릎.


대거와 달리 검은 날이 길고 무거워서 안면에 던지면 위험하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다.


날아간 검은 상대의 정강이를 타격했다.

일상생활에서 딱딱한 가구에 정강이를 부딪혀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얼마나 아픈지.



"끄으윽···!"


저 남자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거다.


남은 건 한 명.


아니, 세 명.


하지만 두 명은 뒤에 있다.


이 한 명을 일순간에 제압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녹슨 검을 뽑았다.


창날이 날아온다.


치명적이다.


몸의 정중앙을 노린 찌르기.


이건 죽일 작정을 하고서 내지른 거다.


하지만 죽일 작정으로 내지른 창에 죽는 결말은 받이들일 수 없다.


그것을 나의 몸은 나보다도 먼저 이해하고 있었다.



"크흑···!"


창날을 주먹으로 붙잡았다.


주먹이 꿰뚫린다.


그럼에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창날은 점차 깊게 파고들고, 베어낸다.


살을 가르고, 근육을 끊는다.


그래서 그게 뭐 대수인가.


이대로 멈춰섰다가는 죽는다.


지켜내지 못한다.


하지만 살고 싶다.


지켜내고 싶다.


그러니까.


검을 휘두른다.



"우왓?!"


남자는 창에서 손을 떼었다.


손목이 부러지고 싶지는 않았겠지.



뚝.



검을 휘두른 손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


녹슨 검의 무게는 두 손으로도 버티기 힘들다.


그런 검을 땅에서 하늘을 향해 한 손으로 힘껏 휘둘렀다.


팔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도, 이걸로 성공이다.


왼손을 파고든 창날을 쥐고, 사방으로 마구 휘둘렀다.


검문관들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막대기를 잡지 못했다.


충분히 거리가 벌어진 다음부터는 뒤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죽기살기로 달렸다.


골목을 돌고, 상자들을 널브러뜨리고, 담장을 넘었다.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보니까 됐다, 라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거친 숨을 차근차근 고르며 남은 무기를 확인했다.


방금 빼앗은 창과 녹슨 검.


딱히 이렇다할 사용법이 떠오르지 않는 애매한 조합이었다.



"그쪽은 없나?!"

"없습니다!"

"그럼 저쪽으로 가!"


나를 찾아 헤매는 병사들의 목청이 거리의 곳곳에서 들려왔다.


이곳도 안전하진 않겠지.


들키지 않을 만한 곳은 없으려나.


주위를 살펴봤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검만큼 녹슨 하수도의 뚜껑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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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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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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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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