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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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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61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30 03:14
조회
146
추천
7
글자
12쪽

암시장

DUMMY

눈앞이 검다.


횃불까진 아니더라도 성냥 한 개비가 절실했다.


냄새는 구토가 올라올 정도로 역했으나, 다소 시간이 지나자 코가 마비되기라도 한듯이 적응되었다.


행여나 썩어 문드러진 건 아닐지 걱정하며 벽을 짚고 나아갔다.


발밑이 질척하지는 않았다.


그에 관해서는 이곳을 만든 설계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분명 사려가 깊은 사람이겠지.


오물이 지나가는 수로의 옆에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길을 터놓았다.


덕분에 끔찍하게 더러운 경험을 하지 않고도 하수도를 거닐 수 있었다.


불만이 하나 있다면 종종 벽을 짚은 손에 끈적하고 냄새나는 무언가가 묻어나오는 것.


그것과 냄새만 제외하면 이보다 좋은 통로는 없다고 단언할 자신이 있었다.


사방에 적막이 내려앉아 있다.


소리라고 한다면 나의 발소리와 오물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소리.


두 가지를 제외하면 정적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장소였다.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 탓에 눈꺼풀이 감기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잠시만 눈을 붙여도 되지 않을까.


문득 스쳐지나간 욕망과 온몸에 찌들은 피로를 날려보낼 방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에는 짊어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등에 엎힌 피로는 점차 크기를 부풀리더니,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있는 의지를 좀먹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이 감겼다.


하도 어두워서 내가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조차 하지 못했다.


발걸음이 느려지고, 무릎이 꺾여갔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을 반쯤 기대고 꾸벅꾸벅 졸며 따라가던 벽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주저앉아 수마에게 끌려갔겠지.


사실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오른쪽으로 꺾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반쯤 자고 있던 나의 머리는 벽이 사라졌다고 생각했고,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세웠다.


참으로 배려심 깊은 벽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 뒤였다.


정신을 차리고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멀리서 일렁이는 불빛.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


사람의 수는 적어도 둘 이상인듯하다.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으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벌써 쫓아온 건가···?'


검문소를 돌파하고 하수도에 들어오기까지 지체된 시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나는 곧바로 몸을 숨기고 내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검토했다.


첫 번째, 나의 행동을 전부 예측해내는 천재 검문관이 있다.


두 번째, 본래 사르티아 전초기지의 하수도를 순찰하는 병사들이 있다.


세 번째, 다른 용무로 이곳을 찾아온 누군가가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기각이다. 나의 행동을 전부 예측해내는 천재가 검문관으로 있을 리가 없다. 보다 높은 직위에 서있겠지.


그 천재가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며 희열을 느끼는 변태가 아닌 이상은 말이다.


천재가 변태가 맞는다면, 그때는 진짜 유감 그 자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을 테니 기각하는 게 맞다.


남은 가능성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그리고 두 번째도 배제하기로 하자.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소리가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고 있다.


그렇다는 건 목소리의 주인들은 머물러있다는 것이고, 순찰을 도는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순찰병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거라는 가능성도 존재는 한다.


하지만 인간족의 제 2의 수도라고도 불리는 사르티아의 순찰병들이 나태함에 찌들어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같잖은 환상과 동경을 보존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으나, 세 번째 가능성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다가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소 억지스런 소거법이었지만.


저 불빛에 다가갈 용기를 지어내기엔 충분했다.


어찌됐건, 오물에 하반신을 담지 않는 이상은 불빛과 말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어진 유일한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멈춰서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다리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들이 말하는 단어들이 구분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값이 싸군."

"얼마 전에 대량으로 들어와서 말이야."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엿들은 생각은 없었다.


괜히 엿듣다가 시비라도 걸려오면 맞설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갈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이상 휘말려선 안 됐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무언가를 거래하는 남성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검은 가루를 거래하고 있었다. 화약 같지는 않았다. 화약과는 다른 무언가. 은빛을 지닌 동전들을 주머니에 한가득 담아서 거래할 정도로 값비싼 가루였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당당하게 거래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


그것을 깨닫자 한 가지 의문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당당하게 거래할 물건은 아니다.


그렇다면 거래하는 모습은 제3자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을 거다.


즉, 저들은 나를 지나가게 놔두는 것보다 붙잡아서 어떤 식으로든 입막음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왜 붙잡지 않은 거지···?'


비에 젖은 옷과 피부의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찜찜함이 가슴 한 켠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머지않아 그 찜찜함은 사라졌다.


늘어선 불빛과 썩은 판자들을 조잡하게 이어붙여 만든 노점들을 보았을 때.


가지고 있던 의혹이 풀려났다.


그들이 나를 붙잡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거래가 당당했기 때문이었다.


불법적인 거래를 하기 위해 열린 시장에서 불법적인 거래를 하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정상적이었다.



"암시장···?"


직접 입으로 말하고도 체감이 되지 않았다.


생소하고도 기이한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 오가는 돈은 대부분이 은빛, 심지어는 금빛 동전들도 낯설지 않게 보였다.


1골드마저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나였다.


불법적인 물건들을 판매하는 장소라고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골드라는 단위를 거리낌없이 입에 올리는 상인들과 호탕하게 건네주는 고객들의 금전감각은 비정상적이었다.


이곳에서의 비정상은 나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구태여 받아들일 필욘 없었다. 지나가면 그만이니까.


주위를 지나치게 둘러봤다간 수상한 자라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한쪽만을 보고 갔다간 진열대에 시선을 빼앗겨 누군가와 부딪힐 수도 있었다.


앞만을 주시하며 모든 소리와 불법상품을 무시하고 걸어나갔다.


그러던 도중 도저히 무시하지 못한 소리에 걸음을 멈춰버렸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젊고 빼빼 마른 청년이었다.


그는 봉지에 담긴 검은 가루를 높이 들어올려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내장사냥꾼의 마약 팝니다! 싸게 드려요! 방금 들어온 신선한 마약이에요!"


나의 얼굴에서 얼이 빠져나갔다. 고개가 끼기긱 돌아갔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뭐···?"


내장사냥꾼.


그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두 눈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일의 원흉이자, 나의 원수가 되는 마수였다.


이름이라도 알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단테에게 물어봤었다.


차라리 물어보지 않았으면.


그렇게 후회하지만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아니지.


감정은 이미 한계까지 차있었다.


오래 전부터 포화상태였다.


더는 차오를 수가 없었다.


분명 그랬을 텐데.


생겨나버렸다.


터져버렸다.


나의 인생이 고작 마약 한 자루 때문에 무너졌다고 생각한 순간.


이름조차 모르는 청년의 멱살을 붙잡고,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실수였다.


불찰이였다.


이성적이지 못했다.


침착하지 못했다.


무시하고 걸어갔으면 모두 완만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분명, 분명 그럴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왜 참지 못했던 걸까.



...



춥다는 감각이 정신을 일깨웠다.


한기가 들어찬 숨을 내쉬며 몸을 움츠렸다.



'여기는···'


기억이 모호했다.


마약을 팔고 있던 청년을 때렸다.


때리고, 때리고, 때렸다.


그의 이빨을 서너 개는 부쉈다.


코를 찌그러뜨렸고, 눈에 피멍을 새겼다.


거기까지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기억은 얼얼하고 뻐근한 뒷통수의 통증에 의해 지워져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철창이 보였다.



'감옥인가···'


결국 잡혀버린 건가.


암시장에서 소란을 피웠고, 누군가에게 뒷통수를 얻어맞아 기절했다. 그리고 나를 기절시킨 누군가는 나를 군에 맡겼고, 현상금을 받아갔다.


이것이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시나리오였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불보듯 뻔했다.


무기도 빼앗긴 채로 감옥에 갇힌 나는 저번처럼 서서히 마음을 잃어가다가 사형을 당하고 죽겠지.


어머니를 보살피지도 못하고, 아루아를 구해내지도 못한다는 최악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씨발···!"



하지 않으려고 했던 욕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는 왜 이렇게 병신같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건 엄연한 내 잘못이었으니까.


수습해야만 한다.


한순간의 감정과 충동에 휘말린 나에게 포기할 권리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을···'


철컹.



그런 소리가 났다.


철창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철창은 없었다.


열려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나는 천장이 떨어질듯한 소란스러움에 위화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팟.



천장에서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어둠에 익숙했던 눈이 찔리는 것만 같아서 눈을 가리고 천천히 적응해나갔다.


"자! 드디어 시작입니다! 오늘의 콜로세움!"


영문 모를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어서 폭발적인 환호가 들려왔다.


겨우 적응하는데에 성공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이 보였다.


사람. 사람. 사람. 사람.


사방이 온통 사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거리가 멀다.


그들은 높은 벽의 위에 앉아있었다.


계단처럼 생긴 객석에 앉아서 검은 가루를 들이마시거나, 쟁반을 든 여성에게 돈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나는 저 녀석에게 걸겠어!"

"나는 왼쪽!"

"역배팅이다! 오른쪽!"


이상한 소리가 오고갔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저들이 누구인지.


추측하기도 전에 우락부락하게 근육을 붙인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테이블을 통째로 들고 있었다.


테이블의 위에는 여러 쇳덩이들이 올라가 있었다.


그것들은 날카롭기도 했고, 뾰족하기도 했고, 뭉특하기도 했다.



"이것들은 다 뭐야···?"


남자에게 물었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엄지로 어딘가를 가리키기만 했다.


고개를 돌려 엄지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활짝 열린 철창과 처음 보는 누군가가 서있었다.


누군가의 곁에도 나의 곁에 있는 것과 똑같은 테이블이 놓여져있었다.



'설마···'


숨을 들이켰다.


차마 내뱉는 건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혀버렸다.


높은 곳에 앉은 관중들과 무대에 선 사회자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자! 무기를 골라주세요!"


사회자의 안내가 경기장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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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목적 20.09.12 109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5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1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 암시장 20.08.30 147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4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4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4 4 12쪽
5 간병 +1 20.08.07 413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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