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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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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56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25 00:34
조회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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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호의와 적의

DUMMY

운이 좋다고 하면 좋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날이다.


알텐하르크에 도착하기 전 나를 걱정하는 마부의 눈길을 뒤로하고 걷기 시작했다.


그의 걱정어린 눈초리는 틀리지 않았다. 나에게는 걱정해야할 거리가 많았다. 물도 그렇고 식량도 그렇고 체력도 그렇다.


운이 좋다고 한다면, 알텐하르크의 하늘 위에 쌓인 비구름이 갈증을 해결해주었다는 것.


나쁘다고 한다면,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옷과 신발이 질척질척하다는 것.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이 찬 신발이 찰박찰박 소리를 내고 있다.


젖은 옷은 비의 무게가 더해져서 그나마 남은 체력을 현저하게 깎아먹기 시작했다.


물기를 머금은 흙길은 발길을 얽매었다.


걸음이 몹시 무겁다.


체온을 빼앗긴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었다.


비구름이 해를 가린 것은 불행이었다.


해가 보이지 않으면 시간을 확인할 수 없고, 내가 얼마나 걸어왔는지와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수 없으니 의지가 구부러져 간다.


언젠가는 부러지게 되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 주저앉는 순간 포기하게 될 테니까. 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말자.


반복하고 반복해서 되새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나 남았을까.


스스로를 다독이다 지쳐, 추정되지 않는 거리를 헤아려보았다.


아마 반은 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멀리서 빛이 보였다.

모닥불인가.


거리가 줄어들자 불빛을 이룬 사물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것은 모닥불이 맞았다. 곁에는 느긋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 마차를 세워두고 무언가를 굽고 있었다.


알텐하르크와 사르티아의 사이는 벌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는 호수도 연못도 없다.

그리고 그 대신이라는 듯이 커다란 나무가 지표를 맡고 있다.


잎사귀는 넓직하고, 가지도 크다. 윗부분이 굵직하니, 그 줄기와 뿌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비를 피하기엔 제격이다.


하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이다. 나는 나아가야 하고, 저 나무는 스쳐지나가는 동안만 비를 잊게 하는 한순간의 착각과도 같은 존재이다.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젊은이. 좀 쉬다 가."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 목소리는 노인의 것이 틀림없었다.


뒤를 돌아보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인자한 미소. 얼른 오라고 파닥파닥 휘젓는 손길.



"혼자 먹기엔 좀 많아서 말이야."


마지막으로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꼬치구이까지.


허기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나는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정신을 잃으면 죽을지도 모르고, 다음에 깨어났을 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


거리는 알 수 없으나 이대로 가다가는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쓰러지는 것보다 따듯한 불의 곁에서 허기를 채우는 편이 좋겠지.


비가 오지만 않았더라도 지나가는 마차를 습격해서 식량을 빼앗을 생각이었다.


그것은 범죄이지만, 살인자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서라면 가벼운 죄였다.


모든 일이 해결되면 빼앗은 식량의 배가 되는 돈을 지불하려고도 했고.


범죄에 대한 자기합리화라고 손가락질 받겠지만, 그 손가락의 주인들도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빈 꼬챙이만이 남아있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많이 고팠나보지?"

"요즘 무언가를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빈 꼬챙이들을 정리하며 노인은 허허 하고 자상하게 웃었다.



"힘든 일이라도 있나?"

"거짓말을 안하지는 않았지만 있는 힘껏 정직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죠···"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왜 하고 있는 걸까.


그건 아마도 지친 마음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서겠지.


옷깃조차 스치지 않은 이 노인이 베푼 호의가 나를 기대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이곳에 안 계실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아들이 살···!"


무심결에 나오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마르지 않은 질척한 양말을 신고, 신발을 신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찌걱찌걱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혹시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뭘, 나는 그저 변덕쟁이 노인네일 뿐이라네."


그는 손사레를 치며 허허 웃었다.


얼른 가라고 말하는 그의 손짓은 배려를 담고 있었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 빗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가슴 한 켠이 따듯해졌다.


이 온기가 있다면 당분간의 추위는 금세 잊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변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변덕에 구원받는 사람도 있다.

그의 이름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의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에 남겨놓았다.


나의 기억력은 좋지 않지만, 언젠가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을 만났을 때에 어렴풋한 인상을 떠올릴 수는 있다.


다음에, 다음에 다시 만나면 꼭 보답하자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몸의 피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지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고, 한참을 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약 30분 정도.


멀리서 흐릿한 요새가 보였다.


사르티아 전초기지.


500년 전의 대전쟁 이후 살아남은 인간들이 드워프의 버려진 성채로 모여들어 만들어진 인간족 제 2의 수도.

목적지가 보이자, 속도가 붙었다.


성벽 밖으로 빠져나온 농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옆으로 걸었다.

검문소와 마주보고 걷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마부의 짐꾸러미에 섞여서 몰래 들어간다는 작전은 비가 오는 탓에 수포로 돌아갔다.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어느 농가의 마구간에서 무례하게 비를 피하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다.


나의 고향은 저 벽의 안에 있다.


벽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하고,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검문을 받아야만 한다.


그리고 검문을 받는다면 보나마나 다시 잡혀가겠지.


검문관들은 주로 4명씩 근무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4명을 동시에 상대할 힘도 재주도 없다.


그럼 어떡할까.


벽을 타고 올라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밧줄도 없고, 그럴 체력도 남아있지 않다.


성벽 밑으로 난 개구멍이라도 찾아볼까.


있다면 수월하겠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



"정면돌파 밖에 없나···"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들을 검토했다.


찬바람이 비에 젖은 옷에 남아있던 온기를 실어 빼앗아갔다.


어쩌면 그 덕분이었을지도.


뒤에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감지했다.


우연이었다.


한없이 우연에 가까운 마주침이었다.


바람이 불었기에 등골이 시렸고, 때문에 뒤를 돌아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있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드러낸 채로, 검을 들고 있었다.


나를 향해 겨눠진 검날을 따라 빗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군."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의를 맞이한 나는 뒤로 넘어졌다.



쿠당탕.



그런 소리가 났다.



"뭐, 뭐야, 너는···! 당신 누구야!"


그런 건 어찌돼도 상관없는 사실이다.


뇌로는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닥쳐오면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후드를 벗어라."


나는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따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행해질 그의 정의를 옳다고 인정하는 것일 테니.


벗었다고 해서 그의 적의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렇게된 이상, 당당하게.

그는 나의 정체를 알고 있고, 나를 노리고 있다.


탁 트인 시야.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정적을 채우는 유일한 소리였다.


그는 어딜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거나 그 아래일 거라고 생각한다.


직업은 모험가겠지.


어디선가 만난 기억은 없다.


즉, 이 청년은 나에게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있을 거다.


차근차근 정리한 뒤, 내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악착같이 살아가겠다.


어머니와 만나겠다.


아루아를 구하겠다.


이 세 가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득하니 높은 장애물들을 부수고 넘어서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는 수밖에 없다.


할 수밖에 없는 거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

"뻔뻔하군.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내가 끝내겠다."


코로 들이쉬고, 입으로 내쉰다.


평범한 심호흡에 불과하지만, 차분해지고 냉정해진다.


대거와 검. 어느 쪽을 쓸지.


이미 정해두었다.


왼손을 검의 손잡이에 휘감았다.



"그렇겐 안 되지!"


예상대로의 반응.


넘어진 상대를 죽이려면 검을 내려쳐야 한다.


보고서 생각하는 건 늦는다. 예상하고 봐라.


단테의 혹독한 훈련에서 한 대라도 때려보기 위해,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새긴 교훈이다.


빠르게 내려찍는 검.


움직임이 보임과 동시에 옆으로 굴렀다.


검의 움직임을 갑작스럽게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단테와 같이 상식을 뛰어넘는 영웅이 아닌 이상은.



캉.



청년의 검이 마구간의 바닥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의 검이 튕겨져 올라오는 시간동안 몸을 일으켰다.


녹슨 검을 뽑았다.


일어난 나를 향해 휘둘러진 검을 피했다.


뒤로 뛰어서 피한 탓에 거리가 벌어졌고, 피할 거라고 예상했던 건지 청년은 곧바로 달려왔다.


검을 휘둘렀다.


묵직하다.


그래서인지 느리다.


달려온 청년이 검을 휘두르는 손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숨결이 닿는 거리.



퍽.



주먹이 날아왔다.


턱에 정통으로 맞았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지만, 손가락은 검을 쥐고 있다.


땅바닥을 향해 휘둘렀다.



카가각.



쓰러지며 휘두른 검은 바닥을 짚었고, 몸은 중심을 되찾았다.


아주 잠깐.


아주 잠깐이다.


이 잠깐의 시간만 지나면 검은 미끄러지고, 나의 몸은 바닥으로 떨어지겠지.


그 전에 발을 들어올렸다.


검을 휘두르려는 청년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크헉···!"


청년의 몸이 옆으로 밀려나는 동안 손으로 땅을 짚고, 앞으로 굴렀다.


서투른 구르기는 지면과 부딪히는 충격을 완화하기는커녕 증폭시켰다.


등골이 아프다.


꼬리뼈도 아프다.


그래도 괜찮다.


움직일 수 있다.


무릎을 피면서 몸을 돌리고, 추진력을 이용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서로 휘두른 검이 부딪혔다.


같은 검과 검이었다면 상대의 승리였겠지.


하지만 검날의 길이도, 무게도 다르다.


길이도 그렇고 무게도 그렇고 내가 한 수 위다.


떨어져나가는 그의 검을 바라보며 직감했다.


흐트러지는 그의 중심을 직시하며 떠올렸다.



『검과 검의 싸움은 검을 맞대어야만 일어난다. 맞대지 못한다면, 그 앞에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떨어져나가지 마라.』


그것은 새까만 갑주를 두른 영웅의 가르침이었다.


귓가에도, 마음에도 닿지 않았던.


길고도 지루했던 수업.


그래도 이제는.


뚜렷하게 와닿았다.



'나의 승리다.'


휘두른 검을 내던졌다.


몸을 들이받았다.


한 손으로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대거를 뽑았다.


바닥에 쓰러진 그가 괴로운 숨을 토하기 전.


대거는 그의 목에 드리워져 있었다.



"무기 버리고 두 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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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09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4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0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6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4 5 11쪽
»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4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2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4 4 12쪽
5 간병 +1 20.08.07 413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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