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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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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58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21 04:37
조회
192
추천
4
글자
11쪽

무의미와 희망

DUMMY

춥다.


아프다.


배고프다.


목마르다.


녹조차 슬지 않은 철창.


틈조차 보이지 않는 벽.


공포가 내려앉은 어두운 바닥.


천장조차 어둡다.


무릎을 끌어안았다.


얼굴을 파묻었다.


피멍이 든 팔을 눈꺼풀로 가렸다.


일렁이는 촛불의 불빛은 온기가 없었기에.


포기했다.



...



발을 내딛었다.


새하얀 꽃이 몸을 꺾어 길을 만들었다.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빗방울의 크기와 세기로 이름을 붙인다는 건 무의미한 짓이다.


소나기도, 가랑비도, 여우비도, 모두 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사실을 나누고,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고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작은 언덕을 넘고, 넘었다.


아마 일곱 개는 넘었을 거다.


숫자를 세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런데 나는 왜 세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걷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럼 왜 걷고 있는 걸까.


왜 앞으로 나아가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이제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것마저도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다.


무언가를 보는 것도 무의미해져서, 눈을 감았다.


숨을 쉬는 것도 무의미해져서, 코를 막았다.


살아가는 것도 무의미해져서.



'무의미해져서···?'


살아가는 게 무의미해졌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하는 건 뭘까.


이 무의미한 짓거리를 관두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


이상하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찾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죽는게 무서우니까.


이런 결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니까.



...



먼지가 쌓인 스튜가 보인다.


구정물과 다름없는 물 한잔이 보인다.


나를 시체라고 착각한 파리 한 마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죄인은 듣거라! 내일 모레! 사형을 집행하겠다!"


그런 소리가 들렸다.


당체 영문을 알 수가 없었고, 알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았다.



...



꽃밭이다.


새하얀 꽃들이 한가득 피어난 꽃밭.


그 위에 나는 서있었다.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끝까지 비켜주지 않은 한 송이가 짓밟혔다.


잘못 내딛지 않았다.


다른 꽃들은 모두 비켜주었다.


그 한 송이만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켜주지 않았다.


이건 나의 잘못인 걸까.


궁금해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유가 어찌됐건, 저지른 사람의 잘못이다.


저질렀다는게 중요한 거다.


개인의 사정따윈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저지른 자는 범죄자가 되고, 범죄자의 변명은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세계는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세간은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조심스럽게 발을 떼자, 하얀 꽃잎들이 흙탕물에 찌들은 '무언가'가 보였다.



...



"마지막 날을 만끽하도록!"


그런 소리가 났다.


벌레가 든 스튜와 가래침이 묻은 빵이 보였다.


스튜에 든 벌레는 누군가의 의로움에 짓이겨져 있었다.


빵에 묻은 가래침은 누군가의 정의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



새하얬던 꽃잎들이 흙탕물에 찌들었고, 꼿꼿했던 줄기는 허물어졌다.

그것은 더이상 꽃이 아니었다.


꽃이었던 무언가였다.


아름답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돌렸다.


주위에는 분명 보기흉한 무언가가 아닌, 새하얗고 아름다운 꽃들이 한가득 피어있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바라본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빛을 죽여버린 어둠만이 가득했다.


무언가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 떨어진 꽃잎. 허물어진 줄기.

하얀색은 온데간데 없고, 더럽게 물든 흙색을 빨아들인 꽃잎.


그것을 하나, 그리고 둘.


손으로 쥐었다.


마지막 한 잎을 주우려다가, 문득 멈추었다.


가로막히면 멈추는게 당연하다.


뛰어넘을 자신도, 부술 힘도, 돌아갈 지혜도 없으니까.


고철덩어리가 나의 손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마지막 한 잎을 주웠고, 나의 손을 대신해서 나에게 돌려주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보았다.


그것은 갑주였다.


부서지고, 깨지고, 찌그러지고, 녹아내린.


흉측한 몰골의 갑주였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구해내고 싶었다.》


...



눈을 떴다.


새가 지저귀고 있다. 두 마리. 아니, 세 마리인가.


어찌되건 좋은 현실이지만.


햇살이 보였다.


햇살을 가리는 잎사귀들도 보였다.


따스하고, 그러면서도 시원하고, 포근하다.


여기는 천국인 걸까.


스러져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다시 봐도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따사로운 햇볕을 반사하며 반짝이는 호수, 그곳을 둘러싼 형형색색의 꽃들은 바람에 살랑이며, 자그마한 참새 한 쌍은 소리없이 노닐다가 날아올랐다.


익숙하고, 평온한 그 풍경은 나에게 두 가지의 의문을 안겨주었다.


나는 어째서, 그리고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


짐작이 가는 곳은 없었다. 있기는 해도,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신과 용 그리고 마법과도 같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다양한 불합리가 공존한다.


그렇다면 연속되는 꿈을 꾸었다는 것도, 그 꿈에서 나온 흉측한 갑주가 나를 구해주었다고 가설을 세우는 것도 불합리에 해당할 것이고,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구해내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 말했다고나 할까. 그렇게 '새겼다'.


목소리를 내지 않고, 나의 가슴속에 그 한 문장을 새겨넣었다.


그는 누구인가, 라는 추측을 시작하려는 나였으나 그것은 하도 어려운 질문이었기에 쉽사리 포기했다.


생각하기를 관둔 나의 몸은 저절로 걷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 위로 올라타서 따라 걷고, 다람쥐들이 물을 마시는 옹달샘을 지나고, 이끼가 돋지 않은 큰 바위를 넘어서 직진, 커다란 버섯이 자라난 나무를 기준으로 왼쪽.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다른 감정들을 죽여나가고 있음에도 아루아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녀를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이기심만은 무사했다.


그리고 그 무사했던 감정들마저도 무사했다고 깨닫는 순간 죽어버렸다.


부서진 의자가 보였다.


실내에 있어야할 의자가 밖에 있었고, 부서져 있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문고리는 부서져 있었다.



"아루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아무도 없었으니까.



"설마···"


'나 때문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럼에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허공에 고개를 젓고, 눈을 감았다 떠보기도 했다.


변하는 건 없었다.


무엇 하나 바뀌지 않았다.


틀림없는 현실이었고, 변치않는 사실이었다.


단테의 말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마수가 밖으로 풀려났다.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조직은 목격자들을 찾아 없앴다.』


목격자들을 찾아 없앴다.

그 행위의 이유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정보를 말살시키는 것이고, 정보는 목격자에게 입이 달린 이상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범죄조직은 누구에게 말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즉.


목격자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숙청시켰을 거다.



『블러드 하운드를 알고 있나?』


아아, 잘 알고 있다. 그 역겨운 생김새는 잊혀지질 않는다.


털이 없는 질긴 피부, 눈이 없고 코와 입만 달린 안면, 덩치는 늑대와도 같은 마수.


그것이 한 마리만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 달려온 것은 한 마리였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로 갔을까.


마수의 고삐를 잡고 있던 범죄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씨발! 이미 알고 있잖아!"


벽을 쳤다.


아픔조차 느낄 새도 없이 치고, 쳤다.


발로 차고, 머리를 박고, 다시 주먹을 날렸다.


주먹에서 피가 흘렀다.


그제서야 한 가닥의 침착함을 자아낼 수 있었다.


얇고 연약해서,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끊어질 침착함.


이러고 있어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자각.


침착하자.


더 침착하자.


분노를 터트리는 게 아니다. 집중시키자.

집중시킨 분노를 원동력으로 사고했다.


우선 핏자국은 없다. 이 자리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았다.


어질러지고 부서진 가구들로 보아, 아루아가 거세게 저항한 모양이다.


그리고 끝내 잡혀간 건가.


괴롭지만, 더.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아루아는 엘프다. 엘프는 숲의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보통은 아렐리아라고 불리는 엘프들의 국가에서 살아가지만, 어째선지 그녀는 이 숲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앞을 보지 못할지라도 엘프는 엘프다. 그 종족의 희귀성만큼은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특히 엘프의 미려한 용모와 뛰어난 마법재능은 어느 국가에 가건 높은 가치를 지닌다.


때문에 납치를 행하는 자들이 대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나.


들은 이야기여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희망의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희박하고 희미한 가능성이었으나, 나를 움직이게 하기엔 충분했다.



'무기가 필요하겠어···'


방안을 여기저기 뒤져보았다. 그러다 사냥용 대거를 발견했다. 날이 한 쪽으로만 나있으나, 예리하고 가벼웠다. 무기로 쓸만하다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챙겨서 허리에 찼다.


사형수라는 이유로 벨트를 압수해가지 않은 감옥의 간수에게 보란듯이 웃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나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자, 목소리가 새겨졌다.



《우물을 찾아가라.》


꿈속에서 새겨졌던 목소리였다.


그는 누구일까.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어려운 의문이었다. 그래서 추측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감사만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였던 나는 죽었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남아있는 모양이다.



"나는 너를 모르지만, 고마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커다란 버섯이 자라난 나무를 기준으로 오른쪽, 이끼가 돋지 않은 큰 바위를 넘어서 직진, 다람쥐들이 물을 마시는 옹달샘을 지나고, 쓰러진 나무에 올라타서 따라 걷는다.


그러면 아름다운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루아에게 말조차 하지 않고 제멋대로 빌린 대거를 새하얀 꽃의 옆에 놔두고, 호수를 향해 걸어나갔다.


나는 이 호수가 우물이라는 걸 확신했다.


근거라고 한다면 내가 깨어났던 장소가 여기라는 거.


그거 하나밖에 없었으나,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호수의 미지근한 물이 발을 적셨다. 신발이 젖고, 양말이 젖는다. 이어서 바지가 젖고, 윗도리가 젖는다.


머리까지 잠긴 뒤에 눈을 떴다.


겉보기와 다르게 깊은 호수였다.


호수의 정중앙 가장 깊숙한 곳에는 우물이 보였다.


헤엄치는 법을 배운 적은 없으나, 손을 젓고 발을 구르면 앞으로 나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물에 가까워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한 번은 위로 올라왔다.



"푸학···!"


호수 한가운데서 헐떡이다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잠수.


일직선으로 내려가 우물 안으로 들어갔다.


깜깜한 우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던 도중,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치였다.


검의 손잡이였다.


붙잡고, 힘껏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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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26 악역등장 20.09.15 98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09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4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0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6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4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5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4 7 11쪽
»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3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4 4 12쪽
5 간병 +1 20.08.07 413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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