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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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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53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9.15 02:12
조회
97
추천
2
글자
12쪽

악역등장

DUMMY

약 500년 전.


영웅이 되고 싶었던 기사가 있었다.


한평생 검만을 바라보고, 검만을 손에 쥐고, 검만을 휘둘렀다.


뛰어난 재능도 막대한 부도 드높은 권력도 없었기에.


검이라는 존재만이 누군가를 지킬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검을 사랑했던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누구도 보살피지 못했고, 누구도 지켜내지 못했다.


끝내 무너져버린 마음은 사념이 되어 한 명이라도 살려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되어있었다.


그의 최후는 비극의 말로였으나, 간절한 바람은 반쯤 이루어졌다고.


단테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으로서는 메우지 못한 반이 무사히 차오르기를 기도했다.



"너는 관여해선 안 돼."

"어째서지?"

"얼마 전 세르나리아의 관할 하에 조직이 관리하던 '병기'가 탈취되었어."

"마도공학생체병기···"


과거의 대전쟁에서 엘프와 드워프가 만들어낸 마법과 공학의 집합체.


500년 전에 창조된 존재이다보니, 정보가 소실되고 소각되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째서 왕실은 그런 걸 조직에게 맡겼지?"

"그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될 녀석들이 있었던 거겠지. 마도사단이라던가, 마도사단이라던가, 마도사단이라던가. 왕실도 슬슬 걔네 이상하단거 눈치챘을 거다."


잭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였다.


한껏 연기를 들이마시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한동안 물지 못했던 연기막대는 그의 숨결에 여유를 불어넣었다.



"명목상으로 술집이라고 되어있지만 페이크고, 실질상으로 콜로세움으로 알려져있지만 그마저도 페이크. 사실은 재앙을 가둔 감옥이었던 거야. 그리고 이제는 너를 묶어둘 사슬이기도 하지."

"···알겠다."

"의외로 무덤덤한 반응인걸."


잭은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끝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벽이 놓여있었다.


귀를 기울여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손바닥을 붙이고 옆으로 밀자 소리없이 열렸다.


여차할 때에 도망치기 위한 비밀통로로 침입한다는 아이러니를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량의 책과 고급져보이는 와인들이 놓인 장소였다.


눈에 띄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잭이 건네준 지도를 펼쳐보았다.


나의 기억에 오차가 없음을 확인하고, 창문으로 불어온 바람에 살며시 열리듯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저택이라는 말에 걸맞게 바닥에는 고급스런 카펫이 깔려있었다.


발소리를 죽일 수고는 덜었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를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들여야할 수고의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밀어 복도를 살폈다.


한 명.


정장을 입고 있고, 같은 장소를 순회하고 있다.


이곳은 지하에 위치한 복도이다.


보이는 문도 내가 나온 것을 포함하여 두 개를 넘지 않으니 이상할 것 없는 인원배치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곳에는 저 사람이 소리를 쳤을 경우 상황을 알릴 누군가가 대기를 하고 있겠지.


열었던 문을 닫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손에 묶은 붕대를 풀었다.


도끼를 창에 가져가 붕대로 단단히 고정했다.


손으로 잡아당기며 수 차례 내구성을 시험해보았다.


이거면 되겠지.


남자가 한 바퀴를 도는데에 걸리는 시간은 대략 50초.


내가 처음 봤을 때는 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지금은 50초하고 24초가 경과했으니 대각선에 위치한 모퉁이를 돌고 있겠지.


5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다섯.


문을 열었다.


옷이 스치지 않도록, 무기가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하며 종종걸음으로 뒤따라붙었다.


적당한 거리가 되었을 때.


옆으로 휘두르듯 내지르고 끌어당겼다.



"억···!"


시야의 사각에서 들어간 도끼날은 갈고리였다.


나아가던 남자의 몸을 끌어당겼다.


남자는 도끼날이 목에 닿음과 동시에 창을 붙잡았으나, 나에게는 무기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빠르게 다가가서 대거 끝을 목덜미에 살짝 밀어넣었다.


땅으로 떨어지는 창을 발로 받쳐서 소리를 없애고,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얌전히 따라와."


두 손을 들고 순순히 따라와주는 남자를 와인 저장고까지 끌고 들어왔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목에 휘감았다.



"하늘색 머리카락을 가진 엘프족 소녀는 어딨지?"

"모, 몰라···!"

"경매장은?"

"그, 그것도 몰라···! 나는, 그저, 여기를 지키라고 명령받은게 다야···!"


일개 조직원에게는 알려주지 않는 건가.


골치 아픈 상황이다.


무작정 저택 안을 돌아다닐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하인 이곳을 벗어나면 경비는 더욱 삼엄해질 텐데.


'경매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니 경매에 참여하는 손님들도 있을 거다.


어느 쪽이건 등에 창을 맨 채로 허리에는 녹슨 검과 여러 개의 단도를 차고 후드를 뒤집어쓴 인물을 수상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나.



"벗어."

"에?"

"벗으라고. 그리고 화장실 어딨는지 말해."


...



옷을 뺏어입은 나는 남자의 등을 대거로 긁었다.



"우웁···!"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을 따라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독이다. 당장은 죽지 않을 거야. 마을로 달려가서 의사를 찾으면 살 수 있겠지."


이건 거짓이다. 그러나 이 자를 기약없이 보냈다가는 허튼 수작을 부릴지도 모른다.


저주를 걸었다던가 특정한 상황이 되면 발동하는 마법을 걸었다던가 하는 허세도 떠올리기는 했으나, 그것은 무리수였다.


나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지식이 없고, 이 남자가 그것들을 모를거라는 보장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일 안전한 건 독을 주입했다는 거짓이었다.


하수도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려나가는 전라의 남성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밑준비를 시작했다.


빼앗은 정장으로부터 손수건을 빼서 얼마 전에 살해한 삼인방의 피를 닦았다.


적당히 얼룩진 손수건이 완성되었고, 억지스런 연기가 성공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코와 입주변에 피를 묻혔다.


창과 도끼를 버리고, 넘겨받은 검집에 녹슨 검을 집어넣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위장이었다.


대거는 가장 작은 하나만 챙겨서 정장의 안쪽에 넣었다.


전해들은 화장실의 위치를 떠올리며 피에 젖은 손수건을 코로 가져갔다.


이곳을 지키던 남자와 머리카락 색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머리만은 숨길 수 없으니까.


코맹맹이 소리를 낼 준비를 마치고 문을 열었다.


복도를 달리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지키던 2명의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말을 걸기 전에 먼저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연기는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


경비를 돌다가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코피를 처리하기 위해 화장실로 뛰쳐가는 조직원처럼 보이겠지.


눈길을 주는 이들은 있었으나 수상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매끈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을 조심성없게 달려갔다.


모퉁이를 돌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에서 피를 행구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부터는 시간문제였다.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들은 조직원들이 의심하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한다.


'서두르자.'


빠른 걸음.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바쁜 일이 있어서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으로.


복도를 거닐며 사람들의 말소리를 쫓아갔다.


길을 가다가 창가에 놓인 안경이 보였다.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슬쩍 집어서 착용했다.


도수가 맞지 않아 어지러웠으나, 이걸로 나의 얼굴을 알아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든다면 참을만한 요소였다.


이내 시끌벅적함이 다가왔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내리쬐는 금빛 조명을 사치스럽게 반짝였다.


가운데에는 작은 분수가 있었고, 주위에는 고급 술이 부어진 와인잔과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이 수두룩히 진열되어있었다.


연회장인가.


사람들의 풍채를 살펴보았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페쿠스가 종종 보이기는 했으나, 대부분은 인간이었다.


양쪽에 화려한 여자들을 끼고 돌아다니는 자.


온갖 사치품들을 주렁주렁 치장한 자.


검은 가루를 코로 들이키고 실실거리며 웃는 자 등등.


황금 돼지의 우리가 따로 없었다.


이곳에서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지나다니지도 않는 외딴 벽을 등졌다.


다른 조직원들처럼 두 손을 모으고 가슴을 편 채로 눈동자를 굴려댔다.


몇몇 조직원들이 나에게 눈길을 던졌지만 최대한 신경쓰지 않도록 억누르며 대화들을 엿들었다.



"이제 곧 시작이겠군요."

"얼마를 지불해도 좋아. 엘프만은 사들여."


엘프라고 한다면 아루아를 말하는 건가.



까드득.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씹었다.


고위 귀족들은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납치한 엘프를 인신매매에서 사들여 강간한다는 소문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방금.


그 소문은 사실이 되었다.


인간과 엘프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적다.


때문에 엘프를 손에 넣은 귀족들은 그녀가 마음에 드는 자손을 낳을 때까지 강간한다.


그렇게 낳은 아이는 긴 수명을 가지고 있고, 마법에 대한 재능을 보유하고 있다.


때문에 다른 가문에서 후계자가 권위를 계승하는 동안 긴 수명을 이용하여 권력을 더욱 축적할 수 있다.


또한 마도사단에 들어가도록 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던가.


듣기만 해도 토악질이 나온다.


저들은 그저 돈많은 고블린에 불과하다.


나는, 그리고 나를 비롯한 수많은 평민들은.


저런 쓰레기들을 위해 평생을 받쳐 노동하고, 세금을 내왔다.


늘 카페에 찾아왔던 나의 첫사랑이 저런 인간들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상처를 파고드는 고통을 매개체 삼아 분노를 억눌렀다.



'참자···'


한순간의 울화를 참지 못해 주먹을 날려서는 안 된다.


마약상을 폭행했던 때를 떠올렸다.


감정에 몸을 맡겨봤자 풀리는 일은 없다.


풀렸을 일을 꼬아버릴 뿐이다.



"후우···"


살아나려던 감정을 다시 죽였다.


조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아직까지 수상한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찬찬히 관찰했다.


누가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서 나오고.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수가 가장 많은 곳이 경매장으로 향하는 입구겠지.



'위험한데···'


그러나 사람들의 움직임은 정체되어 있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이제 의심을 받더라도 변명할 수 없을 거다.


거짓말로 얼버무릴 자신도 없다.



'빨리···'


초조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선 안 됐다.



탁.



천장에서 작은 울림이 들려왔다.


불빛이 사라졌다.


짙은 밤의 어둠이 순식간에 연회장을 독차지했다.


누군가가 박수를 쳤다. 환호를 했다. 휘파람을 불었다.



탁.



한 줄기의 빛이 붉은 카펫 위를 비추었다.



"오늘은 좋은 밤이군요. 신사 숙녀 여러분, 경매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정적이 돌아다녔다.


빛의 인도를 받으며 계단을 따라 내려오는 사회자의 말에 반응해선 안 된다는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듯했다.


그곳에는 장신의 남성이 서있었다.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보였다.


겉보기엔 인간과 다름없으나, 신장이 인간의 수준을 넘어섰다.


허리까지 길게 기른 금색의 머리카락과 짙은 녹색의 눈동자.


엘프인가.


아니다.


귀의 모양이 인간이다.


뾰족하지 않다.



'그냥 키가 클뿐인 인간인 건가?'


아니, 확신할 수 있다.


저건 인간이 뒤섞인 '무언가'다.


범상치 않다.



'저 남자는 대체 뭐지···?'


의문을 품은 찰나.


남자의 이름이 들려왔다.



"이번 사회를 맡은 사간회의 경매간부. 구르게스라고 합니다."


기품있게 허리숙여 인사하는 그의 눈빛은.


나의 간담을 깊숙하게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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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채점 +1 20.09.16 89 4 12쪽
27 맞닿은 손 +1 20.09.15 94 1 11쪽
» 악역등장 20.09.15 97 2 12쪽
25 깨져버린 기대 20.09.14 99 4 12쪽
24 목적 20.09.12 109 3 11쪽
23 고블린 +1 20.09.11 114 7 13쪽
22 독백 +2 20.09.10 127 4 12쪽
21 불효자의 귀환 +1 20.09.09 132 5 12쪽
20 집으로 20.09.08 116 4 14쪽
19 학살 20.09.06 118 4 13쪽
18 부패 20.09.05 143 2 12쪽
17 목적에 묻혀진 죄책감 20.09.04 118 4 14쪽
16 대비 20.09.02 120 5 12쪽
15 이기심 20.09.01 130 6 12쪽
14 암시장 20.08.30 146 7 12쪽
13 연전(連戰) 20.08.28 154 5 11쪽
12 호의와 적의 20.08.25 164 5 12쪽
11 선택지 +1 20.08.22 174 7 11쪽
10 무의미와 희망 +1 20.08.21 192 4 11쪽
9 결심의 뒤에 오는 것 +1 20.08.19 215 7 10쪽
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8 8 12쪽
7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0 7 11쪽
6 이별 20.08.10 294 4 12쪽
5 간병 +1 20.08.07 413 5 11쪽
4 만남 20.08.05 495 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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