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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의 서재

모험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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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둘기
작품등록일 :
2020.07.27 19:58
최근연재일 :
2021.05.31 01:01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14,176
추천수 :
264
글자수 :
658,374

작성
20.08.14 18:11
조회
270
추천
7
글자
11쪽

영웅, 그리고 결심

DUMMY

차갑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하늘이 보였다.

회색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하늘이었다.

그곳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세는 소나기였으나, 그려내는 선이 얇았다.

가랑비였다.

그저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뻐근해서, 잠시 땅을 내려보았다.

그곳에는 무수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것들은 새하얗게 들판을 채우고 있었다.

발을 내딛자, 꽃잎들을 기울여 길을 내주었다.

잘못 내딛으면 비켜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어딘가로 인도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지닌 채로 걷고, 걸었다.

새하얀 꽃들을 바라볼수록, 의문이 늘어갔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여깄을까.

이 끝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누구지.

어느 샌가 내가 누구인지마저 잊어버리고, 왜 걷기 시작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이 보였다.

가랑비는 점점 거세지더니, 이윽고 소나기가 되었다.

마땅히 피할 곳이 없어서, 그저 걸었다.

다시 걷고, 걸었다.

이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도 지쳤다.

멍하니 비를 맞으며 걸어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멈춰서는 순간.

모든 빛이 사라졌다.

비 내리는 소리마저 지워지고, 차갑다는 감각마저 잊혀졌다.


...


낯선 천장이 보였다. 새의 지저귐은 들려오지 않았다. 천장에 스며든 어둠이 지금의 시간을 대강 알려주고 있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살아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왼팔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모든 과거가 꿈은 아닐지에 대해 의심해야만 했다.

상처도, 피에 젖은 붕대도 감겨있지 않았다. 멀쩡한 나의 왼팔이었다.


“일어났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낮게 내리깐 남성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서 목소리의 주인을 시야에 넣었다. 그곳에는 새까만 갑주 하나가 서있었다. 얼굴은커녕 피부조차 드러내지 않는 거무칙칙한 갑주.

설마, 하고 침과 숨을 동시에 삼켰다.


“당신은···”

“흑기사 단테. 모두들 그렇게 부르더군.”


누군가가 말하길, 그는 섬기지 않는 기사이다. 누군가가 말하길, 그는 영겁을 살아가는 불사자이다. 누군가가 말하길, 그는 어둠을 깃들인 영웅이다. 누군가가 말하길, 그는 힘없는 자들의 검이다.

불사의 영웅. 흑기사 단테.

그가 지금 나의 앞에 서있었다.

이건 현실일까.

좀처럼 실감이 들지 않았다. 볼을 꼬집어도 보고, 눈을 감았다가 뜨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눈앞의 영웅은 어디도 가지 않았다. 나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묵묵 내려다보고 있었다.

엄연한 현실이었다.


“저어,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한 명의 영웅이 나를 찾아온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분명 목적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질문을 하겠다만, 괜찮은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다잡고, 그가 무엇을 물어볼지에 대해 짐작했다. 내가 겪은 일들을 되짚었다. 속이 메스꺼웠으나, 구역질은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기이한 생명체에게 습격을 받지 않았나?”

“···받았습니다. 세르나리아에서 사르티아로 귀향하는 도중이었죠. 출발은 낮이었고, 밤이 되었을 때에는 불을 지피고 저녁을 먹었습니다. 습격을 받은 건 그때였죠. 까맣고, 사람의 머리를 집어삼킬 크기의 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험가와 마부를 살해했죠.”


말을 마치며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전부 말했다. 떨림이 잦아들었으나, 멈추지 않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원하시는 정보는 얻으셨습니까?”

“충분하다.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단테 씨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고 계시니 협력해드리는 건 당연합니다.”


방안을 밝히는 유일한 촛불이 창문에서 새어들어온 바람에 일렁였다. 그 작은 움직임을 깨닫게 될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왼팔을 바라보았다. 현실성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뼈가 드러나고, 혈관이 끊어지고, 많은 피를 흘렸는데도 감쪽같이 나아있었다.


“실례지만, 저도 물어봐도 됩니까?”


철그럭.


그런 소리가 났다.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팔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잘 아는 의사에게 고쳐달라고 했다. 이상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안심하도록.”


안심하라고는 해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나의 왼팔이 아닌, 내가 며칠 동안 잠들어있었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한시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자, 평범하게 행복했던 가정에서 자란 아들로서의 사명이었다.


“저는 며칠이나 잠들어있었죠?”

“5일. 살아있는 게 신기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라고, 의사는 말했다.”


5일.

처음에는 편지를 받고 떠날 준비를 마치느라 하루가 걸렸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습격을 받고서 하루. 아루아를 만나고 정신을 잃은 다음 사흘. 거기에 5일인가.

그렇다면 남은 날짜는.


“3일···!”

“무슨 문제라도 있나?”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내뱉었다.


“고향에, 몸이 편찮으신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곤란하군··· 혼자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대의 신변이 위험하다.”

“위험···?”


그는 반쯤 일어선 나의 몸을 다시 눕히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약 한달 전. 어느 범죄조직이 미궁에서 마수를 밀수했다. 그리고 그것을 운반하던 도중 실수를 범했지. 마수가 밖으로 풀려났다.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면 무사하지 못할 거라 판단한 조직은 목격자들을 찾아 없앴다.”


단테는 무언가에 짓눌리듯 고개를 떨구었다.

떨구며, 말을 이어나갔다.


“사태는 거의 정리되었다. 깨닫는 게 너무 늦었다. 지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킬 수 있다.”


사태는 정리되었다. 그리고 지키지 못했지만, 이제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말이 품고 있는 정보를 있는대로 뜯어서 해석했다. 불사의 영웅이 어째서 나의 앞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림과 동시에, 나는 하나의 답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옳다고는 단언할 수 없으나, 그가 나의 앞에 서있는 이유를 해명할 유일한 추측이었다.


“목격자는, 이제 저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겁니까.”


철그럭.


단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가지곤 조직을 제거할 수 없다. 내통자의 가능성도 있는 탓에 모험가들의 도움도 받을 수가 없고, 규모도 상당한 탓에 하루이틀로는 부족하다. 정말이지 곤란하군.”


무심코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무너지려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고, 논리적으로 사고했다. 그러자 꼬일대로 꼬여버린 이 상황을 돌파할 한 마디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제 얼굴도 모르잖습니까?”


나는 그의 고개가 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신이라는 작자는 한낮 인간의 기도따윈 들어주지 않았다.

돌파구라 생각했던 한 마디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맥없이 부정당했다.


“블러드 하운드를 알고 있나? 너의 팔을 물어뜯은 마수이다. 그것의 이빨에, 상급 추적 술식이 부여되어 있었다.”


추적 술식. 마법에는 손조차 대지 못했던 나에겐 뜻을 알 수 없는 단어였으나, 나를 노리는 그들이 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나는 멍청하지 않았다.


“술식은 의사가 지웠으니 당장은 쫓기지 않을 테지.”

“그럼 저희 어머니는 어떻게···!”

“하나, 방법이 있다.”


하나. 그것은 많은 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숫자였다. 나는 초조함과 불안으로 급박해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이윽고 유일한 방법을 제시했다.


“···강해져라.”


처음 들었을 때는 머릿속이 멍해져서 이해하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너 자신을 지키고, 너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해져라."


두 번째로 들어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강해지라는 말은 숨겨진 의미라곤 하나도 없이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직설적으로, 내게 평범함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건, 평범을 벗어난 수준의 강함을 갖추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놓아줄 수 없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단테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 다음, 나는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베개를 강하게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 자세가 가장 안심되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울기 좋았다.

그러나 눈물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울고 난 다음이라면 쉽사리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제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잊고 싶은 과거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 과거는 나에게도 존재한다. 때문에 나는 평범하다. 그렇게 치부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과거는 나를 평범하게 만드는 과거였다.

과거가 있기에 평범한 내가 아니었다. 과거가 나를 평범하게 만들었다.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말이지만, 이보다 잘 설명할 순 없었다.


『리시스는 특별해.』


이렇게 혼자가 되면, 종종 나를 괴롭혀오는 목소리가 있다.

귀를 막고, 눈을 감아도 소용없이 들려온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이고 부정한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다.

평범하니까, 도망치는 것도 당연하다.

죽고 싶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구해주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

나를 차갑게 찔러오는 이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부터는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길하고 불결해서, 자책을 참지 못하게 될까봐.

나는 늘 평범하게 살아왔다.


"엘리스···"


얼마나 더 괴로워야만 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평범이란 말로 자신의 죄를 정당화 시키고 있는 이상은, 벗어날 수 없겠지.

알고 있다.

다만, 나아가기 위해서는 마음의 정비가 필요하다.

무턱대고 앞을 향해 나아갈 정도로 나는 강하지 않다.

나약하고.

빈약하고.

미약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아가길 포기하진 않는다. 어떤 사람이건, 어떤 방향으로든 걸어나가기 마련이다. 겁쟁이는 도망치고, 도망치는 곳에도 길은 있다. 머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나아가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겁쟁이고,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철이 들었고, 마침 좋은 계기가 생겼다.

이걸로 나의 죄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속죄라고는 도저히 여길 수 없지만.

나를 원망했을 그 아이를 위해 뭐라도 해보자고 결심했다.

내일부터. 내일부터다.

내일부터, 나를 바꾸자.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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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강해지기 위한 수업 +1 20.08.16 259 8 12쪽
» 영웅, 그리고 결심 20.08.14 271 7 11쪽
6 이별 20.08.10 295 4 12쪽
5 간병 +1 20.08.07 415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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